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 1: 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 골 1: 25 교회의 일꾼 된 것은
7. 교회에서 바울이 하는 일 ( 1: 24 - 29 )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 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1] 나는 이제
이 말은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힌 그 당시를 가리킨다(Eadie).
2]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사도 바울이 받는 고난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받는 고난이 아니고 교회를 위해 받는 고난이었다.
그는 그 고난을 슬퍼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기뻐하며 즐거이 받고 있었다.
주의 종들이 예수님과 그의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은 주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며 또 하늘의 상급도 크기 때문에 그들은 기뻐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8복의 교훈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마 5: 11-12).
사도행전 5: 40-41에 보면 공회로 모인 대제사장들이 교법사 가말리엘의 말을 옳게 여겼다.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았을 때 사도들은 그 이름 때문에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를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의 옥고(獄苦)는 골로새 성도들을 포함하는 모든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기 위한 것이다.
그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니만큼, 그 수난(受難)을 기쁘게 여길 수 밖에 없었다.
그 기쁨의 이유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1) 수난으로 인하여 복음이 매이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전파되기 때문이다.
(2) 그가 내세에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을 것을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 롬 8: 18 -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 딤후 2: 11-13 -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찌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 벧전 4: 13-16 -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3]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의 불충분성을 암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교회가 당연히 받아야하는 고난인바 유기적인 관계에서 머리가 당하는 고난을 몸의 각 지체가 필연적으로 느껴야 하는 고난이다(Lightfoot).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는 머리와 몸의 관계이니만큼, 일체적 관계이다.
몸이 받은 고통을 머리가 받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므로 교회의 수난은 원리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간주될 만한 교회의 수난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것에 국한한다.
* 벧전 4: 14 -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 된 교회의 수난을 통하여 받으시는 간접적 수난은, 그의 직접 수난 곧, 십자가 위의 수난처럼 대속적(代贖的)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수난은 교회가 그 목표를 향하여 완성되어 가는 도중에서 필연적으로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 계 1: 9 -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또 통과해야 할 것이다.
* 행 14: 22 -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이는 교회의 성장, 완성을 위하여 필요하다.
'채운다.'는 말은 그리스도 자신이 직접 당하실 고난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의 몸 된 교회에서 간접적으로 당하실 수난은 아직도 남아 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을 통하여 당하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천국이 완성되기까지 계속될 일정한 분량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남아 있는 수난은 성도들이 충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
이 해석은 문맥에 적합할 뿐 아니라 어학상으로나 신학상으로도 합당하다.
* 마 10: 39 -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 마 25: 40 -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 요 15: 18 -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 행 9: 5 -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그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완전한 공로가 되었다.
그의 속죄사역에 첨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그리스도의 속죄적 고난이 아직 남았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그의 몸된 교회가 받아야 할 고난이 남았음을 의미한다.
그의 몸 된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핍박과 순교의 고난을 많이 받아야한다고 성경은 가르쳤다.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의 교인들에게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행 14: 22).
요한계시록 6장의 일곱인(印)중 다섯째 인의 환상에서 순교자들의 탄원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하셨다.'(계 6: 11).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한 것은 그가 당시에 벌써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과연 고린도 전, 후서에서 그는 자기의 당하는 고난을 자세히 간증하였다.
그는 증언하기를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라고 하였다.(고전 4: 11-13)
또 말하기를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형제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하였다.(고후 11: 23-27).
골 1: 25 교회의 일꾼 된 것은 -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
'직분'이라는 원어(오이코노미아)는 '직무, 사명'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직무와 사명을 이룬다는 뜻 일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직무와 사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1]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바울은 귀한 복음(20-29절에서 보여주는 귀중한 내용이 있는 복음)의 '일군'이므로(23하반), 그 복음을 위한 의미에서 수난(受難)을 기뻐하고, 또 그 수난을 채우는 데 목표를 둔다.
그가 이런 수난을 통하여 복음의 일군(교회의 일군, 25절 초두)으로서 일하게 된 동기는, 그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청지기의 소명(召命)을 받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일꾼' 됨의 기원이 하나님께로 소급되어 올라감을 밝히고 있다.
이는 자신의 사도직의 진정성 및 권위를 분명하게 독자들에게 인식시키려는 의도를 갖는다.
'직분'(*, 오이코노미안)은 '청지기'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공동 번역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따라'로 해석하고 있다(by thecommission God gave, NIV).
여기서는 이 말을 '직분'이라고 함이 합당할 것이다.
청지기의 직분을 받은 자는, 그 주인의 수하(手下)에 있는 자로서 주인이 그에게 맡긴 대로 일 할 자이다.
기독교의 목사나 감독직이 사도가 아니고 사도의 수종자이지만, 그 직분의 성격도 참되게 감당하는 자들에 한하여 주님의 수하에서 구원의 은혜를 분배하는 '청지기'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맡은 교회에 대하여 주권적 행사를 할 지배자가 아니고, 다만 사도적 복음과 성경 말씀을 분배해 주는 봉사자가 될 뿐이다.
바울의 이 청지기직은 바로 '너희' 즉 이방인인 골로새 교인들을 위하여 부여된 것임을 골로새 교인들은 인식하여야 했다.
* 눅 12: 42 -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 벧전 4: 10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2]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레로사이'(*)는 문자적으로 '채우다', '가득하게 하다', '완성하다'는 의미이나 본문에서는 선교사역과 관련하여 '전달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delivering, JB, O'Brien).
'플레로사이'가 이러한 의미로 사용된 신약의 용례는 롬 15:19이다('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하게 전파하였음을 밝히고 있다(Carson).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룬다' 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여 전도의 사명을 완수함을 가리킨다.
* 롬 15: 19 -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혹 채웠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