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5:7
[새번역]
7.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NIV]
7.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will be shown mercy.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는 말씀은 팔복에 나타난 기독교인의 성격을 한 단계 더 나아가 묘사합니다. 본문이 한 단계 앞선 것이라고 제가 구태여 말씀드리는 까닭은 성격 묘사의 유형과 종류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기독교인의 필요와 그 필요 의식의 관점에서 기독교인을 살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일종의 전환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인의 기질과 관계되는데, 이 기질은 앞서 살펴 본 모든 것에서 결과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음에 계속되는 복들에 있어서도 그런 것은 물론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람이 자기를 바로 보고 특히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서 자기를 보았을 때 초래하는 결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다시 사람이 참으로 기독교인일 때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결과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주께서 이 팔복을 세밀하게 선별하신 사실을 강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팔복의 순서를 되는대로, 함부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사상의 일정하고 뚜렷한 진전이 있으며, 논리적 연속성이 있습니다. 이 특정한 복은 기타 다른 모든 복들에서 결과되어 나오며 특히 이 복은 바로 앞서 나온 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와 매우 선명하고 잘 정의된 논리적 관계를 갖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저는 산상설교의 어느 진술이든 그것을 앞의 문맥에 비추어서 이해하거나 특히 여기에 기독교인의 성격과 기질에 대해 주어진 성격 묘사에 비추어 이해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일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라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얼마나 탐사성이 있는 진술입니까! 여기서 우리들은 각자의 위치와 기독교 신앙고백에 대하여 얼마나 놀라운 시금석을 갖는 셈입니까! 그리스도는 이 사람들만이 복되며, 축하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긍휼히 여겨야 할 이유는 이런 까닭에서입니다. 이 지점은 팔복이 갖는 면밀한 성격을 한번 더 강조해야 할 지점일 것 같습니다. 주님은 기독교인과 그의 성격을 묘사하며, 서술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떠보시며 시험하고 계십니다. 팔복을 전체로써 취급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복종해야 할 일반적인 시금석(test)이 됨을 인식하는 것은 유익합니다. 우리는 이 면밀한 시험과 탐사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이 시금석들은 우리의 기독교 신앙 고백이 어떠한가를 모두 말해 줍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이런 유의 일을 싫어한다면, 만일 제가 이 일에 조바심을 친다면, 제가 그 대신 공산주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면, 제가 이 개인적 분석과 탐사와 시험을 싫어한다면, 이것은 나의 위치가 신약성서인의 위치와 전적으로 반대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 제가 이런 유의 일들이 나를 면밀히 탐사하고 아픔을 주더라도 이것이 나에게 중요하며 유익한 것이라면, 그리고 제가 낮아지고 교만이 꺾이는 것이 제게 유익하다고 생각되고 나에게 나의 참 모습을 보여 줄 뿐 아니라 기독교인을 위한 하나님의 표준에 비추어서 나를 평가하는 거울 구실을 하는 것이라면, 나는 나의 상태와 형편에 대하여 소망을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참된 기독교인은 겸손히 낮아지는 것에 결코 반대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기독교인에 대하여 먼저 말해야 할 것은, 그가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는 것과 그가 자기 속에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주는 일에 반대한다고 하면, 그가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팔복을 하나의 전체로써 취급하면 매우 탐사성 있는 시금석이 됩니다.
팔복은 다른 면에서도 면밀한 탐사성을 가진다 하겠습니다.
이 탐사성은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이 특정 복에 매우 뚜렷하고 선명하게 사실로 나타나 있습니다. 팔복은 기독교인의 위치에 대한 어떤 원초적이며 중심되는 진리들을 상기시켜줍니다. 첫째 진리는 이것입니다. 복음은 그것의 일체의 강조점을 행위에 두지 않고 상태에 두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행동에 보다 우리의 자세에 더 큰 비중을 둡니다.
