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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생활 속 마음경영
2. 사기(邪氣)의 헤살
(4) 실패학(失敗學)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입에 담는 것조차 금기(禁忌)하는 말 중 하나가 실패(失敗)라는 말이다. 계획한 일을 잘못하여 그르침을 뜻하는 실패는 성공의 반대말이기도 하다. 실패는 없고 성공만 있는 그런 곳이 있어 그곳에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실패학(失敗學) 대가(大家)들의 지론이다. 실패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고 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패에서 교훈을 얻을 수도 있고 실패로 아픈 만큼 성숙하기 때문에 실패는 성장통(成長痛)이라는 긍정적인 면도 있고, 또 실패가 있기에 성공의 가치를 실감하게 되지만 그러나 여러모로 부담이 적지 않으니 거듭할 일은 못 된다. 하지만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발표한 「혁신형 창업 활성화의 비결, 플랫폼」이라는 제목의 보고서(2013)에 의하면, 지식. 기술. 디자인 등을 활용한 혁신형 창업은 생계형 창업보다는 성공확률이 높지만 그래도 성공률은 5%정도에 불과하고, 현상유지도 고작 15%, 3년내 실패할 확률은 80%에 육박한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기를 기대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기 때문에 실패학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학이라면 혹 몰라도 실패학이라면 그것을 배워서 쉽게, 빨리, 그리고 확실하게 망하자는 것이냐?’라며 별 뚱딴지 같은 소릴 다한다 하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시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 실패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놓고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연구하는 학문이므로 결국 실패학은 역설적으로 성공하기 위한 학문이다. 단순히 과거의 실패사실을 까발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실패가 가지는 플러스적인 측면을 활용하여 발전의 동력으로 삼아 제2의 실패를 막고 성공으로 가기 위한 적극적인 준비의 일환(一環)이라 할 수 있다. 실패학의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일본 도쿄대 하타무라 요타로(畑村洋太郞) 명예교수로 그가 2000년 「실패학의 권유」라는 저서를 내자 일본에서는 대대적인 실패학(失敗學) 붐이 일었다고 한다.
실패하여 실의에 빠져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성공하기 위해 밤잠을 설치며 정신없이 동분서주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듣고 새겨야 할 말이 “너 자신을 알라(gnōthi seauton, 그노티 세아우톤)”라는 서양 잠언이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 델포이(Delphoi)의 아폴론(Apollon)신전 현관기둥에 새겨져 있었다는 말로, 철인(哲人)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지혜가 신(神)에 비하면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에서 무엇보다 먼저 자신에 대한 무지(無知)를 자각하는 엄격한 철학적 반성이 중요하다 하여 이 격언을 자신의 철학적 활동의 출발점에 두었다고 한다. 무지를 자각한다는 말은 지금 내가 알고 있은 모든 것이 얼마나 부족하고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달어야 한다는 뜻으로 무지를 자각한 후 거기서 출발하여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철인(哲人)이 아닌 한낱 세상을 살아가는 생활인이라 할지라도 이 말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실패에도 약이 되는 실패가 있고 독이 되는 실패가 있다. 약(藥)이 되는 실패란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실패를 말하며 이는 성장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독(毒)이 되는 실패는 좌절(挫折)하여 부정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하는 실패를 말한다. 누구나 실패를 하지만 그 실패의 경험과 결과는 모두가 같지 않다. 어떤 사람은 실패를 훌륭하게 성공으로 승화시키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실패를 반복한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스탠포드 대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카롤 덱(Carol Dweck)박사는 인간을 고정마인드(Fixed mindset)를 가진 사람과 성장마인드(Growth mindset)를 가진 사람으로 구분한다. 고정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유전자적인 지능이 발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굳게 믿는다. 이와는 반대로 성장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 무엇이던 더 좋게 만들고 향상할 수 있다고 믿는다. 덱(Dweck)박사가 진행한 실험에 의하면, 고정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실패원인이 어쩔 수 없는 자신의 능력부족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실패를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생각한다. 반면 성장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실패는 배움을 위해서 거쳐야만 하는 관문 정도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더 개선될 수 있는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할 경우에도 최소한 실패 내성만은 얻게 된다. 실패내성(失敗耐性, Failure tolerance)은 실패를 견디고 일어서는 힘을 말한다. 혹 실패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배움을 얻는 일에까지 실패해서는 아니 된다.
