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보관용 구원, 써먹는 구원>의 줄거리:
예수님 믿어서 구원은 받았다는데 아무리 기다리고 살펴보아도 삶의 어느 영역 어느 순간에도 구원을 써먹는 기색이 보이질 않습니다. 창조주의 독생자가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받으며 이루어주신 구원! 이것이 본래 그렇게 써먹을 데가 없는 건가요? 구원은 죽어서 천국 갈 때까지는 보관용입니까? '구원 받았음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위한 확신용입니까? 혹시 구원을 써먹지 않는 이유가, 구원이 뭔지 모르고, 그래서 사실은 구원을 못 받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보관용 구원, 써먹는 구원
(이사야 49:1~26)
1. 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 곳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2.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사 그의 화살통에 감추시고
3.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4.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보관용 구원, 써먹는 구원>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보관용 구원, 써먹는 구원’
재미있는 책 제목이 있어서 몇 가지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3시간 공부하고 30년 써먹는 부동산 시장 분석 기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3시간 공부하면 30년 써먹는다는 의미입니다. 또 “여자에게 공부가 필요할 때”라는 책이 있습니다. 부제는 1년 배워 10년 써먹는 인생을 바꾸는 성장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그리고 프랑스 사람이 쓴 책으로 “쉽게 익히고 알뜰하게 써먹는 1분 과학지식”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그밖에도 써먹는 심리학, 써먹는 서양철학, 써먹는 경제상식, 써먹는 스펙, 바로바로 써먹는 영어회화, 써먹는 연예기술 등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실 집안에 있는 모든 물건들도 다 써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써먹는다.’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구원은 그저 받았다고 확신할 뿐 써먹지는 못합니다. 마치 비싼 돈 주고 물건을 사놓고 ‘나도 그 물건 집에 있어’라고 하면서 써먹지 않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구원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희생시키시면서 이루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을 하지만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법을 모릅니다. 100만원 주고 냉장고를 사면 365일 내내 돌아갑니다. 그런데 독생자가 희생이 되셔서 이루신 구원은 쓰임새가 냉장고만도 못하다는 것일까요?
많은 분들이 ‘구원 받았느냐?’라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대답하지만 삶에서 구원을 써먹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정말로 구원을 받았는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안다면 구원을 써먹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본래대로라면 쉬지 않고 돌아가는 냉장고나 내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보다도 더 많이 써먹어야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 이유는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어떻게 써야하는지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소리만 칠 뿐이지 실제로는 여전히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7장은 구원에 대한 개념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전체가 생명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에 구원과 관계가 많습니다. 또한 성경 전체가 구원과 관계되지 않은 구절은 없겠습니다만,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나님께 드린 기도를 보면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해 강력하고 세밀하게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13절을 보면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구원은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가지셨던 기쁨을 나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 14절을 보면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을 받게 되면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으로는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으로 기뻐한다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22절을 보면 구원에 대한 표현이 절정에 이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내용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으로 충만하시고, 또한 아들이신 예수님도 아버지 하나님으로 충만하신 상태를 우리에게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게 또한 영광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리에 서게 되면 주님 안에 아버지께서 충만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로 충만하게 되는 상태가 구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자리에 설 때에 우리에게서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구원은 기쁨으로 표현되고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됩니다. 무엇으로 기쁨을 얻느냐에 따라 세상에 속했느냐 하늘에 속했느냐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창조 때부터 우리 마음은 하나님이 들어오시기 위한 자리로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무의 상태를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삶이 헝클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삶에 필요한 판단을 주시면 그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아가는 모습이자 타락 전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스스로 주체가 된 인간의 마음은 더는 하나님을 담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있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억제되지 않고 이 세상의 것들로 채우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구원은 다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워진 상태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채워진 상태’라는 말이 의미하는 대로 구원은 지속적으로 계속되어져야만 합니다.
한편 우리가 보고 있는 이사야에서는 총 4편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1편은 우리가 앞서 보았고 오늘 본문의 1~7절까지가 두 번째 여호와의 종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살펴보면 다소 의아한 생각이듭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적 노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입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노래하고 계십니다.
4절을 보면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라고 구원에 대해 회의적인 표현을 하고 계십니다.
