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 26: 8. 허비하느냐? - 마 26: 11. 항상 함께
마 26: 8. 허비하느냐? -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그 향유가 3백 데나리온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증언한다. (막 14: 3-5. 요 12: 3-6).
그것은 노동자의 3백일 이상의 품삯에 해당한다. 노동자의 품삯을 하루 10만원으로만 잡아도 그것은 약 3,000만원 이상의 가치가 되는 값비싼 향유이었다.
1]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요한복음에 의하면 유다가 이러한 불만의 주동자였음을 알 수 있다.
* 요 12: 4 -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제자들이 분을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들은 두로의 이방 여인에게도 분을 내었고, 어린아이들을 주께 데려왔을 때도 그러했다.
* 마 15: 23 -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 마 19: 13 -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의 제안에 대하여도 분을 내었다.
* 마 20: 24 -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이것은 자기들의 생각이 나타난 현상들과 배치될 때 일어나는 성급하고 악한 감정이었다. 타락한 인간 본성(本性)은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과 경륜을 받아들이기에는 장애와 반발 요인이 너무 많다.
진정 누구보다도 사태의 진전을 잘 알아서 대처해야 할 제자들이였다. 그들은 이 기름 부음 사건이 갖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의 진정한 인격과 십자가를 향한 일련의 사건들이 갖는 의미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2]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허비하느뇨'로 번역된 헬라어 '아폴레이아(*)는 일말의 생산적인 결과조차 기대할 수 없는 완전한 낭비를 의미한다. 즉 값진 것을 무용(無用)하게 탕진해 버린 것을 뜻한다. 결국 이 말은 제자들의 관심이 오직 노동자 1년 임금에 해당하는 그 물질에 집착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의 물질 중심의 평가는 신앙 중심, 사랑 중심의 '한 여인'의 순수한 마음을 무참히도 짓밟아버린 것이 되었다. 정녕 신앙적 무지는 자기 만용과 이웃과의 관계 파괴라는 부정적인 결과들을 낳곤 한다.
마 26: 9. 많은 값에 팔아 -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
그렇게 분노한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요한복음 12: 4-6은 이렇게 기록한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그는 선한 일에 대해 말하였지만 실상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보인다. 그는 돈궤에서 돈을 훔치는 도둑이었다.
1]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그 향유의 가치를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설명하여 구체적인 액수를 밝히고 있다.
2]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찾는 순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은 하나의 관행(慣行)이었다. 예수께서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것을 누누이 전하셨다.
* 마 19: 21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 마 25: 35 -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이 도유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부터 근거리에 수천 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실로 위선적이고 가증한 유다가 가지고 있던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다른 사람들은 적어도 의로운 분노 때문에 그 여인을 비난하였을 것이다.
* 요 12: 6 -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그러나 예수께서 보기에 저들의 태도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요 물질 중심적인 것이었다. 이제 곧 일어나게 될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었다. 정녕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 곁에 있지만 하나님의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마 26: 10. 괴롭게 하느냐 -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
주님의 판단은 그들과 달랐다.
그는 그가 좋은 일을 하였으므로 그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1]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아시고(*, 그누스) - '알다'라는 헬라어 '기노스코'(*)의 제 2 과거형 분사로서 예수께서 초자연적 능력에 의해 그 정확한 상황을 이미 알고 계셨음을 뜻한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직관적(直觀的)인식이야 말로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된다.
* 마 16: 8 -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2]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여기서 '괴롭히다'는 뜻의 헬라어 '코포스'(*)는 '때리다', '치다', '자르다'를 뜻하는 '코페'(*)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거의 폭력에 가까운 압제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당시 이 여인이 제자들의 비난과 따가운 눈총 앞에 얼마나 괴로운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3]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주님의 판단은 그들과 달랐다. 그저 선한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기쁘게 받으실만하며 영원히 기억하고 인정할 만한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의 이 같은 신적 인준에 의해 받아들여진 이 일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비난받을 수 없었으며,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될 만한 선행이었다.
* 막 14: 7 -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예수는 당신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향유로 삼아 쏟아 부은 모든 순교자들에게도 이 같은 변호를 해주실 것이다.
마 26: 11. 항상 함께 -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
그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우리가 항상 할 수 있지만, 자기를 위해 향유를 붓는 일은 항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지상 생애는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마리아는 그가 죽으시기 전에 아마 자기가 가장 아끼던 귀한 향유를 그에게 부어드리고 싶어 했다.
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께서 세계의 가난을 뿌리 뽑을 수 없다고 말씀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일과 자신에게 사랑을 표시한 것을 구분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육신으로는 항상 그들과 함께 있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다시는 그런 선행을 받을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증언하는 대로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땅위에 존재할 것이다.
