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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지아에서 이민 8년차로 열심히 살고 있으며 이제는 주7일 일을 하고 있답니다. 이글은 작년에 써서 한국에 있는 동료에게 이메일로 보냈었는데, 한 이틀 고민을 하다가 혹시 누군가에게 쬐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여기에 올립니다.
커피 한잔 하시면서 읽어 봐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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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식하면 용감하다?
돌이켜 보면 난 참 용감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이 시원치 않고 인생의 반은 다른 삶을 살아 보리라 생각하면서 떠난 미국행 이었다. 미국을 많이 아는 것도, 영어를 잘 하는 것도, 든든한 일가 친척이 있는 것도,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또는 자식 교육을 잘 시키겠다고 시작한 이민도 아니었다. 준비도 하지 않고 막연한 꿈을 안고 무작정 시작한 이민 생활이었다.
이런 나를 기다리는 것은 몸으로 때우는 일들과 영주권 취득을 향한 긴 여정의 관문이었다. 좌우지간 5년만에 취업비자를 거쳐 영주권을 받았고 남들이 축복받은 것이라 하니 그런 줄 알고 흐믓해 하면서 미국이민 7년차로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 나 보고 다시 한번 이민를 가라하면 절대로 안간다. 그건 마치 다시 한번 군대 가라고 하는것과 같기 때문이다. 난 7년전에 진짜로 젊고 무식하고 용감했다.
하지만 남들이 나를 말할때 “걔는 아주 용감하지는 않았어” 라고 해주면 무지 고맙겠다. 증말로……
2. 사는 곳
아침에 길을 나서면 차창밖 양쪽에 숲이 주는 신선한 내음과 새소리와 꽃향기가 있어서 아침 출근이 즐겁고, 자연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집들을 볼때면 영화에서 보던 멋진 집들이 현실로 내게 다가와 있음을 실감한다. 우리나라 생각이 문뜩 스쳐 지나간다. 예전에 숲이 많아서 좋다고 생각했던 과천마저도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빛좋은 개살구지만(주) 2억원 남짓하는 내집도 앞뒤에 잔디가 깔려 있고 스프링쿨러가 있어서 물을 뿌려 줄 수 있으며 너머에는 바로 숲이 있다. 취미가 있다면 꽃과 나무를 심거나 자그마한 텃밭이라도 꾸밀 수 있다. 어느핸가 깻잎을 심었는데 몇 년간 잘 따 먹으면서 느낀것은 “깻잎은 생명력이 강한 식물인겨” “아무것도 안 줘도 잘 자라잖아!”. 또 언제인가 뒷뜰에 사슴이 왔었는데 요즘은 잘 안 보인다. 어두워 지는 저녁 무렵 단지를 한 바퀴 걷노라면 벌레소리도 들리고 여기저기 반딧불이 쉬지 않고 반짝거려 마치 보석이 박힌것 같다. 표현이 좋아서 그렇지 한국으로 치자면 시골 촌구석이지 뭐.
일요일에는 주로 푹 쉬는데 가까운 스톤마운틴 공원이나 쇼핑몰에 나가보면 다양한 인종, 다양한 생김새, 다양한 옷차림을 만난다. 앳된 여자가 첨 보는 꼬부랑 할아버지에게 “하이 베이비”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곳, 삼지창 같은 큰 빗을 머리 중앙에 딱 꽂고 다니는 흑인, 바지를 허벅지에 걸치고 한 손으로 잡고 다니는 젊은 아이들. 어떤 넘은 손으로 바지를 안 잡고 거시기에 걸치고 다닌다. 그것도 계속… 그 지속력이 진짜 놀랍고 부럽다. 쎈∼놈이당.
