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마 해군의 몰락과 재건
전투를 승리로 이끈 2명의 신임 집정관은 크리페아 항구에 남아있던 병사들을 배에 태우고 시칠리아 섬으로 떠난다. 아프리카 전진기지에서 철수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 판단은 최악의 실수였다. 로마군 선단이 시칠리아섬의 남해안까지 왔을 때 엄청난 태풍을 만나게 된다. 로마의 키잡이들은 로마연합에 가맹한 항구도시의 선원들이었다. 그들은 태풍을 만났을 때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 해안선에 지나치게 접근한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바다에 익숙하지 못한 로마 장군들은 이들의 주장에 반대했다. 육지도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태풍에 농락당하는 공포를 견딜 수 없었던 로마 장군들은 해안에 접근하라고 선원들에게 명했다. 게다가 배들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도록 한무더기가 되어 접근할 것을 명했는데 결과적으로 지중해 역사상 최악의 해난사고가 벌어지고 만다. 안벽에 부딪치거나 배들끼리 충돌하여 시라쿠사 항까지 피난할 수 있었던 것은 230척 중에서 80척에 불과 했고 6만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카르타고인들은 그해 겨울 강화사절을 로마에 보내 온다. 지금이먀말로 유리한 조건에서 강화를 맺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강화사절은 카르타고인이 아니라 포로로 붙잡혔던 로마의 전 집정관 레굴루스였다. 그의 임무는 로마 원로원을 설득해 시칠리아섬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설득에 성공하건 실패하건 임무를 끝낸 뒤에는 카르타고에 돌아오기로 약속했는데 막상 로마로 입성한 레굴루스는 로마 원로원을 설득해 카르타고와 강화조약을 맺지 말 것을 종용한다. 로마 원로원은 그의 참뜻을 이해하고 카르타고와의 강화를 거부한다. 약속대로 카르타고로 돌아간 레굴르스는 동그란 바구니 속에 갖힌 채 코끼리들의 축구공이 되어 걷어차여 죽임을 당했다.
카르타고로 돌아가는 레굴루스(벤자민 웨스트 作)
어쨌건 기세가 등등해진 카르타고쪽은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대장 크산티포스도 해고해 버리고 시칠리아 탈환을 위해 군대와 코끼리 140마리를 상륙시킨다. 로마는 석달간 220척이나 되는 5단 갤리선을 건조하는 재주를 부려 해군을 재건했으며 지난 해난사고의 책임자였던 두 전직 집정관과, 로마가 해군을 가진 첫 해에 리파리 섬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스키피오를 포함한 4명의 집정관이 이끄는 군대를 시칠리아로 출동시켰다. 로마는 카르타고군과 맞서 육해공 공동 작전으로 싸우는 동시에 시칠리아의 카르타고 거점인 팔레르모를 공략하기로 결정한다. 초기에는 로마쪽에 유리하게 전황이 전개되어 가는 듯 했다. 시칠리아에서 로마의 거점이었던 메시나와 팔레르모 중간에 있는 체팔루를 굴복시키고 로마의 동맹국인 시라쿠사로부터의 보급로까지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팔레르모는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고 결국 이듬해에 가서야 공략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는 팔레르모 주민들 가운데 친로마파가 대세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로마군은 친카르타고파 주민들 대부분을 노예로 팔아 버려 시칠리아의 다른 지역 주민들도 로마군에게 얌전히 성문을 열어주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
이듬해 봄 함락된 팔레르모 대신 카르타고의 보급기지가 된 마르실라마저 침공할 준비를 마치고 겨울이 찾아와 양군은 잠시 휴전기를 맞이한다. 시칠리아를 떠나 모국으로 돌아가던 로마 함대가 이탈리아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기 시작할 무렵 또다시 무시무시한 폭풍우를 만나게 된다. 이번에는 지난 경험을 되살려 지휘관들은 선원들의 충고에 따랐지만 그 일대의 바다는 호메로스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표류담에도 나와 있듯이 험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또다시 로마 해군은 150척 가까운 배와 수많은 병사를 잃어야만 했다.
