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규 시집 『흔적』을 읽고
서정적 진실과 삶의 고뇌
이 재 창
김승규 시인의 이름은 오랜만에 대해보는 이름이다.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와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부문 당선과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요가 당선된 시조단의 대선배 시인이시다. 그러나 그동안 그의 많은 작품을 대할 수 없었다가 최근에 시집『흔적』을 접하고 나서 한동안 망설였다. 어쩌면 이렇게 훌륭한 선배님이 그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대부분의 작품이 데뷔 초반에 생산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작품 전반에서 드러나는 서정적 진실들은 그의 삶과 함께 여린 생명의 섬세한 핏줄처럼 곳곳에 흐르고 있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고뇌와 몸부림, 삶의 억척스런 집착이 서정적 진실과 그의 감성 속에 잘 녹아 있다. 또한 시적 삶과 영혼의 자화상 사이에서 고민하는 시인의 모습이 조용하고 평온하게 다가온다.
1960년대 이후 우리 사회를 이끌어 온 것은 대체로 성장의 신화로 출발했다. 경제성장을 통한 근대화와 그 성공적인 운영이 사회발전의 근본을 이루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도시인들의 생활은 극과 극을 오르내리는 처절한 운명을 지니며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무엇이든 도전해서 얻을 수 있는 기회와 사회적 성장의 기쁨을 느낀 시기이기도 했다. 그 속에 한 시인은 숨죽이고 서있지만은 않았다, 그가 바로 김승규 시인이다.
그의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서정적 진실은 그러한 도시인의 삶을 잘 묘사해내고 있다.
다시 그날일 수 없는 강가에 나와서면
무수한 바람으로 갈꽃은 부서지고
한빛인 그림자 속에 너는 잠겨 있구나.
매듭진 세월을 풀어 낚시를 드리운다.
거친 물살을 거슬러 찌르르 손악에 닿는
한때는 부신 지느러미 그 황홀턴 입질들.
강어귄 어귀대로 기슭은 기슭대로
흘러도 흘러도 하냥 그대로인 너를
이제야 실끝을 물고 네 곁에 와 눕는다.
-「江」전문
이 작품은 서정성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또한 강의 이미지를 통한 도시인의 삶을 갈꽃과 그림자, 낚시와 입질들의 매개로 적요하게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강은 우리들 모두나 시인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무대이다. 첫수에서는 세상의 거친 파도 앞에 서있는 자신을, 둘째수에서는 그 세상이 파도 속에 몸을 담고 살아가는 모습을, 셋째수에서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가면서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삶의 거친 세상사들을 묘사하면서도 남성적인 우직한 어감이나 호사로운 감정의 격동을 노출시키지 않고 이렇게 잔잔하게, 그리고 평온할 만큼 정적인 그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요즘 세상을 살자면 흑싸리끗에라도 미쳐야지
아니면 그 뒷전 개평 뜯는 재미나마 붙이던가
그것도 영 시들해지면 낮술이라도 들이킬 일
나이 서른을 넘기고도 미칠 일 하나 못 붙잡고
뿔뿔이 달아난 바람에 끈마저 끊어진 연
아직은 이 미칠 일로도 미쳐지지 않는다.
-「近況」전문
이 작품은 아마 김승규 시인이 30대 초반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 나이에 뚜렷한 직업이 없이 헤매던 시절이 있던 사람은 쉽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그 나이뿐만 아니라 현재의 IMF 시대를 건너가고 있는 직장인은 더더욱 생생하게 가슴속에 사무치는 작품이다. 그리고 하고 있는 일이 자기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경우는 더더욱 서글픈 일이다. 일은 하되 만족하지 못하는 직업의 선택에서 우리는 권태와 좌절을 쉽게 맛보게 된다.
앞의 작품「강」이 삶의 묘사에 있어서 정적이고 서정적이라면 이 작품은 좀더 현실적이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한가지 흑싸리끗에라도 미쳐야 한다는 것과 아니면 그 반대로 개평 뜯는 일에라도 재미를 붙이며 사는 것도 삶의 한 방법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낮술이라도 들이키는 재미가 있어야 세상사는 재미가 있다는 것. 그만큼 삶의 고뇌는 그의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해저문 거리를 돌아 蠶室로 돌아오면
강바람에 마른 갈대 우우우 몸으로 울고
돌박이 가난을 끼고 돌아누운 아내여.
백 번을 더 기운들 다 못 가릴 그 가난을
한 곡조 거문고로 온 고을 살찌우고
그 여운 다시 千年을 이으시는 先生이여.
끝끝내 끊지 못할 아편 같은 이 젓대를
어느 날 막힌 구멍 하나하나 트이려나
이 밤도 꿈길에 나앉아 마른 입술을 축인다.
