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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거짓인질극 강경대응>의 줄거리:
사람을 인질로 붙들고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고 벌이는 소동이 인질극입니다. 사람 목숨이 담보 잡혀서 어쩔 수 없이 인질범들의 요구 조건에 고분고분 임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아담 이후 사람들의 삶은 전적으로 인질극의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세상이 미래의 나, 행복한 나를 인질로 잡고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상의 요구에 한 없이 부드럽게 순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마귀의 인질극에 대한 강경대응이 바로 선민의 회막 신앙입니다.
거짓인질극 강경대응
(출33:7~23)
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거짓 인질극 강경대응>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거짓 인질극 강경대응’
1972년 9월에 서독의 뮌헨에서 20회 하계올림픽이 개최 중이었습니다. 9월 5일 새벽 4시에 운동선수복장을 한 괴한 8명이 올림픽선수촌 담장을 넘게 됩니다. 자동소총과 수류탄으로 중무장을 한 괴한들이 곧바로 28명의 이스라엘 선수들이 묶고 있었던 숙소로 침입해 들어가자 총성과 비명소리에 놀란 이스라엘 선수들이 재빨리 창문을 통해 몸을 피했습니다만 벌써 2명은 죽고 9명은 인질로 잡힌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복면을 한 괴한들은 자신들을 팔레스타인 무장저항단체인 검은9월단 소속으로 밝히면서 이스라엘에 억류된 자기들의 동료 200명을 석방하라고 요구합니다. 서독 경찰들이 몸값을 주겠다고 이들과 수차례 협상을 시도합니다만 결렬되면서 결국은 총격전이라는 강경책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선수 9명이 모두 숨지게 되고 테러범들도 5명은 사살되고 3명은 생포가 됩니다. 비참한 참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올림픽사상 최대 규모로 122개국의 7,000여명의 선수가 참여해서 가장 화려한 대회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던 뮌헨올림픽이 그만 유혈사태로 얼룩지고 말았습니다.
인질(볼모), 피부에 닿게 이해를 위해서 우리 역사상 제일 유명한 볼모가 있지 않습니까? 조선 16대 인조 임금 때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상태에서 소현세자와 인조 임금의 또 다른 아들인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갑니다. 이 인질을 잡는 이유는 인질들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고 벌이는 소동입니다. 인질극을 벌이면 많은 경우에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들이 볼모(담보)로 잡혀있기 때문에 고분고분 그들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앙이란 바로 이런 악랄한 인질극에 강경 대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인질극에 순응하거나 협상하거나 부드럽게 대응하는 사람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회막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데 이 회막은 번제단이 있는 정식 회막이 아니고,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서 받은 영적타격을 회복하기 위해서 임시로 만든 회막인데 이 회막이 마귀 인질극에 대한 강경대응책입니다. 뮌헨 올림픽의 검은9월단 인질극처럼 인질이 모두 죽는 참사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회막을 세운 모세의 마음에는 바로 이런 마귀의 인질극에 강경대응을 위한 의도가 들어있지만, 모세의 의도대로 이루어지는 회막의 장치를 통해 마귀의 인질극에 강경대응을 할 때는 절대로 뮌헨에서처럼 9명의 인질이 다 죽는 그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이 회막을 세운 모세의 의도를 따라서 강경대응하지 않을 때 인질 9명이 죽는 것과 같은 참사가 벌어지게 됩니다. 강경 대응해야 참사가 없어요. 왜냐하면 마귀의 인질극은 근본적으로 거짓 인질극으로 마귀의 말에 순응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고분고분 그들과 협상할 필요도 없고 그들의 요구에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은 우리에게 진짜 귀중한 것을 마귀는 하나도 인질로 잡고 있지 못하고 사기를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어제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신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한탄이 담긴 그 주제를 이어가는 것이고 확장시켜 가는 거예요. 목이 곧은 백성 됨이 드러난 금송아지 사건을 고려해서 강경대응하기 위하여 만든 장치가 바로 회막인 것입니다. ‘목이 곧다’는 것이 ‘남에게 호락호락 굽히지 아니하며 억지가 세다’는 것인데, 억지라는 말이 들어가서 약간 부정적 뉘앙스가 있습니다만 목이 곧다는 것이 양면성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목이 부드럽게 잘도 끄덕끄덕하는 어떤 한 방면이 있기 때문에 다른 방면으로는 목이 곧은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목이 부드럽다는 것은 마음 깊이 명심하고 잘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그대로 요청에 순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한 쪽으로 아주 부드럽게 잘 받아들이면 다른 한 쪽으로는 반드시 강경하게 거부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해 목이 곧음만 있는 게 아니고 세상을 향한 목이 곧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목이 부드럽고 끄덕끄덕 잘 하고 명심하면 세상을 향해 목이 곧을 수밖에 없고 세상을 향해 목이 부드러워서 끄덕끄덕해서 세상의 요청에 순응하면 하나님을 향해 목이 곧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좋은 예가 베드로와 요한이 부활하신 예수를 전한다고 두드려 맞고 다시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을 전하지 말라는 산헤드린공회의 협박을 당할 때 행4:19-20절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아주 강경합니다. 