잇따른 해난 사고로 로마도 기가 꺽여 버렸는지..그 이듬해에는 해군을 재편성 하자는 주장을 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시칠리아와 아프리카 북해안 사이의 제해권을 유지하기 위해 고작 60여척의 군선을 파견하는데 그쳐야만 했다. 로마의 두 번째 사고를 알게된 카르타고는 150마리로 늘어난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마르살라를 떠나 팔레르모로 진격해 들어왔다. 로마군은 4반세기전에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가 끌고왔던 코끼리 부대를 통해 코끼리의 무서움을 처음으로 맛봤고, 4년전에 레굴루스가 이끌던 로마군은 무려 8천명이나 코끼리에게 밟혀 죽은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코끼리의 수가 더 많아졌다. 로마군으로서는 마르살라 공략 따위는 생각도 못해볼 형편이었다.
포에니 전쟁
잇다른 해난사고로 바다에 대한 자신감도 잃고 육지에서는 코끼리라...로마군으로서는 불가향력의 상황이었다. 병사들은 장교들이 아무리 호통을 쳐도 코끼리 부대 앞에선 차마 발을 떼지 못했다. 이듬해의 집정관 선거를 위해 수도로 돌아간 동료를 대신해 팔레르모 방어를 맡고 있던 이는 집정관 메텔루스였다. 그는 팔레르모 시가지를 둘러싼 성벽 바깥의 해자를 더욱 깊고 넓게 파게 했으며 병사들 대부분을 성벽 안쪽에 배치시켰다. 카르타고군은 성벽 바깥에 진을 친 후에 코끼리를 앞우고 곧장 진격해 오기 시작했다. 메텔루스는 로마군의 주력인 중무장 보병이 아닌 경무장 보병을 내보내 다가오는 코끼리 떼에게 창을 집어 던지게 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성 안으로 숨어들어갔다. 창에 고슴도치가 된 코끼리는 잔뜩 화가 나서 성벽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들다가 대부분 깊은 해자 속으로 곤두박질 쳤고, 해자 앞에서 간신히 걸음을 멈춘 코끼리들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정신나간 코끼리들은 뒤따라오던 카르타고 병사들까지 짖밟기 시작했다. 메텔루스는 드디어 중무장 보병들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이들이 성 밖으로 달려나가 허둥대는 카르타고 병사들을 제거하는 동안 경무장 보병들은 다시 성벽위에서 해자속에서 날뛰고 있는 코끼리떼를 향해 다시 창을 집어던져 완전히 잠재워 버렸다.
카르타고의 중전차
팔레르모 공방전은 로마군의 완승으로 끝났고, 포획한 10마리의 코끼리를 제외하고 대부분 로마군의 창에 목숨을 잃었다. 카르타고군의 전사자는 2만을 헤아렸고, 지휘관은 살아남았지만 본국에 소환당해 사형에 처해졌다. 실패한 지휘관에게 중용의 기회를 주는 로마와는 완전히 다른 처리법이었다. 승장이 된 메텔루스는 코끼리를 새긴 기념 은화를 만들었다. 코끼리에 대한 공포를 극복한 것은 팔레르모 방어에 성공한 것보다 더 기념하고 축하할 만한 일로 간주되었다.
코끼리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로마인은 바다에 대한 두려움도 잊기 시작했다. 결국 해군을 다시 재건하기로 했고 기원전 250년, 이탈리아 각지의 조선소에서 200척의 군선을 진수해서 마르살라 공략에 투입했다. 카르타고로서도 시칠리아에 남은 그들의 세력권은 마르살라와 트라파니 뿐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밀릴 수 없는 형국이었다. 카르타고는 1만명의 용병을 파견했고 트라파니에는 대함대를 파견했다. 또한 본국에서는 10만명의 용병을 모집해서 시칠리아로 투입하기 시작, 로마군의 마르살라 공략은 난항을 거듭했다.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다시 겨울이 찾아와 휴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듬해인 기원전 249년, 제 1차 포에니 전쟁도 어언 16년째를 맞이하게 된다. 로마군은 220척으로 재정비된 함대를 이끌고 트라피니을 공격하는 한편 육군은 마르살라를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트라파니를 수비하고 있던 카르타고의 장군은 로마 함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항구에 정박중인 함대에 출항 명령을 내리고 남쪽에서 올라오는 로마 함대를 기다렸다. 항구에서 대기중인 트라파니 함대를 포위할 작정이었던 로마 함대는 오히려 벼랑으로 둘러싸인 해안선을 등지고 포위당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카르타고의 함대 지휘관은 함대간 접근전에서는 로마가 유리하지만 떨어져서 싸우는 한 항해술이 뛰어난 카르타고가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르타고 함대는 로마 함대를 이리저리 유인하고 몰아 붙이면서 깊은 바다까지 몰아 넣고 로마 해군을 대파한다. 로마 해군은 카르타고와 가진 해전에서 처음으로 패전을 맛본 셈인데 220척 가운데 93척을 빼았기고 30척이 침몰했으며, 2만 명에 이르는 병사들과 선원들이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로마인은 수영에 능숙하지 못한데다 갑옷을 입고 있어서 피해가 훨씬 컸다. 나머지 병사들은 간신히 해안까지 헤엄쳐 간 다음, 육로를 따라 마르살라를 공격하고 있는 로마군 진영으로 달아났다.