* 신 15: 11 -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이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해 베푸신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한다. 따라서 가난한 이웃을 구제할 시간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
2]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예수께서 맞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매우 특수한 것이며, 이 여인은 이 순간을 올바로 포착(捕捉)한 것이다.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하는 그 순간을 포착하여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음으로써 그의 장례를 예비한 것이다. 이 기회를 놓쳐버린다면 결단코 다시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300 데나리온의 돈은 매우 많은 것이며 그 돈으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300 데나리온으로는 할 수 없는 놀라운, 곧 인류 구속의 위업을 수행하실 것이다.
그 여인은 바로 그 값진 일에 자신의 사랑을 쏟아 부은 것이다.
3] 한 여인의 헌신과 가룟 유다의 비판
주님께서 베다니 고을에 사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어떤 여자가 매우 값나가는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다가와서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이것을 바라본 제자들은 매우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팔아 여러 명의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는데 그 여자가 쓸데없이 낭비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그러한 심증을 아시고 나무라시며 여자의 행위를 매우 칭찬하셨다.
(1) 마리아의 헌신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들과 더불어 식탁에서 음식을 들고 있을 때 마리아라고 하는 한 여인이 그분 앞에 섰다. 이 여자는 오래전부터 주님을 뵈웁게 되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기가 사는 마을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너무도 기쁘고 고마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귀한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렸다. 그녀가 주님 앞에서 행한 아름다운 헌신의 시간은 그녀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주님 앞에 가장 귀한 것을 바치는 기쁨과 감격의 순간이었다.
성도의 삶은 바로 이러한 시간의 연속이어야 한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구하는 것보다 드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줄 알고 실천할 때 성도는 진정한 기쁨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① 헌신의 본질
마리아는 매우 값진 향유 옥합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 옥합보다 그녀가 주께 드리고자 하는 중심이 더 가치 있는 것이었다.
위선적인 예배자들은 눈 먼 불완전한 양들을 가지고 성전에 와서 예물로 바쳤다. 건강하고 흠 없는 양과 염소는 자신들의 것으로 감추고, 값이 없고 불완전한 것들로는 하나님께 생색내기를 지금도 여전히 행하고 있다.
여분의 동전으로 헌금하며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예배를 드리고서는 최선의 것과 최고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렸다고 여긴다. 그러한 자들은 성스러운 헌신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일 뿐 아니라 그것에 동반하는 자기 희생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이다.
② 헌신의 자세
본문과 동일 기사인 요한복음을 참조해 보면 그녀는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귀한 옥함을 깨뜨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렸다.
이러한 행위는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행위로서 그녀의 자세는 값진 옥합을 주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정성과 뜻과 온몸을 그분의 발 앞에 드린 헌신이었다.
③ 헌신의 결과
마리아가 드린 향유는 온 집안을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 차게 하였다.
이처럼 최선을 다하는 전인적인 헌신 행위는 반드시 이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에게 귀한 향기를 제공한다.
그녀의 고귀한 헌신 행위로 말미암아 주님뿐만 아니라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도 동일한 향기를 발하였다.
(2) 가룟 유다의 비판
마리아의 고귀한 행위가 가룟 유다에게는 아름답지 못했고, 향기롭지도 못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차라리 옥합을 팔아 300데나리온의 돈으로 만들어 자신의 가방에 챙겨 넣는 것이 훨씬 가치 있었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위선적인 구실은 그 옥합을 판 돈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미명이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향유를 쏟아붓는 마리아를 질책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앞에서 가장 헌신적이었던 한 여인의 고귀한 신앙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믿음이 없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진정 그리스도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에서는 눈 먼 소경이 될 수밖에 없었다.
(3) 예수님의 판단
제자들에게 공격당하고 있는 여인에 대해 '그녀를 그대로 두어라'라고 하시는 주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녀가 행하는 일의 깊은 뜻을 주님만이 아셨기 때문에 그녀의 헌신 행위에 대하여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셨다.
곧 닥쳐올 죽음과 장사 지낼 일을 이미 알고 계신 주님에게 있어서 그 여인의 향기로운 기름은 그야말로 적절한 헌신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의 질책에 대해 그녀를 옹호하시면서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라고 칭찬하셨다. 이는 필경 그녀의 헌신적인 행위만큼의 큰 보상이 그녀에게 주어질 것임을 뜻하는 말씀이라 하겠다.
그러나 가룟 유다처럼 주님을 위하여 쓰여지는 재물을 도둑질하는 아들에게는 은혜를 끼칠 수 없을 뿐더러 자기 자신도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손을 펼 수 있으며, 그들과 고난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