여기서는 인사를 참 다양하게 하는데 한번은 가게에 젊은 흑인 2명이 들어와서는 반갑게 웃으면서 하는 말 “야 18눔아” 였다. 순간 화도 나고 황당해 하는데, 옆쪽에 있는 카운터로 가더니만, 50대 중반의 직원 두명에게 똑같이 “야 18눔아”하면서 웃는다. 두형님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만 종내는 같이 웃고 말았다. 이말이 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한국말이었다. 욕도 나쁜 감정을 실지 않으면 인사말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 그지없다. 그런데 도대체 “언놈의 샤끄가 야들 한테 이말을 가르쳐 준거여…..” “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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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집은 30년 은행대출(Mortgage)로 산 것이기 때문에 집문서는 은행에 있고 난 30년간 매달 1600불씩 갚아야 한다. (ß 빛좋은 개살구). 여기 사람들은 보통 모기지로 집을 산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보통 5년짜리 은행론을 받아 월부로 갚는다.
3. 사업
이곳 애틀랜타에서 한인들이 주로 하는 비지니스 종류에 대해 “세리마”라고 말을 하는데 즉 세탁소, 리커스토어, 마켓(수퍼마켓)을 줄여서 세리마라고 한다. 실제로 애틀란타 주변의 리커스토어중 약 1/3 정도는 한국사람이 운영하고 있다. 나는 작년에 리커스토어를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다. 왜 리커스토어를 시작했냐하면 여러사람에게 “돈을 많이 벌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물으니 리커스토어를 추천하면서 뒷말이 “그런데 뒷돈이 충분히 있어야 돼” “안 그러면 무자게 고생해”라고 했다. 그런데 난 뒷말은 무시하고 시작하여 지금 무지하게 고생하고 있다. 그래도 갠신히 밥은 묵고 산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는 참 많다. 기뻐서, 슬퍼서, 외로워서, 기분이 꿀꿀해서, 또는 그냥 등등…
알콜도수가 높은 1.75L짜리 큰병을 하루가 멀다하고 사가는 사람이 많다. 여자들도 장난 아니게 마신다. 대부분의 손님이 흑인인데 정말 화끈한 면이 한국사람 못지 않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는 일가견이 있다고 보면 된다. 오죽 했으면 내가 아는 흑인지역 리커스토어 사장 왈 “ 흑인은 세가지 밖에 할 줄 모른다고 했을까?” 세가지는 술마시고 마약하고 섹스하는 것이다. 암튼 여기 조지아주는 일요일 술판매가 법는 통과되었지만 아직 시행은 하고 있지 않아 일요일은 쉰다. 따라서 주말이나 무슨날 (크리스마스, 독립기념일, 추수감사절, 발렌타인데이 등)에는 술을 무척 많이 사간다.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데 아마도 “속이 다 문드러졌을끼다” 라고 측은해 하면서도 술을 많이 사가는 고객이 이뻐 보이니 난 이중성격자가 분명하다.
나의 리커스토어는 규모가 큰편이며 직원이 주중에는 3명, 주말에는 4명이 일을 한다. 나는 주 6일 아침 9시부터 밤 11시30분까지 주로 다음과 같은 일을 한다.
1) 영업사원들이 오면 술을 주문하여 사고, 손님에게 술을 판다. 한국의 주류백화점과 같다. 매장에서 술을 마실 수 없고 술을 사면 봉투에 담아 주는데 매장 주차장을 벗어나서 마셔야 한다.
2) Check Cashing Service를 한다. Payroll check, unemployment check, government check, state check등을 손님에 가져오면 수수료를 적당히 떼고 현금을 준다. 이곳에는 은행계좌를 못 여는 신불자가 약 10%정도 되는데 이런사람들은 Check를 받으면 첵케쉬서비스 하는 곳에서 수수료를 내고 현금으로 교환한다. 이 비지니스는 아주 위험하지만 수익이 좋다. 돈 놓고 돈 먹는 고리대금업과 비슷하다. 하지만 가짜Check나 문제가 있는 Check인 경우 2%정도의 수수료를 벌려다가 펑크가 나면 98%을 잃어 버린다. (천불짜리 체크인 경우 바운스가 나면 960-970불 정도 손해를 본다. 무척 열받는다. 썅….)
3) Money Order Service를 한다. 손님들이 현금을 지불하고 money order를 산다. 예를 들어서 공과금을 편지로 부쳐야 하는데 현금을 봉투에 넣을 수 없으므로 money order끊어서 보낸다. 이 비지니스는 수익은 아주 미미하지만 현금을 돌릴 수 있다. Money order회사는 3일씩 묶어서 일주일에 두번 money order판 금액을 내게 청구하며 수수료를 쬐금 준다.