이미 로마는 인구가 크게 줄어들 정도로 인적 손실이 쌓이고 있었으며 지속되는 전쟁으로 국고를 거의 탕진한 상태였다. 반면 카르타고는 해전에서 여러차례 패했다 하더라도 로마처럼 해난사고를 겪지는 않았으며 전투에서 죽은 병사도 카르타고인이 아니라 타국의 용병이었으므로 18년에 걸친 전쟁에서 소모된 국력을 비교해 보자면 로마쪽의 피해가 훨씬 압도적이었다.
기원전 247년에 카르타고는 나중에 로마의 악몽이 된 한니발의 아버지인 하밀카르 바르카스에게 시칠리아 전선을 담당케 한다. 이 해는 한니발이 세상에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인은 자국에 유리한 기회를 활용하는데 서툴렀다. 이때도 유능한 사령관을 파견해 놓고는, 그를 계속 강력하게 지원해야 할 본국 정부가 둘로 분열되어 있었다.
한니발
카르타고가 위치해 있던 북아프리카 지역은 지금은 비도 적고 녹지도 많지 않은 곳으로 변해버렸지만, 고대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카르타고인의 영농기술은 뛰어났고,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환경도 갖추어져 있었다. 그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페니키아 민족의 전통을 이어받은 뛰어난 통상 민족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카르타고는 국정을 담당하는 경제인들이 늘상 '국내 중시파'와 '해외 진출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국내파는 북아프리카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하는 일에는 적극적이었지만, 세력을 해외로 확대하는 일에는 소극적이었다. 해외로 진출해도 그들이 이익을 직접 누릴 수는 없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시칠리아 점령에 집착하는 것은 해외파였고, 국내파는 아프리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선결 문제라고 주장해 왔다. 카르타고가 좋은 기회를 맞이하고도 오히려 소극적이 될 때가 많았단 것은 국내파가 해외파의 발목을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국내파의 리더가 한논 가문이라면, 하밀카르나 한니발이 속해 있는 바르카스 가문은 해외파의 리더로 간주되었다.
하밀카르 바르카스
로마가 인적으로나 물적으로 완전히 소모되어 있던 기원전 247년에 시칠리아 전선에 파견된 하밀카르는 이런 국내 사정 때문에 좋은 기회를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병력을 제공받지 못했다. 그에게는 2개 군단 정도의 병력이 주어졌는데, 시칠리아 서해안까지 밀려난 카르타고의 세력을 일거에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밀카르는 시칠리아 전선의 교착상태를 지속시키면서, 국력이 소모된 로마가 먼저 강화를 제의해 오기를 기다릴 작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시칠리아의 카르타고 세력을 적어도 전쟁 발발 이전의 상태까지는 돌이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밀카르의 이런 전망은 절반은 적중했지만, 절반은 빗나가게 되었다. 그는 마르살라와 트라파니를 거점으로 삼지 않았다. 두 도시 가운데 하나를 거점으로 삼았다가 로마군에 포위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밀카르는 팔레르모 근교에 우뚝 솟아 있는 작은 산 위에 거점을 두었다. 이 산 위에 서면 팔레르모 시가지와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로마에서 남하하는 함대도 저 멀리 수평선 위에 나타난 시점부터 감시할 수 있다. 게다가 산에서 내려와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벼랑으로 둘러싸여 팔레르모 항구에 정박해 있는 로마 함대에 들킬 염려도 없는 만도 있었다. 산 위에 진영을 설치한 하밀카르는 거기서 해안을 따라 좀 멀리 돌아가긴 하지만, 아군이 굳게 버티고 있는 트라파니까지의 보급로도 확보했다.
