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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길-17화차. (은티마을~이화령)
글쓴이 : 미스터리
1. 지난 곳/시간. 2005. 7/22~7/23.
은티마을 (3:29 출발)
~ 지름티재 갈림길 (4:00)
~ 희양산성 (4:44/4:48)
~ 무명봉(905봉) (5:07)
~ 무명봉(888봉) (5:14)
~ 안부 갈림길 (5:28), 은티마을 하산로, 가은 원북리길 폐도. 좌 전방 시루봉.
~ 배너미평전 (5:35/5:40)
~ 이만호골 갈림길 (5:54)
~ 119신고 8번 위치(5:52)
~ 전망바위 (5:59), 희양산 전망 good. 용바위?
~ 로프 맨 小오르막(6:12)
~ 마당바위 (6:14)
~ 이만봉 (6:22/6:28)
~ 곰틀봉 (6:46)
고사리밭등 내려 와,
~ 사다리재 (7:03)
~ 무명봉 (7:23)
~ 안부 (7:25)
~ 백화산 안내표시 (7:35), 뇌정산, 삼밭골 갈림길.
~ 981봉 (7:37/7:47)
~ 평전치 (7:59)
~ 갈림길1 (8:04), 좌측 분지리 안말 방향, 길 희미함.
~ 갈림길2 (8:08), 우측 만덕사 갈림길.
~ 1012봉 (8:19/8:24)
~ 백화산 (8:37)
~ 옥녀봉 갈림길 (8:45/9:07), 좌측 흰듸뫼 하산길. 아침 식사.
~ 바위지대 (9:16)
~ 헬기장 (9:25), 공터 억새.
~ 억새밭 갈림길 (9:39), 좌는 흰듸뫼, 우는 오시골하산길.
~ 황학산 (9:42)
~ 갈림길 (9:54), 좌는 흰듸뫼, 우는 풍덕풍.
~ 무명봉(862봉) (9:59)
갈미봉 갈림길(777봉) 지나,
~ 넓은 길 습지 (10:20), 습지 웅덩이.
~ 각서리 갈림길 (10:23), 낙엽송 조림지 안부. 길 안내판 있음. 이화령 1.5km??
~ 조봉? (10:26), 헬기장 있음.
~ 헬기장 (10:37)
~ 무명봉1. (10:45)
~ 무명봉2 (10:59)
~ 헬기장 (11:13)
~ 군막사 우측 통과(11:22)
~ 이화령 (11:29 도착) 총 8시간 00 분.
2. 이동 거리.
은티마을~희양산성 : 3 km. ?
~ 배너미 평전 : 2.28 km.
~ 이만봉 : 2.26 km.
~ 사다리재 : 1.1 km.
~ 평전치 : 2.46 km.
~ 백화산 : 1.45 km.
~ 황학산 : 1.85 km.
~ 조봉 : 3.9 km.
~ 이화령 : 1.53 km. 총 19.83 km.
3. 17회차.
(은티마을~이만봉) 7.54km. (3:29/6:22)
은티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둥근달이 떠 있다.
6월 보름을 지난 지가 이틀밖에 안되었으니 달이 차 있다.
마을 개들을 깨울 새라 랜턴도 밝히지 않고 마을 입구로 들어간다.
2 주전에 만났던 은티마을 유래비, 아직도 禁줄을 두르고 있는 남근석이 달빛 아래 서
있다.
다리를 건너 좌로 방향을 틀어 과수원길로 접어든다.
마을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개들도 얌전하다.
어째 오늘 따라 보름달이 조그마하다.
어느 때는 보름달이 쟁반만하다가 오늘 같은 날은 호떡만하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달도 컨디션이 있는 것인가.
임도 쓸려 나간 길을 지나간다.
어두운 밤 간신히 한 뼘 남은 좁은 폭 위를 지나려 하니 발 헛딛을까 조심스럽다.
이윽고, 희양산성과 지름티 갈라지는 갈림길에 도착한다.(4:00)
갈림길이라고는 해도 지름티로 가는 길이고 산성터로 갈라지는 길은 구분키 어려운
오솔길이다.
