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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아이러니, 시라는 아이러니
임현준
반칠환, 「즐거운 동티-멸종의 기쁨」, 『애지』, 2024 봄.
허 정, 「가죽들」, 『생명과 문학』 12호, 2024 봄.
박용숙, 「공동경비구역」, 『애지』, 2024 봄.
김상희, 「접속」, 『문학사상』, 2024년 1월.
최지은, 「너는 담에 기댄 작은 목련나무처럼」, 『창비』, 2024 봄.
‘봄꽃이 만개하면 곧 비가 쏟아진다’라는 말이 있다. 봄날의 환한 절정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이 말의 출처를 알지 못하지만, 아마 주변의 어르신들이 하실 법한 평범하면서도 묵직한 통찰인 것만은 틀림없다. 화려한 꽃놀이 뒤에 어김없이 물젖은 하늘이 우리가 딛고선 아스팔트를 적실 비를 내이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다. 이 순리의 광경을 예감할 수 있는 혜안은 생활의 반복에서 올 터이다. 연륜과 경륜의 힘은 자연법칙에 내재한 순환성을 귀납적으로 관찰하는 데서 생겨나는 진리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러니 옛말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유종호도 “젊은이들이여, 명심하라. 악마는 그대들보다 나이먹었다”고 말한 막스 베버를 끌어들이면서 “내가 만나본 지혜의 여신도 호호백발이었다”라고 전한다. 생활에 천재가 없듯, 세상만사 오래 누적된 경험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환하게 내다보게 만들 창문이 된다.
오래 쌓은 경험의 혜안이 함의하는 바는, 빛이 밝히는 것 이면에는 그늘이 있기 마련이고, 태어나는 것들의 완성은 죽음에 닿아 있고, 어지러운 혼돈 속에는 거대한 방향성이 있고…, 등등의 아이러니가 우리의 생활을 이끌고 간다는 것에 있다. 눈에 보이는 것 뒷면에는 반드시 뒤따라올 반대급부의 운명이나 숙명이 도사리고 있다. 물질의 풍요에는 문명의 암담한 결말이 예견되어 있고, 생활의 편리 속에는 암묵적인 고독의 불안이 꿈틀거리고, 첨단의 사회관계망 안에는 세계와 단절된 채로 외로운 내면이 어둑한 방구석에 엎드려 있다. 이러한 채로 우리의 생활은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자본주의적 비유의 손아귀에 끌려다니다가 문득 생의 아이러니를 깨닫게 된다. 아니, 깨닫게 되는 존재가 돌연변이처럼 툭 불거져 나온다.
당산나무를 베고 마을길을 넓혔어. 산을 깎아 산신의 거처를 헐고, 바다를 메워 해신의 궁전을 없앴어.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리면 더 풍요로워진다는 걸 알았어. 별처럼 꽃처럼 많던 신들이 실업자가 되었어. 사람의 땅에는 백 년 만에 처음이라는 축제가 날마다 벌어지고 있어. 얼음 땡! 수만 년 술래였던 빙하가 풀리고, 낮은 자존의 바다가 높아져 뭍으로 넘치고 있어. 투발루 총리가 연설하며 두 발로 힘을 주니 섬 행세 하던 작은 섬이 가라앉고 있어. 목마른 아라비아 사막에 눈이 내리고, 불모의 시베리아 영구동토에 꽃이 피고 있어. 우리가 만든 동화의 세계야. 최후의 한 생명까지 피안으로 건네주는 뗏군 호모 니르바나스여, 건배!
-반칠환, 「즐거운 동티-멸종의 기쁨」, 『애지』, 2024 봄.
에즈라 파운드는 예술가를 “인류의 촉각기관”이라 불렀다. 예술가는 자신의 행동과 윤리와 사유와 기술과 도구가 갖는 함의를 파악해 자신이 속한 시대 혹은 세계를 감지해 내는 사람을 말한다. 예술가는 통합적인 정신의 소유자인 셈이다. 이 통합적 정신의 소유자는 생의 아이러니 또는 생활의 아이러니를 목도하는 자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아이러니를 명과 암으로 형상화해 내는 자일 것이다. 시인도 예외일 수 없다.