하밀카르가 산정에만 틀어박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군대와 함께 자주 산을 내려와, 마르살라를 공략하고 있는 로마군의 배후를 기습하여 그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한번도 로마군에게 정식으로 싸움을 걸지는 않았다. 전력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하밀카르는 육지에서만이 아니라 바다에서도 게릴라 전법을 사용했다. 먹이가 된 것은 '로마 연합'에 가맹해 있는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도시와 이탈리아 중부의 에트루리아인의 상선이었다.
카르타고군 병사 피켜
하밀카르의 전법은 교묘하고 효과적이었다. 기원전 247년부터 기원전 243년까지 4년 동안, 포에니 전쟁은 하밀카르의 뜻대로 전개되었다. 켈레그리노 산에 대한 로마군의 공격도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하밀카르의 전망은 여기까지는 완전히 들어맞았다. 들어맞지 않은 것은 아무리 기다려도 로마의 강화 사절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
로마는 교착상태에 빠진 지 오래된 시칠리아 전선을 타개할 길을 찾고 있었다. 그 결과 마련된 전략은 카르타고 본국과 하밀카르를 잇는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시칠리아 서해안과 카르타고 본국 사이의 제해권을 획득하지 않고는 실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해역의 지배권을 빼앗기면 시칠리아를 완전히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카르타고는 반드시 함대를 파견할 것이다. 하밀카르 때문에 마르살라와 트라파니도 공략하지 못하고 있던 로마는, 카르타고 함대를 해전에서 격파함으로써 하밀카르와 마르살라와 트라파니를 동시에 고립무원의 상태로 몰아넣을 계획을 세웠다.
로마는 포에니 전쟁이 시작된 뒤 '네번째로' 함대를 새로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남아 있는 배들도 대부분 노후했기 때문에, 모든 선박을 새로 건조할 필요가 있었다. 상대가 카르타고인 이상, 함대 규모는 적어도 200척에 5단층 갤리선이 아니면 안된다. 5단층 갤리선을 200척이나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기원전 242년 당시의 로마 국고는 텅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원로원은 세금을 늘리는 것이 최선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까지의 관례를 어기면서까지 동맹도시들에게 전비 부담을 요구하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원로원은 전시국채를 발행하기로 결의했다. 전쟁이 끝난 뒤 상환능력이 회복되었을 때 갚는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이렇게 쥐어짠 재원으로 로마는 200척의 5단층 갤리선을 새로 건조하고, 집정관 카툴루스에게 지휘를 맡겨 바다로 내보냈다.
오랜만에 본격적인 함대가 도착했다고 해서 시칠리아 서해안의 상태가 일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해가 끝날 때까지 카르타고에서는 함대가 출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4번째 함대의 효과는 있었다. 바다에서 공격하는 로마 함대 덕분에 마르살라 항구가 로마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다. 이리하여 로마 함대도 마르살라라는 천연의 양항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소식이 카르타고에 전해지면, 카르타고도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2. 1차 포에니 전쟁의 종말
기원전 241년 3월, 카르타고는 국내파를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는지 본격적인 함대를 파견했다. 일찌감치 3월에 출동한 것은 로마군의 병사 교체기를 노렸기 때문이다. 로마의 신임 집정관의 임기가 3월 15일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그해의 로마군 교체 병력이 시칠리아에 도착하는 것은 일러야 4월 말이다. 카르타고는 전력이 줄어든 시기를 노려 군량 보급을 끝내둘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산이었다. 로마는 전황이 중대 국면에 접어든 것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로마의 육군은 겨울철 휴전기 때문에 병력이 반으로 줄었지만, 해군 전력은 집정관 카툴루스와 함께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카르타고의 오산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태풍같은 해난사고를 거듭 겪은데다 8년 전에는 해전에서도 패배한 로마군이 쉽사리 싸움을 걸어오지는 못할 거라고 카르타고는 예측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원전 241년 봄에 출동한 카르타고 함대는 함대라기보다 수송선단이라고 부르는 편이 어울리는 수준의 것으로 시칠리아에 주둔중인 카르타고군이 반년은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군량과 무기를 가득싣고 있었다.