산헤드린공회를 향해서 목이 곧다 못해 강철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전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너무 부드럽게 뼛속깊이까지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목이 곧다 곧다, 해도 초대교회 교인들보다 곧은 자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며 다니느라 직장 잃고, 수입 없고, 집 잃고, 전토 잃고, 가족이 뿔뿔이 헤어지고, 나라 잃고 세상에서 정한 가치 제로상태로 세상을 향해 목이 곧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선 먹고 살 것을 장만하라고 하고, 복음도 좋고 예수도 좋고 예수 믿어야 하지만 우선 살 궁리부터 하라고 하고, 네 노후는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고 하고, 네 자식들의 미래는 앞으로 어떤 상태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그렇게 세월 편하게 속편하게 복음만 전하며 다니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굽히지 않는데 세상의 요청대로 직장 구하려고 염려하고, 수입 없다고 염려하면서 그것들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향해 목이 부드러운 자들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 한 분만 있으면 된다고 믿었고 하나님을 향해 부드러운 자들이었습니다. 직장도 없고 수입도 없고 집도 없고 전토도 잃고 나라도 잃고 가족과도 헤어지고 핍박 받는 상황에서 이 세상이 정한 가치가 아무것도 없는 그런 상황에서 세상의 가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조금도 노력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면서 다녔는데 이게 바로 강경대응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수입이 없고, 재산이 없고, 돈이 없고, 직장이 없어도 내 행복과 내 기쁨과 내 만족은 나의 미래는 하나님께서 쥐고 계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해서 강경대응을 한 것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반복해서 살펴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향해 왜 그토록 부드러운 목을 가질까요? 왜 그렇게 끄덕끄덕하면서 세상의 요청에 대해서 오금을 펴지 못한 채 질질 끌려갈까요?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목이 곧은 자로 살아갈까요?
‘하나님을 향해서 목이 곧다’라는 것은 하나님만 있으면 기쁘다는 이 사실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죽어도 이 땅에서 무언가 조건을 갖추어야 만족할 수 있고 기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평생 세상이 정한 가치들 돈, 건강, 승진, 생활의 안정, 형통, 인정, 명예 등을 추구하며 살다가 죽는 것으로 이게 바로 세상에 호락호락한 상태로, 아담 타락 후에 인간의 삶은 전적으로 인질극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에게 속아서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에덴에만 기쁨이 있는데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기쁨이 없으면 생명이 없는 것이고 만족이 없으면 살아있는 게 아니고,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삶은 소모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이 에덴 밖의 인간세상에서도 얼마든지 기쁨이 있고, 인간세상이 나의 기쁨과 만족을 담보잡고 있는 것처럼 속여 버렸습니다. 세상이 나의 기쁨을 담보잡고 있고 또 다른 말로 하면 미래에 성공한 나를, 미래에 행복할 나를 인질로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한 나와 행복한 나를 풀어주려면 협상을 해야 되는데 그 협상이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대로 살아라.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찾는다고 하면서 새벽 형 인간이 되어라. 이래라 저래라’라고 하는 모든 율법조항으로 사람들을 얽매어 놓았는데 우리는 그것을 하지도 못하면서 하려고 합니다만 이게 바로 마귀의 인질극에 놀아나서 협상테이블에 앉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성공해야 뒤처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덴에서 쫓겨난 것을 안타까워하고 아쉬워하는 인간이 아무도 없어요. 에덴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비극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모두가 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에덴에서 쫓겨난 것을 아쉬워하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조직과 체계가 지배하고 있는 인간사회 인간세상으로부터 뒤쳐질까만 두려워하고, 인간세상에서 낙오자가 될까 두려워하고, 인간세상에서 밑바닥 인생이 될까 두려워하고 에덴에서 쫓겨난 것을 두려워하진 않고 그것을 한탄하진 않아요. 