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길하, 천재 시인을 만나다/석야 신웅순
최길하 시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필자는 ‘아, 그 천재 시인요?’ 하고 되묻곤한다. 필자는 최시인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충청도에서 먼 끝 제천. 제천은 지형적으로 보나 말씨로 보나 성정으로 보나 강원도에 가깝다. 제천하면 관란재 원호가 생각나고 의병이 생각나고 의림지가 생각난다. 거기에 최길하 시인이 동화처럼 살고 있다. 며칠 전 유권재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대전에 와 있다는 것이다. 가끔 시인은 대전에 오곤한다. 필자가 보고 싶다고 전화를 한다. 그리고는 갑자기 나오라고 한다. 돌연 벌어지는 상황이라 만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날도 그랬다. 그런데 시간을 냈다. 최길하, 장중식, 김연미, 김민덕, 유권재 시인이 몇몇 모여 있었다. 만난 지 몇 년이 되었다. 거기에서 7인 시집 『鹿鳴』을 받았다. 시집 머리말 「나눔의 미학」 첫부분이다.
사슴은 먹이가 생기면 혼자 먹지 않고 모두 불러모아 나눠 먹는다고 한다. 그 불러 모으는 사슴 의 울음소리를 ‘녹명’이라고 한다.나눔의 소리 녹명, 시경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 7인의 시조집은 바로 그 녹명의 긴 울음이다.
녹명의 길고도 짧은 울음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첫장 최길하 시인의 녹명, 그 멀고도 가까운 울음이 참으로 궁금했다. 전에도 그랬었는데 그 때는 시간이 길어 그만 먼 길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가난한 집 살구꽃은 왜 그리도 곱던지 안골에서도 젤 끝집 그 집 마당 살구꽃은 고와서 하도 고와서 무너질 듯 서러웠지.
말 못하는 지아비와 앞 못 보는 지어미가 귀 나누고 눈 나누어 더듬더듬 살아가던 연분홍 꽃구름 가린 반달만한 안골 그 집.
손 잡아줄 사람 없는 막막한 저녁이 와 사는 게 너무너무 사무치고 서럽거든 강 건너 안골 살구나무집 꽃그늘을 찾아오렴
첩첩 산도 모셔놓고 꽃그늘도 모셔놓고 술잔을 기울이며 낙화 아래 홀로앉아 후드득 지는 눈물을 꽃잎인 양 받아보렴 - 최길하의 「안골 그 살구나무 집」전문
아름다운 동화이다. 안골 그 살구나무 집은 최시인이 지향하고 있는 유토피아의 세계이다. 사는 게 너무너무 사무치고 서럽거든 강 건너 안골 살구나무 집 그 꽃그늘을 찾아오란다. 첩첩산, 꽃그늘 함께 술잔을 기울이잔다. 낙화 아래 홀로 앉아 후드득 지는 눈물을 꽃잎인 양 받아보란다. 거기에는 벙어리 지아비와 소경 지어미가 살고 있다. 그들은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가난하게 살고 있지 않다. 먼 이국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김종삼의 가난한 아이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그런 마을이다. ‘시조창작 그 풍류와 멋’ 시민대 친구들이 최길하의 이 시조를 보고 놀랐다. 한 번도 이런 시조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를 소재로 동화를 쓰고 싶다는 친구도 있었다. 짧은 시조 속에는 이렇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있다. 시조는 시인이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독자들이 많은 말을 하는 것이다.
풀벌렌 또 찾아와 밤새도록 졸랐다 무너진 돌담을 한 철만 빌려달라고 눅눅히 젖은 설움을 말려입고 간다고 - 최길하의 「입추」전문
석야 서, 최길하의 ‘입추’
풀벌레란 놈이 찾아와 무너진 돌담을 한 철만 빌려달라고, 눅눅히 젖은 설움을 말려입고 간다고 밤새도록 주인한테 졸랐다. 얼마 전 주인집 어른한테 새집을 짓는다는 소리를 들었었나 보다. 새집을 지으면 더는 찾아올 수 없다는 것을 풀벌레들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제발 한 철만 더 무너진 돌담을 빌려달라고 졸라대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연 파괴라는 코드가 숨어있다. 멧돼지가 시내 한 복판으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것도, 고라니가 아스팔트 길을 따라 저녁을 찾아나서는 것도 다 인간들이 그들의 삶의 공간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 동물들의 하늘 비친 눈물을 누가 훔쳐나 줄까. 사람들도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만 한다. 먼 미래의 후손들도 영원히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얼마 전 송명호 시인이 내게 이런 시조 한편을 보내왔다.
눈 내리는 목요일 강의차 학교 들려 차 한 잔 하려 했는데 출차중이어서 전화 통화만 하였습니 다. 신교수님의 여러 동향과 동정을 살펴본 후 신교수님을 한마디로 표현하여 단수 ‘풍류’를 지어 봤습니다. 이런 시조 형식 짓기를 나름대로 첫 시도하여 재미를 찾았는데 어떠신지요?
