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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진목사/아하수에로의 대 잔치 (에 1:1-8)
주요내용:구원의 천국잔치론
(요약)
아하수에로는 왕의 왕되신 그리스도의 예표요, 관리들을 위한 비밀잔치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객관적 구속사요, 백성들을 위한 공개적인 대 잔치는 택한 자를 그 구원에 동참케 하시는 주관적 구속사의 예표이다. 그가 꾸민 삼 색의 휘장은 예수님께 나온 자에게 약속하신 의와 영생과 영광이요, 금과 은의 걸상은 자녀와 구원의 자리에 앉히심을, 땅을 귀한 돌로 포장함은 저주까지도 관계없게 하실 것을, 금 잔으로 마시는 한 없는 어주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끝없는 은혜의 성령을 가리킨다.
(설명)
☆ 아하수에로의 잔치 (구원의 천국잔치의 예표)
① 아하수에로('왕'의 의미) - 만왕의 왕
② 127도(종족별) -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심
③ 인도로 구스까지(정복희망 및 정복지) - 하늘과 땅의 권세
④ 수산궁(겨울궁전) - 이 세상 나라
⑤ 삼 년에(즉위한지) - 공생애의 예표
⑥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려함 - 부활 승천
⑦ 일 백 팔십일(관리들을 위한 비밀잔치) - 객관적 구속사
⑧ 대소 인민(백성들을 위한 공개잔치) - 주관적 구속사
☆ 특별한 배려 (구원의 내용)
① 백색, 녹색, 청색 휘장을 자색 가는 베 줄로 - 성결과 영생과 영광
② 금 자리 - 하나님 자녀 신분
③ 은 자리 - 구원의 자리
④ 귀한 돌로 깔음 - 저주까지 담당
⑤ 금 잔 - 믿음으로 마음껏 누리게 하심
(강 해)
오늘부터 몇 차례에 걸쳐서 에스더서를 강해하도록 하겠습니다. 간단히 서론을 말씀드리면 에스더서의 인간 기자는 불확실하나 오늘날까지 정경으로 인정됨을 볼 때 성령께서 원저자이시고, 모두 10장으로 되어 있으며, 기록연대는 B.C 465년 이후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서 귀환한 후에 일부 남아 있던 때이고, 역사적인 배경 역시 그렇게 남아 있던 유다인들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본서가 보여주는 객관적 구속사는 하만의 대적과 모르드게의 성공을 통해 그리스도 십자가의 승리를, 그리고 주관적 구속사로는 에스더와 모르드게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우리를 구원해 주실 뿐 아니라 신앙의 연단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을 만들어 가시는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스더서는 책명은 에스더서이지만 본서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은 모르드개입니다. 에스더가 중생한 영혼이나 신앙의 예표라면 모르드개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의 그리스도적인 예표로서는 장대에 달리게 되었으나 하만이 대신 달리는 부분이 그 절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령의 예표로는 에스더를 길러 왕후로 준비시킨 것이나 에스더와 함께 왕을 감동시켜 하만을 제거하고 그 민족을 멸하고 파사 제국을 통치하에 두는 그러니까 성령의 소명 중생 성결 성화 주권 영화 하나님 나라 등의 중요한 예표를 제공함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은 1:1-8의 내용으로 아하수에로가 베푼 대 잔치에 대한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데 이 잔치는 역사 속에서도 다시없는 전무후무한 잔치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즉위한지 3년만에 그 기념으로 180일 동안 온 나라 관리들과 군인들을 대상으로 잔치를 베풀고 또 수산 성민들을 위하여 7일 동안 잔치를 베풀되 왕후는 왕후대로 부녀들을 위하여 베푼 큰 잔치였습니다.
이 거대하고 화려한 잔치는 과연 구속사적 관점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답부터 말씀드리면 이 잔치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나라 천국잔치의 예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원을 천국잔치에 비유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천국잔치를 베풀어 놓으시고 지금 죄인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럼, 천국잔치는 과연 어떤 잔치일까요?
1. 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잔치입니다.
1절에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된 것이니" 했습니다.
여기 아하수에로란 '왕'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하수에로 왕이란 왕을 중복하여 부르는 왕의 왕이란 의미입니다. 그는 당시 그 지역을 모두 지배한 왕의 왕이었습니다.