그러면서 전부 이 인간세상이 내 미래에 아름답고 성공적이고 형통한 나를 인질로 잡고 있다고 믿고 그 인간세상이 요구하는 바를 따라서 협상을 하면서 그대로 순응하며 살아가느라고 그렇게 세상을 향해서 목을 끄덕끄덕 잘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인들과 사도들이 보여 준 모습은 죽어도 기쁜 나, 만족한 나, 행복한 나는 이 세상 속에서 담보 잡혀 있는 게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손에 있고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고,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고 이 인간세상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지 나는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고 세상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이 완강한 강경대응책이 바로 오늘 본문의 회막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금송아지를 섬긴 이유는 내 행복이 이 세상의 물질의 풍요와 다산에 있다고 믿고, 세상이 그렇게 담보잡고 있는데 그 행복을 금송아지를 섬기면서 찾고, 사업을 해서 찾고, 돈을 잘 벌어서 찾고, 장사를 잘해서 찾고, 열심히 살아서 찾고, 부지런해서 찾고, 공부 많이 해서 찾고, 높아져서 찾고, 관직을 얻어서 찾자고 나타난 것이 하나님을 향하여 목이 곧은 백성이 돼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강경책인 회막을 세운 것입니다. 회막을 세웠다고 하니 남편의 사업문제가 있을 때 기도원에 가서 ‘내가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매달려서 사업이 잘되게 해주시겠다는 응답을 받고야 내려올게. 응답 받지 못하면 내려오지 않을 거야.’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건 마귀의 인질극에 놀아나서 세상의 요청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요청에 순응하지 않고 뻣뻣하게 대하려면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 내가 굶어 죽더라도 하나님 한분으로 마음이 기쁘고 즐거워하다가 죽겠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으니 십자가 붙잡고 그렇게 싸우다 죽겠다’라는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굶어죽더라도, 망하더라도, 하나님 한분이면 된다고 믿다가 죽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막은 이스라엘 250만이 동서남북으로 진영을 짜면 그 한 가운데 있는 것인데, 아직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섬기는 바람에 일이 계획대로 진행이 되지 않았습니다. 번제단이 만들어지지 않은 대응책으로 진영 바깥에 회막을 만들었는데, 무슨 뜻인가 하면 250만이 동서남북으로 각 방면에 세 지파씩 자리를 잡고 진을 친 진영 안에서 이스라엘의 삶이 진행되는데 본문에 보니 “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장막을 처서 회막이라 이름하니”라고 합니다. 회막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그리로 나갔다”라고 합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진 바깥에 회막을 쳤다’는 것은 회막이 지금 광야 한 가운데 쳐져 있는 것입니다. 진은 250만이 모여 살고 있는 삶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회막이 쳐진 곳은 삶이 죽어버린 자리로 삶의 바깥쪽입니다. 어떤 주석들은 삶에서 일어난 일들의 해답을 얻기 위해 회막으로 나갔다고 하는데 그런 게 아닙니다. 죽음의 자리입니다. 그 해답을 얻겠다고 하는 마음이 있으니 금송아지가 해답으로 등장한 것이지요. 문제를 내가 왜 문제시 하는 것입니까? 무슨 자격으로 삶에 대해서 내가 왜 문제제기를 하는 것입니까? 내가 삶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할 정도로 해답을 구해야 될 만큼 주체적인 위치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회막의 자리가 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라고 강조하는 것은 내 마음에서 삶이 죽어버리는 것을 뜻하고, 내 마음에서 삶이 죽어야 하나님을 앙모하게 됩니다. ‘앙모한다’는 것은 ‘우러러 그리워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이 믿음을 고백하려면 내 마음에서 삶이 죽어야 합니다. 삶이 내 마음에서 살아있으면 아직도 이 인간세상에서의 삶이 내 행복을 볼모잡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 행복을 붙잡고 계신다고 믿는다면 내 마음에서 삶에 대해서 죽고 삶의 현장에서 완전히 떠나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삶의 죽은 자리를 만들어 놓으신 곳, 광야의 회막에 대신해서 서있는 자리가 갈보리 십자가 자리입니다. 내 마음이 주님의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 그 현장에서 삶이 죽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죽었으니 삶이 없어요. 그럴 때 여호와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 회막으로, 회막이 성막의 전신이고 또 성막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전신입니다. 삶에 대해서 죽는 것이 강경책입니다. 질질 끌려가지 말아요. ‘너, 지금 돈이 없는데 돈 걱정 안 해도 되냐? 너 지금 자식이 이 모양인데 닦달을 해야 되지 않느냐? 너, 건강이 이 모양인데 건강을 위해서 뭘 해야 되지 않느냐?’라는 이런 요청에 순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는 회막과 진영을 왔다 갔다 하면서 하나님과 만나 대화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청년이 있는데 회막에 머물러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때문에 아예 삶을 살지 않기로 작정을 한 사람입니다. 게을러서 삶을 살지 않는다거나 도박에 팔려서 골프에 빠져서 술에 취해서 삶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 때문에 삶에 대해서 죽어 버린 사람이 여호수아입니다.
