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학설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날조한 식민사관의 하나인 타율성이론의 대표적 산물로서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과 궤를 같이한다.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태고부터 외세의 간섭과 영향을 받아 타율적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하면서 임나일본부설을 제기했는데, 쓰에마쓰[末松保和]는 이를 체계화한 바 있다. 그의 설에 의하면, 3세기 중엽에 이미 왜인은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즉 임나가야(任那加耶)를 점유하고 있었으며, 왜왕은 그 중계지를 통하여 삼한(三韓)을 통제했다. 또한 370년경에는 대규모 군대를 보내 백제와 신라에 편입되지 않은 대부분의 삼한 소국을 정복하여 직접 지배하고 양국을 간접 지배했으며, 임나의 지배체제를 이때에 성립시켰다. 왜는 임나의 지배범위를 계속 확대하여 북서쪽은 금강 유역, 북동쪽은 낙동강 상류유역까지 이르렀다. 임나는 400년 무렵에 광개토왕이 파견한 고구려군 5만 명의 침입을 받은 이래 쇠퇴를 거듭하다가 562년 신라의 대가야 정벌 때에 임나관가(任那官家)가 토멸됨으로써 멸망했다. 그뒤에도 왜는 임나 고지(故地)에 대한 연고권을 가져서 646년까지 임나에게 공납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는 〈니혼쇼키 日本書紀〉를 주된 사료로 이용했는데 이 책은 8세기초에 왜의 왕가(王家)가 자신들을 미화하기 위해 편찬한 사서로서 원사료(原史料) 편찬과정에서 많은 조작이 가해진 것이다.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들은 그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설화적인 서술들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 왜가 임나지역을 200년 동안이나 군사지배했다면, 그 지역에서 그들의 문화요소가 강하게 나타나야 하는데, 가야지역에 대한 고고학 발굴자료는 4세기 이전의 이 지역 문화요소가 연속적으로 계승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처럼 문헌사료의 해석과 고고학 유물의 분석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던 쓰에마쓰의 임나일본부설을 정설로 받아들였던 일본 학계는 1960년대 북한의 김석형이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분국설'을 제기하자, 큰 충격을 받아 1970년대 이후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주요한 연구경향은 〈니혼쇼키〉 사료의 신빙성 문제를 치밀하게 고증한 다음, 그에 입각하여 종래 임나일본부의 성립시기나 그 실체를 제한시켜 설명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이후 대부분의 일본인 연구자들은 〈니혼쇼키〉에 나오는 5세기 이전 사료의 신빙성을 부인함으로써 임나일본부의 성립시기를 6세기 전반 무렵으로 늦추어보고, 그 실체 또한 왜가 임나를 군사통치한 지배기관이라기 보다는 왜왕이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독점적으로 수용하려는 목적으로 임나에 파견한 사신(使臣) 또는 관인집단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임나일본부의 존재 이유도 왜 왕권의 지배 욕구보다는 백제·신라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가야세력의 노력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도 역시 왜가 설치한 임나일본부가 가야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음으로써 식민사관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한편 국내 학자들은 한동안 이에 대해 무시해오다가 최근에 이르러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국내 연구자들은 대세론(大勢論)에 근거하여 우선 〈니혼쇼키〉에 나오는 왜의 임나지배를 부정하고 대신 백제의 가야지배라는 해석을 시도했다. 따라서 임나일본부의 실체도 왜가 가야지역을 정벌하고 설치한 지배기관이 아니라 백제의 근초고왕이 369년에 가야지역을 정벌한 다음, 그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파견군사령부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연구경향은 가야지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다는 것을 밝힌 점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200년간에 걸쳐 가야가 백제의 지배를 받았다는 설명은 앞에서 언급한 고고학 유물의 분석결과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니혼쇼키〉에 보이는 임나일본부가 반백제적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으므로 그것을 백제의 가야지배기관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국내연구자들의 한계는 가야사 및 일본 고대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 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