실패는 그 원인이 무엇이며 또 그 원인은 어디에 기인한 것인가에 대하여, 실패는 성공의 반대말이기 때문에 성공의 조건을 충실히 실행하지 못하여 실패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세상일이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이 쪽의 성공 아니면 저 쪽의 실패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패도 그 기준과 정도에 따라 논자(論者)들의 이론이 분분할 것이나 실패의 총체적 원인은 자신의 무능(無能)이라 할 것이다. 실패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구분해 보면 첫째로 무지(無知)이다. 실패자들은 무지한 상태에서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인가에 대한 고려와 성사(成事) 가능성에 대한 분석 없이 무모(無謀)하게 덤벼들어 실패를 부른다. 무모는 무지한 용기의 소산이다. 둘째는 속는 것이다. 속는 것도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가장 흔한 것이 어설픈 상식을 가진 자신에 속는 것이고, 다음으로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던 가까운 주변에 속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는 믿을 수밖에 없는 정보에 속는 것이다. 셋째로는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인 욕심이다. 자신의 능력을 감안하지 않고 대박이 터지기만을 고대하며 한껏 마음을 부풀린다. 그러나 순리를 벗어난 곳에 좋은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망각한다. 넷째로는 헤살에 의한 것이다. 헤살이란 짓궂은 훼방을 말한다. 헤살꾼으로는 우선 자연재해를 꼽기도 하나 이는 인간이 순리를 거역하여 생기는 자연현상으로 헤살이라 할 수 없고, 주변사람들이 헤살을 놓는다 하겠지만 그 또한 원인은 자신에 있다. 다섯째로 실패의 내밀(內密)한 원인은 원기(元氣)의 보호권(保護圈)을 이탈하여 원기의 필성(弼成)이 단절됐음에 있다. 누구든 실패가 자기자신의 마음에서 기인된 줄 모르고 외부상황에 의한 결과라고만 생각한다면 주변상황은 더욱 그에게 시련을 안겨줄 것이다. 그런 외부상황을 개선해 보려고 안간힘을 써보겠지만 그것으로 그뿐인 것은, 정작 필요한 자기자신의 내면을 개신(改新)하는 데는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다른 길이 없게 된다.
욕심(慾心)은 모든 죄악과 실패 그리고 인간관계를 해치는 원인이므로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버리려고 애를 써보지만 버려지지 않는 마음쓰레기 중 하나이다. 욕심이란 말의 사전적(辭典的) 의미는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하거나 하고자 하는 마음이라 설명되는 부정적인 말이다. 욕심은 순리(順理)에는 소극적이면서도 비리(非理)에는 극성(極盛)이라 할 정도로 아주 적극적이기 때문에 결국 극성지패(極盛之敗)하게 된다. 극성지패란 지나치게 적극적이고 드센 태도나 행동을 극성이라 하고, 극성을 떨면 얼마 못 가서 실패한다는 말이다. 조화원(造化元)의 화신(化身)인 우리인간에게서 하필 부정적인 말인 욕심이란 것이 왜 생겨나는가? 근원적으로는 인간의 마음에 무한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며, 현실적으로는 그 동안 겪어온 인간고(人間苦)의 경험에서 생겨난다. 즉 인간에게는 감정과 분별력 그리고 상상력이 있어 어떤 사물이 자신에 미치는 영향을 감정을 바탕으로 비교하고 분석하고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에서 욕심이 생겨나고 거기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기 때문에 그 욕심은 끝이 없게 된다. 사람들은 욕심을 버리고자 마음을 다잡아 굳게 다짐하기를 수십 차례, 이쯤되면 마음속에서 욕심이 사라졌으려니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욕심은 조용히 잠자고 있다가도 마치 눕혔다 놓으면 벌떡 일어나는 어린이 장난감 오뚝이처럼 어떤 계기가 되면 갑자기 일어나기 때문에 세심에 가장 어려운 걸림돌이다. 또한 욕심은 사람의 눈과 귀를 가리고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듣게 하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이나 위치를 과대황장(過大皇張)하고, 불확실한 이익도 크게 보이는 망상에 빠지게 하여 결국 낭패를 보게 한다. 예로부터 큰 손해는 반드시 그곳으로 이끄는 작은 이익이 있다(大害必有小利爲之媒)고 했다. 인간은 현상이나 사물을 경험이나 지식만으로 보기 때문에 자기가 아는 대로 또는 아는 만큼이라는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무지(無知)가 진정 실패의 원인인가? 오늘날과 같이 복잡다기한 사회에서 그 많은 분야에 모두 전문지식을 갖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또 자신의 전공(專攻)만으로는 다른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 대한 무지와 무능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분업이 필요한 것이고, 때문에 실패의 원인을 무조건 무지나 무능으로만 돌리는 것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세간에서 흔히 쓰는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는 속담이 말하듯 어설픈 지식으로 인해 일을 망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설익은 지식보다는 아예 무지가 안전을 위해 더 나을 경우도 있고, 제아무리 많은 형식지(形式知, Explicit knowledge)와 자기만의 비법인 암묵지(暗默知, Tacit knowledge)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이 지금 이순간, 이 장소의, 이 일에, 필요하고 적합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지(無知)와 다를 바 없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해악이 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하여, 북송 시대의 정치적으로 불운을 겪었던 시인 소동파(蘇東坡)는 초서에 뛰어난 서법가(書法家) 석창서(石蒼舒)의 취묵당(醉墨堂)이라는 재실(齋室)에서 조롱조로 지은 석창서취묵당(石蒼舒醉墨堂)이라는 시(詩)를 통해 식자(識字), 즉 지식 또한 우환이 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그가 시(詩)에서 말한 식자우환이란“人生識字憂患始(인생식자우환시) 姓名粗記可以休(성명조기가이휴) 何用草書誇神速(하용초서과신속) 開卷惝怳令人愁(개권창황영인수)”이다. 이를 해의(解義)하면, 사람이 나서 글자를 알게 될 때부터 우환이 시작되니, 이름자 대충 쓸 수 있게 되면 그만둬도 좋을 것을, 초서를 귀신처럼 빨리 쓴다 자랑하여 무엇에 쓰겠는가, 책을 보고 당황한 사람들을 시름겹게 할 뿐이지, 라는 뜻이다. 