그럼 우리의 왕 중의 왕은 누구이십니까? 계19:16에 예수님을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아하수에로는 하나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이 왕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니 이 잔치에 참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감히 어떤 분의 잔치라고 거절합니까?
눅 22장을 보면 어느 임금이 혼인잔치를 베풀었는데 사람들이 오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종들을 해코자 하다가 왕이 보낸 군대에 의해 진멸 당하고 동네까지 불사름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복음 사역만큼은 직접이든 간접이든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신약 성경은 저주를 금하지만 저주가 딱 몇 번 나오고 있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복음을 방해할 때입니다. 그 만큼 왕의 잔치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2.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잔치입니다.
1절 하 반절에 "일 백 이십 칠 도를 치리하는 왕이라" 했습니다.
본래 메대 파사는 부왕인 다리오가 공물의 양에 따라 구분시킨 20개의 행정구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하수에로는 그 구역을 재조정하여 제국을 종족별로 127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한 것도 모두 예표가 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아하수에로는 모든 종족을 거느린 왕입니다.
이 얼마나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이 구절의 주동사가 얼른 보면 "가르쳐 지키게 하라"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원문에 더 가까운 번역이 되려면 모든 족속으로 가서 세례를 주고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고 가르치면서 제자 삼으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제자 삼아라"가 주동사입니다. 이처럼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분부하신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나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민족이라고 하셨을까요? 여기에 선교학적인 여러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타민족이 복음을 전해줄 수는 있어도 복음화는 그 민족이라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혹은 민족이나 가족 중 한 사람의 모범이 주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아버지가 믿으면 다 믿게 됩니다. 왕이 믿으면 그 국가가 다 믿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의 왕 앞에 서려고 했던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그 소망은 이루어져서 콘스탄틴 대제 때 로마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가장 결속이 강한 구심점인 민족주의가 와해됨으로 진정한 예수 안에서 화해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 삼으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주의 일군들을 육성하라는 분부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3년 반 동안 대중 사역과 아울러 가장 역점적인 일이 제자 삼으심이었습니다. 일군이 많으면 부흥이 옵니다. 그래서 교회는 여러 방향의 일하는 일군을 많이 양성해 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하여, 찬양을 통하여, 치유를 통하여, 교육을 통하여, 기술을 통하여, 봉사를 통하여, 여러 방향에서 활동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시행착오는 한 종류의 일군을 너무 많이 양성해 냈고 다른 특기 가진 일군들은 설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민족이나 부족이 예수를 모른다면 신학교를 세워 여러 방향의 제자를 길러 내야 합니다.
3. 이 잔치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잔치입니다.
1절 하 반절에 "아하수에로는 인도로 구스까지" 했습니다.
그 당시 메대 파사는 바벨론의 지역은 물론이고 인도와 구스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도는 전 인도 지역이 아니라 부친 다리오에 의해서 정복된 인도 북부 파키스탄 지역으로 인더스강 서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도는 아하수에로가 모두 정복하고 싶었던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입장에서 본다면 인도는 소망의 나라 천국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거기다 구스는 종종 애굽에 복속되기도 했던 나라로 세상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이 잔치를 베푼 아하수에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이 하늘과 땅의 두 권세를 가지셨으니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영육 간에 온전케 하실 수 있습니다. 영혼의 문제가 있습니까? 육신의 문제가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 영혼만 복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육신도 복 주시길 원하십니다. 이 두 면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문자 그대로 육으로도 봐야 하지만 영으로도 봐야 합니다. 가령 잠언을 통해서 지혜를 얻어 세상에서도 성공자가 되고 거기서 신령한 눈을 떠 참된 신앙생활의 성공자도 되어야 합니다. 혹은 아가서를 통해서 가정의 행복도 회복하고 나아가 예수 안에서 깊은 영성도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강한 권세로 이렇게 영육간 안팎으로 온전히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4. 이 하나님 나라 구원 잔치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2절에 "당시에 아하수에로 왕이 수산 궁에서 즉위하고" 했습니다.
