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제로원(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가상세계 탈출>의 줄거리:
최첨단 IT시대의 콤퓨터만 가상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은 이미 실락원 이후 줄곧 가상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생각으로 만들어 낸 이 가상세계로 인해 우리의 삶에 끊임없이 황폐함과 파멸이 찾아 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은 죽어서 천국 가기전에 이 땅 위에서 가상 세계를 탈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가상세계 탈출
(행24:1~9)
1.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2.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3.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4.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6.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7. (6하반-8상반 없음)
8.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가상세계 탈출>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1) 모 유명 전자회사가 개최한 재미있는 골프대회가 진행 중입니다. 자회사 제품 광고 취지로 열리는 이 대회에는 4명의 프로와 12명의 아마추어가 참여하여 네 개 팀으로 나뉘어 라운딩을 하는 프로암대회입니다. 프로골퍼 한명과 아마추어 골퍼 3명이 한 팀을 이루는 거지요. 그런데 아마추어 골퍼 12명을 선정하는 예선 과정이 재미있습니다. 전국에 있는 스크린 골프장을 통해 선정한다는 겁니다. 현재 전국에 186만 명의 스크린골프애호가들의 관심이 집중 되고 있다고 합니다. 스크린골프에서의 점수와 실제 필드에서의 실력을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글쎄요. 골프는 치지 않지만 사실 저도 무척 궁금합니다. 스크린 위에 띄어 놓은 가상골프장에서 익힌 솜씨가 실제 필드에서 어느 정도로 유효할까요?
호주 시드니에 살고 있는 매튜 쉐일은 보잉 747시뮬레이터를 집안에 두고 있답니다. 제작비용만 20만 달러가 소요되는 이 시뮬레이터에는 14개의 컴퓨터, 45개의 컴퓨터 프로그램이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장비들을 사용해서 제작된 쉐일의 항공기 조종 시뮬레이터는 전 세계 27,000 곳의 공항 이착륙을 정교하게 재현할 수 있는 성능을 가지고 있으며 특정 항공회사를 선택해 가상 비행을 즐길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인천공항이라고 입력하면 인천공항의 이착륙 활주로가 입체감 있게 비행기 창문에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컴퓨터 조작으로 만들어지는 가상세계의 활용이 삶에서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예로서, 탱크·항공기의 조종법 훈련, 의료계에서 수술 실습 등 다양합니다.
2) 그러나 좀 더 넓은 의미에서의 가상세계는 단지 컴퓨터조작으로만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현실이 아닌 가상세계의 창조는 컴퓨터는 고사하고 불에 달군 쇠붙이를 망치로 두드려서 만든 단순한 가재도구가 지금의 마이바흐 승용차만큼이나 귀하던 멀고 먼 옛적부터 모든 사람에 의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후 인류는 줄곧 가상세계를 창조하면서 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믿는 사람이 누리는 구원 얻은 삶은 죽어서 천당 가기에 앞서 반드시 이 땅에 사는 동안 가상세계를 탈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 됩니다. 골프스크린이 아닌데, 항공기 조종법 훈련을 위한 시뮬레이터의 모니터 화면도 아닌데 그 옛날부터 인간이 대체 어떤 가상세계를 만들며 살았다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 가상세계 창조의 가장 전형적인 한 예가 소개 되고 있습니다.
3) 총독 벨릭스가 있는 가이사랴의 총독부에 지금 사도 바울이 구금 되어있습니다. 이제 바울을 고소할 목적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몇몇 유대인들이 찾아 왔는데 더둘로라는 이름의 변호사를 앞세우고 왔습니다. 아마도 유대사회에서 통하던 당대 최고의 변호사였을 것이라 생각 됩니다. 이 추측의 정당성을 뒷받침 해주는 것이 바로 그의 바울을 고소하는 논고의 내용입니다. 일견 논고가 지나치게 단순해 보입니다. 사도바울의 범죄를 증명하기 위한 증빙자료도 치밀하게 준비된 논리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저 세 가지 방면으로 간단하게 죄목을 나열한 것으로 논고의 본론을 마무리합니다. 논고 자체 보다는 총독 벨릭스에게 훨씬 더 마음을 쓰는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역시 노련한 변호사입니다.