-「방아타령」전문
앞의 작품 「근황」이 현실적인 소재를 택해서 쓴 작품이라면「방아타령」은 역사적인 인물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러나 역사적 인물의 사실을 그대로 작품화 한 것이 아니라 당시대의 끈적끈적한 삶의 어두운 부분을 대비시켜 형상화 했다.
첫째수의 귀가길에서 강바람에 마른 갈대 우우우 몸으로 우는 자신을 발견하며 집에 있는 돌박이의 자식과 가난한 아내를 떠올리는 모습들이 쓸쓸하고 절실하다. 잠실과 강바람, 마른갈대, 돌박이, 가난한 아내의 모습들이 한데 어우러져 우우우 온몸으로 우는 강바람에 더욱더 삶의 지친 모습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둘째수에서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드러난다. 그 끝없는 천년의 가난도 한 곡조 거문고로 온 고을을 살찌우는 삶의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서는 극복의지다. 어느날엔가 막힌 구멍 하나하나 트일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긴장감으로 시인은 마음은 불안하지만 꿈길에서라도 하고자 하는 일 하나하나 성취되기를 기대한다.
흔적은 남기는 것 아니라 가고 나면 남는 것
모아서 어쩌자는 지 부질없는 허울들을
물 위에 잠시 맴돌다 가라앉을 뼛가루.
가지런히 누워 있는 측은한 저 얼굴들
뙤약볕 비바람 속 싱싱한 저 숨소리
그렇다 살아온 내 날들이 헛것만은 아닌 것을
이제 저것들 다 제 갈 길 가게 하고
뒷짐진 빈 들녘 그 너머와 마주서다
바람이 마른 풀잎을 수런수런 흔들고 있는
넋들도 간절하면 다시 눈짓 마주칠까
어딘가 떠돌고 있을 영글다 만 우리사랑
외진 봄 두견이 울음으로나 깨어날 수 있을지.
-「흔적을 모으며」전문
이 작품은 그의 문학적 삶과 생활인으로서의 삶이 복합적으로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회의와 포기, 희망 그리고 초연하게 대처하는 한 시인의 모습을 본다. 삶과 문학의 흔적을 위한 부질없는 허울을 위한 회의감, 그러나 살아온 날들이 헛것만은 아니기를 기대하는 싱싱한 삶과 문학적 희망, 어딘가 떠돌고 있을 영글다 만 우리사랑이 다시 봄날 두견 울음으로 깨어나기를 바라는 그의 삶의 자세가 한 폭의 서정성과 조화롭게 어울려 있다.
문학적 삶과 생활인으로서의 삶에 고민하는 그의 시적 자세가 이제 나이가 들어가면서 새롭게 변모하고 있는 듯하다. 흔적은 남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남는 것이라고 항변하는 그의 소극적 문학적 자세가 이젠 외진 문학의 틀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찾고자 하는 의지가 역력하게 느껴진다.
그의 작품 곳곳에 나타나는 삶에 대한 서정적 진실들이 독자들에게 절실하게 와 닿고 감동을 주는 것은 꾸밈이 없는 진솔함들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야 그의 작품들을 대하면서 이제까지 칩거한 선배시인의 모습이 많은 궁금증을 들게 한다. 하지만 시인은 작품으로 평가받을 수 밖에 없다. 그의 작품처럼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 것, 스스로 남아 온 세계를 울리게 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단시조 한 편을 음미하며 이 글을 끝맺는다.
육신을 벗을 수 있다면 칙칙한 네 욕망도
그 아침 몸을 푼 원효 스님의 갈증처럼
저렇듯 빛으로 깨어나 영롱할 수 있는 것
-「이슬」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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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창 시인은 /
1959년 광주광역시 학동에서 태어나
1977년 고교 2학년 재학중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최종심에 오름.
1978년 《시조문학》에 「옛 동산에 올라」로 1회 추천과
1979년 《시조문학》에 「墨畵를 옆에 두고」로 2회 천료,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거울論」 당선,
1991년 《심상》 신인상 시 「年代記的 몽타주 · 2」 외 4편 당선돼 문단 활동.
문학평론집 『아름다운 고뇌』 (시와사람, 1999),
창비 6인 시조집 『갈잎 흔드는 여섯 악장 칸타타』 (창작과비평사, 창비시선 189번, 윤금초 편저, 1999),
시조집 『거울論』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태학사, 2001),
시집 『달빛 누드』 (시선사, 2005) 등이 있다.
목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10여년간 ‘시조창작’을 강의함.
현재, 濟州와 光州에 거주.
* ‘5세대’ 사화집 『그리움이 터져 아픔이 터져』(나남, 1987) 출간
* ‘5세대’ 사화집 『노래로 노래 해다오』(열음사, 1989) 출간
* ‘토풍시’ 사화집 『다시, 화양연화』(이미지북, 2023) 출간
* <이재창교수 작명역학 연구원>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sijosi59
* <이재창교수 동양학 사관학교> (다음 카페 http://cafe.daum.net/tongma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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