일행 중 지난 번 희양산에 못 간 이들은 지름티로 향하고, 산성까지 갔던 이들은 막바로
左로 分岐하여 산성쪽으로 가기로 한다.
산성길로 들어서자마자 계곡이다.
길이 불분명하다.
계곡 따라 잠시 올라 보는데 아이고 시작부터 ‘알바’다.
앞 뒤가 바뀌어 계곡을 건너 오른다.
은티마을이 본래 산 사이에 폭 싸여 있는 마을인데다가 계곡을 타고 오르려니 폭 파인
공간이라 바람 한 점 없고 찌기 시작한다.
습도, 온도 높지, 바람 한 점 없지, 지형 꺼져 있지 찜통도 이런 찜통이 없다.
10 분도 못되어 등산 T-shirts가 완전히 땀에 젖는다.
일행이 모두 힘들어 하고 얼마 못가서 쉬는 이들이 생긴다.
지난번 이 길로 내려 올 때는 잠시 계곡물 소리 들으며 내려 온 것 같은데 오르막 비탈은 여간 가파른 게 아니다.
대간길 오르기도 전에 어프로취 구간에서 땀 다 빼고 마는구나.
드디어 희양산성 성벽길에 도착한다. (4:44/4:48)
어프로취에 1 시간 20분이나 소요된 것이다.
물마시고 오이 한 쪽으로 수분을 보충한다.
이어 우리 팀의 주력부대가 도착한다.
우리는 방을 빼기로 하고 孫 縮地님은 지난번 봉암사로 알바하느라 걷지 못한 대간길
(희양산성~희양산 갈림길) 다녀 오기로 한다.
(* 산행하는 이들의 隱語로, 먼저 차지한 좋은 쉴 자리 양보하는 것을 방 뺀다 함.)
무너진 산성을 끼고 대간길 산행을 시작한다.
산성 바로 위는 작은 암봉이다. 아마 전쟁 때는 망루로 사용하기에 좋은 지형지물이었을 것 같다. 그 곳 내려오니 작은 안부.(5:02)
들꽃이 피어 있는데 어둠 속이라 구분이 되지 않는다.
다시 길은 조금 오르다가 능선길이 이어진다.
곧 봉우리(905봉) 하나 넘고(5:07), 또 하나(888봉) 오르니(5:14) 길게 하산하는 내리막길이다.
내리막의 끝, 마치 平田과 같은 넓은 안부가 나타난다.(5:28)
앞쪽 좌측으로는 시루봉이 보인다.
길도 몇 갈래가 있어 혼란스럽다.
지도를 살피면서 지세를 판단해 본다.
좌측 하산길은 은티마을길, 우측길은 거의 폐도가 되었으나 문경 원북리길, 확연치는 않으나 중앙에 있는 오솔길이 대간길일 것 같다.
아쉽게도 어디에도 대간리본이 없다.
평평한 오솔길로 나아간다.
왼쪽을 보니 마른 계곡이 지나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알바는 아닌 것이다.
山自分水嶺, 최소한 물길은 건너지 않고 가는 것이다.
이윽고 낡은 리본 하나를 발견하는데 백두대간표시가 되어 있다. 반갑구나.
평평한 초원 ‘배너미평전’이 나타난다. (5:35/5:40) 고개 이름으로는 ‘성재’이다.
7~800고지에 이렇게 펼쳐진 평원이 신비롭다.
좌로는 시루봉 10 분이라는 표지가 서 있다.
평전이 신기하여 평원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사진도 찍어 둔다.
배너미평전, 그 언제던가 이 땅에 천지개벽이 있어 홍수가 몰아쳐 오던 날 물이 이 곳까지 넘쳐 배가 넘었다지..
그러나 요즈음 같이 사방이 어지러운 날, 천지개벽은 과거의 일이 아니고 어느날 미래의 일이 되어 한국판 노아의 方舟가 이 평전을 넘는 것은 아닐른지..