반칠환의 「즐거운 동티-멸종의 기쁨」은 시인의 오래 묵은 혜안이 번뜩이는 시이다. “수만 년 술래였던 빙하가 풀리고”, 폴리네시아에 있는 아홉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투발루”가 “가라앉고 있”고, “목마른 아라비아 사막에 눈이 내리고, 불모의 시베리아 영구동토에 꽃이 피고 있”다는 걸 보았을 때, 시인은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리면 더 풍요로워진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일견, 이러한 통찰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빙하가 풀리는 시간이나 투발루가 가라앉는 시간은 지구적 입장에서는 급격한 것이지만, 인간에게는 긴 시간이다. 때문에 “마을길을 넓”히고 “산을 깎아”도 평범한 속인은 “당산나무를” 벤 것도 “산신의 거처를” 헌 것도 깨닫지 못한다. 그렇지만 시인은 “별처럼 꽃처럼 많던 신들이 실업자”가 된 기이한 현상을, “백 년 만에 처음이라는 축제가 날마다 벌어지”게 된 비정상적인 상황을 오랫동안 목도해 오면서 “우리가 만든 동화의 세계”라는 아이러니를 직시한다.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리면 더 풍요로워진다”는 아이러니는 자연을 훼손하거나 귀히 여기지 않으면 발생하는 이상 현상에 대한 문제만 지적하지 않는다. “풍요”에만 눈이 먼 “호모 니르바나스”의 함의는 이중적이다. ‘불이 꺼진 상태(nir-vana)’는 열반을 뜻한다. 탐욕이나 증오, 어리석음 같은 부정적인 괴로움과 번뇌가 사라진 상태인 ‘니르바나’는, 시원한 상태나 행복한 상태 같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표현에 쓰이기도 한다. 불이 꺼졌기 때문에 시원하고 괴로움과 번뇌가 사라졌기 때문에 행복에 이르는 열반은 긍정과 부정이 중첩되어 있는 궁극의 아이러니를 품고 있는 것이겠다. 그러니 “피안으로 건네주는 뗏군”인 우리 스스로에게 건네는 “건배!”는 “풍요”의 “즐거움” 속에 “동티”가 움트고 있다는 것을 아이러니하게 강조한다. 산·바다·나무·별·땅·빙하·섬·사막·동토 따위를 잘못 다루어 신(자연)을 화나게 해서 받게 되는 재앙이 인간에게 내려지듯이 자연도 받게 되는 동티가 있음을, 그 동티가 종내에는 인간임을, 인간이든 자연이든 어느 쪽도 “멸종의 기쁨”에 닿게 됨을 중첩된 아이러니를 통해 예리하게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소가 소를 잡아먹는 소우주에 산다
점심으로 소불고기를 먹고 소 등에 누워 잠을 잔다
내 뱃속에 소가 있고 내 밑에 소가 깔려 있으니
나는 소로소이다
이 집의 거실에 가죽들의 무덤이 있다
무덤의 봉분 위에 누워 나는 가죽들을 생각한다
오늘은 어떤 소가 죽임을 당하고 가죽이 벗겨질까?
가죽을 말려 염색을 해서 소파를 만들려고 생각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 소파는 몇 마리의 소가죽으로 합체되었을까?
서늘한 가죽들 위에 누워 안락한 여름을 보내는
등가죽이 아주 얇은 동물들, 그들은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고 되새김질을 하던 한 생애를 기억할까?
바람 부는 날 들판에서 음머~ 하고 우는 소 울음소리가
그들의 귀에는 그저 시원한 바람 소리로 들릴까?
트림과 방귀만으로 멸망의 그날을 꿈꾸는
소가 소를 잡아먹는 소우주도 하나의 행성일까?
-허정, 「가죽들」, 『생명과 문학』, 2024 봄.