본국을 떠난 카르타고 함대는 북동쪽으로 진로를 잡고, 마르살라와 트라파니 사이의 앞바다에 떠 있는 마레티모 섬에 일단 닻을 내렸다. 거기서 시칠리아 서해안에 접근할 기회를 노리자는 것이다. 에가디 제도에서도 가장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섬이 마레티모 섬이다. 카르타고 함대는 트라파니 북쪽에 있는 에리체 근처 해안에 군량을 상륙시킬 작정이었다. 트라파니 앞바다는 로마 함대가 감시하고 있을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집정관 카룰루스는 트라파니 항구 따위는 감시하고 있지 않았다. 적 함대가 출동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그는 고대하던 소식이 들어오자마자 당장 모든 함대에 북상 명령을 내렸다. 집결지는 에가디 제도 가운데 하나인 파비냐나 섬이었다. 카르타고 함대가 정박해 있는 마레티모 섬과 로마군의 함대가 정박해 있던 파비냐나 섬의 거리는 10킬로미터 밖에 안된다. 카툴루스는 이 파비냐나섬에서 적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지루한 대치가 계속되는가...싶더니 3월 10일 아침, 바람이 서풍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강풍이었다. 마레티모에서 동쪽에 있는 에리체로 가기에는 더없이 좋은 순풍이다. 마레티모에서 약간 동남쪽에 있는 파비냐나섬의 카툴루스도 이 바람이라면 반드시 적이 나올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마레티모 섬에서 나온 적에게 싸움을 걸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조금 망설였다. 에리체로 가는 카르타고 함대의 앞길을 가로막으면 서풍을 정면에서 받게 된다. 카르타고 함대에는 순풍이지만, 로마 함대에는 역풍이 된다. 강풍이니까 파도도 높았다. 항해술이 서투른 로마쪽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국이다.
그러나 카툴루스는 불리함을 무릅쓰고 싸움을 걸기로 결심했다. 로마군선들이 가진 이점은 군량을 가득 실어 무거운 적선보다 가볍다는 것이었다. 카툴루스는 돛을 내리고 노만 저어서 출동하라고 아군 함대에 명령했다. 서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간 로마 함대는 마레티모를 떠나려던 카르타고 함대 앞을 가로막았다. 이미 전투태세에 들어간 로마 함대를 보고, 카르타고 함대도 돛을 내렸다. 해전은 노젓기만으로 배를 조종하면서 싸우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에, 돛을 내리는 것은 도전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표시이기도 했다.
서풍은 여전히 강하게 불고 있었다. 돛을 내려도 대형선이기 때문에 강하게 밀린다. 강풍과 높은 파도에 밀린 카르타고 군선들은 동쪽에 진을 친 로마 함대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 왔다. 여기저기서 배들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격돌로 맞물린 배에서 적선으로 옮겨타고 싸우는 병사들의 함성이 주위를 압도했다. 격전이었지만, 승부는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카르타고의 배는 50척 이상이 침몰했고, 70척 이상이 로마에 나포되었다. 나머지는 때마침 방향을 바꾼 바람의 도움으로 본국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
우지끈...
승리한 로마 함대도 추격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배는 수리가 필요했다. 카르타고의 총사령관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카르타고에서는 극형으로 되어 있는 책형(죄인을 나무기둥에 묶어놓고 찔러 죽이는 형벌)에 처해졌다. 이 책형을 처음 시행한 것이 고대 페니키아 인이었으며 십자가 형벌도 책형의 일종이니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페니키아식(카르타고식)으로 처형당했다고 볼 수 있겠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된 이래 패전책임을 지고 사형에 처해진 카르타고 사령관은 이제 세 명이 되었다.
카르타고 정부는 겨울철 휴전기도 기다리지 않았다. 하밀카르에게 전령을 급히 파견하여, 로마에 강화를 제의하라고 명령했다. 집정관 카툴루스도 하밀카르의 제의에 응했다. 이리하여 두 명의 현실주의자 사이에 제1차 포에니 전쟁을 끝내기 위한 강화 교섭이 시작되었다. 카툴루스와 하밀카르가 동의한 강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에서 철수하고, 시칠리아에 대한 영유권을 영원히 포기한다.