그 때에 대비해서 이 평전에다 예약이라도 해 놓아 볼거나.
우향우하여 이만봉으로 향하기 전 잠시 시루봉에 가 볼까 망설여도 본다.
그러나 그만 두기로 한다. 사실 시루를 엎은 듯하다는 시루봉에 대해 무관심한 것만도 아니다.
시루봉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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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韓聖根의 이야기.
한성근 형제는 괴산 땅 칠성면에 살았는데 힘은 장사였으나 똥구멍이 째지게 가난하여
공부는 한 자도 못하고 땅파고 사냥하며 살았다.
어느날, 지나가던 老僧이 쓸어져 사경을 헤매는 것을 보고 구해 주었다.
이 노승 살았으면 떠나야 하건만 떠나지 않고 한씨 형제에게 글도 가르치고 주역도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날 이 형제의 아버지가 命을 달리 했다.
이 노승 시루봉에 올라 무덤 사이를 비집고 묘자리를 잡아 주었다.
이 자리는 명당으로 ‘머지 않아 그대들은 장가도 들고 재물도 얻고 벼슬도 하게 되리라’
이러고 떠났다.
여름이 와서 형제, 원두막에 있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며 그칠 줄 몰랐다.
비가 오자 잠시 원두막으로 피해 올라온 두 여인네 길손이 있었는데 날은 어두워지고 걱정이 많았다.
의리맨인 이 형제 이 여인네들을 집안에 들게 하고 잘 보살펴 주었다.
비는 며칠을 줄기차게 내렸다.
걱정이 된 한성근 ‘어디로 가시는 분들인데 큰 일이외다.’
‘저희는 동서지간으로 둘다 홀로 되었기에 살 만한 고장을 찾아 길을 떠난 것이라오.’
이렇게 해서 두 노총각과 두 과부는 정한수 떠 놓고 합동으로 禮를 올렸다.
다행히 과수댁들은 가진 것이 쏠쏠하여 집도 짓고 땅도 사고 살만하였다.
이에 한성근, 노스님한테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해서 서울 나들이 한 번 하기로 하고
길을 따났는데 중도에 장호원에 도달하였다.
어느 양반집 사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집 학동이 책을 가져와 글을 묻고 있었다.
그 때 밖이 소란하였다.
학동에게 이유를 물은 즉, 어머니 비녀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한성근 노스님에게 배운 주역 실력을 발휘하여 失物占을 쳐 보니 아궁이 속에 있는 괘였다. 이리하여 하루 아침에 이 집에 귀빈이 되었다.
그런데 다음날 이 소문이 벌써 온 고을에 퍼졌는지 어떤 여인네가 찾아와 신수점을 쳐 달라 하였다.
占을 쳐 보니 보통 사람의 신수가 아니었다.
‘본인이 직접 오셔야만 말씀드릴 수 있소이다.’ 이렇게 해서 그 귀인을 만나러 갔는데
임오군란으로 신변에 위험을 느껴 장호원으로 피신 와 있던 명성황후 민비였던 것이다.
‘마마, 다음달에는 환궁하실 것입니다.’ 한성근은 족집게였다.
이리하여 한성근은 벼슬길에 나서 병조판서에까지 이르렀는데..
말타면 경마잡히고 싶은 법, 시루봉 무덤 사이에 끼어 있는 초라한 아버지 무덤이
맘에 걸려 주위의 무덤들을 쫓아내든지 파헤치고 아버지 무덤을 성대하게 꾸몄다.
이 때 한성근으로 인하여 무덤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의 원성이 그대로 있을 리 없었다. 누군가가 몰래 한성근 아버지의 묘를 훼손했으니(아마도 유골도난사건?)
한성근 패가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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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루봉 옛날이야기를 뒤로 하고 이만봉을 향해 출발한다.(5:40)
이제부터는 지도를 펴 보면 느끼겠지만 도깨비방망이 같은 오늘의 산행구간으로 본격 진입이다.