인간의 가장 아이러니한 면모는 먹고사는 것에 있다. 허정의 「가죽들」은 생존을 위해 먹어야 하는 생명들, 이 예외 없는 자연의 이치를 돌연 돌아보게 하는 시이다. 인류의 생존 방식이 수백만 년 유지됐던 수렵 채집에서 땅을 일구는 농업으로 전환되었을 때, 인간의 동물적 ‘생존’은 사회적 ‘생활’이라는 차원으로 판을 옮기게 된다. 이 ‘생활’이라는 개념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인식이다. 생활은 터전을 잡아야 하고, 생활은 생계나 살림을 꾸려나가는 수단을 마련해야 하고, 생활은 조직되고 구성되는 사회를 기반으로 해야 하고, 생활은 먹는 것 이상의 취미와 흥미를 찾아야 유지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인간이 인간에 의한 또는 인간을 위한 휴머니즘, 즉 인간 중심의 인식이 견고하게 뿌리박혀 있다. 그러니 “무덤의 봉분 위에 누워” “가죽들을 생각”하거나 “점심으로 소불고기를 먹고 소 등에 누워 잠을” 자는 ‘나(인간)’에게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고 되새김질을 하던 한 생애”는 관심 밖의 것이 된다. 인간은 생존의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경제적·심리적 차원의 차별화된 “소우주”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대로 “트림과 방귀만으로 멸망의 그날을 꿈꾸는” 인간이 스스로 걸려든 ‘덫’이 된다.
유발 하라리는 농업혁명이라는 일대 사건을 ‘사치라는 덫’으로 비유한다. 유목에서 경작으로 식량 확보 방식을 혁신하면서 초과 생산된 잉여물이 생긴다. 그러나 잉여물은 배분되지 않는다. 잉여물의 축적은 노사관계의 수직적 관계를 가능케 하고, 집단의 영역을 경쟁적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된다. 잉여물의 개념이 식량뿐만 아니라 다양한 물질과 도구, 노동력과 권력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나아가 잉여물은 잉여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변질된다. 잉여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욕망이 될 수밖에 없다. 추상적 개념인 잉여는 인간 문명이 태동하는 기반으로서의 욕망 또는 문명을 굴리는 윤활제로서의 탐욕을 의미한다. 굶주림의 감각이 지워진 자리에 과식의 미각이 발달하고, 최소한의 안위를 위해 추구했던 의식주의 자리에 보다 쾌적하고 안락한 풍요로움이 권세를 누리게 된다. 결과론적으로 “역사란 다른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이 해온 무엇”이라고 한 유발 하라리의 지적대로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혁명한 사건 이면에는 ‘지옥과도 같은 역사의 시작’이 아이러니하게 놓여있다.
농업혁명의 아이러니는 “밀이 인간을 길들이기 시작”했다는 유발 하라리의 통찰로 확인될 수 있다. 밀의 생존은 인간의 욕망을 조용히 길들였고, 그 결과 문명의 발전에 눈이 먼 인간은 “멸망의 그날”까지 그 아이러니를 눈치채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대로 인간의 생존 전략이 된다. 인간이 ‘생존’이 아닌 ‘생활’을 선택한 순간 우리는 안정적인 방어기제로서 ‘일상’에 매몰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상에 대해 느끼는 지루함은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인위적인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 날것의 자연에서는 일상이 살아남기 어려울뿐더러 일상이라는 개념조차 성립되기 어렵다. 일상은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 없는 시공간이며,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상은 인간에게만 가능한 개념이다. 그리고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들’ 속에서만 가능하다.
엘리베이터 가운데 둔
아파트 공동경비구역
남북의 문 열리고 예견치 않은
회담 성사될 때마다
열대야에도 찬바람 휑하다
애써 외면한 얼굴, 무표정한 근육
어색한 시선은 애꿎은 거울 겨냥한다
누가 이곳에
거울을 달아 놓을 생각했을까?
잠시 딴청 피우지만
매번 낯선 몇 년째 통성명 없는 앞집 여자의
장바구니와
피부와 옷차림새, 액세서리 슬쩍 훑어보며
유기농일까, 아닐까
순금일까, 아닐까
별별 생각 스친다
언제쯤 우리 무장 해제하고
봄꽃 따뜻이 피워낼 수 있을까?
-박용숙, 「공동경비구역」, 『애지』, 2024 봄.