이사야의 예언으로부터 약 700년 후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원사역을 펼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루어질 구원사역에 대해 이미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또 읽지 않은 7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왕들이 보고 일어서며 고관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신실하신 여호와 그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메시아가 백성들에게 멸시와 미움을 받고 관원들에게는 종처럼 취급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대체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구원을 써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장 우리도 구원을 써먹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 개신교 인구가 7억 명이나 되고 가톨릭이 12억 명이라고 하지만 그 중에서 구원을 써먹는 사람이 극히 드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회의감을 느끼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을 써먹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좋아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취직이 절실한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은 직장을 간절히 원해서 취직만 되면 인생이 다 이루어질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 절실함은 사실 직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속에 하나님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결핍입니다. 그런데 24시간 존재하는 이 결핍은 때와 상황에 따라 육체로 접하는 것들을 결핍의 원인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근본적인 결핍이 해결된 사람은 직장이 없다고 해서 마음에서 결핍을 느끼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 볼 때는 멀쩡한 사람이 직장이 없는 것을 결핍으로 여기지 않다니 오히려 걱정스러울 지경일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구원이 이루어진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움직이시면서 나의 할 일을 찾게 하십니다. 이것이 신의 부르심을 의미하는 소명(calling)으로써의 진짜 직업이 됩니다. 내가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찾아다니는 직업은 짐승이 먹이를 구하려 땅만 보고 다니는 것과 근본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영락교회에서 있었을 때에 저와 가깝게 지냈던 안수 집사님이 강릉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분께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서 생선찜을 맛있게 하는 곳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초당두부를 대접하기 위해서 두부 집을 찾아다녔는데 어느 집도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평소에 맛있다고 생각했던 생선찜 집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예약한 손님도 못 받을 정도라고 하였습니다. 쫓겨나듯 나와서 망연자실하고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가끔 가던 회냉면 집이 있어서 그곳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음에는 생선찜을 바라보면서 입으로는 회냉면을 먹는데 맛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결핍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생선찜이라면 직장은 회냉면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결핍을 느끼는데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직장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해결을 해보려고 할 뿐입니다. 이때에 주님이 오셔서 주실 수 있는 구원은 하나님 아버지를 마음에 채우게끔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마음에 채워지기 위해서는 직장을 붙잡고 있는 마음이 죽어야만 합니다. 직장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어떤 것을 통해서 결핍을 채우려고 하면 하나님은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필요로 느낄 때에만 하나님께서는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향하고 있는 것은 돈이나 직장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은 하나님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동일하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오실 때에 구원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이것을 싫어하고 있습니다. 직장을 필요로 하는 마음이 죽는 것에 대해 거부합니다. 일단 실직 상태에서 구원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므로 생긴 결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 세상의 것으로 채워보려고 합니다. 생선찜에 대한 결핍을 회냉면으로 대신 채워보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구원이라는 이름의 생선찜을 가져오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회냉면을 먹겠다고 고집한다면 주님과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을 써먹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루신 복음을 만끽하는 것입니다.
직장이 없어서 마음에 강박증과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때에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직장에 대해 결핍을 느끼는 마음을 죽여야 합니다. 마음의 결핍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우려는 것이 죄이기 때문에 이러한 마음을 주님과 함께 죽이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반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직장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하기를 지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할 마음을 직장으로 채우려고 했습니다. 이 마음을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나의 마음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습니다.’라고 기도하면서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정직하게 진행될 때에 이유 없는 평강과 기쁨이 생겨납니다. 태산처럼 크게 보였던 직장 문제도 티끌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직장 없이 행복하고 즐겁게 살라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내가 직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먼저 알고 계셨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느끼는 모든 필요는 오히려 뒷북을 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가 살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으로 채워지면 때를 따라서 나에게 합당한 생각을 주시고 행동하게 하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기 암에 걸린 환자가 있습니다. 이 환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암을 고쳐달라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려는 구원은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건강이 있어야 인생이 행복하리라 생각하는 말기 암환자의 마음이 죄입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셔야 할 자리에 건강을 채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다른 신입니다. 내게 기쁨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들입니다. 건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는 이 구원이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 기도하면서도 예수님의 구원은 싫어합니다.