배너미평전부터 시작하여 안으로 분지리(세집담, 도막, 안말, 흰듸미 마을)를 끼고 백화산까지 東南進한 후 백화산에서 180도 U턴하여 다시 서북방향으로 이화령까지 돌아가는 도깨비방망이 산행길이다.
배너미에서 출발하는 길은 숲도 우거지고 땅도 축축한 습기가 많은 지역이다.
예전 큰 암반이었을 바위들이 세월에 갈라져 너덜로 나타나고 그 깨진 바위나 돌 위에
이끼도 많다.
말나리가 만개해 있고 산수국도 보인다.
멧돼지가 많은지 나리 뿌리를 파먹은 흔적들이 곳곳 눈에 띈다.
이만호골 갈림길이 좌로 나타난다. (5:54)
어느 땐가 萬戶벼슬을 지낸 李씨가 들어 와 산 골자기라 해서 이만호(이만이)골이 되었다 한다. 萬戶라 하니 연속극 ‘불멸의 이순신’에서 굳굳하던 정만호 생각이 난다.
능선에 오르니 ‘119긴급신고 이만봉 8번’ 알림판이 서 있다.(5:52)
오늘 지나는 구간이 국립공원이나 도립공원에서 빠져 있는 구간인데도 이런 안내판이 서 있으니 반갑다.
아, 그런데 지나온 길 방향에 제법 큰 봉우리가 서 있다.
963봉이다. 이 봉을 넘어 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길을 몰라 배너미로 올라온 것이다.
대간길 가는데는 문제가 없으니 일부러 돌아가지는 않기로 한다.
이제부터는 대간길 능선에 핑크빛 ‘솔나리’가 많이 나타난다.
완전히 만개한 상태다.
희양사 전망이 잘 보이는 바위를 지난다.(5:59) 이 곳이 용바위인가 보다.
이어지는 대간길 지형은 대간길 오솔길 하나 내어 주고 좌우로는 그대로 능선 경사면이다. 대간길만이 삼각기둥 모서리 솟듯 우뚝하여 낙엽진 겨울철이면 좌우가 환히 보일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숲이 우거져 바위지대가 아니면 아랫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능선길에는 계속 솔나리가 많다.
로프가 매어 있는 2~3m 암벽을 오르니 시원한 바위가 펼쳐져 있다. 마당바위다.(6:14)
좌측 골자기마을 분지리가 내려다 보인다.
분지리(분적골)는 세집담, 도막, 안말, 흰드미(흰드뫼,흰두뫼) 마을이 모여 된 동리이다.
한 때는 70호가 넘는 산골 부자마을이었다고 한다.
비록 산골 화전을 일구었으나 토질이 좋고 물이 좋아 연풍땅 농산물 중에 으뜸이었다 한다. 그러기에 70년대만 해도 연풍 읍내 술집들은 읍내 사람에게는 술값 외상 안 주어도 분지리 농군들에게는 외상을 주었다 한다.
그러던 것이 세월 따라 사람 떠나고 더욱이 마을 입구에 분지저수지가 생긴 후 안개가 차기 시작하여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한다.
인간이 자연을 망쳐 먹기는 금방인 것 같다.
게다가, 이화령 터널이 뚫리고, 중부 내륙고속도로가 뚫리면서 발빠른 투기꾼들은 백두대간 아래 이 골짜기 마을 땅도 무수히 사들였다 한다.
꾼을 탓해야 하나? 나라 정책을 탓해야 하나?
사람들은 떠나고 끝마을 흰듸미는 폐가만 남고, 아래쪽 마을도 몇 집 남지 않았다.
어느날 다시 우리가 이 대간길 지날 때, 저 계곡 아래에 제발 붉은 지붕, 푸른 지붕
음식점과 팬션 나타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대간길 산신령님께 간절히 빌면서 마당바위를 지난다.
잠시 오르막길 치니 이만봉이 나타난다. (6:22/6:28)
이만호골 위에 있어 자연스레 이만봉이 되었다. 정상석과 함께 기념사진 한 장 찍는다. 989m 고도의 봉이건만 높은 위치에서 출발하다 보니 그저 뒷동산 같다.
