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바울의 미래관(保羅의 未來觀)
3월 19일 (주일)
盖人以希望生活, 若無希望, 有死而已也. 彼乞人在路傍乞錢, 亦有希望, 彼病人在院中呻吟者, 亦有希望. 西國有試生者, 命病者, 汝血漏盡死, 醫以水作血漏聲, 須臾人果澌眩幾欲死, 醫更命曰 非血淸也乃水漏, 汝血自若云則人果復甦云, 此非血之有無也. 乃希望之有無也. 吾等心靈上果有主血乎? 無血是證無望死而已也. 若無望農夫不必流汗, 生徒不必受業. 世人皆言生活在衣食住三件云, 而其實則在未來希望也. 余讀新報, 某處有富豪累豊所得, 身致數千石, 且子孫滿堂, 而可謂地上仙也. 有何不足而乃飮毒自殺云. 此何故也? 其心中有不可言之罪惡, 而使絶其人之希望, 故不顧人世之榮光, 至於自盡者 , 以無希望故也. 然則使人絶望果何物也? 有兩樣. 一則自己, 一則他人. 自己何能使自己絶望也? 初因甚愚, 然人世之失敗何物非自己爲之也? 自斧自斫自繩自縛也. 人若知此, 則所謂自己云者, 絶對保護不被蹂躪, 何嘗有一退于後也? 今日淸國之被英國蹂躪, 皆自爲也. 阿片自吸也, 毒酒自飮也. 奸淫自犯也, 故人當知自己, 不知自己者何知他人也? 故學貴知己, 友貴知己. 某西政府, 注文工場造捕人鐵甲, 自働車工民曰 此自繩自縛也. 不應注文. 我國前有金永振, 造殺人械, 金先入其械而死, 故何事非自爲也? 仰天而唾, 唾墜于自己面上, 經亦云 齒償齒目償目, 亦此理也. 推而往之, 知自己知自家知自民知自國, 彼倡說利己主義者, 亦有眞理, 楊朱曰 拔一毛而利天下, 不爲之者. 非獨思自己也. 其實先害自己者, 不能利他人故也. 余幼時讀此甚笑楊氏, 今日思之, 其言切矣. 虛己爲美德, 而自古未有害己之虛也. 虛己欲受他也. 虛舟泛中流, 必待人滿乘也. 海虛故滿, 覆盃則水不能入, 正盃則雨水均入也. 書曰 滿招損謙受益也, 由此觀之, 虛亦欲受故也. 故自在失敗者, 不必尤人, 又不必怨天. 必怨自己可也. 常使自己滿足不縮, 則生命自在其中. 我之未來榮耀必顯, 人若失敗, 或讐怨他人, 我之失我之敗, 毫不干自己, 皆在他人, 萬善在己, 萬惡在人, 如此怨謗不已者, 不知自己, 而已入於失敗者, 他人必有干涉, 甚者奪之殺之, 無有餘地. 於是怨謗起焉, 此非愚人而何? 我不善則非善者干涉也, 必有惡者干涉. 我不强則非義者導之, 必有惡者干我. 我之所享未來榮光, 彼已奪去也. 然有一種眞理不變者, 自古以惡陷人擠人者, 有能興昌者乎? 我無罪受辱, 則必有伸雪之日矣. 故主曰受難者當安心也. 人生之榮光不足貴也. 何故? 人與人平等也, 神與之榮光, 貴不可言, 何故? 卽自上而下也. 皇帝以花冠, 加姜邯贊之頭, 人皆仰視, 今日必自民任政府受賞者, 亦貴又貴也. 又有蓬麻之友互相助長, 古有管鮑, 有劉關張三人, 皆因人而成希望也. 有過失相規, 事業相濟, 神亦慰人而成事, 人何不依人而成功也? 然如上所言, 我惡 惡人來交, 我善 善人來交. 此理不爽. 成希望者, 有兩樣, 一自小而成理也. 主言芥種之譬, 警勸門徒者, 以此世人蔑視微小, 人微則侮, 物賤則棄. 主則不然, 視小者尤貴於大者何也? 其中有不朽之希望也. 稅吏亦有希望, 癰者亦有希望, 主前無棄人. 敎會亦有三時期, 曠野敎會, 檉神敎會, 千年王國. 耶蘇生活亦有三期, 幼時苦難時榮光時, 無非自小而成, 猶大雖小, 後必爲世界國, 以耶路撒念(예루살렘)爲聖京, 民位亦然, 前日民不敢干政治, 今日以民衆爲本, 皆自小而成, 加岳山雲片雖小, 有雨量之無數, 見雲者初則不甚奇異, 會有雨量多少也. 保羅言榮光, 必多言苦難, 無苦難之榮光, 窖蔥無强力也. 礫田之苗易枯, 荊藪之苗皆易靡者. 皆以此故也. 吾人之生活苦難必要也. 今朝鮮人, 困於無舍, 又困於無識, 無困賜福, 非神之意. 故自古達人, 初困後達皆以此也. 然以罪受困, 困而已, 無所望也. 無罪受困, 必有伸雪之日也. 吾等當無罪以生, 當從眞理以生可也. 神必以天國享我, 我享天國亦所當然也. 經言神望衆子之顯者何也? 神之子必多數困難後, 至自主堂也. 自主則必贖羊也. 故吾當忍耐而待也. 諸位念之哉!