첫째로 이 복음의 주요 강조점은 여러분과 제가 무엇을 행하는가에 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질적으로 어떤 존재들인가에 두고 있습니다. 산상설교를 일관해서 우리 주님은 기질에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주님은 뒤에 가서 행동에 대하여 이야기하십니다. 하지만 이에 앞서 주님은 성격과 기질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여드리려고 하는 바와 같이 이것은 본질적으로 신약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기독교인은 그가 무언가를 행하기에 앞서 어떤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행동할 수 있기에 앞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요점입니다. 존재(being)는 행위(doing)보다 중요하면 자세가 행위보다 더 의의가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혹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여러 점에서 기독교인이 되도록, 혹은 되려고 애쓰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성격을 소유하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어떤 유형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자주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이러 저러한 점에서 기독교인으로 살려고 힘써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면 우리의 행동은 그 결과가 되는 셈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통제하게끔 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기독교가 우리를 통제하게 되어야 합니다. 신약성경 전체의 관점에서도 그렇지만 팔복의 관점에서 볼 때도 이와 다르게 생각한다면 전혀 잘못입니다. 이를테면 '내가 참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나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며 이것을 적용해야 하겠다'라고 말한다면 잘못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께서 설정하신 방법이 아닙니다. 내가 진리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것은 내가 내 속의 성령의 사역에 의하여 기독교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완벽히 표현한 사도 바울의 진술을 한 번 더 인용하겠습니다. - 나는 삽니다.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주님이 나를 지배하시는 것이지 내가 주를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의 태도를 통제하고 여러모로 기독교인이 되려고 애쓰고 있는 자연인으로서 나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영이 나의 삶 중심에서 나를 통제하고 있으며 나의 존재의 바로 근원에서, 나의 모든 활동의 원천에서 나를 조종합니다. 여러분은 이 같은 결론을 내리지 않고는 팔복을 읽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의 삶의 표면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며, 일종의 도금이나 합판 장식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의 인격 바로 중심에서 발생하고 있는 그 무엇입니다. 신약성경이 중생이나 거듭남에 대하여, 새로 지음(창조)와 새 성품을 받는 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것은 그의 존재의 바로 중심에서 발생하는 그 무엇입니다. 이것은 그의 모든 생각과 그의 모든 전망과 그의 모든 상상을 통제하며 그 결과로써 그의 모든 행동까지 통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활동은 이 새로운 창조의 결과요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새 성품의 결과가 되는 셈입니다.
팔복이 그처럼 면밀한 탐사성을 띠는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 팔복은 결과적으로 이렇게 말해 줍니다. 평범한 삶을 살 때 우리는 그 동안 내내 우리가 어떤 존재들인가를 선언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문제가 그토록 심각성을 띠는 이유도 이런 까닭입니다. 우리의 반응 여하에 따라 우리의 영을 나타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사람됨을 기독교의 관점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도 이 영인 것입니다. 인간의 강한 의지의 결과로 그들의 행동을 크게 자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들은 그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항상 선언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모두 '심령이 가난한지' '애통하고 있는지' '온유한지' '주리고 목마른지' '긍휼히 여기는지' 아닌지 선언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 생활 전체는 실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표현이며 선언입니다. 우리가 이 같은 목록에 직면하거나 주께서 묘사하신 기독교인의 이 비상한 성격묘사를 볼 때 우리 자신을 살피고 검토하고 이 같은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기되는 특별한 질문은 우리가 긍휼히 여기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에 의하면 기독교인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그런 인물일 뿐 아니라 동시에 긍휼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축복받아야 할 사람이, 여기에 복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긍휼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습니까? 