당시 파사 나라는 궁전이 메디아와 수산 두 곳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산궁은 겨울 궁전입니다. 그런데 아하수에로가 왕으로 즉위한 곳이 수산성이었습니다. 그래서 파사왕은 추운 계절이 오면 이 수산궁에 내려와서 국사를 집행했습니다. 그래서 수산성은 겨울궁전이라 일컫습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겨울나라가 어디입니까? 이 죄악된 세상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영원하신 왕이시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죄악 세상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메시야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왕이란 뜻입니다. 이 때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으로서 이런 세상에 오셔서 겨울 나라를 봄 동산의 나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좁게는 이 겨울 나라가 죄인의 심령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만 왕으로 모시면 겨울 같은 심령 역시 봄으로 변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5.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3년간 천국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
3절에 "위에 있은 지 삼 년에" 했습니다.
그 때가 아하수에로가 즉위한지 제 3년이라고 했습니다. 이 3년이라는 기간은 아하수에로 왕의 정권이 완전히 안정된 때를 가리킵니다. 이 왕은 에스더서에 나타나 있지만 아주 강력한 왕입니다. 북한 김정일도 아직까지도 김일성 유훈 통치를 하고 있지요? 그런데 지금은 유훈이 아니어도 될 만큼 완전한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아하수에로도 이 강력한 왕권이 수립되기까지 3년이 걸렸습니다.
여기 3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메시야 즉 왕으로 나타나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천국복음을 증거하시기를 약 3년간 하셨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자들마저 몰랐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후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때야 비로소 제자들의 입에서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는 답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는 확신이 수립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의 왕이시라는 확신도 수립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맘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래야 하나님 말씀대로 살게 됩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예수 구원은 아는데 그리스도 나의 왕인 잘 모릅니다. 왕이 어떤 존재인지 아십니까? 왕이 지나가면 백성들은 모두 땅에 엎드려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처벌받아요. 이처럼 철저한 하나님 주권주의로 겸손해야 합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잔치입니다. 그러나 그 때 행복이 옵니다. 그래서 3년 반 동안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예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구름 떼처럼 몰려왔습니다.
6.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4절에 "왕이 여러 날 곧 일백팔십일 동안에 그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제 3년에 아하수에로 왕은 잔치를 베풉니다. 잔치의 이유는 4절대로 그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자기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살리사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신 그 권세와 영광의 막강하신 때가 언제였습니까? 그것은 공생애 3년 후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나님 우편에 오르시므로 그의 영원한 영광과 권세를 드러내셨습니다.
7.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은 먼저는 객관적 구속사역입니다.
다시 4절에 "왕이 여러 날 곧 일 백 팔십일 동안에 그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 했습니다.
아하수에로가 베푼 잔치는 크게 두 종류인데 하나는 권세자들인 신하들을 위한 잔치요 다른 하나는 백성들을 위한 잔치입니다. 먼저 그가 베푼 180일간의 잔치가 보여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180일 동안 그 모든 127도의 도지사 즉 방백과 문무백관 즉 자기 신하들과 메대 파사의 모든 장수들과 각도의 귀족과 행정관리들을 모아서 잔치를 베풉니다. 그런데 이렇게 6개월 동안 잔치를 해야 했던 것은 그 만큼 나라가 방대하고 국가업무의 공백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순차적인 잔치가 불가피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잔치를 해도 치안과 행정과 안보적인 공백을 나타내 보이지 않기 위하여 극비리에 이루어졌던 보이지 않은 잔치였습니다.
또 거기에 부름 받은 그들은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통치력 신장을 위한 권세적인 잔치로 한 사람 한 사람 왕의 호의를 느끼도록 하여 친분관계를 만들었습니다. 즉 이 잔치는 비밀잔치요 보이지 않은 잔치요 권세적인 잔치요 택한 자들의 잔치라는 이 잔치의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 특징처럼 우리도 알지 못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들을 구체적으로 선택하셨고 2000년 전에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사 그 안에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복 주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확보를 위한 권세적으로는 이미 다 이루어 놓은 사건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 그래서 롬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그런데 왜 180일입니까? 180일은 당시 개념으로는 반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3년 반을 계시록에서는 1260일 그러니까 1년을 360일로 보았습니다. 반년이란 이제 추수만 남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직 예수를 알기 전에 이미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복음이 완성되고 준비된 것입니다. 그래서 롬8:30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특수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입니다. 즉 우리가 아직 나기도 전에 예수 믿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성취시켜 준비하셨다는 교훈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실재만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절반입니다.