(이만봉~백화산) 5.01km. (6:28/8:37)
잠시 휴식 후 이만봉 출발이다.
길은 등정길에서 직진하는 길과 90도 좌회전하는 길이 있다.
좌회전 길은 아무래도 뚝 떨어지는 길이라 곰틀봉으로 갈 수는 없을 것 같고, 직진이 맞을 것 같다. 가자 앞으로.
그런데 갈수록 풀이 깊고 내려가기 시작하는데 어떤 봉우리도 보이지 않는다.
순간 ‘알바’다.
다시 빽하여 돌아 오면서 살피니 우측으로 봉우리 하나가 보인다.
이만봉에서 좌회전했어야 하는 걸 아차했구먼..
다시 돌아와 내리막길로 접어드니 내리막도 잠시 앞쪽으로 꽤 잘 생긴 봉우리가 보인다. 오르는 길은 만만치 않다.
게다가 푸짐하게 멧돼지가 응아도 해 놓았다. 검고 실하기도 하여라.
골틈봉 곰들은 어디로 가고 멧돼지가 그 자리를 차지했는가 보다.
狐假虎威라더니 猪假熊威다.
옛적 곰이 살아 곰봉이요, 그 곰 잡으러 곰틀을 놓아 곰틀봉이라는데 문경땅 옛적 특산품 중 하나가 熊膽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오르면서 본 곰틀봉과 이후 981봉 지나며 본 곰틀봉은 높이는 높지 않으나 하나의 봉우리가 우뚝 솟은 멋진 봉우리였다. 이런 峰을 文筆峰이라 한다.
혹시 신성한 봉우리여서 ‘곰봉’이 아니었을까? )
곰틀봉에 오르니 가은쪽 골짜기가 툭 틔여 시원한 경관을 보여 준다.(6:46)
앞쪽 백화산길 능선과 뇌정산 모습도 선명하다.
계절이 맞지 않아 그런지 고사리를 찾을 수 없는 고사리밭등(薇田峙) 타고 내려 와 사다리재에 도착한다.(7:03)
이 곳은 대간길 당일 종주하는 이들이 이화령에서 올라와 분지리 안말로 내려가는 하산길로 종종 이용하는 등산로이다.
만일에 이 분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숲이 우거진 길이 되었을 것이다.
하산길 내려다 보니 숨차게 가파른 비탈길이다.
이 골을 사다리골이라 한다. 그 이름의 유래는 분명치 않다.
우리나라 곳곳에 사다리재가 있으니 아마도 연유가 있을 것 같다.
다만 어떤이들은 사다리를 걸친 것 같이 가팔라 사다리골이라 한다는데 억지의 냄새가 풍긴다.
이후 길은 편안한 능선길로 이어진다.
하늘 말나리가 많다. 꽃며느리밥풀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멧돼지 응아도 또 보인다.
무명봉 하나 넘으니(7:23) 작은 안부다.(7:25)
예전에는 내려가는 길이 있는 갈림길이었을텐데 흔적만 있을 뿐이다.
안부 지나면 길은 오르는 법, 땀흘려 오르니 백화산이라 쓰여 있는 화살표 나무 길안내판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
뚱딴지 같이 백화산 가고 있는 큰 길에 그 방향 가리키면서 백화산이라니.
친절해서 좋다만 의미가 없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곳이 뇌정산갈림길이다.(7:35)
전에는 화살표가 양쪽에 붙어 하나는 뇌정산, 또 하나는 백화산으로 갈림길을 알려 주었다는데 뇌정산 화살표는 떨어져 없어졌으니 무심한 대간꾼은 그 길을 알지 못한다.
곧이어 981봉에 닿는다. (7:37/7:47)
봉이라 하기보다는 대간길 높은 둔덕에 지나지 않는다.
더위에 대비해 최소한 물을 2~3리터씩은 지고 왔으니 시원하게 땀으로 뺀 물을 보충한다. 김영규님의 얼려 온 물은 아직도 녹지 않았다.