4) Lottery를 판다. 즉석복권과 정해진 시간에 추첨하는 온라인 복권을 판다.
5) ATM단말기에 돈이 떨어지지 않게 관리한다. 나는 건당 1.75불의 수수료를 챙긴다.
6) 매장에 있는 16대의 감시카메라를 자주 보면서 도둑을 감시한다.
내 가게에서 돈은 흐름은 이렇다. 복권판매, 술판매 및 money order발행으로 현금이 들어온 후 check cashing 서비스 거쳐면 check들만 남는데 이것을 은행에 입금하고 이계좌에서 술구매 금액과 money order 대금을 지급한다. 돈이 잘 안돌면 당장 문제가 발생한다. 술을 big deal로 싸게 살 수 없고, check cashing 서비스를 못하게 된다. 스트레스 팍팍 받으며 몸도 마음도 후덜덜해진다. 하지만 여러차례 이런일이 반복되면 면역이 생기고 얼굴이 뻔뻔해 져서는 check cash해 달라고 오면 “야! 오늘은 돈 없어. 내일 와”라고 하면서 거꾸로 큰소리를 치며 강하게 나간다. 그러면 이 착한 사람들은 조용히 갔다가 내일 온다. 물론 어떤 놈은 욕을 하면서 나간다. 하지만 자기가 급할때 웃으면서 또 나타난다.
3면이 유리로 막혀 있는 내 check cash room에는 백불짜리가 여러장 없어져도 잘 모를 정도로 늘 현금 입출입 많아서 직원에게 맡길 수 없고 와이프와 나만 출입을 한다. 아주 고수였던 전 주인이 이 매장을 나에게 넘길 때 조언 하기를 “와이프 빼고는 아무도 믿지 말라”는 거였다. “와이프는 월급도 안주면서 믿고 부릴 수 있다”고 했다. 아 하, 그 순간 나는 옛날에 있었던 일부다처제가 왜 좋은지 너무 너무 쉽게 팍팍 이해가 되는거 있∼쥐.
“와 와 와이프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건가벼!!”
..
……
………………
그런데 갑자기 왜 내 목 뒤가 써늘해짐을 느끼는 걸까? (*?!!#@$%^)
4. 붕날라뻥차뿔라
1) 내 가게 주변은 늘 분주하다. 집없는 거지들이 동냥을 하고 거리의 여자들이 호객행위를 한다. 또 은밀히 마약을 파는 인간들이 서성인다. 문제는 이 인간들이 쫓아도 잘 가질 않고 또 갔다가도 금방 돌아와서 골치가 아프다. 일부 손님들은 구걸하는 것 때문에 불평을 한다. 경찰을 불러도 금방 풀어주어서 별 효과가 없다. 하지만 이들도 나의 손님으로 문을 열때 부터 닫을 때까지 몇번이고 들락거린다. 정 못된 놈들은 못들어 오게 하고 술을 안판다. 집없는 거지들의 냄새는 정말 장난이 아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속이 매스껍다. 돈도 더럽고 냄새가 심하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2) 어떤 연놈들은 매장 안에서도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구걸을 한다. 같은 흑인들끼리는 서로 브로(브라더를 줄여서 사용)라고 부르면서 돈을 잘 구걸하고 또 잘 준다.
3) 눈만 돌리면 훔치려는 도둑이 있다. 훔치려다 눈이 마주치면 얼마냐고 물어보고 다시 놓고 나간다. 제대로 걸리면 우리 가게에 못 들어 온다.
4) 꽤 많은 여자들이 브레지어를 지갑으로 쓴다. 가슴에서 돈을 꺼내 주는데 젖어 있고 동전은 따스하다. 어떤놈은 돈을 팬티나 신발에서 꺼내준다. 음메 더러운 거………
5) 어떤 연놈들은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거스름 돈을 안 받았다거나 10불 주고 20불을 주었다고 빡빡 우기면서 큰소리를 친다. 결국 카메라가 늘 진실을 밝혀준다.
