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키워드를 언급할 때 대마초 파동과 금지곡은 빼놓을 수 없다. 군사정권 연장을 위해 가동된 사회정화운동은 당대의 중요 뮤지션들에게 유배와 운둔을 강요했다. 무주공산이 된 대중음악계의 음악흐름이 시대역행적 양상을 보인 것은 당연했다. 이에 대중의 눈과 귀는 심심했다.
활기를 잃은 사회적 분위기를 반전시킬 대안적 오락거리가 절실했다. 이때 젊고 신선한 캠퍼스문화를 방송에 참여시키면 “방송의 질과 폭을 넓힐 수 있다”는 한 방송피디의 참신한 제안은 대중음악계에 일대 전환기를 불러왔다.
단순히 일회성으로 그칠 것 같았던 그 행사는 대안적 오락의 의미를 넘어 새로운 시대의 음악 패러다임을 형성했다. 이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수많은 대학생가요제를 대표하는 MBC 대학가요제다. 당시 엄청난 대중적 호응을 업고 각종 대학생 가요제를 통해 등장한 젊은 대학생들이 선배들의 빈 공간을 채웠다.
그때 등장했던 샌드 페블즈, 활주로, 블랙 테트라, 피버스, 장남들, 작은거인, 로커스트, 마그마, 옥슨, 라이너스등 캠퍼스밴드들은 뜨거웠던 대중적 관심에 불을 지핀 뉴웨이브의 중심이었다. 이들은 80년대 대중음악계의 주역으로 성장했고 회생이 불가능하게 보였던 록은 더욱 화려한 부활의 몸짓을 했다.‘가수 등용문’이었던 대학가요제가 배출한 가수 또한 무수하다. 심수봉, 노사연, 유열, 신해철, 원미연, 우순실, 주병선, 이정석, 전유나, 이규석, 록커 김경호, 이한철, 전람회, 김준선, 남성듀오 캔 출신 배기성, 인디밴드 슈퍼키드가 그들이다. ‘고음불가’로 유명한 개그맨 이수근, 방송진행자 임백천도 대학가요제 출신이다.
제1회 MBC대학가요제가 열린 1977년 9월 3일 서울 정동의 문화체육관으로 돌아가 보자. 진행자는 대학생 가수 이수만이였다. 지금은 한국 대중음악계의 큰 손으로 군림하고 있는 그가 맞다. 이후 대학가요제 단골 진행자로 명성을 떨쳤던 그는 “대학 생활의 낭만과 취미활동의 무대를 제공함으로써 대학 풍토의 명랑화에 기여하기 위해서 문화방송이 마련했다”고 가요제의 정체성을 소개했다. 공중파 TV를 통해 전국에 방영된 대학가요제의 파장은 엄청났다.
최고상인 대상은 참가번호 11번 서울대 농대 록밴드 ‘샌드 페블스’ 6기가 차지했다. 사회자 이수만도 샌드 페블스의 2기 멤버다. 1970년에 결성된 이 밴드는 1회 대회에 이어 1987년 제11회 대회에서 15기가 본선에 진출했고 1992년 제16회 대회에선 21기가 동상을 수상했다. 1984년 유니세프 가요제에서도 13기가 금상을 수상한 샌드 페블스는 39년 동안 156명의 뮤지션을 배출해 현재 36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국내 최장수 캠퍼스 밴드다. 밴드명은 ‘산파블로’로 개봉된 스티브 매퀸과 캔디스 버겐 주연의 미국 영화 ‘샌드 페블즈’에서 따왔다. 영화의 낭만적 분위기와 ‘모래와 자갈’이 주는 전원적 느낌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부합했던 것. 이후 대상 곡 ‘나 어떡해’는 초보 록밴드의 연주교본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7080’세대의 가슴을 뛰게 하는 불후의 명곡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곡은 록밴드 산울림의 둘째 김창훈의 창작곡이다. 그 역시 샌드 페블스 5기다. 재미난 사연이 있다. ‘산울림’의 전신인 밴드 ‘무이(無異)’는 제1회 대학가요제 서울예선에서 ‘문 좀 열어줘’로 1위를 차지했었다. 하지만 이미 대학을 졸업을 한 김창완 때문에 본선에는 예선 2위인 샌드 페블즈만 나갔었다. 대회 후 막후의 실력자로 인정받은 밴드 무이는 앨범제작의 기회를 얻었고 ‘산울림’으로 한국 대중음악계의 전설이 되었다.
1회 대회는 기성곡 ‘가시리’, ‘당신은 모르실 거야’가 당당하게 은상을 수상했고 ‘세노야’, ‘제비’는 물론 팝송번안곡인 ’권투선수‘, ’나의 어머니‘도 본선에 올랐었다. 하지만 금상을 받은 상명여대 박선희의 ’하늘‘, 동상을 받은 서울대 트리오의 ’젊은 연인들‘과 전남대 트리오의 ’저녁 무렵‘은 대학가요제의 성공에 기여했던 창작 대학가요들이다. 이후 탄생한 TBC 해변가요제를 비롯해 강변가요제등 대학가요제 전성시대 개막의 소중한 기억은 실황앨범으로 발매된 1,2집에 나뉘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