이 곳에서 내려 오니 平田峙(평밭등). (7:59)
이름과는 달리 평평하고 넓은 고개는 아니다.
분적골(분지리) 흰드뫼에서 문경쪽 상내리 한실마을로 넘어다니던 길이었고, 임도도 흰드뫼에서 이 곳까지 열려 있었다던데 이제는 폐도가 되고 안말로 다니는 등산로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마을에 사람 떠나니 길도 사람을 떠난다.
1012봉 가는 길에 분지리 안말방향으로 내려가는 희미한 갈림길 하나 지나고(8:04)
다시 우측 문경쪽 만덕사 갈림길 지나니(8:08) 길은 다시 치고 오른다.
이 곳의 나리꽃은 ‘말나리’이다.
산의 앞뒤에도 기온의 차이가 있는가 보다.
지나온 길은 ‘하늘말나리’더니 이 오르막에는 모두가 말나리뿐이다.
꽃 박사 저녁노을에게 공부 배워야겠다.
잠시 너덜길 오름 지나 1012봉에 닿는다. (8:19/8:24)
오늘의 최고봉 白華山이 코 앞에 있다.
1012峰 오르기가 만만치 않았기에 마음다짐을 하고 도전한다.
그런데 어어, 비스듬한 언덕길 오르더니 앞길이 그대로 밝아진다.
괴산의 최고봉 백화산(1064봉)이다.(8:37)
도깨비 방망이 맨 끝 지점에 온 것이다.
백화산은 눈덮힌 봉우리가 희어 白華山이 되었다 한다.
아랫마을 ‘흰드뫼’가 한자화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地勢를 보는 이들은 이 산을 聖人을 따라 땅에 내려온 鳳凰의 숫컷이라 한다는데 이를 증명하듯 주위에는 鳳笙, 鳳鳴山, 鳳岩寺 등이 힘을 보태고 있다.
그래서 옛부터 산 南壁 아래 기도발 잘 받는 명당터가 있다.
혹시 소원할 일 있으면 대간길 백화산에 올라 비박하며 소원을 빌어 봄직도 하다.
산신령께서 대간꾼 안 봐주시면 누구를 봐 주시겠는가.
俗된 우리 눈에 도깨비 방망이로 보이는 이 곳 지형은 옛분들이 보시기에는 봉황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이며, 이화령 조령산으로 이어진 산줄기는 봉황의 왼날개(左翼)
희양산, 구왕봉, 장성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봉왕의 오른날개(右翼)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대간길 문경구간은 완전히 鳳凰을 타고 가는 것인데 오늘은 그 중에도
머리를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백화산은 봉황의 부리끝이다.
그런데 부리끝 왼쪽에 헬기장을 만들어 놓았다.
부리끝 파헤쳐 헬기장 만들었으니 봉황이여, 얼마나 불편하시겠는가.
(백화산~ 이화령) 7.28km. (8:37/11:29)
백화산 정상에서 아침을 먹으려던 생각을 바꾸어 옥녀봉 갈림길까지 간다.(8:45/9:07)
백화산 정상은 햇빛 뜨겁고 바람 한 점 없다.
김밥 상할 것이 확실하여 나는 빵을 사 왔는데 김영규님과 임용혁님은 김밥에 상할 만한
내용물은 빼고 야채로만 김밥을 싸 왔다. 걸작품이다.
게다가 마실 물을 얼려 함께 넣어 왔으니 천연냉장고까지 겸한 것이다.
염치불구 두 분의 김밥을 빼앗아 먹고 힘을 낸다.
시원한 얼음물도 얻어 마신다.
희양산성에서 희양산 갈림길 땜방 떠났던 縮地 손승천님이 도착한다.
식사는 이미 마쳤다고 구지 사양하는 孫縮地님을 먼저 떠나 보내고, 우리 三人은 느긋한 김밥소풍 후 길을 나선다.
바위지대다.(9:16)
걸쳐놓은 로프가 미끄러지면서 내 몸이 바위에 부딪친다.
팔꿈치만 약간 벗겨진 것이 다행이다.
