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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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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스크랩 약봉 김극일
혜명 추천 0 조회 45 13.06.26 04: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성명 : 김극일(金克一) , 1522년 ~ 1585년
본관 : 의성(義城)
: 백순(伯純)
: 약봉(藥峯)
출생지 : 안동(安東) 천전(川前)
출신지 : 안동(安東)
분묘지 : 안동(安東) 비리곡(飛鯉谷)
입사경로 : 1546년(명종 1) 식년시(式年試) 급제
내관직 :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형조정랑(刑曹正郞), 예조정랑(禮曹正郞),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외관직 : 홍원현감(洪原縣監), 청홍도도사(淸洪道都事),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
증직및기타 :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
신동으로 불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기상이 남달랐으며, 글을 배운 뒤로는 성현들의 경구를 줄줄 외워 사람들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명리를 탐하지 않고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청하다
뛰어난 재주와 탁월한 식견이 있었지만 명리에는 욕심이 없었다.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했던 관계로 벼슬을 하더라도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을 주로 희망했는데, 이는 그 임지가 주로 안동과 가까운 예천, 평해, 밀양, 성주 등이었던 사실로부터도 충분히 유추된다.
지방관 재직 시 유학의 기풍을 진작시키다
평생 동안 모두 다섯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부임하는 곳마다 유학의 기풍을 진작시키고 후학을 양성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또한 직무를 처리할 때에도 백성들을 성실하게 대하고 공명·청렴하여 당대의 수령의 으뜸으로 꼽혔다. 이런 까닭에 당시 주변사람들로부터 “중국 송나라에 염계(濂溪: 周惇?) 선생이라는 분이 있어 지방 수령으로 부임하는 것을 편히 받아들이면서 도를 실천하기를 즐겨했는데, 지금 선생이 그와 비슷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한 번은 성주목사로 있을 때 도산으로 가 스승인 이황을 만난 일이 있는데, 이 때 이황이 『계몽익전서(啓蒙翼傳書)』라는 책을 문인들에게 정서(正書)하게 하여 역동서원에 갖다 두게 한 일이 있었다. 당시 이를 보고 김극일은 그런 귀중한 책은 한 곳에 두기보다는 널리 유포하여 학문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청하여 허락을 받고는 곧 성주에서 판각을 하였는데, 이황이 특별히 서문을 써 보내주기도 하였다.

또 밀양부사로 재직할 때는 그 고을의 유명한 유학자였던 송계(松溪) 신계함(申季?)이 살던 곳을 찾아가 몸소 비명을 지어 유허비를 세웠고, 용암(龍巖) 박운(朴雲)이라는 사람의 효행을 기리는 글을 지어 선양하기도 하였다. 이 글들은 문집에 수록되어 전한다.

가족이야기

: 김예범(金禮範)
생부 : 김진(金璡)
: 여흥민씨(驪興閔氏) 민세경(閔世卿)의 딸
형제 : 김수일(金守一), 김명일(金明一), 김성일(金誠一), 김복일(金復一)
아버지를 도와 의성김씨 내앞파를 중흥시키다
의성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의성군(義城君) 석(錫)을 시조로 한다. 이 의성김씨가 안동에 터를 잡은 것은 시조로부터 9대손이 되는 김거두(金居斗)와 그 아들 천(?)이 풍산현으로 낙향하면서부터이다.
그 뒤 김천의 증손인 만근(萬謹)이 처가가 있는 임하(臨河)의 이웃인 내앞으로 이주하면서 의성김씨 내앞파 500년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 내앞파는 만근의 손자대에 와서 실질적인 증흥기를 맞이하는데, 그 주역이 김극일의 아버지인 김진이다.
김진은 청운의 뜻을 버리고 일찍부터 고향에 정착하여 후학을 기르고 고장에 면학 기풍을 진작시키는 한편, 자식 교육을 엄격히 하여 다섯 아들을 모두 과거에 합격시키고 동기 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는 등 집안을 일으켜 지역 사회에서 신망을 얻었는데, 김극일은 맏이로서 바로 이런 아버지를 도와 의성김씨 내앞파의 지위를 굳건히 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형제들과 함께 김씨오룡(金氏五龍)으로 불리다
형제가 모두 다섯이다.
동생들은 둘째부터 차례로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운암(雲巖) 김명일(金明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이다.
김극일을 비롯하여 이들 다섯 형제는 모두 대소과에 올라 ‘김씨오룡(金氏五龍)’이라 불렸고, 본가는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고 칭해졌다.
8남매의 맏이로서 집안을 이끌다
아래로 남동생 넷과 여동생 셋을 두었는데, 집안의 맏이로서 동생들을 잘 이끌었다.