위의 두 가지 예는 잘못된 지식이거나 실정에 맞지 않는 지식은 오히려 해가 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드오션(Red Ocean)의 생사를 건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거나, 비록 블루오션(Blue Ocean)이라 할지라도 아직 시도된 바 없는 미개척 분야에 도전하는 경우 그 일의 핵심에 대한 달통(達通)한 지식과 기술, 창의력, 그리고 일을 휘갑하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무모하게 뛰어들어 실패했다면 그 무지와 무모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과 고통을 주게 되므로 그것은 실패라는 소극적인 책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보다 큰 책임인 죄악을 저질렀다고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세상일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아무리 지식과 경험과 능력을 충분히 갖췄다고 자부해도 성공여부는 모를 일인데 그런 것이 아닌, 어디서 주워들은 어설픈 상식을 가지고 남들도 다 잘하는데 나라고 못하랴 하는 식이라면 애당초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만약 능력 있고 성공경험이 있는 믿을만한 사람으로부터 자문을 받거나 또는 그와 함께한다 해도 그 사람의 사람됨이나 능력 그리고 그의 성공경험은 그 때, 그 시절에나 통용되던 옛이야기일 뿐이다. 어제가 옛날인, 초스피드시대인, 오늘에 있어서도 그런 것들이 내가 지금 하려는 일에 그 때처럼 성공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식의 레밍효과에 의해 실패의 수렁에 빠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레밍(lemming)이란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서식하는 들쥐로 이들은 한 마리가 내달리기 시작하면 다른 레밍들도 덩달아 따라 나선다고 한다. 이때 선두그룹을 쫓아 무리 전체가 뒤처지지 않으려고 경쟁적으로 따라가기 때문에 앞의 레밍은 뒤의 레밍들에 밀려 걸음을 멈출 수도 업고, 대열에서 빠져나오게 되면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빠져나올 수도 없다. 게다가 곧장 앞으로만 가는 습성 탓에 해안가 절벽에 도달해서도 속도를 멈추지 못해 절벽 아래로 떨어져 결국 집단자살을 하고 만다. 선두의 뒤를 따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가는 레밍과 같이 누군가 먼저 어떤 것을 하면 맹목적으로 그를 따라 행동하는 현상을 레밍효과라고 한다. 비이성적인 행동이지만 우리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특히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하여 떼돈을 벌었다는 소문에 혹해 무턱대고 대출까지 받아서 묻지마 식의 투자를 하는 레밍족들의 공통된 특징은 생각 없이 남 따라 달려들었다가 시장 침체라는 악재를 만나게 되면 하늘이 무너진듯 창황하여 터무니없는 낮은 가격으로 처분하여 정리하고는 결국 레밍처럼 자폭하고 마는 우(愚)를 범한다는 점이다. 레밍효과는 투자뿐만 아니라 단지 유행에 뒤떨어질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일에 끼어들거나, 남의 좋다는 말에 무작정 따라 하는 민간신앙이나 건강관리, 심지어는 직업이나 사업의 선택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같은 일은 욕심이 앞선 무지(無知)의 소치(所致)로 그로 인해 인생까지 실패하는 경우도 적지 않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참으로 어렵사리 성공의 정상에 이르긴 했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기(知其一 未知其二)때문에 실패의 벼랑으로 급전직하(急轉直下)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일이든 그 분야에 신기술을 개발하여 열심히 하면 성공할 줄로 알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희망에 부푼 창업자에게는 반드시 건너야 할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이 앞을 가로막는다. 특히 창업 초기의 벤처기업들이 피나는 노력으로 기술개발을 이뤄 첨단제품 생산에 성공은 했지만 자금조달의 어려움으로 개발한 기술을 사업화하는 단계까지 이르지 못하고 실패하여 중도에 도산하는 벤처기업이 허다하다. 벤처기업의 성공과 실패를 설명하는 주요 이론으로 캐즘이론(Chasm theory)이 있다. 캐즘은 원래 지질학용어로 지면이나 암석 따위의 갈라진 틈이나 협곡을 뜻한다. 첨단기술수용론이라고도 하는 캐즘이론에서 소비자는 ①혁신자(革新者). ②선각수용자(先覺需用者). ③전기다수(前期多數). ④후기다수(後期多數). ⑤지각수용자(遲刻需用者) 등 5개 유형으로 분류한다. 신제품의 초기 소비자와 그 후 주류시장의 소비자는 서로 다른 시점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구매하는 것이 일반적인 소비패턴이다. 신제품이 아무리 혁신적이라 해도 실용적이지 못하면 시장에서 성공하기 어렵다. 신제품을 출시한 초기에는 혁신성을 선호하는 소수의 소비자가 생기지만 그 후에는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면을 중시하는 소비자가 중심이 되는 주류시장(主流市場)으로 옮겨가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도기에 일시적으로 수요가 정체되거나 후퇴하는 단절현상이 일어나는데 이 현상을 캐즘(Chasm)이라고 한다. 기업은 캐즘이 길거나 간극(間隙)이 크거나 자금력이 약하면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쓰러지게 된다. 첨단제품이 출하되면 혁신자와 선각수용자는 기술애호나 호기심에서 제품을 구입한다. 그러나 전기다수 및 후기다수의 소비계층은 실용성, 유용성, 경제성을 중시해 여러 가지 고려사항을 비교 분석한 뒤 증명이 충족된 후에야 구매하기 시작하게 된다. 기업입장에서는 이 두 계층이 실질적인 소비층으로 전체 소비의 2/3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들의 소비가 일어날 때 비로소 수익성이 있는 성공의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지각수용자는 마케팅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소비자로 때가 되어 제멋에 겨워야 스스로 구매에 참여하는 별도계층이다. 이와 같이 제아무리 기발하고 특수한 것이라 해도 인간의 마음은 어떤 공식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측하기 어려운 변수(變數)가 작용하여 언제든지 딴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와 같은 죽음의 계곡을 건널 수 있는 대비책을 강구하여야 한다.
