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 옷을 갈아 입시혔기에,
내 영혼이 잠잠할 수 없어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시편 30:11~12].
시편 30편은 성전 낙성가(봉헌가)다. 어떤 분이시기에 성전을 봉헌하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수렁에서 건져 주시고(궁지에서 건져 주시고),
내 원수가 나를 비웃지 못하게 하시며(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스올(무덤)에서 끌어 올리시어,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신 분이시다.
이런 하나님 경험은 과거형이며, 동시에 진행형이며, 미래형이다.
이런 사랑의 하나님께 '거룩한 이름을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정 사랑하시기에 바른 길을 가지않을 때에는 노하시기도 하지만, 그 노함의 근원은 사랑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으며 한결 같은 사랑이다.
5절에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도, 새벽이 오면 기쁨이 넘친다.'는 말씀이 있다.
나는 이 말씀을 '기다림'과 연결시켜 묵상한다.
눈물 흘리는 밤은 길게만 느껴진다.
살아온 모든 날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시간, 모든 것이 다 무너진 것 같은 시간이다.
자신의 성공과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조차도 다 부질없다.
하나님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하며 산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하나님이 그것을 산산조각 부수신다.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는 시간을 대면하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울 수밖에 없다.
물론, 하나님 없이 사는 이들은 하나님의 부재에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 밤은 영원하지 않으며, 반드시 새벽이 온다.
하나님께서 다시 나의 얼굴을 바라보시는 것이다.
절망의 순간, 눈물 흘리는 밤은 그렇게 끝난다.
하나님의 사랑은 매일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듯 변함없이 한결같다.
그러므로,
지금 눈물 흘리는 밤을 보내고 있다고 할지라도 두려움이나 절망에 굴복하지 말라.
최후의 보루인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을 바라는 이들의 하소연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귀를 기울여 들어주시고 우리를 도와주신다.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슬픔의 상복을 기쁨의 나들이 옷으로, 검은 상장(喪章)을 들꽃으로 갈아입어 주신다.
이런 하나님이시니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하나님은 어디에서나 찬양할 수있지만, 그분을 찬양하기 위한 성전을 봉헌하는 것이다. 그분을 성전에 가두기 위함이 아니라, 더 잘 찬양하기 위해서. 하지만, 악한 시대는 성전에 하나님을 가둬두었고, 오늘 날에도 하나님은 성전이라는 감옥에 갇혀계시다.지금 하나님이 눈물 흘리는 밤을 보내고 계신 것은 아닌가? 그 하나님을 위로하고, 그 하나님을 춤추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을 회복시켜 춤추시게 하라.그가 지금 강도를 만나 길에 쓰러져 계신다. 교회에 쓰러져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