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힘이 세다. 인간은 대개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거나 밥을 먹고 일을 하고 귀가하고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랑을 나누고 익숙한 이부자리에 몸을 누인다. ‘평범’과 한 쌍을 이루는 ‘일상’이라는 말은 변화하려는 세계의 압력을 버텨내고 알지 못하는 것들의 침범을 막아내는 힘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평범함 이면에 비범함이 있고 일상이라는 반복 속에 매일매일의 기적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박용숙의 「공동경비구역」은 현대의 주거 양식인 아파트의 일상에서 어떤 위화감을 감지한 시이다. 시인은 시적이지 않은 것에서 시적인 것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달리 말하면 일상이라는 생활의 한 단면에서 “누가 이곳에/ 거울을 달아 놓을 생각을 했을까?” 하고 불현듯 일상적이지 않음을 감지할 수 있는 이가 시인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먹고사는 일에 함몰되어 끌려다니다 불현듯 불편함을 인식하게 될 때, 시인은 지독한 아이러니에 몸부림을 치는 존재일 것이다.
「공동경비구역」은 현대인의 힘센 일상을 “엘리베이터” 안의 “외면한 얼굴, 무표정한 근육”으로 형상화해 낸다. “애써 외면한 얼굴, 무표정한 근육”은 현대인의 일상을 유지시켜 주는 일종의 동력이다. 그러므로 “몇 년째 통성명 없는” 것은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암묵적 방어선이 된다. 사회학적인 용어로 치자면 ‘개인화’ 또는 ‘개인주의’일 터인데, 개인의 권위와 자유를 중히 여겨 사회 구성원 간의 모든 행동을 규정하려는 윤리주의는 일종의 거리를 유지하는 데서 비롯된다. 때문에 남과 북이 대치한 비무장지대와 같은 “엘리베이터”에서는 사소한 수작에도 터져버리는 긴장감이 서려 있다. 물리적 거리든 심리적 거리든 자칫 선을 넘어오면 총탄이 날아들기 때문이다.
“아파트 공동경비구역”에서는 “열대야에도 찬바람이 휑”하고, 서로의 일상을 구성하는 “장바구니와/ 피부와 옷차림새, 액세서리”를 “훑어보며/ 유기농일까, 아닐까/ 순금일까, 아닐까”로 피아식별을 한다. 아군이냐 적군이냐의 여부는 ‘나’와 같은 ‘급’인가 ‘급’이 되지 않는가에 있다. “엘리베이터”라는 “공동경비구역”에서의 긴장감은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누가 ‘나’와 같은 ‘급’의 아군인지 구별할 수 없는 ‘관계의 불확정성’ 때문에 생긴다. 역사상 이웃 간의 거리가 가장 좁은 주거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 역사상 가장 배타적인 낯섦을 느끼게 하는 이 아이러니 속에, 현대의 개인주의는 서로 “훑어보”고 염탐하면서 안간힘을 다해 서로를 피아식별하는 일상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 비행기는 독일행이다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여자와 나는
이곳의 유일한 동양인이었고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그러나 말은 묶음으로 두기만 한다
그녀도 나를 의지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동양인은 우리뿐이니까
우리는 너무 다르게 생겼지만
크게 보면 똑같은 생김새니까
어쩌면 내가
여자와 밀접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러나 사람은 정말 다르게 생겼다
화장실을 오가는 이들은
징그러울 정도로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그녀와 나만큼이나
나는 조급해진다
우리의 닮음을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원숭이가 털을 골라 주듯
나도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빗어주고 싶지만
인간 종의 접속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나는 그녀와 접속되고 싶어서 노트북의 마우스를 마구 클릭한다
앞자리의 푸른 눈이 나에게 헬로, 한다
내가 기쁜 마음으로 헬로, 하면
우리는 잠시 연결되었다가 금세 끊기고
그가 다시 앞을 보면 나는 그의 얼굴을 까먹는다
이상하지, 이상해
나는 내가 멸종될 것 같아서 얼른 그녀와 연결되고 싶은데
비행기는 착륙 중이다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린다
몇몇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다
그 순간에도 모두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게 이상해
그녀가 일어선다
출구로 가기 위해 나를 지나친다
그녀의 뒷모습이 보인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비행기에서 본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
나와는 관계없는
접속이라는 말은 너무 무거워서
나는 잠시 착각하다가
오랫동안 좌석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김상희, 「접속」, 『문학사상』, 2024년 1월.