먼저 부정적인 면부터 말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이것은 '안이하고 적당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일들을 살펴보지도 않고 안이하게 적당주의로 하는 것을 의미하거나 우리가 여러 가지 일들을 본다 해도 보지 못한 척 가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법이나 질서를 신뢰하지 않으며, 어떤 의미에서 정의나 의를 신뢰하지 않는 이러한 시대에 있어 특별한 위험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을 지배하는 관념은, 사람이 절대 자유사상을 가져야 하며,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행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범죄와 법률 위반에 대하여 미소짓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현대인은 말하기를 '무슨 상관이야? 좋아. 계속해'라고 합니다. 그는 일종의 맥없는 사람이요, 안이하고 적당히 사귀기가 쉬운 그런 사람이요, 법률에 위반되든 어쨌든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요, 법률 준수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분명 이것은 우리 주님이 이 점에서 기독교인의 성격을 서술한 것과 다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팔복을 하나의 전체로 고찰할 때 팔복의 어느 하나도 생래적 기질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크게 강조된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까닭은 만일 여러분이 팔복을 그런 식으로, 생래적 관점에서 생각하지 시작한다면 여러분은 팔복에서 심히 부당한 점을 발견하겠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성질로 태어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큰 이점을 가지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어떤 기질을 두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마주 대할 때 그 아무도 다른 사람보다 유리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리 떠나 있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의 변명하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에 복종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생래적 기질은 팔복의 어느 하나를 해석하는 데도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긍휼히 여긴다'는 것이 안이하고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데는 이보다 훨씬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용어를 풀이할 때 이 말이 특별히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형용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의 의미에 대하여 제가 여하한 결정과 정의를 내리든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께 있어서도 의미를 지니며, 여러분이 긍휼의 의미를 그런 뜻으로 바라보는 순간, 법을 위반하는 것에 개의치 않는 이 안이한 적당주의식 태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아시게 됩니다. 하나님은 긍휼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긍휼을 어떻게 해석하든 이 말은 이상의 모든 사실들 곧 하나님에 관한 사실들을 포함해야 합니다. 긍휼과 진리는 서로 조화됩니다. 그런데 만일 제가 진리와 율법을 희생시켜야만 긍휼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라면 이런 긍휼은 참된 긍휼이 아니며 이 용어를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긍휼이란 무엇인가? 저는 긍휼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은 긍휼을 은혜와 비교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른바 목회 서신의 서문에서 사도가 새 용어를 소개한 사실을 주목하실 것입니다. 그의 기타 서신들은 대부분 '은혜와 평강'으로 허두를 떼지만 그의 목회서신에서는 '은혜와 긍휼과 평화'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이와 같이 은혜와 긍휼 사이에 흥미있는 특징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제가 본 것 중에 이 두 용어에 대한 최상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은혜는 죄를 지은 사람들과 특히 관련되고 긍휼은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관련된다' 환언하면 은혜가 죄를 전체로써(총괄적으로) 내려다보는 반면, 긍휼은 특히 죄의 비참한 결과를 내려다보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측은한 생각과, 고통을 제거하려는 소원이 합쳐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긍휼의 본질적 의미입니다. 긍휼은 측은감과 행동이 합쳐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측은감을 가집니다. 사람들의 비참성에 대한 관심은 그것을 제거하려는 열정으로 유도됩니다.