신선은 말이 없다 하얀 몸짓 크낙할 뿐 웅장한 속내를 산과 바다 헤아릴까 순금빛 붓놀림 자태 불사조로 웃는다 - 송명호의 「풍류」
필자가 시조창을 하고 서예를 하고 시조를 짓고 시답잖은 그림 그린다해서 필자를 풍류 시인이라고 했나보다. 송시인은 ‘신웅순’이라는 첫음을 따 삼행 시조를 지었다. 마침 필자의 시인 직함이 없으니 잘 되었다 싶었다. 꽤 어울릴 것 같다. 최 시인은 남다른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충북 단양 출생이다. 1984년에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장원을 했고 동아일보에 시조로, 한국일보엔 동시로, 불교 신문엔 시로, 충청일보엔 시조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4개 신문사를 시와 시조로 휩쓸었다. 필자가 천재 시인이라고 말 한 것은 그냥 칭찬을 위해 한 말이 아니다. 사실을 이야기 했을 뿐이다. 최길하의 「물봉선」이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는 오 촉 불빛 언니집 문 앞에 와 서성이다 돌아간 해 기운 냇가에 앉아 설핏설핏 울던 꽃.
낮으론 눈길을 피해 그늘로만 숨어들고 밤으론 등불마다 화농으로 잡힌 물집 분홍물 몸때가 되면 서러워서 더 예뻤다.
총총히 맺히는 저녁 이슬 달무리를 물소리에 흔들며 제 몸을 어루만지는 찬이슬 공방만 키우는 예쁜 꽃띠 막내이모
‘이모오~’하고 부르면 눈물 먼저 오는 이모 한 번씩은 다 앓는다는 홍역이나 수두 같은 이모오, 내 입속 작은 물집 혓바늘 아린 이모 - 최길하의 「물봉선」전문
물봉선은 눈․귀․입 다 멀어야 비로소 볼 수 있는 꽃이다. 필자도 이런 시조를 쓰고 싶다. 천재 시인의 꼬리표가 붙어야만 쓸 수 있다면 필자에게 노력하는 천재 시인이라고 붙이면 되지 않겠는가. 최시인의 시조를 읽고 있다. 한 눈을 팔 수 없다. 인생이 머문 곳, 녹명 34페이지를 넘길 수가 없다. 이것을 놓친다면 평생 후회가 될 것 같다. 죄를 지을 것 같다.
어느 날 내게 다시 사랑이 찾아온다면 은행잎 우수수 지고 산들도 텅 빈 날 산들한 국화꽃 향기 바람을 타고 오렴
영혼도 환히 비치는 투명한 이 가을 엷은 꽃그늘이 손등을 스치듯 한 방울 분홍 꽃물이 옷자락에 튀듯 오렴
평생 서툴렀던 신음 같은 내 사랑아 명치 끝에 떨리는 아직 가쁜 숨결아 마지막 간절함으로 등을 하나 켜든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영원이라는 마을이 있어 연민이란 등불 하나 잘 익혀 들고 가면 그 마을 어디쯤에서 마중 나올 너만 같다 - 최길하의 「어느 날 내게 다시 사랑이 찾아온다면」전문
얼마나 덕을 쌓아야 이런 사랑이 찾아올까. 일생 오지 않는 이런 사랑 한번 해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 멀지 않은 마을에 영원이란 마을이 있단다. 평생 서툴렀던 신음 같은 내 사랑이 한방울 분홍 꽃물이 옷자락에 튀듯 그런 사랑이 온다는 최시인이 아닌가. 비가 온다. 봄비처럼 주룩주룩 겨울비가 내린다. 오늘은 필자의 수상「겨울비」한 소절로 올 12월의 마음을 달래야겠다. 살구꽃 필 즈음 안골 그 살구나무 집 주인과 탁주 한 잔 하고 싶다. 그러면 필자도 풍류 시인 말고 행화촌 시인 이름 하나 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꽃에게, 녹음에게, 낙엽에게 다 주어 더 이상 줄 곳도 없고 갈 곳도 없는 나그네. 겨울비는 빈자 의 모습으로 겨울 늦게 낯선 동네로 돌아온다. 산동네 불빛도 둘러보고 좁은 언덕의 골목도 마다 하지 않고 오른다. 산천은 가진 것이 없는가 참으로 눈부시다, 산허리 저 물안개는 누가 풀어놓고 간 붓질이며, 앙 상한 겨울 나무는 누가 울고간 노래인가, 저 마른 산녘의 강물은 누가 쓰고 간 서체이며 저 하늘 비워둔 세월은 누가 보내준 편지인가. 빈자가 아니면 어찌 순백의 화선지에 저런 절구를 훔쳐낼 수 있단 말인가. 감나무, 밤나무 낙엽 이 진, 산꿩이 울고 간, 내 고향 고추밭 어디쯤일 것이다. 거기에서 겨울비는 적막하게 온다. - 필자의 「겨울비」일부
서예문인화,2016.1, 104-107쪽. / 한국시조시인협회 옮김/송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