한번 성공했다고 해서 그 성공이 계속해서 탄탄대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성공의 대로에서 실패의 샛길로 빠져들지 않고 그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초지(初志)가 용두사미(龍頭蛇尾)에 그쳐서는 안 된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성공한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성공함정(成功陷穽. Success trap)이란 것이 있다. 성공함정이란 자신의 과거 성공경험을 과대평가하거나 또는 그에 집착하여 세상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변화를 감지했다 해도 자만이 지나쳐 그것을 하찮게 여기고 현상에 안주한 결과로 실패하여 몰락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세상은 변화한다. 지구의 공전과 자전이 멈추지 않는 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잠시의 멈춤도 없이 세상의 변화는 계속된다. 따라서 변화를 수용하기 위하여는 그에 발맞춰 끈임 없이 자기혁신과 함께 기술혁신을 통하여 낡은 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아 변혁시키는 창조적 파괴과정을 통하여 지금까지와는 다른 개념의 이노베이션(Innovation)을 이루어야 하고 거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투자하여야만 가능한 것이다. 사업을 예로 들면, 사업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그 시장에는 이미 경쟁자가 생겨 같은 고객을 두고 사느냐 죽느냐의 비정하고 냉혹한 경쟁이 벌어지는 레드오션(Red ocean)에 이르게 되고 만다. 세계적인 초 우량기업의 몰락이라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이론으로 “레드퀸 경쟁과 게으른 강자(Red Queen Competition & Lazy Monopolist)”가 있다. 우월한 경쟁력을 가진 강자는 라이벌(Rival)을 압도한다. 경쟁력 덕분에 라이벌을 압도한 강자는 현재의 경쟁력만 믿고 근본적인 혁신노력 없이 “게으른 강자 증후군”에 빠져 있는 사이 약자는 필사적으로 혁신을 시도해 새로운 경쟁력을 개발하여 한발 앞서 나가게 되고 결과적으로 먼저의 강자는 패배자로 몰락하게 된다. 어느 분야든 생사를 건 치열한 경쟁을 피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지고 여유롭게 새로운 고객에게 새로운 가치를 제공함으로써 새롭게 고객을 창출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새로운 선도자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꿈같은 소망을 이룰 수 있는 블루오션(Blue ocean)은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고가 실패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사고는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인간의 부주의나 실수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실수가 있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고를 운수소관(運數所關)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사람은 누구나 직접 내 눈이나 내 귀로 보고 들은 것은 확실하다고 믿는 것이 상례(常例)이다. 그러므로 “Seeing is believing”, 즉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영어속담도 있다. 그러나 사람의 감각기관은 착각할 때가 있고 맹점(盲點)이 있다. 사람은 많은 사물 중에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필터링(Filtering)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특정 부분이나 움직임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을 때 예상하지 않았던 사물이 나타나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은 분명히 모두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순간 인지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일부분일 뿐이다. 무엇을 바라본다고해서 그 존재를 모두 알아차리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다 보면 시야에 맹점이 생기고 이로 인해 생각 외의 다른 것은 눈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은 주의력 부족 때문이다. 주의력이 부족하여 생기는 현상으로는, 눈이 특정 위치를 향하고 있지만 주의가 다른 곳에 있어서 눈이 향하는 위치의 대상이 지각되지 못하는 무주의맹시(無注意盲視, Inattentional blindness)가 있고, 연속 제시되는 장면들에서 어느 한 부분에 변화가 있었음에도 그 변화를 탐지하지 못하는 변화맹시(變化盲視,change blindness)가 있다. 누구든 무주의맹시나 변화맹시에 의해 사고를 내거나 사고를 당했다면 당사자는 그 사고의 원인을 알지 못하므로 원인 모를 사고가 되어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라는 말밖에 달리 할말이 없게 된다.