자그마한 언덕 내려오니 넓게 펼쳐진 개활지에 억새가 무성하다.(9:25)
헬기장 흔적도 있다.
대간길 8~900m는 될 고도에 이렇게 정원 같은 공간이 있는 게 신기하다.
이 곳부터 길은 편안한 흙길, 꽃피고 나비 천국인 산보길이다.
904봉 넘으니 산수국군락지도 지나고 , 동자꽃도 나타나고, 조록싸리, 어수리, 사람의 흔적이 고스라히 남아 있는 닭의장풀도 보인다.
발부리에 걸리는 긴 풀만 아니라면 더 바랄 것이 없는 걷고 싶은 길이다.
다시 억새가 많은 갈림길이다.(9:39) 주변은 넓다.
좌는 분지리 우는 오시골 갈림길이다. 이제는 다니는 이가 없는 잊혀진 길이다.
근처에는 산뽕나무도 눈에 띈다.
사람은 없으나 사람의 손길이 닿았을 주변의 땅모양이 정겹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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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火田의 흔적.
분지리 마을 안말, 흰드뫼 마을은 가난한 이들이 많이 들어온 곳이라 한다.
배고팠던 그 시절 부칠 땅 하나 없는 이들이 마음 편히 갈 곳이 산골이었다.
이 곳도 가난한 이들이 들어 와 우리가 이제 지나온 길, 자나갈 길, 편안한 대간길
(그 시절에야 대간이란 개념도 없을 때) 능선에 올라 불을 지르고 밭을 일구었다.
넉넉한 이 곳은 그들에게 보상을 해 주었는데 이 곳에 자리잡고 몇 해만 채소며 약초를 가꾸면 아랫마을에 자리잡을 만큼은 풍족해졌다고 한다.
그 사람들이 내려가면 또 배고픈 이들이 들어 와 그 자리를 이어 농사를 지었는데
다들 넉넉해졌다고 한다.
오늘 우리 걸으며 마음 풍족했듯이 이들에게 풍족한 삶을 주었던 대간길이다.
그러다 火田을 정리하는 나라의 정책에 따라 이들은 이 곳을 떠나고, 밭을 일구었던
대간길에는 억새가 무성하게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인간에게 삶을 주고 대간길은 이제 자연으로 돌아 온 것이다.
산에 다니다 보면 억새가 유난히 유명한 곳이 있다.
영남 알프스의 사자평, 대간길 함양 봉화산, 포천 명성산, 정선 민둥산..
이 시대 우리에게는 억새관광 코스이지만 30년 전만 해도 배고픈 민초들의 삶의 자리,火田의 흔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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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 사이를 헤치고 오르니 펑퍼짐한 봉우리에 도착한다.(9:42)
예의 무명봉이려니 하고 지나다 보니 아무래도 지도 위치 상 황학산인 것 같다.
표지도 없고 아무 특징도 없다.
이어지는 길은 여전히 편하다.
흰드뫼와 풍덕풍으로 내려가는 갈림길 지나(9:54) 작은 무명봉(862봉)을 넘는다.
능선길은 넓고 오르막내리막도 없는 700~800고지의 산책길이다.
김삿갓 풍류 떠나온 것 같다.
얼마를 왔을까, 오른쪽으로는 멀리 봉우리가 하나 보이는데 아마도 갈미봉인 듯하다.
길은 좌로 방향을 틀어 참나무 숲 사이로 내려 간다.
참나무들이 서 있는 구릉이 어찌나 평평하고 너른지 김영규님과 나는 목장지로 최적지라고 즉석에서 결론을 낸다.
축산의 전문가 임용혁님도 동의를 해 주니 공연히 으쓱해진다.
구릉지가 평평해질 즈음 우리 가는 길을 가로 질러 한 1m 폭이나 될까 물길이 흐른 개울 흔적이 있다.
순간 털컹한다. 또 알바인가? 어찌하여 물길을 건넌단 말인가.
곰곰 살핀 우리의 결론, 이것은 물길이 아니고 지난 해나 그 즈음 큰 물 몰아쳤을 때
흘러간 자국이라고.