1546년 문과에 급제해 교서관의 정자 벼슬을 하던 중 모친인 여흥민씨가 죽었을 때 바로 아래 동생인 수일은 19살, 명일은 13살, 성일은 9살 그리고 막내인 복일은 6살이었고, 누이동생 셋은 모두 명일과 성일 사이의 나이였다.
김극일은 집으로 돌아와 이런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삼년상을 이끌었는데, 어린 동생들이 형을 따라 한결같이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법도에 맞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또 지방관으로 있을 때도 동생들을 임지로 데리고 가서 뒷바라지를 하였다. 홍원현감으로 있을 때 한 번은 관아에 불이나 모든 사람들이 달려가 불을 끄느라고 정신이 없던 상황에서도 넷째인 성일이 책꾸러미를 짊어지고 손에 전패(殿牌:임금을 상징하는 나무로 만든 패)를 받들고 멀리 피해 있는 것을 보고, 허허 웃으며 성일은 반드시 학문을 독실하게 하여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기뻐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후사가 없어 조카를 양자로 들이다
부인은 가선대부(嘉善大夫)·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지낸 수안이씨(遂安李氏) 이위(李?)의 딸이다. 슬하에 아들이 없어 동생인 김수일의 아들 김철(金澈)을 양자로 삼았다.
딸은 모두 넷을 두었는데, 첫째는 군수 조청(趙靖)에게 시집을 갔고, 둘째는 현감 유기(柳?)에게, 셋째는 생원 이윤려(李胤呂), 넷째는 진사 장여화(張汝華)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손자는 숭정처사(崇禎處士)로 유명한 표은(瓢隱) 김시온(金是?)이다.

학문이야기

스승 : 이황(李滉)
향사 : 사빈서원(泗濱書院)
학파 : 퇴계 학파
교유인물
기대승(奇大升), 황준량(黃俊良), 권호문(權好文), 조목(趙穆)
이황에게 배우다
부친의 권유로 이황에게 가서 공부를 하였다. 학업에 뛰어난 성취를 보여 스승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도산서원에 가기 전에는 부친의 훈도로 집에서 글공부를 하였고, 진전이 있자 순흥의 소수서원에 가서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산림파 문학에 일가를 이루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특히 시에 발군의 자질을 보여 당대 시문학의 종장으로 추앙을 받을 정도였다. 그의 시는 일상사나 사회적 현상보다는 대상을 관조하고 자연을 음미하는 이른바 산림파 문학의 색채가 강하다. 다리를 건너는 사람과 말이 물에 비친 모습과 봉우리를 솟구쳐 날아오르는 매의 기상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시들 속에서 그런 시 작풍을 엿볼 수 있다.

- 능파교(凌波橋)
흘러내리는 물굽이는 흰 비단을 두른 듯 / 白練紫回下
가로지른 다리는 청룡이 꿈틀거리는 듯 / 靑龍夭橋橫
말은 구름을 뚫고 지나가고 / 馬穿雲離過
사람은 거울 속을 거꾸로 가네 / 人倒鏡中行

- 나는 새매를 보다(見飛?)
뾰족한 봉우리를 날아오르는 새매 / 峯尖見飛?
두 날개 칼날처럼 날카롭구나 / 兩翅利霜刀
비수같이 날아 은하수 위로 솟구치니 / 翩翩雲漢上
기세는 가을 기운 같이 높도다 / 勢與秋氣高

 

문집명
『약봉선생문집(藥峰先生文集)』
『약봉선생문집(藥峰先生文集)』
많은 저술이 있었으나 1587년 겨울에 발생한 종가의 화재로 대부분의 저술들이 소실되고, 지금은 『약봉선생문집(藥峰先生文集)』 2책만 전한다. 『약봉선생문집(藥峰先生文集)』은 청계 김진과 그의 다섯 아들의 문집을 모아 의성김씨 문중에서 편집하여 발간한 『연방세고(聯芳世稿)』 속에 수록되어 있다.

『연방세고(聯芳世稿)』 권2부터 권4까지가 『약봉집』이다. 문장에 뛰어났다는 평가에 걸맞게 대부분이 시이며, 권4의 말미에 가야 부(賦) 1편, 서(書) 1편, 제문(祭文) 1편, 비문(碑文) 3편 그리고 부록으로 묘갈명(墓碣銘)이 수록되어 있다. 묘갈명은 김세호(金世鎬)가 지은 것이다.

시는 모두 242제(題)인데, 주로 일상의 가정생활에서부터 관직 생활을 하면서 느낀 소회, 벗들과의 교유 내용과 자신이 감상한 명승고적에 대한 묘사 등이 주류를 이룬다. 또 귀봉(龜峯)과 학봉(鶴峯) 등 아우들에게 주는 시들도 다수 들어 있어 형제간의 우애를 엿보게 하며, 이황에게 보내는 시들 속에는 스승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가득 차 있다.

이밖에 기대승(奇大升), 황준량(黃俊良), 권호문(權好文), 조목(趙穆) 등 퇴계 문하의 동문들과 교유한 시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사료적인 측면에서 초기 퇴계 학파의 정서를 살펴보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비문 가운데 「용암선생박공효자비(龍巖先生朴公孝子碑)」와 「신송계비각명(申松溪碑閣銘)」은 밀양부사로 있을 때 유학의 기풍을 진작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고을 유학자들의 공덕을 발굴·선양하기 위해 지은 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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