김상희의 「접속」은 박용숙의 「공동경비구역」과 같으면서도 다른 ‘사회적 인간이라는 아이러니’를 이야기한다. 「공동경비구역」의 경우 “아파트”라는 사회 안에서 같은 구조의 주거 양식을 공유하면서도 “피부와 옷차림새, 액세서리”로 피아식별을 시도해야 하는 ‘관계의 불확정성’이 화두였다면, 「접속」의 경우는 “우리의 닮음”을 찾아내고 “설명”을 해야 하는 ‘관계의 단절’이 기저에 깔려 있다. “독일행” “비행기” 안에서 “유일한 동양인”이라는 “조급”함은 “내가 멸종될 것 같”은 심리적 불안에서 비롯되는데, 이때의 “접속”에 대한 열망은 ‘관계의 단절’을 역설적으로 도드라지게 한다.
또한 「접속」에서의 “접속” 시도는 「공동경비구역」에서의 “훑어보”기처럼 은밀성을 보인다. 그렇지만 「접속」은 다수의 편에 드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조급”함 때문에, “나”가 “비행기” 내에서 아군임을 “설명”하려는 태도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공동경비구역」의 경우보다 비굴한 태도를 보인다. ‘나’와 같은 ‘급’을 피아식별을 해야 하는 ‘관계의 불확정성’이 ‘나’라는 개인주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징그러울 정도로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다수 속에서 “우리의 닮음”을 입증해야 하는 ‘단절된’ ‘나’는 소수자 또는 주변인 또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시적 화자가 “접속”하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라곤 “밀접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뿐이거나 “그녀와 접속되고 싶어서 노트북의 마우스를 마구 클릭”하는 것뿐이다. 이마저도 “우리는 잠시 연결되었다가 금세 끊기고” 서로의 “얼굴을 까먹”고 만다. “비행기”가 “착륙”하면 “비행기에서 본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은 결국에는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들일 뿐이다.
어쩌면 “아파트”라는 본진이냐, “비행기”라는 포위된 적진이냐 하는 사회적 공간의 정황이 ‘관계의 불확실성’이나 ‘관계의 단절’을 가를지도 모를 일이지만, 결국 인간은 인간‘들’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계의 불확정성’이나 ‘관계의 단절’이 삶의 질과 비례하는 시대임을 직시하면서도, 그 시대적 아이러니를 감내할 도리밖에 없다. 딴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명제인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로서 호모 폴리티쿠스이다”가 나이브하게 들리는 것은 또 다른 아이러니일 수도 있겠다.
건넛방
할머니 성경책 넘기는 소리
약포지 뜯는 소리
놓친 알약 굴러가고
되감는 묵주
다시,
성경책 넘기는 소리
밤늦도록 성경책
넘기는 소리
간간이 중얼거리는
긴 숨소리
건넛방 할머니
몸 긁는 소리
밤이면 더 붉어지는
소리 가려운 소리 미치는 소리
푸른 봄밤 어둠을 찢는
소리
건넛방
가려워 가려워 너무 가려워
같이 긁고 있는 소리
문지방이 가렵고
벽이 가렵고
가려워 너무 가려워
창밖의 어린 목련나무처럼 듣고 있는 어린 네 숨소리
오늘 밤
아무도 너를 찾지 않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오늘 밤
건넛방
돌아가신 할머니 성경책 넘기는 소리
한장 한장
봄을 움직이는 소리
글을 모르던 할머니 성경책 넘기는 소리
네가 되어버린 소리 너를 보여주는 소리 그러니까 너보다 너를 더 잘 아는 사람의
오늘 밤
네 안에서 또렷해지는 소리
너를
일으키는 소리
한번 더 너를, 살리는 소리
-최지은, 「너는 담에 기댄 작은 목련나무처럼」, 『창비』, 2024 봄.