그 실례를 여러 가지로 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긍휼한 영을 가진다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에게 죄지은 사람을 여러분의 권세하에 두고 있는 위치에 있음을 문득 발견할 때에 나타나는 그러한 영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긍휼한가 아닌가를 아는 길은 여러분이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 나는 이점에서 내 권리를 행사해야겠다. 나는 법대로 처리해야 하겠다. 이 사람은 내게 죄를 범했으니 잘 되었다. 마침내 기회가 오지 않았는가'라고 말하렵니까? 이것은 긍휼의 정반대입니다. 이 사람은 여러분의 손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복수의 영을 품고 있습니까, 아니면 고통 중에 있는 여러분의 원수들에 대하여 측은하고 불쌍히 여기는 영이나 친절한 영을 품고 있습니까? 이것을 다른 사람들의 슬픔이나 고통과 관련된 내적 동정심이나 외적 행동으로 서술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드는 것이 이것을 설명하는 최선의 방법이겠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긍휼의 실례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여행 중에 그는 강도들의 손에 떨어졌던 불쌍한 사람을 보고 걸음을 멈추고 그가 누웠던 곳으로 다가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았지만 못 본 체 지나갔습니다. 그들이 동정이나 측은감을 느꼈는지는 모르나 그것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긍휼한 사람을 봅니다. 그는 강도에 희생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길 건너로 다가가 상처를 싸매고 그 사람을 데려가 양식과 숙소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측은감만을 느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큰 의욕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그 사태를 제거하려는 하나의 노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부터 모든 실례 중 최고의 실례로 넘어가야 합니다. 자비나 긍휼에 대한 완벽하고 으뜸가는 실례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일이며, 아들의 오심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하나님에게는 긍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련한 상태를 보셨고 고통을 보셨으며, 법을 위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동하게 움직인 것은 긍휼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오셨고 우리 상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속죄론의 필연성이 있게 된 것입니다. 공의와 긍휼, 혹은 긍휼과 진리 사이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둘은 서로 조화됩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는 이것을 매우 명확하게 표현했습니다. 즉 의의 아들의 탄생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그는 마침내 조상들에게 약속된 긍휼이 도래했음을 하나님께 감사했고, 메시야가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통하여' 오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이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시초부터 이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긍휼의 대략입니다. 죄의 결과로 가련한 상태에 빠져있는 사람을 내려다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일반적으로 죄와 관련되어 있는 은혜가 하나님께서 죄의 결과를 내려다보시게 되면 일반적인 것에서 떠나 특별한 긍휼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복된 생활과 행동에서 변함없이 나타나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이상으로 긍휼에 대한 대략적인 정의를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이 복의 실제 문제는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한 약속에 의해 생기게 됩니다. 이 복처럼 자주 오해를 받아온 팔복은 없다 하겠습니다. 개중에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려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해야만 하나님도 내게 긍휼하실 것이며, 내가 용서해야 나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내가 용서받는 조건은 내가 용서하는 것에 달려있다' 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은 이것을 두 개의 유사한 진술과 함께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첫째로 주기도문에는 이것과 유사한 잘 알려져 있는 진술이 있습니다. 곧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입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여러분이 용서하면 여러분도 용서를 받을 것이며, 여러분이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주기도를 기도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빚진 자들의 비유에 이와 비슷한 진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빚을 지고 있는 어떤 잔인한 종이 주인으로부터 청산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그 종은 갚을 돈이 없어 주인에게 빚을 면하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주인이 그를 긍휼히 여겨서 그가 빚진 것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께서 기억하다시피 이 사람은 밖으로 나가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에게 자기가 주인에게 탕감받은 빚과 비교하면 아주 사소한 빚을 갚으로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사람도 사정하여 이르기를 '조금만 더 참아주시면 꼭, 모든 빚을 갚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고, 그가 남은 한 닢까지 갚기까지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들이 이 모습을 보고 주인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주인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잔인하고 불의한 종을 불러 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아, 너의 행동에 비추어 나는 네게 한 말을 취소하겠다'고 하여 그가 마지막 한 닢까지 다 갚기까지 감옥에 들어가 있으라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들어 '이와 같이 너희도 진심으로 형제를 서로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다시 이렇게 말하여 할 것입니다. '자, 이 비유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이 같은 해석에 도달하게 된다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제게는 놀라운 것이 되어 버립니다. 