사람은 주의를 집중하여 두 가지 이상의 일을 동시에 할 수 없다. PC를 예로 들면, 멀티태스킹(multitasking)은 하나의 컴퓨터 내에서 워드프로세싱, 통신, 음악, 표 계산 프로그램 등을 동시에 불러놓고 행하는 다중작업을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한 개의 CPU를 가진 PC 가 특정 순간에 수행할 수 있는 태스크(Task)의 개수는 하나뿐이다. 따라서 멀티태스킹은 스케줄링이라는 방식을 사용하여 컴퓨터 사용자에게 병렬 연산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환경을 제공한다. 스케줄링 방식은 CPU 사용시간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나누어 각 태스크가 사용할 수 있도록 분배한다. 분배 받은 한가지 일을 하다가, 잠시 멈추고 또 다른 일을 하고, 또 멈추고 다른 일을 하게 되는데 분배 받은 시간이 종료되어 태스크가 사용하던CPU를 다른 태스크가 사용할 수 있도록 재 배정하는 것을 문맥교환이라 하며 스케줄링에서 이 문맥교환이 빨라지면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멀티태스킹은 여러 가지 업무를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면서 작업하는 스위치태스킹(switch tasking)일뿐 동시에 작업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어떤 행위를 하면서 다른 것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동시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어느 것이 됐든 관심 있는 다른 것에 딴전을 부리게 되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건성으로 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딴전을 부리거나 딴 데에 관심을 가지다 보면 지금 하는 일에 주의력 부족으로 인한 사고의 위험이 따르게 된다. 이와 같이 딴 데 정신을 팔다가 생긴 사고는 그 원인을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도 알아차릴 수가 있다. 그러나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는, 겉으로는 아무런 표시가 나지 않게 주의력을 무디게 하는 헤살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심예(心穢)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심예의 헤살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심예는 의식이 깨어있는 각성상태에서뿐만 아니라 ‘분한 마음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는 말과 같이 의식이 쉬고 있는 수면상태에서도 작용한다. 심예의 작용은 본인은 느끼지 못하지만 억기(憶起)에 의해 마음이 흐트러져 주의력과 판단력을 무디게 하고 위험한 작업에 실수를 유발하여 크나큰 재난을 초래한다. 이렇게 발생한 사고는 본인조차도 ‘도대체 이런 사고가 왜 발생했는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고 말하게 된다.
사람은 거짓에 속아서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왜 속는가? 사람이 속는 원인은 누구나 상식을 가졌지만 어떤 사물을 판단할 때 그 상식을 벗어나거나, 또는 그 까짓 것 하며 상식을 무시해버렸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상식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대문에 누구든, 언제든, 어디서든, 무엇이든 상식을 따르면 속아서 실패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속으면서 그것을 원망하며 살아가고 있다. 1942년「이방인」이라는 장편소설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던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일찍이 거짓에 대하여 “진실은 빛과 같이 눈을 어둡게 한다. 거짓은 반대로 아름다운 저녁 노을처럼 모든 것을 멋지게 보이게 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인간은 거짓에 곧잘 속는다. 거짓사물을 볼 때 참된 상식의 잣대를 통해 보는 것이 아니라 욕심의 눈으로만 보기 때문에 아름다운 저녁 노을처럼 멋지게 보여 속게 된다. 상식(常識)이란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할 참된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자연의 이치 중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상식이라 말한다. 상식은 인간이 태어날 때 가장 기본적인 것을 생득(生得)하고, 거기에 세상을 살아가면서 습득(習得)과 체득(體得)을 통하여 축적해가고 또 스스로 터득(攄得)한 것을 더해가는 것이다. 무엇에 속는가? 사람인가, 아니면 돈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거짓인가? 남들이 어떤 것에 속는 것을 보고는 어쩌면 멀쩡한 사람이 그토록 어리석을 수가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만약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도 언젠가는 같은 방법으로 속는 일이 생길 수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누구나 무엇에 속게 되는 여러 가지 심리현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경우든 속는다는 것은 거짓에 속은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자기자신한테 속은 것이 된다. 거짓된 사람에 속는 것은 후광효과(後光效果)에 의해 직관력이 흐려지고 상대방을 자기중심적 프레임(Frame), 즉 자신의 인식체계로 보기 때문에 진실성에 있어 상대방도 내 마음과 틀림없이 같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생기는 일이다. 후광효과란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에게 한 두 가지의 현저히 좋은 특징이 있으면 그 사람의 다른 면까지도 모두 좋게 보이고, 반대로 나쁜 특징이 있으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나쁘게 보이는 경향을 말한다. 고급 옷을 입은 준수한 사람, 아는 것이 많은 사람, 그 방면에 성공했다고 소문난 사람은 “비단보에 개똥(錦褓裏犬屎, 금보리견시)”인 줄도 모르고 그냥 겉보기로만 믿어 버리게 되는 이유가 다 거기에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단편적인 지식이나 경험에 의한 그릇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오류를 인식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한번쯤 다시 생각해 보는 노력조차 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실패가 있을 수밖에 없다. 주변 사람들의 극구 말리는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큰소리치며 고집한 결과로 참혹한 실패를 겪고 난 후에야 비로소 땅을 치며 후회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곳곳에 거짓과 무리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또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으며, 실현가능성 및 사실여부를 상식수준에서 판단했더라도 ‘안 되는 일’이란 것을 금방 알아 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실패의 늪에 빠져드는 줄도 모르고 사기(邪氣)가 이끄는 대로 혼자 좋아서 얼씨구 좋아라 허수아비 춤을 신명 나게 추다 보면 그 춤이 끝나기도 전에 낭패의 먹구름이 몰려 들어 가슴을 치며 후회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쩌랴! 이 모두가‘근거 있는 예측’ 보다는 ‘근거 없는 희망’에 홀딱 빠져 내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던 것을!
