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미칠근<一米七斤>
一米七斤恩 指月禪師警
海印行者時 半米手中責
<和翁>
한 톨의
쌀이 은혜가
일곱 근이라고
지월(指月)
선사(禪師)께서
경책(警策)하셨네!
해인사(海印寺)
행자
(行者) 시절에
반톨(半米)의 쌀을
손 가운데
보이며 꾸짖으셨네!
*이 게송(偈頌)은 화옹(和翁)이 50년전 해인사(海印寺) 행자시절(行者時節)에 지월선사(指月禪師)님을 회상(回想)하면서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 평기식(平起式) 게송(偈頌)이다. 압운(押韻)은 경(警) 중(中)이다. 해인사(海印寺) 행자(行者) 시절에 공양주(供養主)를 했는데 수곽(水廓)에서 쌀을 씻다가 쌀 반 톨이 수곽(水廓)에 떨어져 있는 것을 지월선사(指月禪師)께서 보시고, 손에 쌀 반 톨을 가지고 공양 칸에 오셔서 공양주 행자가 누구입니까? 큰 스님 저입니다, 했더니, 일미칠근(一米七斤)입니다, 하시고 시은(施恩)의 막중함을 일깨워주셨던 일화(逸話)다, 벌써 50년 전일이 되었다, 총림(叢林)에는 이렇게 후학(後學)들을 이끌어 주는 큰 선지식(善知識)이 계셔야 하는데, 요즘은 그런 큰 선지식이 없어서 불교교단(佛敎敎團)이 시끄럽다. 지월선사(指月禪師)님은 그때 유나(維那) 소임을 맞고 계셨다. 갓 출가한 행자 눈에 비친 지월(指月) 스님은 인자(仁慈) 하시면서도 근엄(謹嚴)하셔서 뵙면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화옹이 군대(軍隊) 제대(除隊) 하는 날 12월25일 해인사로 제대복(除隊服) 입은 채로 출가(出家)를 했다. 그날은 눈이 엄청 많이 내렸다. 열아홉 살 때 해인사로 출가하려고 갔더니, 군대 갔다 오라고 해서 제대하는 날 갔다. 행자방(行者房)은 여러 명이 한방을 쓴다. 행자 소임에 따라 소임이 같은 행자끼리 한방을 쓴다. 한겨울인데도 방은 미적지근한 온기다. 지월선사(指月禪師)께서는 매일 행자방(行者房)에 들리신다. 큰스님이 오시면 좌복방석(坐服方席)을 내 드리면 앉자마자 방석을 하나 더 달라고 하신다.
방석을 하나 드리면 또 방석을 하나 더 달라고 하신다. 이렇게 방석 여섯 개를 깔고 앉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요즘 행자방에 장작 몇 개 땝니까? 날씨가 추워서 8개 땝니다. 그러면 4개만 때십시오. 방이 너무 덥습니다. 옛날에는 나무하는 부목(負木)들이 10명이 나무를 했는데, 요즘은 가야산 중중봉(中中峰)까지 30명이 나무를 해와도 감당(堪當)이 안됩니다. 그러니 장작 4개씩만 방에 불을 때십시오, 하고 매일 경책(警策)을 하셨다. 좌복 방석을 여러개 달라고 해서 깔고 앉은 것은, 행자(行者)들을 경책하기 위한 방편(方便)이다. 말씀도 아주 작게해서 유나 큰스님 좀 크게 말씀 해주십시오. 하면 옆방에 수행하는 스님 소리 방해하면 못씁니다. 하고 아주 낮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말씀도 이렇게 바로 앞에서 서로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성량(聲量)으로 작게 말씀하셨다. 옆방 수행자(修行者) 배려(配慮)다. 화옹은 행자시절 공양주(供養主)를 했다. 해인총림(海印叢林) 대중(大衆)이 워낙 많다보니, 아침 공양 마치자마자, 점심공양(點心供養) 할 쌀을 씻는다. 수곽에서 큰 양푼 그릇에 넣고 깨끗하게 씻어서 쌀 한톨 한톨을 수저로 저어 가면서 모래나 돌 이물질을 추려내는 작업이 쉽지가 않다. 쌀 톨이 여물지 않는 것은 물에 씻을 때 흘러갈 때도 있다. 지월 유나스님께서는 이렇게 버려진 쌀을 꼭 주어서 공양간에 가지고 오셔서 손, 바닥을 펴 보이면서 공양주 행자님이 누구십니까? 접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쌀 반 톨입니다. 이 쌀이 수곽(水廓)에 떨어졌어요. 일미칠근(一米七斤)입니다. 하시고 시은(施恩)의 중함을 말씀하셨다. 유나스님께서 경책할 때마다 정신(精神)이 번쩍 들고 신심(信心)을 다졌다.