첫째로 여러분과 제가 이런 용어들로 엄격히 심판받아야 한다면 우리의 어느 누구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며, 아무도 천국을 보지 못할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 만일 이 어구가 이처럼 법적으로 엄격히 풀이된다면 용서는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풀이하여 자신들을 정죄하는 것이 되는 줄을 알지도 못하고 이처럼 생각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더욱 놀랍습니다. 만일 이것이 이 복과 유사 어구에 대한 해석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신약 성경으로부터 은혜론을 전부 말소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도다'와 같은 말씀이나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든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다' 같은 영광스런 성구들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성구들은 모두 함께 물리쳐야 합니다. 무의미한 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성구들은 모두 사실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성구를 다른 성구들과 모순되게 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해야 하며' 교리들 사이에 서로 일치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 원칙을 본문에 적용할 때 본문의 해석은 완벽할 정도로 단순해집니다. 주님은 내가 참으로 회개할 때에 한해서 참으로 용서를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내가 처벌 이외에는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으며, 내가 용서를 받는다면 그것을 전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에 돌려야 하며 다른 아무것에도 돌려서는 안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저는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내가 참으로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서 내 위치를 인식하고 내가 이런 식으로만 용서받게 됨을 알게 되면 내게 죄를 범한 사람들을 반드시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려고 합니다. 저는 팔복의 복 하나하나가 앞의 복을 어떻게 계속하고 있는가를 매번 지적하는 수고를 해 오고 있습니다. 이 원칙이 여기보다 더 중요한 데가 없습니다. 이 복은 다른 모든 복들의 뒤를 잇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것을 이런 형태로 표현하겠습니다. '나는 심령이 가난하다. 나는 내게 의가 없음을 안다. 하나님과 그의 의에 직면할 때 나는 철저하게 무능함을 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나는 속에 있는 죄 때문에 애통한다. 나는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내 마음이 검은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란 외침이 무엇인지를 알며, 내 속에 있는 이 타락성을 제거하고자 의욕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나는 온유하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한 이 같은 바른 견해(평가)를 체험하게 된 이상,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는 말이 지나친 말일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그런데 나의 가장 큰 원수도 나의 가장 악한 점은 모르고 있다. 나야말로 참으로 가증한 자이다. 내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이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동경한다. 나는 이것을 만들 수 없으며, 다른 아무도 이것을 만들 수 없음을 알았다. 나는 하나님 앞에 나의 절망적 상태를 보았다. 나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해주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고 나에게 새 성품과 생명을 줄 이 의에 나는 주리고 목마르다. 그런데 나는 이 의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보았다. 나는 채움을 받았다. 나는 이 의를 모두 거저 주시는 선물로 받았다.
내가 이것을 모두 보았고 체험한 이상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온전히, 전적으로 변화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내가 전에 그들을 보던 식으로는 다시 보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을 지금 기독교인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을 속고있는 사람들로, 희생물로, 죄와 사탄과 세상 길의 노예로 봅니다. 나는 그들을 싫어하는 사람들로만 보게 되지 않고 불쌍히 여겨야 할 사람으로 보게 됩니다. 나는 그들을, 한 때는 나도 그러했던 것처럼 이 세상 신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던들 나도 아직 그들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나는 단순히 그들과 그들의 행하는 것만을 보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을 지옥과 사탄의 노예들로 보며 그들에 대한 나의 자세는 변화됩니다. 이 때문에 내가 그들에 대하여 긍휼할 수 있고 또는 긍휼해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나는 죄인과 죄인의 죄와를 구별합니다. 나는 죄의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할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여러분들에게 최고의 실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죄를 결코 지으신 일이 없고, 누구에게도 아무 해를 주지 않으시고, 오셔서 진리를 설교했고,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하려 오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보십시오. 십자가에 못박혀 고난을 받으신 주를 보십시오. 자기를 못박은 사람들을 바라보실 때 주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어째서입니까? '저들이 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아니라 사탄이었습니다. 그들은 희생물이었습니다. 그들이 죄의 통제와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이 저들의 한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여러분과 저는 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경지에 도달한 순교자 스데반을 보십시오. 스데반은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기를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죄 때문에 미쳤습니다. 그들은 내가 당신의 종인 줄을 모릅니다. 그들은 나의 주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 신에 의해 눈이 멀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들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라고 스데반은 말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겼고 그들을 긍휼이 여겼습니다.