사람에게 속는 것은 누구나 속으려 해서 속는 것이 아니고, 꼭 어리석어서 속는 것만도 아니다. 사람의 심리(心理)는 어떤 메시지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가 되면 그냥 믿어 버리는 속성이 있다. 처음 들을 때는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지만 그것이 계속하여 반복되면 그것에 익숙해지고, 익숙함은 곧 친숙으로 발전하여 신뢰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거짓말도 계속 반복하게 되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그것을 듣는 사람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은연중에 진실로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세뇌(洗腦)가 가능한 것이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라는 속담이 존재하게 된다. 자기기인(自欺欺人)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인다”라는 뜻으로 자신도 믿지 않는 말이나 행동으로 자기도 속이고 남도 속인다는 말이다. 남을 완벽하게 속이기 위하여는 자신의 거짓에 자신이 먼저 속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완벽하게 남을 속일 수가 없다. 자신의 거짓에 대한 내면의 양심이 의식표면에 떠오르지 않도록 꾹꾹 눌러 자신의 거짓을 그대로 믿어버리게 되는 기억조작의 엄청난 수고가 뒤따르지 않고서는 공상허언의 병증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거짓말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공상허언증(空想虛言症. Pseudologia Fantastica)은 자신의 실제가 아닌 자신이 만들어 놓은 거짓을 상정하고 그것을 진실인양 믿게 되는 일종의 정신병이다. 이 증상은 1891년 안톤 델브뤼크(Anton Delbrueck)에 의해 처음으로 설명되었고 한다. 공상허언증환자는 자신의 거짓말이 거짓이란 사실을 이미 망각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또 탄로의 불안을 느끼거나 양심의 가책도 없다. 이런 사람의 거짓은 초기에는 거짓말의 논리가 허술하여 조금만 생각해 보면 오류를 발견할 수 있지만 고도의 허언증은 이미 모든 논리적인 것을 다 구축했기 때문에 누구도, 무엇으로도 거짓임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허언증의 유형은 자기자신을 우월하다고 꾸미기 위한 황당한 수준의 거짓과 다른 사람을 중상모략하기위한 작화(作話)의 경우가 있다. 거짓같은 사실보다는 사실 같은 거짓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되새겨 보아야 한다.
거짓말에 대하여 영국의 정치가였던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거짓말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라며 정확을 생명으로 하는 숫자로 표시되는 통계까지도 과학적 허구성과 오류, 착시가 있음에 대해 지적하였다. <벌거벗은 통계>의 저자 발터 크래머는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는 목적으로 통계를 들먹인다”고 말했다. 속고 속이는 일은 인류와 함께 발생하여 발전의 역사를 같이 하고 있는 것 같다. 성경은 잠언14-15에서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류 최초의 여자 하와(Hawwāh)는 하나님이 금지한 명령을 어기고 간교한 뱀의 말을 따라 에덴동산의 선악과(善惡果)를 따서 그의 남편 아담(Adam)과 같이 먹음으로써 불순명(不順命)의 죄를 짓고 벌을 받아 그들의 후손인 모든 인간에게 원죄(原罪)의 멍에를 짊어지게 했다고 한다. 청정한 창세시대의 청정인간도 이러했을진대 오늘날과 같은 혼탁한 세상의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보다 편하게 살기 위해, 보다 많이 갖고자 서로가 속고 속이는 상투적인 짓거리를 탓해 무엇 하랴! 푸슈긴(Pushkin)이 자신의 시어(詩語)로“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충고하였듯이 그저 그런 것임을 인식하고 슬기롭게 대처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있겠는가.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Hegel)은 그의 저서 「법철학」서문에서 “미네르바(Minerva)의 올빼미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라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다.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낮이 지나고 밤이 돼서야 그 날개를 펴는 것처럼, 진리에 대한 인식은 시대에 선행(先行)하기보다는 일이 다 끝날 무렵에야 알게 된다는 뜻으로 지혜는 현실을 꼼꼼하게 살필 때 그 성과를 얻을 수 있으며 무슨 일이든 한참 지난 후에야 비로소 진실을 깨닫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실패를 면하기 위하여는“십 리(里)가 모랫바닥이라도 눈 찌를 가시나무가 있다”라는 속담을 새겨 근거가 모호한 희망적인 유혹에 홀딱 빠지지 말고 한발 물러서서 그 속내를 들여다본 후에 판단하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에게는 확증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이라는 심리현상이 있다. 확증편향이란 자신이 이미 그렇다고 믿고 있는 가치관이나 신념에 일치하거나 또는 자신의 경험이나 판단 또는 정보가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그 옳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정보만을 찾는 편향된 사고, 즉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확증(確證)은 받아들이지만,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부정하거나 반대되는 반증(反證)에 대하여는 자기의 생각이 과연 옳은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배척하고 무시하는 심리적 경향을 말한다. 확증편향의 주요 증상은 자신이 가진 신념에 부합하는 것이면 그것이 극히 예외적인 특별 사례라 할지라도 일반화하여 쉽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일반화된 일이라 할지라도 이를 무시하거나 의미를 축소하고 정보의 객관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자신의 잘못된 판단이나 인식에 대한 자기정당화를 한다는 얘기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인지적 편견이라고 할 수 있다. 