보세요. 인류역사상 여호수아처럼 인간세상에서의 삶을 치열하게 성공적으로 산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스라엘 250만 오합지졸을 끌고 가나안 족속들을 무찌르면서 250만을 가나안 복지에 정착시킨 사람이 여호수아입니다. 수1:7절에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라고 하십니다. 전쟁을 앞둔 지도자에게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라고 하십니다. 아직은 이스라엘을 이끌 형편이 아니므로 여호수아는 회막에서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는데 여호와를 앙모하기 위해서 삶에서 죽어버렸습니다.
성공적인 나, 행복한 나, 만족으로 충만한 나는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에게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삶에 대해서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장중에 나의 미래가 있다고 믿고 하늘을 향해서 하나님만 앙모하는 그 사람을 통해서 인류역사상 그 누구도 여호수아만큼 치열하지 못했을 정도로 치열한 삶을 살게 하시고 뿐만 아니라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수행해 나가십니다. 이게 바로 강경하게 세상을 맞서서 세상에 대해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알렉산더나 칭기즈칸은 치열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어간 것이지요.
마귀는 자꾸 세상을 통해 인질극을 벌입니다. 돈 걱정하고, 미래걱정하고, 자식걱정하고, 건강 걱정하라고 하면서 우리 마음을 이 세상으로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끌어들이는 대로 이 세상에서 뭔가 노력을 대가로 지불하면 담보로 잡혀있는 나의 보장된 미래, 성공적인 미래, 나의 형통하는 미래가 주어질 줄을 아는데 거짓으로 인질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나 하나, 기쁜 나 하나, 행복한 나 하나, 그리고 우리 가족들 하나, 하나 인질로 아홉 명, 열 명, 스무 명씩을 붙잡고 있는데 다 거짓말입니다. 결코 이 세상은 행복한 나를 담보잡고 있지 못합니다. 행복한 나는 하늘에 계신 지금 위에 계신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므로 속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강경하게 이 세상이 나에게 무엇을 해야 된다고 강박관념을 심어주면서 요청할 때, 인질극의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는 것을 알고 거짓 인질극인줄을 알고 강경대응으로 나서되, 회막의 완성이신 갈보리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이 삶에 대해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왜 죽어요? 게을러서? 능력이 없어서? 할 게 없어서? 판단력이 부족해서? 분석력이 부족해서? 아니요. 하늘에 계신 여호와를 앙모하기 위해서.
하나님 한분 있으면 행복한 나, 성공한 나, 형통한 나, 만족한 나는 얼마든지 주어질 수 있고, 지금 위에 계신 하나님 한분이면 된다는 생각으로 하나님께 한없이, 한없이 부드러워서 뼈까지 다 녹아내려서 하나님 한분이면 된다는 이 말씀으로 세상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나갑니다. 내 마음에서 내 모든 미래를 담보잡고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는데 마귀가 사용하고 있는 인간세상 자체를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여호수아의 미래처럼 여호수아가 활동하는 인간세상도 실제로는 하나님 안에 있더라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우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고 계속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앙모하고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삶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내 마음에서 다른 데로 도망가거나 이단에서 하는 것처럼 재산 팔고 어디로 들어가거나 하지 말고 직장에서 가정에서 삶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시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가 일어난 것이에요. 그러므로 교회에 들어와서 예배를 드리는 중에도 마음에 사업걱정하면 그 사람은 마귀의 인질극에 놀아나는 것이고 시장 한 복판에 들어가서도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기억하면 그 사람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회막이 쳐진 것이고 강경 대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앙모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만난 자를 하나님이 장중에 붙드시고 하나님 당신의 뜻을 인간세상 안에서 펼쳐 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펼쳐 나가실 인간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를 미리 생각할 것 없고, 그러면 또 빠져 들어가니 또 세상에서 뭔가 돼 보겠다고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우상숭배의 현장으로 다시 빠져 들어가므로 잊어버리고 죽는다는 게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니, 세상에 대해서 마음이 완전히 죽어버리는 강경대응책을 통해서 마귀의 거짓 인질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서 하나님을 갖고 하나님으로 하나님 부자가 되는 참 선민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지금까지 생애의 99%를 마귀의 인질극에 놀아나면서 그 협상테이블에 앉아 마귀가 사용하는 세상의 요구에 응하느라 진땀 빼며 살았습니다. 강경대응하게 하시며 그러기 위해서 시장 한 복판에서 우리의 가정 안방에서 갈보리 십자가 주님을 늘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