6) 가난이 찌든 얼굴에 다 헤진 옷을 입고 죽어라 즉석 복권을 긁어서 돈을 다 날리고 가는 인간이 있다. 또 매달 1일과 3일에 정부에서 주는 체크를 들고 와서 현금을 받은 후, 둥그렇게 원통형으로 말아서 손에 쥐고 어쩔 줄을 모르면서 술사고, 20불짜리 즉권복권을 팍팍 사서 몇시간씩 긁어서 몇백불 하던 돈을 거의 탕진하고 가는 인간이 있다. 많은 흑인들은 돈이 있으면 일단 다 쓰고 본다.
7) ATM 단말기의 인출 한도가 20불에서 200불인데 꼭 20불씩만 인출하고 꼬박꼬박 수수료는 1.75불씩 내는 인간이 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의 돈은 정부에서 생활 보조금으로 통장에 넣어준 돈이다.
8) 멀쩡한 놈들이 정부보조금을 더 타내려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가게문을 콱콱 찧는다.
손님들의 대부분은 정직하고 착한 블루칼라지만 일부는 위에 나열한 인간들이다. 내가 이들에게 꼭 해 주고 싶은 것 한가지는?
붕날라 뻥차뿔라
5. 가족
미국에 첨 왔을 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여기서는 부부가 같이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아지기 때문에 극명하게 두가지로 양분된다고 했다. “우애가 더 돈독해 지던가, 아니면 단점을 더 많이 보게 되어 헤어지던가” 둘중 하나라고!. 다행히도 우리는 전자에 속한다. 나는 내 아내가 늘 나에게 조금 과분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 왔다. 그러다 보니 정말로 내게 과분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제 중년인 나는 차를 타고 다니면서 뽕짝이나 386세대의 노래를 즐겨 듣고 다닌다. 왠지 가사가 마음에 와 닿고 편안하기 때문이다. 엄마 덕에 우리집 두녀석은 바이올린을 배워서 쪼금한다. 그런데 아내는 내차에 타면 아이들과 한통속이 되어서는 내가 듣는 노래는 노래도 아니라고 하면서 얼른 CD를 바꾼다. 그 바뀐 CD에는 차이코프스키나 시벨리우스 같은 속족이 맹근 바이올린 콘체르토가 나오고 어떤 때는 정경화나 사라장의 바이올린 콘서트 음악이 나온다. 그러다 보니 음악에 꽝인 나도 휩쓸려서는 어느순간, 혹은 어쩌다가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35번인가를 듣곤 하는데 정말 대단한 작곡가네 하다가도 금방 뽕짝과 70∼80년대 음악으로 바꿔서 듣는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여야 하는겨.. 아님 탈라!!
내가 사는 조지아주의 중고생 학력은 전국50개주에서 거의 꼴찌수준에 머문다. 그런 주에서 중고교에 다니는 두 아들녀석 성적이 그럭저럭 중상위권이니 오죽 하겠냐 마는 그나마 잘 적응하고 있어서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 가끔 학교에 가 보곤 했는데 느낀점은 한국보다는 자유분방하면서도 규율이 엄하며, 기초질서를 잘 지킨다는 것이다. 또 선생들의 실력은 모르겠지만 무척 친절하고 적극적이었다. 스승의 날이 되면 학급의 학부모 대표가 통신문을 보내서 공식적으로 5∼20불정도 걷어서 교실에서 파티를 해 주는 정도다. 그리고 학년이 끝나는 5월쯤에 1년을 마무리하면서 감사하고픈 분에게 체크를 써서 주거나 선물를 보내 줄 수 있다.
나는 이곳의 고교 졸업생이 한국학생들보다 자립심 및 생활력이 더 강할 거라고 생각한다. 난 우리 아이들이 특별히 자립심이 강하다고는 생각 하지는 않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알아서 하겠지 하는 기대심리가 있고 두아이도 그렇게 알고 있다. 학원비가 거의 안드는 것도 나에게 그나마 다행이다.