확증편향의 원인은 자기논리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선입견 때문이다. 이러한 선입견에 뒷받침되지 않는 새로운 정보나 다른 의견은 틀린 정보로 인식하게 된다. 결국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보를 축소, 왜곡하는 자기합리화가 발생하여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는 우호적이지만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은 불편하므로 회피하게 된다. 확증편향은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으로 작용한다. 특히 확증편향은 기업을 운영하는 경영주나 CEO가 경영을 실패하게 하는 대표적인 요인이다. 확증편향은 수직적인 조직과 상명하복이 뚜렷한 조직, 경영주가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하는 조직일수록 확증편향은 더욱 심각하고 몰락한 기업의 CEO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확증편향은 규모와 연관성이 적고 조직의 성향과 관련이 깊으며, 대기업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대기업의 경우도 총수 한 사람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체제라면 확증편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확증편향에 빠진 CEO들의 공통점은 비선(秘線) 조직을 둔다는 점이다. CEO는 비선조직이 입맛에 맞는 정보를 빠르게 전달하고 실행에 옮기기 때문에 그들만을 신뢰하고 그 점에 매력을 느낀다. 비선은 CEO가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발탁한 사람들로 그 역할은 매우 제한적인 반면 강력하고 비밀스럽기 때문에 용인(用人)에 신중함을 필요로 하지만 실패한 기업의 CEO들은 대부분 이점을 간과(看過)한다. 확증편향의 문제점은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는 벽창호로 타인의 의견을 무시하는 독단에 빠진다는 데 있으므로 자기성찰을 통해 자신의 생각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라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야만 큰 실수나 실패를 미리 막을 수가 있다.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는 사기수법 중에 네다바이(ねたばい)라는 것이 있다. 네다바이라는 말은 일본어 조어(造語)로서 교묘하게 남을 속여 금품을 빼앗는 사기를 뜻하는 말이다. 네다바이 수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사람을 속이는데 반드시 확증(確證)을 제시한다는 특징이 있다. 2008년7월 보도를 통해 알려진 블랙 머니(Black money)사건을 예로 들면, 사건에서의 블랙 머니란 공적인 통로를 통하지 않고 음성적으로 유통되는, 출처가 의심스런 부정한 돈의 의미가 아니라 돈에 까만 칠을 한 검은색 돈을 말하는 것으로, M 씨와 라이베리아인 3명이 한 조가 되어 활동한 블랙 머니 사기단은 한 호텔에서 한화 수백억 원 상당의 외화 블랙 머니가 있다며 검은색 약품이 칠해진 500만 달러와 500만 파운드의 블랙 머니를 진폐(眞幣)로 환원하기 위한 약품구입자금을 투자하라며 여러 사람들로부터 거액을 받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조사 결과 이들은 특수 화학약품을 진폐100달러짜리에 칠해 블랙 머니를 만들어 준비하고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다시 약품 처리하여 100달러 진폐로 되돌리는 모습을 연출하여 보여준 뒤 그 돈을 은행창구에서 환전하여 진폐임을 확인시켜주고 투자하면 한화 15억 원을 남겨주겠다고 속이는 수법으로 여러 차례 사기행각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 미국 정부에서 무기를 구입하라며 지원한 자금을 라이베리아 국립은행 총재를 지낸 지인이 달러를 해외로 빼돌리기 위해 약품 처리하여 블랙 머니로 위장한 달러를 지금 진짜 달러로 되돌려 자금화하려 한다고 속였으나 이를 의심한 사람의 신고로 경찰에 꼬리가 잡혔다고 한다. 이 사건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세상엔 절대로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과 같이 땀을 흘리는 수고가 없는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만(萬)에 하나’를 허위의 반증(反證)으로 삼는 신중함이 있는 반면 이번 사건의 피해자들은 ‘만에 하나’를 사실의 확증(確證)으로 믿는 경솔함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피해자들이 욕심이 없는 정심(正心)이었다면 심안(心眼)이 열려 비록 그들이 보여준 미끼가 진실이었다 해도 500만 달러라면 100달러짜리로 5만장인데 그 중에 단 한 장의 확증에 홀려 모두를 사실로 믿어버리는 확증편향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신고자처럼 거짓의 기미가 눈에 보여 사기꾼임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것이다. 이번 사기사건에서와 같이 그렇듯 쉽게 큰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자기들끼리 해먹지 가깝게 지내지도 않았고 또 친분이 그리 두텁지도 않은 나에게까지 돈을 벌게 해주려고 애쓸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돈에 관한 한 세상 인심은 그렇게까지 후(厚)하지가 않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의든 아니든 거짓말을 하게 되므로 거짓말은 어쩌면 인간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하나의 요소인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정서는 순간마다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머뭇거리게 되며 그 과정에서 옳고 그름을 가릴 분별력을 얻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욕심이 발동하고 이해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과연 나의 유익을 포기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진심이 존재할 것이며 이해관계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일진대 세상에서 누가 누구를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실패는 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 때문인 경우도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그레샴의 법칙은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화폐유통의 법칙이지만 지금은 실질가치를 지닌 양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의미는 이미 퇴색됬고 단지 나쁜 것이 좋은 것을 몰아낸다는 의미로만 사용되고 있다. 