인간이라는 아이러니는 시가 된다.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리면 더 풍요로워지는” “즐거운 통티” 같은 아이러니와, “소가 소를 잡아먹는” 먹고살기의 아이러니와, 가장 가까운 곳에 살면서 서로가 가장 낯선 “아파트”의 아이러니와, “멸종될 것” 같은 “조급”함 때문에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과 “접속”하려는 아이러니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 된다. 시의 속성이 아이러니에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시의 아이러니가 인간의 모순성에서만 발현된다고 할 수는 없다. 가령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심성이나, 인간이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사랑이나, 인간이 인간이고자 하는 열망 따위도 시적 아이러니가 될 수 있다.
최지은의 「너는 담에 기댄 작은 목련나무처럼」은 인간의 그리움이 스스로의 생명을 살리는 데까지 나아가는 아이러니를 그려낸 시이다. 여기서 그리움에 대한 객관적 상관물은 “할머니”가 생전에 “성경책 넘기는 소리”와 거기로부터 파생된 “할머니”의 “소리”들이다. “가려운 소리 미치는 소리/ 푸른 봄밤 어둠을 찢는/ 소리”는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이지만, “할머니”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됨으로써 “소리”들은 그리운 것들이 된다. “소리”라는 청각 이미지가 “가려”움이라는 촉각 이미지로 전환되는 과정은 “할머니”에게서 “너”로 전이되는 고통의 형상화이다. 이러한 고통은 “아무도 너를 찾지 않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오늘 밤”이 되어서야 “글을 모르던 할머니의 성경책 넘기는 소리”라는 아이러니를 통해 그리움으로 변모한다. 나아가 “창밖의 어린 목련나무처럼 듣”게 되는 “할머니”의 “소리”들은 “네 안에서 또렷해지는 소리”로, “너를/ 일으키는 소리”로, “너를, 살리는 소리”로 승화된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마음이 그리운 마음이 되는 아이러니에서 시가 나오고, 그 시적인 아이러니를 통해 인간은 스스로의 생명을 구하기도 하는 것이다.
덧붙여, 시에서 호명되는 “너”는 시적 화자인 ‘나’로 중첩되어 읽히는 것과, 불규칙적이지만 짧은 호흡의 행이 이루는 독특한 리듬에서 “너”가 곧 시를 읽고 있는 ‘독자’가 되는 것과, ‘나’와 “너”와 ‘독자’를 “살리는 소리”를 더불어 듣게 되는 것은 시의 경이를 함께 체험하는 일이 된다. 결국 시라는 속성은 이 글을 읽는 당신과 이 글을 끄적이는 내가 다르지 않다는 아이러니에서 비롯된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당신과 나는 유사한 생활에서, 또는 비슷한 일상에서 감지되는 아이러니를 통해 그 시적인 것을 불현듯 깨닫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서정시의 밑자리는 생활이고 일상이지만, 그 견고한 익숙함에서 어떤 위화감을 감지할 때야말로 시가 봄날의 꽃처럼 하얗게 타오르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기 때문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꽃의 절정을 ‘놀이’하는 인간은 경이롭다. 그리고 그 경이의 속성은 아이러니하다. 우리의 생활을 돌이켜보면, 오르막과 내리막이 언제나 한 쌍으로 솟거나 꺼져 있어서 살아가는 우리의 숨을 가쁘게 하거나 쉬이게 했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어느 날 무심하게 듣게 되는 뉘 집 귀한 자식의 출생 소식같이 생의 아이러니는 인간만의 독특한 감각이어서, 시인은 활짝 핀 봄꽃의 환희를 보며 꽃잎이 떨어질 땅바닥의 암울을 예감하는 존재일지 모른다.
어제와 오늘, 봄의 뒤숭숭한 꽃길을 걷다가 건진 몇 편의 아이러니가 있다. 좋은 시는 애늙은이 같다. 문장은 싱싱한데 그 안에 담긴 인간이라는 아이러니는 평범하면서도 제법 오래되고 묵직한 통찰을 노래하고 있다. 봄볕의 환한 눈길로 꽃잎 같은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오래 묵은 우리의 외로움과 고독과 고통이 호호백발처럼 뒷짐 지고 앞서가고 있다. 그 몇 편의 시를 뒤따라가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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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준
약력
2018년 애지 등단. 애지 편집위원.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출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