논고의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가는 곳마다 소요를 일으키는 전염병 같은 자라는 것이 첫째요. 둘째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성전을 더럽게 하려했다는 겁니다. 조금 허술한 것처럼 보이는 이 논고의 내용을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참으로 교묘한 의도가 눈에 들어옵니다. 아무리 봐도 소위 사도 바울의 범죄 사실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확하게 지금 재판장 자리에 앉아있는 총독 벨릭스에게 맞추어진 논고입니다. 로마 황제로부터 팔레스틴 지역을 다스리도록 명을 받고 온 총독의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어느 하나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사안들입니다.
첫째 고소 내용처럼 바울이 정말 가는 곳마다 소요를 일으키는 그런 자라면 제국내의 평화와 안정유지를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총독으로선 결코 좌시할 수 없는 통치의 방해물로 여겨짐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고발 내용도 절묘한 논고입니다. 우선 이 고발이 종교적인 것 같지만 아닙니다. 나사렛 이단이란 예수님을 이르는 말인데 반외세 반로마를 외치며 민족혼을 일깨워 로마에 대항하려 했던 메시아 운동의 미명아래 일어난 정치적 불온 세력이라는 뜻을 암시하도록 특별히 선별된 단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정치적 환경의 변화에 지극히 민감한 총독의 입장에서는 바울이라는 개인이 아니라 바울이 대표하는 반로마 집단 전체를 마주 대하게 되는 셈입니다.
세 번째 고발 내용도 역시 총독을 겨냥한 것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품에 안고 나가야 했기 때문에 특별히 종교에 대한 정책은 관대한 편이었습니다. 각 종교를 인정하고 종교 활동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던 겁니다. 그래서 총독의 입장은 되도록 유대인들의 종교와 율법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여하기를 원치 않았던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의 종교 법상 용납이 안 돼는 범죄인을 보호했다가는 유대인 전체와의 관계가 심히 곤란해질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입니다.
4) 노련한 변호사 더둘로는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에 대해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죄목이 모두 거짓이고 실제로 범죄 사실이 성립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변호사로서 그는 교묘하고 교활할지언정 충동적인 분노나 소모적인 증오 같은 감정에 휘말릴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 재판의 성패가 사도바울의 있지도 않은 범죄 사실을 증명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법적 경험과 지식으로 볼 때 바울의 행적에는 범죄로 확증 될 수 있는 어떤 요소도 없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벨릭스를 겨냥한 것입니다. 총독 벨릭스의 모든 정치적인 상황과 그의 심리상태까지도 고려해서 물샐틈없이 압박하고 몰아감으로 바울의 범죄를 총독의 입을 통해 성립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는 바울을 미워할 필요도 증오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유대지도자들에게 두둑한 의뢰비를 받아 챙기고 바울을 유죄 판결을 받게만 하면 되는 것이고 그 목적을 위해 냉정하게 전략을 짜고 실행하면 그뿐이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 그가 행한 법정 논고가 바로 가상세계의 창조였습니다. 이 겉으로 보기에 아주 엉성해 보이는 논고를 통해 재판장 벨릭스의 판단력을 가상세계로 밀어 넣으려 했던 것이지요. 아마추어 골퍼가 골프 스크린 앞에 서서 골프 클럽을 휘두르듯이, 파일럿 지원자가 항공기 시뮬레이터 안에 탑승하여 조종관을 작동하듯이, 총독 벨릭스의 판단력을 바울이라는 이름의 스크린 앞에 새우고, 뭐 다른 말로 바울이라는 항공기 시뮬레이터에 태워서 예상된 반응을 이끌어 내려 했던 것입니다. 스크린 상의 골프장이 실제 필드가 아니듯 항공기 시뮬레이터가 실제 조정석이 아니듯 변호사 더둘로가 묘사한 바울은 전혀 실제 바울은 아니었습니다. 총독의 유죄 판결을 끌어내기 위해 총독 개인의 처지와 성향에 교묘하게 맞추어진 의도되고 창작된 바울이었습니다. 벨릭스의 판단과 생각을 가상으로 만들어진 바울로 둘러싼 것입니다.