이런 말씀을 하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치지 않으셨냐며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환자를 고치신 이유는 물론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우선 된 목적은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병자를 고치시고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신 구원은 단순히 병으로부터 낫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병을 고쳐준다는 소문이 펴져서 그들이 병 고침을 기대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결코 병 고침이나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육신의 배부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기 암환자도 생명이 있는 한 우선적으로 찾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시려는 구원이기에 마음속으로는 이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속했다면 말기 암환자를 앞에 두고 어떻게 하나님으로 채우라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을 따라 말기 암환자가 십자가를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이 만드신 구원의 통로를 따라 마음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아버지로 채워지기를 바라며 기도할 때에 실제로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몸에 말뚝 같은 가시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괴로운 질병에서 낫기 위해 세 번이나 기도하였지만 그가 받은 응답은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라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말기 암환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기를 원하신다면 기쁨 가운데 눈을 감게 하실 것입니다. 또는 그를 통해 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말기 암을 고치실 수도 있으며, 혹은 암을 안고도 건강한 사람보다 더 오래 살며 맡은바 일을 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구원받으면 죽고 사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써먹는 삶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입고 살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세상 것을 통해 결핍을 채우고자 합니다. 생선찜을 못 먹어서 생긴 결핍을 회냉면으로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이때에 십자가에서 회냉면에 대한 마음을 죽이면 하나님이라는 생선찜이 허락됩니다. 이것이 구원을 써먹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내 마음에서 떨어져나간 세상의 문제들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구원을 써먹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내 마음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만족과 기쁨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에 이 기쁨과 만족은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변치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기쁨을 누리게 되면 세상에서의 삶 또한 질서를 찾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지으시기 이전에 이미 가지셨던 계획을 따라서 혼돈 대신 질서를 주실 것이고, 공허 대신에 결실을 주시고, 흑암 대신에 광명한 삶으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오해하고 써먹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는 것은 구원이 아닌 구원의 결과입니다. 구원을 써먹고 산 결과로 천국을 가는 것이지 천국에 가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삶에서 구원을 써먹을 수 없다면 구원을 받지 못했거나 구원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어도 구원을 모릅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설교하는 목사님도 구원이 무엇인지 모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천국에 가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이성봉 목사님이 예수 천당을 외치며 전도를 하셨다지만 사실 올바른 구호가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으면 아버지 하나님을 갖게 됩니다.
구원은 상태입니다. 한강물이 계속해서 흐르듯이 하나님으로 채워짐이 계속해서 지속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계속 바라봄으로써 마음에 세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하늘로부터 성령님이 오셔서 마음을 채우시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 상태를 삶에서 써먹어야만 합니다. 써먹을 수 없는 구원은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태초부터 하나님이 들어가시기 위해 작정하고 비워두신 공간입니다.
이곳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원죄로 인해 세상을 붙잡은 상태를 죽이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어제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살았던 사람일지라도 오늘 십자가를 붙잡지 않는다면 또 세상에 대해 결핍을 느끼고 세상을 좇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내 안에 하나님이 들어오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한 뜻을 펼쳐나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써먹고 사는 삶입니다.
구원은 죽기 전까지는 보관해두었다가 죽고 나서 천당 갈 때에 내미는 표가 아닙니다. 구원은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확신용도 아닙니다. 구원은 삶에서 써먹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평생 구원을 써먹으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 구원 안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에 대해 회의를 가지시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믿은 지가 30~40년이 되어서 장로가 되고 안수 집사가 되었는데도 단 한 번도 구원을 써본 일이 없다면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죽어도 천국 갈 것을 믿습니다.’라는 말은 구원의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으로 충만해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기쁨을 누려야만 합니다. 또한 아버지의 뜻이 나를 통해 나타는 것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천국 가는 것은 구원의 결과입니다.
앞서 예로 들었던 책 중에 ‘1년 배워 10년 써먹는 인생을 바꾸는 성장 프로젝트’라는 책처럼 전도 또한 이렇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 번 받아 평생을 써먹는 구원’을 제시해야만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그 동안 십자가도 써먹지 못하고 구원도 써먹지 못하면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셔서 오늘부터 십자가를 생활하게 하시고 온전한 구원을 써먹으며 하루하루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가득 채워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