2. 카르타고는 시라쿠사를 포함한 로마 동맹국들에 대해 싸움을 걸지 않기로 약속한다.
3. 포로는 양국 모두 몸값을 받지 않고 석방한다.
4. 카르타고는 로마에 대한 배상금으로 2천 200탈렌트를 10년 분할로 지불한다.
5. 로마는 카르타고의 자치와 독립을 존중한다. |
이런 내용의 강화에 대해 찬반의 의사표시를 요구받은 로마의 민회에서는 반대표가 다수를 차지했다. 23년에 걸친 긴 전쟁이었다. 단순 계산으로도 희생은 로마가 훨씬 컸다. 그런데 이것이 승자가 맺을 강화인가....로마의 시민들은 석연치 않았다. 로마에서는 10명의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파견했으며 시칠리아에 도착한 그들도 카툴루스의 의견에 동의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전쟁을 로마로서도 더 이상 끌고 싶지 않았으리라.
강화 조건이 약간 변경되어 배상금 액수가 2천 200탈렌트에서 3천 200탈렌트로 바뀌었고, 증액분은 분할상환이 아니라 강화가 발효한 뒤에 일시불로 지불하기로 결정되었다. 참고로 1탈렌트는 양 300마리, 즉 1천만원 정도에 해당한다. 그밖에 에가디 제도와 몰타 섬, 판텔레리아 섬 같은 시칠리아 주변의 섬들도 로마 영토로 귀속되었다. 사실 카르타고는 아프리카의 농업 생산만으로도 1년에 1만 탈렌트가 넘는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또한 몰타나 판텔레리아의 로마 영유는 기정 사실을 추인하는 데 불과했다. 로마는 상대가 받아들이기 쉬운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귀국한 조사단의 보고를 들은 로마 시민도 이번에는 찬성표를 던졌다.
기원전 264년부터 시작하여 23년 동안 계속된 제1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41년에 끝났다. 카툴루스는 그해 6월에 로마로 개선했다. 로마인도 평화를 만끽하는 데 열중했다. 기원전 673년부터 줄곧 열려 있던 야누스 신전의 문도 무려 432년 만에 닫혔다. 전쟁의 신 야누스 신은 이제 그만 쉬시라는 뜻이다.
야누스 신전의 문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벌어진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서지중해 지역에만 국한되었고, 게다가 그 일부에 불과한 시칠리아가 전쟁터였기 때문에 형태로는 국지전이다. 하지만 강대국 카르타고와 신흥국 로마가 대결한 이 전쟁은 투입된 전력의 양으로 보아도 단순한 국지전은 아니었다. 이만한 전력을 장기간에 걸쳐 투입할 수 있는 나라는 지중해 세계에서는 두 나라밖에 없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지중해 세계의 내일을 결정할 나라는 이집트도 시리아도 마케도니아도 아니고, 카르타고나 로마 둘중에 하나였다. 로마는 이제 이탈리아 반도 뿐 아니라, 해외의 속령을 갖게 되었다. 시칠리아는 로마의 첫 프로빙키아(속주)가 되었다.
로마에서 카툴루스가 네 필의 백마를 앞세우고 개선식을 거행하고 있을 무렵, 트라파니와 마르살라에서는 카르타고 세력을 철수하는 작업이 착수되고 있었다. 카르타고에서 파견된 용병들에 이어, 시칠리아에서 식민지 경영에 종사해온 카르타고인들도 섬을 떠나야 했다. 혼란은 없었다. 난민들의 소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칠리아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그리스인에게 카르타고의 시칠리아 철수는 카르타고의 지배에서 로마의 지배로 바뀌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는 이렇게 시칠리아에서 400년동안 쌓아올린 기득권을 송두리째 상실하고 말았다. 그것은 지중해 서쪽 바다를 잃는 것이기도 했다....
2차 포에니 전쟁당시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의 코끼리 부대
Part 4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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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금 처럼 무기가 최첨단화 된 것은 아니지만... 역시 상대보다 많은 인원수로 먹고 들어가는 것을 보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