5) 변호사 더둘로의 논고를 대하면서 우리는 인간들의 두드러진 죄적 체질의 또 다른 측면을 보게 됩니다. 변호사 더둘로는 가상세계 창조에 있어 탁월한 고수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수들의 교활하게 의도된 가상세계가 아니라도 모든 인간은 가상세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가상세계의 형태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기 자신의 판단과 생각을 통해 무의식중에 만들어 내는 가상세계입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한 밤중에 타고 가던 배가 광포한 풍랑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곧 죽음에 삼킬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같은 조건 같은 상황의 이 북새통 속에서 깊은 잠에 들어 계셨습니다. 불가사의 한 일입니다. 바로 이 장면 속에서 지금 가상세계가 창조되고 있다는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풍랑이 일고 있는 밤바다 그 자체는 가상세계가 아닙니다. 그리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자체로는 현실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그냥 사실입니다. 가상세계의 창조는 언제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촉감을 통해 접하게 되는 하나의 사실이 우리들의 판단과 생각을 통과할 때 이루어집니다. 일엽편주에 몸을 의지하여 가다가 밤바다에서 만난 풍랑을 오감을 통해 느끼면서 마음이 판단합니다. 이 풍랑 속에 조금만 더 있다간 우리 모두 죽는다. 이 판단이 마음에 생겨남과 동시에 풍랑 이는 밤바다는 공포의 세계로 탄생합니다. 제자들이 만들어 낸 가상세계입니다. 실제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풍랑 속에서 공포에 질려 허둥대는 것이 지금 참 현실이 아니라 가상세계에 대한 반응임을 어떻게 확언할 있습니까? 깊이 잠드신 주님의 모습과 대비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주님은 어떻게 이 상황 속에서 그렇게 깊은 잠에 빠지실 수가 있었을까요? 현실세계에 들어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이 현실세계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풍랑 이는 밤바다에 대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과 판단 속에 참 세계, 현실세계가 존재합니다. 십자가에 도달할 때까지 예수님의 목숨이 위협을 받게 될 사건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 안에서 예수님은 머물고 계셨고 그 안에 계시면서 주어지는 모든 사실들을 대하며 사셨습니다. 광포한 풍랑에 금시라도 뒤집힐 듯 요동치는 일엽편주의 상황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판단과 생각 안에서 보면 얼마든지 깊고 단 잠을 이룰 수 있는 현실이라는 거지요. 직장의 풍랑 가정의 풍랑 사업상의 풍랑 인간관계의 풍랑 이 모든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의 판단 안에서 대하기 전에는 아직 그 자체로는 참 현실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의 할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섣불리 나의 판단과 생각을 가동시키지 말라는 점입니다. 영영히 가상세계에서 못 빠져나오고 맙니다. 가상세계 속에 머물 때 반드시 나타나는 일이 파멸입니다. 왜 자살합니까. 왜 애인과 헤어집니까? 모두 내 생각이 만들어 낸 가상세계 안에서 사업을 보고 애인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 이 땅 위에서 사는 동안에 근본적으로 이런 가상세계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가상의 나로부터 빠져 나오면 됩니다. 마치 변호사 더둘로가 총독 벨릭스의 판단을 오도하기 위해 창조해 낸 가상의 바울과 같은 나로부터 나오기만 하면 그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그것으로 가상의 세계를 창조할 염려는 없게 됩니다.
그럼 우리의 실제 나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판단 안에만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것이지요. 아직 이 땅 위에서 살고 있는 한 실제의 내 모습 그러니까 하나님의 판단 속에서의 내 모습은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잊는 모든 순간 실제의 나를 떠나 가상세계로 빠져들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이 십자가를 떠나지만 않아 내가 실제의 나로 머물러 있기만 하면 이제 내 삶을 황폐하게 하는 가상세계는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삶의 모든 풍랑의 순간에서조차도 푸른 초장이 주어짐을 느끼며 예수님처럼 풍랑 속 배 안에서도 깊은 잠에 빠질 수 있는 실제의 평강이 주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 위에서 어떤 상황을 만나도 내가 하나님의 판단 안에 있는 실제의 나로 있기만 하면 하늘의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서처럼 실제로 나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죄악의 결과로 생긴 가상세계 창조의 체질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이 땅에 살고 있는 나를 보고 계시는 진짜의 나를 찾음을 통하여, 완전히 극복되어 푸른 초장에서 평강 가운데 살 수 있는 삶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