인간은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삽니다. 만약에 희망이 없으면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거지가 길 가에서 구걸을 하여도 역시 희망을 가지고 있으며, 병자가 병원에 들어가서 고통을 호소하여도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양에 생명을 시험하는 사람이 있어서 병든 사람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피는 지금 자꾸 새어나오고 있소. 만일 그 피가 다 나오면 죽게 됩니다.’ 하고, 물로써 피가 새어나오는 소리를 들려주었더니 조금 있다가 그 병자는 어지럽다고 하면서 거의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의원은 다시 말하기를 ‘그 소리는 피가 새어 나오는 소리가 아니고, 물이 새는 소리요. 당신의 피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하자 그 사람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피의 유무에 달린 것이 아니라 희망의 유무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들의 심령에 과연 주님의 피가 있습니까? 피가 없다면 이는 희망이 없다는 증거이니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만일 희망이 없다면 농부는 땀을 흘릴 필요가 없고, 학생은 공부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람의 생활은 의식주 세 가지에 달렸다고 하는데 실제는 미래의 희망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신문에서 읽은 이야기인데 ‘어느 부호가 여러 해 풍년이 든 소득으로 자기 자신이 수천 석의 곡식을 거두었고 또한 자손이 집안에 가득하여 이 세상에 사는 신선이라고 생각할 만한데도 무엇이 부족한지 음독자살을 하였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죄악이 있어 그의 희망을 끊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영광을 돌아보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이른 것입니다.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절망을 주는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자기이고 하나는 타인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자기에게 절망하게 합니까?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실패에는 자기 스스로 만들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자기 도끼로 스스로 발등을 찍고, 자기 밧줄에 자신이 걸려드는 것, 자승자박(自繩自縛)입니다.
사람이 만일 이런 사실을 안다면 이른바 자기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보호하고 남에게 짓밟히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한 발자국이라도 뒤로 물러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청나라가 영국에 유린을 당하는 것도 모두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아편을 자기들 스스로 흡입하고, 독주를 마시며, 간음하는 죄를 스스로 범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마땅히 자기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모르는 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알겠습니까? 그래서 자기를 아는 학문이 중요하고, 자기를 알아주는 친구가 귀한 것입니다. 서양 정부에서 사람을 잡는데 쓰는 철갑(鐵甲)을 만들어 달라고 기술자에게 주문하였더니 자동차 공장의 기술자가 말하기를 ‘자승자박(自繩自縛)하는 것이라’ 하고 그 주문에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전에 김영진(金永振)이라는 사람이 살인 기계를 만들었는데 김영진이 그 기계에 들어가 먼저 죽었습니다. 스스로 하지 않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늘을 보고 침을 뱉으면 그 침이 자기 얼굴에 떨어집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아라.’고 한 말도 다 이런 이치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나간다면 자기를 알고, 자기 집을 알고, 자기 민족을 알고, 자기 국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기주의를 앞장 서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진리는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철학자 양주 (楊朱)가 말하기를 ‘나의 털 하나라도 뽑아주면 천하가 이로워진다고 해도 나는 뽑아주지 않겠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자기만을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자기를 해친 자는 타인에게도 이로움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릴 때 이 글을 읽고 이기주의자 양씨를 비웃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말은 절실한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것[虛己]이 미덕(美德)이 되지만 예로부터 자신을 해치면서까지 비우는 일은 없습니다. 자신을 비우는 것은 남의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빈 배가 물 한 가운데 떠 있는 것은 반드시 사람들이 가득 차도록 타기를 바라서입니다. 바다도 비어 있었기 때문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잔을 엎어놓으면 물을 담을 수 없으나 잔을 바로 놓으면 비나 물이 골고루 들어갑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자만하면 손해를 보고, 겸손하면 도움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볼 것 같으면 비운다는 것은 남의 것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실패를 가지고 남을 탓할 필요가 없고, 또 하늘을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반드시 자기를 원망하여야 합니다. 늘 자신에 만족하고 위축되지 않으면 생명이 저절로 그 가운데 있습니다. 내 미래의 영화와 광채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실패를 하고 나면 간혹 남을 원수같이 여깁니다. 나의 실패가 나와는 조금도 관계가 없고 그 원인이 모두 남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 가지 착한 일은 내가 했고, 만 가지 악한 일은 남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원망과 비방을 그치지 않는 자는 자기 자신을 모를 뿐 아니라 실패에 들어간 자입니다. 그렇게 되면 타인을 반드시 간섭하게 되고, 심한 경우 빼앗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여 자신을 돌볼 여지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원망과 비방이 일어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착하지 못하면 착한 사람이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악한 사람이 간섭합니다. 내가 강하지 못하면 의로운 자가 인도해 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악한 자가 나를 간섭합니다. 내가 누려야할 미래의 영광을 악한 저 사람들이 이미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나 진리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으니, 그것은 예로부터 악으로 남을 모함하고 넘어뜨린 자가 능히 흥왕하고 번창한 자가 있습니까?