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모두 이런 상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죄의 노예된 무능한 모든 사람에 대하여 비애감을 느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가 이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악용하고 헐뜯을 때에도 이것이 기독교인의 위치임을 인정하고 있는지 저는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뒤에 가서 산상설교를 살펴보겠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이런 일을 체험해 보지 못했습니까? 그들의 얼굴 표정에서 그들이 느끼는 신랄함과 분노를 보여주는 사람들에 대하여 가련한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까? 그들은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이 무슨 일로 그렇게 성내는가 보십시오. 그들은 영이 온통 잘못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모든 것을 용서하신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다릅니다. 그들에 대하여 큰 비애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용서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체험했다면 이런 일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내가 과연 긍휼에 대하여 빚을 진 자임을 안다면, 과연 내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 때문에 기독교인이 된 것을 안다면 나에게 교만이 있을 수 없으며, 변명이 있을 수 없으며,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을 볼 때 비열한 것이 발견되거나 그것이 죄의 표현인 것을 알게 될 때 마음속에 큰 슬픔을 느껴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불가피하게,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주께서 여기서 말씀하고 계신것도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긍휼하다면 여러분이 이렇게 긍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긍휼을 갖고 있더라도 죄를 다시 지을 때마다 다시 긍휼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까닭은 여러분이 무엇을 했는지를 알게 될 때 여러분은 하나님께 돌아서서 '오, 하나님,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말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점을 기억하십시오. 죄를 지을 때 만일 여러분이 그 죄를 보고 회개하는 가운데 하나님께로 향하여, 무릎을 꿇고 여러분이 다른 어느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여러분은 기도에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멸시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이 표현한 대로 '내가 내 마음속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 하시리라'입니다. 여러분이 형제를 용서하지 않고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에 확신이 서지 않을 것이며, 여러분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의 이 복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이 이것입니다. 만일 그 불의하고 잔인한 종이 자기 수하에 있는 종을 용서하지 않으려 했다면 그는 용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며 그의 주인에 대한 그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용서의 한 가지 조건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무엇보다, 내가 하나님께 조금도 권리를 주장할 것이 없으며, 용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대면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위치를 참으로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반드시 긍휼해야 한다는 귀결에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용서의 영이 없다면 용서를 받았을 리가 없다고 말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엄숙하고, 심각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무서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이러하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긍휼과 함께 마음속에 임할 때 우리는 긍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를 받았는가 못 받았는가의 여부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가 아니 하는가로 선언하는 셈이 됩니다. 내가 용서를 받았다면 나는 용서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누구도 생래적으로 용서의 영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용서의 영을 갖고 있다면 여러분이 이 영을 받고 있는 데에는 오직 한 가지 이유가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해 주셨는가를 보게 되고, '나는 참으로 용서받은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참으로 용서한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미 긍휼을 얻었기 때문에 긍휼합니다. 세상을 계속해서 살아가노라면 죄에 빠져들게 마련입니다. 죄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이 긍휼이 필요하며 이것을 얻습니다.
우리의 최후를 기억합시다. 디모데 후서 1:16-18절에 바울이 로마에 포로 돼 있을 때 자기를 불쌍히 여겨서 방문한 오네시보로를 회상하며 그에 관한 글을 넣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날에 주께서 자비를 그에게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최후의 날에 우리는 모두 긍휼이 필요할 것입니다. 종말의 날에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서 몸으로 행한 행실의 기록을 직고할 때 이 긍휼이 필요할 것입니다. 분명히 그릇되고 사악한 일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날에 긍휼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들 속에 있다면, 주의 영이 우리들 속에 있고 우리가 긍휼하다면, 우리는 그 날에 긍휼을 받을 것입니다. 나로 긍휼히 여기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긍휼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즉 내가 긍휼하지 못하다면 여기에는 한 가지 설명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밖에 있으며, 아직 죄 속에 있으며, 용서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 자신을 살피도록 합시다. 저는 여러분이 어떤 유의 삶을 사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러 저러한 일을 하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집에 대하여 어떤 막연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이것을 묻습니다. 여러분은 긍휼합니까? 저 죄인들이 여러분에게 죄를 지어도 그 모든 죄인을 불쌍히 여깁니까? 여러분은 세상과 혈육과 마귀의 희생물이요 속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깁니까? 이것이 시금석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긍휼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