해인사 공양주는 정말 힘든다. 삼시(三時) 세 때, 서 말 쌀 씻어 밥 짓는 일이 만만치 않다. 밥을 짓다 보면 타거나 질퍽할 때가 많다. 지월 선사님은 공양이 끝나면 부엌에 오셔서 아침밥은 공양이 구수해서 좋습니다. 밥이 질퍽하면 이번 밥은 촉촉해서 좋습니다. 칭찬이 아니라 꾸지람이시다. 큰스님 어떻게 하면 밥을 잘 짓겠습니까? 물어보면 신심(信心)을 내보세요. 신심을 내보라는 말은 아직도 정성이 부족하다는 말씀이다. 밥이 타면 밥이 부족해서 난리다. 한 스님당 세 홉 밥을 먹는데 태웠으니 모자라면 공양간이 난리가 난다. 밥이 누른 만큼 몫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밥이 타지도 질지도 않게 공양 밥을 짓는 방법을 찾았다. 쌀을 밥솥에 물을 붓고 죽 쑤듯이 삽 주걱으로 젖는다. 밥이 다 될 때쯤 되면 밥물이 뽀골 뽀골 올라오면서 맛난 냄새가 난다. 이때 아궁이에 땐 불을 다 밖으로 빼어내고 아궁이 밑바닥에 물 한 바가지를 뿌려놓고 한참 후에 숯불 몇 개를 아궁이에 넣어 놓고 밥솥 뚜껑을 닫아놓고 뜸을 들이면 밥이 타지도 질퍽하지도 않고 아주 맛있는 밥이 되었다. 3개월 만에 터득한 해인사 공양 밥 짓기 화옹의 비법이 되었다. 이렇게 타지도 질퍽하지도 않게 공양을 짓자 그 후로는 지월 유나 스님의 꾸중은 없었다. 3개월 공양주 소임을 하다가 국만 끓이는 갱두(羹頭) 소임을 맡았다.
속가에서 밥만 받아 먹었지 국을 끓여 보지 않아서 된장만 풀고 끓인 국은 맛이 없었다. 얼마나 맛이 없는지 지월 유나 스님께서 갱두간(羹頭間)에 오셨다. 공양주 때와 마찬가지로 신심(信心)을 내 보라신다. 시래기에 물 붓고 된장만 넣어서는 맛을 도저히 낼 수가 없어서 원주(院主) 스님께 대구 시장가면 멸치 가루를 곱게 빻아 달라고 했다. 며칠 만에 멸치 가루가 와서 깨끗한 헌겁에 싸서 하얀 사기 국그릇을 국 솥 한가운데 엎어놓고 국을 끓였다. 멸치 가루만 들어가도 국 맛은 기가 막히게 맛이났다. 이틀이 지나자 국 맛이 너무 좋다고 지월유나 스님께서 갱두간에 또 오셔서 어떻게 국을 끓이기에 국 맛이 좋다고 하시면서 국을 솥에서 퍼 담으려고 할 때 확인을 하신다. 국을 솥에서 다 푸고 하얀 사기그릇이 보이자, 저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 사기 사발을 넣고 국을 끓였더니 맛이 좋습니다. 큰스님! 했더니, 국솥에 있는 사기 사발을 열어보라신다. 멸치 가루를 넣는 것을 눈치를 채신 것 같다. 사기그릇을 열어 보이자, 헌겁에 싸놓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이실직고 멸치 가루입니다. 국 맛이 없어서 멸치 가루를 넣으면 맛이 날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갱두간에 숨겨놓은 멸치 가루를 다 내 달라고 하신다. 앞으로는 절대로 멸치 가루로 국을 끓이면 해인사에서 쫒겨 난다고 하시고 나무라지는 않으셨다. 아무리 나이가 어린 행자로도 선사님은 항상 누구에게나 존대(尊大) 말을 쓰셨다. 그 후로 옳다, 나는 은사(恩師) 스님을 지월(指月) 스님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짐했다. 그런데 인연법(因緣法)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지월 선사님은 그해 열반에 드셨다. 지월선사님이 입적한 후에 해인사 밭에는 퇴비(堆肥)가 부족해서 채소 작물을 흉작이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화장실에 낙엽도 챙기셨다는 일화다.