즉, 같은 종류의 여론이나 정책, 상품 중에서 나쁜 것들이 좋은 것들을 압도하는 사회병리현상을 설명할 때 많이 인용되며 이 법칙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분야는 사람과 사람간의 인간관계에서다. 옛말에 “사람 하나 잘못 들어오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주로 집안에 망징패조(亡徵敗兆)가 있을 때 새 며느리를 빗대어 책임전가하는 말이어서 황당한 감이 들지만 유유상종의 법칙의 견지에서 볼 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또 일추탁언(一鰍濁堰)이란 말도 있다. 즉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방죽을 흐리게 한다는 뜻이다. 무슨 일을 좀 해보려고 하면 주변에 성공하도록 돕는 협력자는 거의 없고 실패의 길로 유인하는 헤살꾼만 득실거린다. 그 헤살꾼은 먼데서 온 전혀 관계없는 딴 사람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이고 또 주위에 있는 사물들이다. 한 개인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경영체에 있어서도 헤살에 의한 실패가 적지 않다. 아무리 규모가 작은 프로젝트(Project)라 해도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은 거의 없고 또 일이란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계획한 대로 성공(成功)하려면 CEO는 모든 팀(Team)의 관리자들을 모두가 주인이 되게 하는 리더십을 발휘하여야 한다. 물론 주인이란 단어는 팀워크(team work)란 관점에서 볼 때 주종관계(主從關係)로 명령이나 지시에 의한 독단(獨斷)이 연상되는 부정적인 말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소유권이나 대표권 또는 결과물의 귀속에 있어 주인을 뜻함이 아닌, 전체든 부분이든 담당업무에 대한 의사결정과 그에 따른 결과를 책임지는 주체(主體)로서 가져야 할 주인 된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이다. 어느 조직이든 외부의 적(敵)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는 말과 같이 CEO와 한마음 한 뜻으로 자신에게 부여된 업무를 내 일처럼 행하는 사람과 엉뚱한 딴생각을 가지고 남의 일처럼 행하는 사람과는 모든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한 조직체가 추구하는 목적과 상충되는 딴생각을 가지고 몽니를 부리는 관리자나 마음속에 사기인 심예(心穢)가 가득한 직원이 있게 되면 그들이 직접적으로 해코지를 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은연중에 여론을 오도(誤導)하고 불화를 유발하여 전체 분위기가 흐려지므로 유유상종의 법칙에 의해 사기(邪氣)인 고만이를 불러들이게 된다. 따라서 예상하지 못한 장애나 고장 등 사고가 빈발하고 사소한 실수로 인해 일이 틀어지게 되는 등 문제가 발생하게 되므로 가까스로 성사(成事)는 할지 몰라도 목적달성에는 실패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렇듯 그레샴의 법칙이나 일추탁언이 현실이라면 예로부터 전해오는 바르지 못한 것이 바른 것을 짓밟을 수 없다는 뜻의 한자성어인 사불범정(邪不犯正)이나 만사는 반드시 정리(正理)로 돌아간다는 뜻의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은 허구란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그레샴의 법칙이나 일추탁언은 사(邪)가 정(正)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기인 고만이는 원기에 비해 세력 면에서는 아주 보잘것없으나 전파력이나 침투력이 강하므로 어쩌다 사소한 잘못된 틈이라도 생기게 되면 어김없이 파고들어 전체를 망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 사람을 잘 만나야 실패를 면할 수가 있다.
실패는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 아니라 자신이 잘못 선택한 길의 막다른 벽에 다다른 것이다. 그러나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그 벽을 잔꾀를 부려 돌파하려고 만용이나 오기를 더 이상 부려서는 않된다. 그러면 상처만 더 커질 뿐이다. 누구에게나 ‘넘사벽’은 존재한다. 하지만 실패의 모든 원인은 앞을 가로막는 그 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있는 것이고, 자신이란 곧 마음이다. 인간사 모든 곳에 유유상종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정도(正道)를 벗어난 예심(穢心)으로는 아무리 잘해보려고 발버둥을 친다 해도 치면 칠수록 실패의 늪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된다. 인간은 조화원(造化元)이 체화(體化)한 화신(化身)이므로 본성은 누구나 다 같지만 현재의 심성(心性)은 마음속의 심예에 따라 수시로 달라지게 된다. 욕심과 남을 해하려는 생각. 의심과 염려. 공포심 등 예억(穢憶)들을 말끔하게 버리고 본래의 정심(正心)을 회복하면 심안(心眼)이 열려 세상의 모든 사물이 바르게 보이고 따라서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무슨 일이든 행위자의 마음속 의지가 유유상종의 법칙에 의해 원기와 상합(相合)하게 되면 그의 필성(弼成)으로 성사되는 것이며, 예심에서 나온 허황된 계획이나 바람은 원도(元道), 즉 순리(順理)와 상충(相沖)하기 때문에 원기의 필성(弼成)을 얻지 못해 성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화(禍)를 불러들이게 된다. 자신을 망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이다. 따라서 사사불성(事事不成)을 사사여의(事事如意)로 바꾸는 길 또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