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그 복음을 죄인들에게 적용시키시므로 주관적 구속사역을 성취하고 계십니다.
5절에 "이 날이 다하매 왕이 또 도성 수산 대소 인민을 위하여 왕궁 후원 뜰에서 칠일 동안 잔치를 베풀새" 라고 말씀합니다.
이 잔치는 제 2차 잔치로서 수산성에 있는 백성들을 위한 잔치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온 백성들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메대 파사 온 백성들을 위한 잔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의 이 잔치가 왕명으로 수산성이 선포될 때 사람들은 입에서 입을 통하여 그 좋은 소식을 전하고 전해서 모두 궁궐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잔치는 이제 택하신 백성들을 성령으로 소명하사 예수 믿어 구원받도록 성도들의 전도를 통하여 부르시는 천국잔치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도성 수산의 대소 인민이라고 했습니다. 대소 인민이란 어른부터 어린이까지를 가리킵니다. 즉 이 말씀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면 누구든지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 사상은 요3:16에도 나타나 있고 행2:39에도 나타납니다. 요3:16에는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라고 했고, 행2:39에서는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잔치한 7일의 7은 하나님의 사역의 완전수로서 7은 대개 성령의 사역을 암시합니다. 즉 우리를 부르셔서 온전케 하시는 일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역사를 성령께서 죄인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하사 부르시고 중생시키시고 성화 영화시켜 나가심을 주관적 구속사라고 부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장차 육체의 죽음에서까지 구원하셔서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은 구속을 적용하시는 하나님으로 이것을 흔히 주관적 구속사라고 부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지금 이 시대에도 택하신 자기 백성들을 모두 천국잔치 하나님의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도록 부르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9. 그럼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6절에 "백색, 녹색, 청색 휘장을 자색 가는 베 줄로 대리석 기둥 은 고리에 매고" 라고 했습니다.
즉 아하수에로는 자기 궁궐에 3색 휘장을 위에 쳐서 찬란하게 잔치석을 꾸몄습니다. 그것은 잔치집의 분위기 고조를 위함만이 아니라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그늘을 제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왕은 이 삼색 나부끼는 휘장 아래 자기 백성들을 모아 잔치를 베풉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백색 녹색 청색 휘장이 나부끼는 휘장 아래 모여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휘장이란 집결 소속 위치 사랑 힘을 북 돋우거나 그 아래 모임의 어떤 특성을 알리는 상징물로 단순한 그늘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삼색 휘장의 백색은 성결의 색이요, 녹색은 생명의 색이요, 청색은 영광의 색입니다. 이것은 즉 예수의 그늘 아래 모이기만 하면 누구든지 영원한 죄사함과 거룩과 영생과 영원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께 모이게 하시고 또 우리가 모이고 있습니까? 바로 그것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 3색 휘장을 설치한 방법을 보십시오. 자색의 가는 베줄로 대리석 기둥 은고리에 매었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이토록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을까요? 모두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색 베줄이란 붉은 줄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상징합니다. 거기에 붉음은 왕의 색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공로와 그의 강력한 왕권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이 줄을 대리석 기둥 은 고리에 매었는데 은은 구속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구속 은총의 영원성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잔치를 베풀어 놓으시고 영원한 구원의 은총 아래로 불러모으시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향하신 속죄와 영생과 영광의 모든 것은 곧 사라지고 없어질 것이 아니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권세와 보배피로서 언약하신 견고한 언약에 의해서 계속하여 유지되고 지탱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10. 그 뿐 만이 아닙니다. 영광스런 구원을 주셨습니다.
6절 하 반절에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을" 그랬습니다.
왕은 백성들을 금과 은으로 만든 의자에 앉혀 먹고 마시게 합니다. 이 의자들은 평상과 같은 넓은 것으로 먹고 마시되 눕기도 하고 편히 쉬면서 먹고 마시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마치 여호와께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푸른 초장에 누이신다는 표현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 금과 은의 걸상은 무엇을 뜻합니까? 즉 금 자리의 금은 신성의 상징으로 신성의 자리란 하나님 자녀 됨의 축복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영광스러운 하나님 자녀의 자리에 앉혀주셨습니다.