2년전에 한국에 나갔을때 서울대학병원에서 큰녀석이 수술을 받았다. 퇴원할때 학내 매점에서 포켓용 수첩을 하나 사주었는데, 우연히 나중에 보니 첫장에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그런 아들이 자랑스럽고 앞으로도 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돼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곳에 살고 있는 나는 한국 이미지에 보탬은 못 될지라도 최소한 민폐는 끼치지 않는 아버지가 될려고 노력하고 있다. 음 ∼∼ 이제부터는 나도 손님들에게 좀 더 친절해 볼까나?
나는 팔불출이 아니므로 가족 야그는 이제 그만 할란다. 쩝, 실은 아직도 더 있는데……………..
6. 고독
여기에 사는 많은 한인들은 한국의 추석이나 설을 그냥 평일과 같이 보내 버린다. 특별히 찾아 갈 친척도 많지 않고 삶이 힘들기 때문이리라.
여기 생활을 한 4∼5년 하고 났을 땐가, 버는 돈은 시원찮고 기다리는 영주권은 안 나오고, 한국에서 가져다 쓰는 총알은 다 떨어져 가는데, 지갑에 돈 한푼없는 삶은 곤궁하고, 여기 온것이 너무 후회가 되었다. 그냥 다 싸가지고 패잔병처럼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아무도 반겨 주는 이 없으리라! 내 신세 가엽고 불쌍하다. 가장이 이러니 식솔들은 더 말해야 무엇하리.
차를 몰면서 퇴근하는 길인데 그날은 한국의 추석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서럽기 그지 없다. 갑자기 차창밖이 뿌옇게 흐려져 왔다. 밖에 비가 오는게 아니고 내가 울고 있는 것이었다. 눈물을 손으로 훔치고 또 훔쳐도 끝없이 흘렀다. 집에는 다 왔는데, 우는 얼굴로 들어 갈 수가 없어 집 밖 차안에서 한시간은 더 울었던 것 같다. 이럴땐 예전에 학교에서 배웠을 것 같은 “귀거래사”라도 읊조리고 싶은데 한 구절도 생각이 안났다. 그렇다고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읊을 순 없지 않은가? 또 불쌍타. 그렇게 서럽게 울고 나니 얼마 안 있다가 영주권이 승인났다.
그리하여 드디어 우리 가족은 영주권카드를 한장씩 손에 들고 한국에 다니러 갔다. 나의 마지막 전투를 위해 그나마 있는 총알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다. 다시 일년에 걸친 견제 후 나는 이 리커스토어를 샀다. 여기가 내 마지막 전장이다. 뒤는 없다.
서럽고 고독할 때 읊조릴 좋은 시를 하나쯤 찾아서 외우리라 생각했지만 여태 나는 안 찾고 있다. 왜냐하면 앞으로는 그런 류의 시는 필요 없을 테니까…..
옛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가 아는 부모형제, 친척, 고교동창들, 회사사람들 등등 모두가 내가 잘 되기를 바랬던 사람들이었다. 내 허물을 덮고 뻣대는 나를 끌어 안고 함께 했던 사람들이었다.
앞으로는 절대로 고독해 지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노래말에 있듯이 “고독이란 무서워요. 무서운 병이니까요.”
7. 새로운 시작
여기 가게에 있다가 보면 나는 여러 호칭으로 불린다.
“하이 프랜”, 베이비, 보스, 빅보스, 캡틴, 브로, 영맨, 스위리, 허니, 바리, 사장님, 그리고 화난 고객은 나를 “뻑-큐” 라고 부른다.
오늘 아침도 나는 그 호칭들이 있는 곳을 향하여 딱지 끊기지 않을 만큼의 속도로 나훈아의 “잡초”를 들으며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어느덧 부모형제가 있는 고향땅 한국으로 달리고 있으며 2차 모임이 있는 사당동으로 가고 있다.
모임을 생각하니, 최딴지도 보고 싶고, 소띵도 보고 싶고, 김옥돌이도 보고 싶고 언규오빠도 보고 싶다.
“이누므 자슥이 누굴보고 감히 김옥돌이래” 라고 화딱지를 내는 사람에게
붕날라 뻥차일지라도………..
< 꾸 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