행자시절 해인사 화장실은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화장실 똥 위에 낙엽도 항상 덮게 해서 그 퇴비로 밭작물 퇴비로 활용토록 했다는 일화다. 가끔 법문 들으려고 유나(維那)스님 방에 행자들이 가기도 했다. 겹겹이 꼬맨 다 떨어진 누더기, 옷이 전부였다. 양말도 몇 겹을 기웠는지 원 양말 바탕은 보이지 않는 두툼한 버선 같은 양말을 신고 단아한 좌세로 앉아 계셨다. 눈가에는 잔잔한 미소를 짓고 말씀은 낮게 알아들을 정도로 법문을 하셨다. 행자시절에 법상에 올라 법문하신 것은 딱 두 번 보았다. 법문 내용은 똑같은 법문이다. 대궐 같은 집에 백옥같이 하얀 쌀밥에 유리알 같은 장판에 무엇이 부족합니까? 인생은 초로 같으니 부지런히 공부해서 부처님 되십시오. 짧고 울림이 큰 법문이었다. 조사어록 선어도 아닌 평상의 도리로 대중을 몸소 실천을 앞서 보이며 해인총림을 이끄셨다. 총림에는 이렇게 대중과 함께 먹고 자면서 앞에서 이끌어 주시는 선지식(善知識)이 많아야 한다. 용맹정진 때 보면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죽비(竹篦)를 손수 치면서 주장자를 끌어 않고 정진을 하셨다. 20대 득력(得力)을 해야 한다, 하셨다. 늙으면 힘이 부쳐서 정진(精進)도 못한다고 하셨다. 사시불공(巳時佛供) 때면 꼭 참석하셔서 축원(祝願)을 하였는데 지월선사님의 축원 소리는 천상음악(天上音樂) 같았다. 선사의 축원 소리는 속진(俗塵)이 다 떨어진 말로는 표현도 할 수 없는 청아성(淸雅聲)이었다. 삼복더위에도 산문 밖을 나설 때는 가사장삼(袈裟長衫)을 꼭 입고 가셨다. 간편한 외출복이 좋지 않겠느냐고 스님들이 물으면 가사 장삼이 스님한테는 시어머니라 했다.
가사장삼(袈裟長衫)을 입으면 함부로 걷지도 뛸 수도 눕지도 못하고 몸가짐을 여법(如法)하게 갖도록 하기 때문에 가사장삼은 꼭 입고 다니라고 경책(警策)하신다. 지월선사님께서 열반하려 때 상좌스님들이 물었다는 문답(問答)이다. 스님 염라대왕(閻羅大王)이 보입니까? 내 눈에는 안보여! 그럼 화두는 들립니까? 내가 내 집을 두고 어디를 가겠나? 하셨다고 한다. 성성적적(惺惺寂寂) 화두삼매(話頭三昧) 속에 열반에 드신 증거(證據)다. 자료를 다 찾아보아도 그 흔한 오도송(悟道頌)이나 열반송(涅槃頌) 하나가 없는 유일한 선지식(善知識)이다. 지월선사(指月禪師)님의 오도송(悟道頌)은 불안(佛眼) 지혜(智慧)로 보면 내 눈에는 염라대왕(閻羅大王)이 안보여! 이고, 내가 내 집을 두고 어디를 가겠나? 가 불생불멸(不生不滅) 본무생사(本無生死) 도리(道理)에 체증(體證)했으니, 열반송(涅槃頌)인 셈이다. 임종시(臨終時)에 눈빛이 떨어질 때 성성적적(惺惺寂寂) 갈 곳이 뚜렷하지 아니한가? 요즘은 해인사 총림에는 지월 선사님 같은 큰 선지식이 없는가 보다. 들리는 뉴스는 주지(住持)스님, 성스캔(scandal)들로 이슈가 되니 말이다. 오늘은 화옹의 행자시절에 느꼈던 지월 유나 선사님의 일미칠근(一米七斤) 일화(逸話)를 게시해 보았습니다.
여여법당 화옹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