또 은 자리의 은은 구속의 상징으로 은 자리란 우리를 그의 피로 사셔서 구원의 자리에 앉혀 주신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받은 구원의 위치란 것은 보통 위치가 아닙니다. 마치 모세가 건짐을 받을 때 죽음의 히브리 소년이 아니라 영광스런 공주의 아들 왕자로서 건짐을 받았던 것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11. 그런데 그 정도의 은총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6절 하 반절에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을 깐 땅에 진설"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 귀한 의자를 울긋불긋 찬란한 모자이크 위에 놓아 앉도록 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로 하여금 흙조차 발에 묻지 않도록 특별하게 배려한 것입니다. 여기 화반석은 붉은 돌이요, 백석은 흰색의 돌이요, 운모석은 진주석 혹은 자개석이요, 흑석은 검은 색의 돌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휘황찬란하겠습니까? 일생 궁궐 안을 기웃거리지 조차 못했던 그들을 보석 위에서 그토록 각별한 왕의 환대를 받았으니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그럼 이 모자이크는 신령한 의미에서 무엇을 뜻할까요? 여기 돌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인성을 뜻합니다. 그리고 땅이나 흙은 대개 육신이나 수치나 죄나 저주 등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4는 사방 세계 세상 등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이 네 종류의 돌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시고 죄악을 이기시고 고통을 이기시고 결핍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이제는 세상의 저주와 고통의 가시가 있는 흙을 다시는 밟지 않도록 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에 서서 물리치고 감사하므로 다시는 저주의 멍에를 메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12. 그 뿐 아니었습니다.
7-8절에 "금잔으로 마시게 하니 잔의 식양이 각기 다르고 왕의 풍부한대로 어주가 한이 없으며 마시는 것도 규모가 있어 사람으로 억지로 하지 않게 하니 이는 왕이 모든 궁내 관리에게 명하여 각 사람으로 마음대로 하게 함이더라" 했습니다.
여기 규모란 어떤 규칙을 가리키는데 그렇다고 억압하는 규칙이 아니라 그 규칙은 타인의 음주에 대해서 간섭하지 말고 안 마셔도 좋고 마음껏 마셔도 좋고 취하여도 좋다는 그런 규칙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래 어주란 특별한 공신들에게 내리는 술입니다. 그런데 왕의 어주는 한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느 왕궁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파격적인 잔치였습니다. 나중에 이 잔치의 배경 해석이 더 나옵니다만 취하여 술주정을 해도 용납하라는 것이 당시 왕이 내린 규모였습니다. 군주들은 간혹 이런 파격적인 잔치를 통해서 자기의 관대함을 과시하고 그 멋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환심과 충성을 유도했습니다.
그럼 이런 파격적이고 파격적인 잔치가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 믿고 우리 성도들이 구원과 은혜의 성령을 마음껏 누리도록 배려하신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한없는 어주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성령의 상징입니다. 당시 파사인들은 단숨에 술잔을 소위 말하는 원샷으로 폭탄주를 들이마시거나 술주정이 심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들이 아주 성령의 새 술에 크게 취하여 내 정신이 아니라 성령의 정신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찬양하고 춤추고 전도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이러한 이방인들의 문화적인 배경조차도 복음을 증거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아주 새 술에 취하여 인격적으로 바꾸어져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기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 성령의 새 술에 취하라고 교훈합니다. 그리고 취하고 취하고 또 취해도 좋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은혜를 마시고 또 마시고 넘치게 마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더구나 빛나는 금 잔으로 마시게 했습니다. 여기 금 잔의 금은 신성 혹은 믿음을 상징합니다. 즉 이는 우리가 그 은혜를 누리는 방법을 교훈한 것으로 성령으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놓으신 은혜를 마음껏 받고 누림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구원의 잔치를 베설해 놓으셨어도 믿음이 아니고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을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도록 계속하여 주십니다.
<초청의 말씀>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 엄청난 대 잔치의 축복이 지금 우리 앞에 있습니다. 모두 이 귀한 하나님의 대 잔치에 참여하셨습니까? 지금 잔치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어 이 특별잔치에 참여한다는 사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 파격적인 귀한 잔치에 한 사람이라도 참여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혹은 이 잔치에 참여했건만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앉아만 있다면 참으로 안타깝고 애석한 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이 귀한 잔치를 마음껏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은혜 충만 받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 귀한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전도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