이 결론이 틀리지 않았음은 잠시 후 판명되었다.
얼마 안 가서 대간 리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이제는 우리 눈도 상당히 수준이 높아졌는가? 내심 폼도 잡아 본다.
길은 넓고 주변도 넓은 개활지인데 낙엽송을 조림하여 숲이 무성하다.
작은 웅덩이 습지도 있다.(10:20)
화전을 정리하면서 그 자리에 조림한 낙엽송이 숲을 이룬 것이다.
간벌을 하는지 가까운 곳에서 돌아가는 전기톱의 굉음이 오토바이 소리처럼 온 산을 울린다.
평평한 언덕길 하나 넘으니 한창 간벌이 이루어진 갈림길과 만난다.(10:23)
각서리로 내려가는 안부이다.
길 안내판에는 이화령 1.5km라고 씌여 있다.
나중 알고 보니 이 거리표시는 엉터리였다. 적어도 4.5km는 될 듯 싶다.
이 안부 앞 봉우리로 오른다.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다. 아마도 조봉이 아닐까.(10:26)
주의 깊게 들으니 가까운 숲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맞는가 보다, 鳥峰.
헬기장 하나 지나고(10:37), 두 개의 무명봉을 넘으니(10:45 / 10:59) 또 하나 헬기장이
기다리고 있다.(11:13)
아마도 이 지역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인가 보다.
앞으로는 상당히 가파르게 보이는 봉우리가 우리를 맞는다.
지도에 표시된 梨花嶺 앞 681봉일 것이다.
마지막 땀을 빼리라..
그런데 그 곳에는 철조망이 쳐 있고 대간길은 右로 우회한다.
잠시 후 능선 위에 軍 건물이 보이는데 대간길은 그 곳을 비껴 옆으로 떨어진다.(11:22)
싸이즈가 맞지 않아 우리 같은 숏다리를 괴롭히는 시멘층계를 내려 오니 梨花嶺의 포장길 열기가 후욱 밀려온다.(11:29)
그래도 오늘 대간길, 無風 高溫에 땀 범벅 각오했으나 선선한 바람 속 숲길 쾌적한
산행할 수 있게 해 주신 봉황께 감사드린다.
이 더운 날, 어디 碧梧桐 나무그늘에 앉아 竹實 많이많이 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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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梨花嶺
해발 548m의 3번 국도가 지나는 충북과 경북의 도계 대간 위 고갯길이다.
옛 문헌에는 伊火峴, 伊火伊峴으로 고려 때부터 기록하고 있다.
민간에서는 ‘이우리재’라고 불렀다.
고개가 험하다 보니 산짐승이나 도적의 피해를 만날 수 있기에 ‘어울려’ 넘는다는 뜻으로 ‘어우리재’였을 것인데 세월 따라 ‘이우리재’로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옛고개의 큰형은 다음차 우리가 갈 하늘재(鷄立嶺)이며 이어서 소백의 竹嶺인데
이우리재는 아마도 새재(鳥嶺)보다는 형님이었을 것이다.
새재에 院(여관)이 열리기 전 벌써 이우리재 아래 각서리에는 요광원이란 院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던 이 고갯길이 1925년 일제가 新作路를 뚫면서 졸지에 梨花嶺으로 바뀌었다.
아무 연관도 없는 배꽃고개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한편, 97년말 개통된 이화령 터널도 늦어진 내력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이미 터널을 뚫으려 했건만, 안동 양반들이 들고 일어났다.
터널하면 천성산, 사패산의 악몽이 떠오르지만 이 때 들고 일어난 이유도 못말리는 것이니 ‘이화령에 터널이 뜷리면 경상도 대통령의 脈이 끊긴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그랬는가? DJ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다시 N씨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맞지 않는 말이 되었다.
고개는 말이 없건만,
이름도 바꾸고, 터널도 뚫고, 말도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이 고개는 무슨 생각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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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더운 날, 문경 새재와 하늘재 갈 생각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더위 이깁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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