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등장 이후 미국 중심의 국제 자유주의적 헤게모니 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개방적 시장질서 대신 “미국 우선”의 보호주의적 무역정책을 채택하였고, 트럼프의 비일상적인 행태는 미국 Soft Power에 상당한 손실을 안겨주고 있다. 트럼프 시기 미국은 더 이상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 유지가 어려워지는 것이 아닌 가하는 우려도 증가하고 있다.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위계적으로 작동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 도래하고 있다. 향후 국제질서는 이안 브레머가 예측한대로 어떠한 헤게모니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 G-Zero의 시기, 혹은 중국의 영향력 확대로 귀결될 가능성도 증대되고 있다.
반면에 중국은 크게 약진하고 있다. 중국은 이미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였고, 국제통화기금(IMF) 추계에 따르면 중국은 구매력 기준으로는 2014년에 미국을 추월하였다. 2020년대 중반이 되면 GDP규모에서도 미국을 따라 잡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보다 주목해야 할 사안은 중국 내부 경제구조의 변화가 추동할 대외정책의 변화이다. 중국은 14억이라는 단일 시장을 바탕으로 내수 역량을 급속히 강화하면서 일명 “홍색공급망”으로 불리는 자기 완결적인 시장 경제체제를 완성하려 하고 있다. 중국 내 경제는 이제 중국 고유의 규칙과 규범에 따라 질서를 형성해 나가겠다는 의미이다. 결국 국제경제에서 트럼프도 보호주의로 가지만, 중국 또한 보호주의로 가는 모양새이다.
이러한 변화가 지니는 대외정책적인 함의는 중국의 미국에 대한 취약성, 민감성이 점차 약화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보다 동등한 대미관계의 형성, 즉, 중국이 의미하는 “신형강대국 관계”의 형성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틸러슨 국무장관은 금년 4월 중국 방문시 이미 자발적으로 이 관계를 인정해 버렸다. 미중 양국관계는 앞으로 경제적으로는 상호의존의 방향으로 진전되기 보다는 훨씬 더 독립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대북핵 및 한반도 정책 역시 더불어서 진화하고 있다. 중국은 2016년 말 이후 그간의 수세적이고 대응적인 북핵정책을 넘어 더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한반도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비핵화와 평화협정 동시 병행안이나,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과 한미 합동 군사훈련의 잠정 중단안 등이 그것이다. 중국은 최종적으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한반도 전역에 대해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구상을 지니고 있다.
북한은 이에 대해 강한 반발을 하고 있다. 북한은 이미 2016년 제4차와 5차 핵실험, 제7차 노동당 대회를 통해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하였다. 중국이나 미국의 이해와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계획대로 핵무장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에 따라 북중 관계도 전례 없이 악화되었다. 북한은 미중 관계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독립변수가 되려 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최근 4월 미중 정상회담을 통해 미중이 공조하여 대북 압박을 강화하기로 한 합의에 크게 반발하면서 최대한 빨리 자신의 핵미사일 역량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사드문제는 미중 간 구조적 경쟁의 과정에서 미국과 그 동맹들이 중국을 억제할 대중 반 탄도미사일(MD) 체계를 구축하는 시도로 중국이 인식했기 때문에 악화되었다. 그리고 그간 한반도 문제는 협상과 타협으로 미중 간의 관리한다는 묵계를 미국이 방기하는 신호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트럼프 시기 재 강화된 미중 공조는 사드 문제의 전략적 민감성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중국 역시 사드 관련 출구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이는 새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한국에 사드 문제 해소와 한중 관계 개선에 일말의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이러한 정세변화는 한국 문재인 정부가 직면한 긴박한 당면과제와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제안을 가능하게 한다. 우선, ‘면밀관찰,’ ‘전략점검,’ ‘신중행동,’ ‘국제공조’를 유지하는 것이다. 즉, 강대국이 아닌 중견국가로서 강대국의 움직임을 통해 그 방향을 읽고, 그들의 강점과 한계를 잘 읽어내고 준비하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특히 새 정부의 대외정책 우선순위는 대북 국제공조의 유지가 되어야 한다. 미중이 북핵문제에 대해 이처럼 공조를 강화한 예가 없고, 북한은 한국의 정책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인 정책을 취할 것이고 이를 억제하기 위해서 국제공조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분법적 사고에 입각한 편승형 정책은 최대한 자제를 권고한다. 현재 일반적인 사고는 ‘위계성을 전제한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와 정치 현실주의에 입각한 ‘군사부문’의 중시이다. 이러한 전제는 동북아에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미중 관계 속의 한국의 현실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세 번째로 사드 배치관련 출구전략을 잘 구사하여야 한다. 새정부 출범이후 등장한 대중 낙관론은 비관론 못지않게 위험하다. 사드 문제는 한미동맹, 한국의 안보적 이해, 중러의 전략적 이해를 해소할 수 있는 타협안을 찾아내야 하고, 신중하게 처신할 것을 권고한다. 실무적으로는 사드 배치와 용도를 한반도에 한정 짓는 프레임을 유지하고 이를 제도화하는 것이 대안이다. 한미 동맹을 존중한다는 원칙을 천명하고, 동시에 중국을 겨냥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분명히 해야 한다. 미국과 이미 타결한 “북핵 대응용, 1개 포대, 종말단계 레이더 고정배치”의 원칙을 분명히 하고, 추가적인 용도의 변경이나 배치 및 비용의 발생은 한국 정부와의 새로운 협상의 영역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 촛불 혁명으로 위상이 높아진 국회의 역할을 잘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새로운 현상변경은 한국의 안보 환경에 심각한 변화를 초래하고, 막대한 추가 예산을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에 국회동의 사안으로 공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정책은 주한 미군의 안전에 대한 우려에 성의를 다하면서도, 중러가 우려하는 사드의 대중러 견제용이라는 우려를 최소화하는 조치이며, 한국의 외교적 유연성을 확보하는 방안이다.
문재인 정부가 직면한 과제는 긴박하고 해법을 찾기 어렵지만 이를 타개할 수 있어야 한다. 현 단계에서 북한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미중 공조가 중요하고, 중국의 역할이 전보다 더 강화되고 있으며, 중국의 대북 정책 변화를 담보하는 데 미국의 역할은 긴요하다. 그리고 미중의 북핵 관련 정책 형성에 있어 한국의 보다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역할은 필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는 미중 전략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협력과 타협의 공간이어야 함을 각인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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