내가 아무 죄 없이 욕을 당하면 반드시 그 원통함이 풀어질 날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르기를 ‘어려움을 당한 자 안심해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의 영광은 족히 귀한 것이 못 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는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는 영광은 그 귀중함을 말로써 다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곧 위에서 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화관(花冠)을 강감찬의 머리에 씌워주자, 사람들은 모두 우러러 보았습니다. 오늘 날은 반드시 민임정부(民任政府)로부터 상을 받은 자가 또한 귀하고 또 귀합니다. 또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친구끼리 상호간에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으니, 옛날에는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의 관포지교가 있고,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의 도원결의가 있는데, 이 모두 사람끼리의 인연으로 희망을 이룬 경우입니다. 허물이 있을 때 서로 충고하고, 사업을 할 때 서로 도와주면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위로해 주기 위하여 일을 성취시켜 줍니다. 사람이 어찌 사람에 의하여 성공할 수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앞서 한 말과 같이 내가 악하면 악인과 사귀게 되고, 내가 착하면 선인과 사귀게 됩니다. 이 이치는 틀림이 없습니다.
희망을 이루는 데는 두 가지 모양이 있으니 하나는 작은 데서부터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겨자씨를 비유로 든 것은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작은 것을 멸시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은 작으면 업신여기고, 물건은 흔하면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아서 작은 것도 큰 것보다 더욱 귀하게 여기셨으니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 가운데는 없어서는 안 될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천시 받던 세리에게도 희망을 주셨고, 한센씨병 환자에게도 희망을 주셨습니다. 주님 앞에는 버릴 사람이 없었습니다. 교회사도 역시 시기를 셋으로 나눌 수 있으니, 광야(曠野)교회, 성신교회, 천년왕국입니다. 예수님의 생활도 세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린시절, 고난시기, 영광시기입니다. 이 모두 작은 데서 시작하여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유대나라가 비록 작았지만 뒷날 세계적인 나라가 되었고, 예루살렘이 거룩한 성이 되었습니다.
백성의 지위도 이와 같습니다. 옛날에는 백성이 감히 정치에 간섭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은 민중이 정치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작은 데서부터 이루어진 것입니다. 갈멜산[加岳山]의 구름조각이 비록 작아도 많은 비를 품고 있습니다. 그 구름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리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마침내 많은 비를 내려 주었습니다.
바울은 영광을 말할 때 반드시 고난을 많이 말하였습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구멍 난 파처럼 강한 힘이 없습니다. 자갈밭의 싹은 마르기 쉽고, 덤불 속의 싹은 쓰러지기 쉽습니다. 이 모두 고난을 못 이기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활에는 고난이 필요합니다. 지금 조선 사람은 집이 없어 고난을 겪고, 또 무식하여 고난을 겪습니다. 고난 없이 복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세상 이치를 통달한 달인은 고난을 먼저 겪은 뒤에 통달하게 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지어 고난을 받는 것은 고난이 있을 뿐이고 희망이 없습니다. 반대로 죄 없이 고난을 받으면 반드시 억울함이 풀어질 날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죄 없이 살아야 합니다. 꼭 진리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이 역시 마땅합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많은 자녀들이 드러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은 뒤에 주님의 교회당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주께로부터 온다는 것은 반드시 양으로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생각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