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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55
마태복음 6장 9-13절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넷째 간구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입니다. 양식이라는 말 안에는 우리 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데, 그것까지도 하나님께서 채워 주십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리문답은 이 기도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오직 주께서 모든 선한 것들의 근원이심과, 또한 주께서 베푸시는 복이 없이는 우리의 염려나 수고도, 주의 은사들도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어떤 피조물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요리문답 자체를 통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양식을 구하라고 할 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그것도 ‘오늘’ 우리에게 그것을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양식을 구하도록 할 때 다른 어떤 피조물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가르친다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구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모든 시간이 기도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구한다는 것은 양식이 의미하는 바, 우리 몸에 필요한 모든 것들에 대한 한없는 욕심을 억제하도록 한다는 것도 가르칩니다. 달리 말하면 자족하도록 가르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신자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아 누리는 자로 있고, 나아가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을 받은 자로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을 가장 큰 상급으로 알리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받았다는 것은 자족할 수 있는 근거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 몸에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면서도 그것이 욕심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다섯 번째 간구와 여섯 번째 간구입니다. 먼저 다섯 번째 간구에 대해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6문에서 설명합니다.
126문. 다섯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인데, 이는 “주의 은혜의 증거가 우리에게 있사오니(마6:14-15, 18:21-35), 우리 이웃을 진심으로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서, 불쌍한 죄인인 우리의 허물들과 언제나 우리에게 붙어 있는 악들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시51:1-7, 143:2, 롬8:1, 요일2:1-2).”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간구의 핵심은 죄 사함입니다. 마태복음 6장의 본문은 ‘죄’로 번역하고 있지만 원문은 ‘빚’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 진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사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한 비유로 빚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왜 죄를 빚이라고 표현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순종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또한 그 결과 형벌로써 그 값을 치러야 할 처지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죄들이 우리를 하나님께 빚진 자들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으면, 그것은 하나님께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하지 못하는 것이요, 또한 그것을 그에게 행해드리지 못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 빚진 자들로 남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빚의 결과는 무엇인가? 형벌로써 그 빚을 보상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런 죄를 사해 달라는 것은 빚진 자가 자신의 모든 빚을 탕감해 달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해 준 것처럼 그렇게 탕감해 달라는 것입니다. 빚진 자에게 그 빚에 대하여 아무런 요구도, 형벌도 가하지 않도록, 마치 그 빚이 지불된 것처럼 장부를 깨끗이 정리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는 자는 요한복음 13장 10절의 대상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중생 이전 우리의 본성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임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없습니다. 혹 깨닫는다고 해도 자신의 죄 문제를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스스로 해결한다는 것은 형벌을 받는 것인데, 그것은 영원한 죽음으로 결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고 말씀하시고 죄인에서 의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미 우리가 앞서 살폈던 것처럼 우리 죄를 대신하여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구원 받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로우심 때문에 죄인을 그냥 용서해 주실 수 없습니다. 반드시 공의로워야 합니다. 그래서 죄인을 대신한 의인을 세우시는데, 세상에는 의인이 없기 때문에 성자로 하여금 성육신하여 우리를 대신하게 하셨습니다. 이 중보자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시되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성취하실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모든 짐을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즉 우리의 모든 죄의 빚을 그리스도께서 갚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에서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습니다. 모든 죄가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은 요한복음 13장의 표현처럼 지상에 있는 동안 모든 신자는 목욕한 자로 있긴 하지만 발도 계속해서 씻어야 할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의 구성 요소는 죄책과 부패입니다. 모든 인류의 머리인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와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할 때 모든 죄인은 죄책과 부패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아담에게만 죄의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 각자에게 죄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고, 또한 인간의 모든 부분이 부패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자범죄를 짓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죄의 구성 요소가 죄책과 부패라고 할 때 죄책과 부패 모두를 해결하신 것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을 해결하실 것이지만 일차적으로 죄의 대한 모든 책임을 우리가 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 말은 신자일지라도 여전히 부패함이 있다는 것이고, 그런 부패함이 자범죄를 짓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다섯 번째 간구인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우르시누스는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이유에 대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즉 죄 사함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라는 자들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그 은덕을 베푸시지 않기 때문이란 겁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죄라는 것을 아는 것도 있지만, 아는 죄만 짓는 게 아니라 모르는 죄도 짓기 때문입니다. 그럼 모르는 죄에 대해서는 용서를 구하지 않기 때문에 죄가 남아 있는가? 그래서 결국 구원을 받을 수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하십니다. 알고 짓는 죄뿐 아니라, 모르고 짓는 죄도 용서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바라는 자들에게만 은덕을 베푸신다, 죄 용서를 구하는 자들에게만 용서하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실 때 깨닫게 하시는 바에 대한 마땅한 의무가 용서를 구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용서를 구함으로 죄 사함만이 아니라 용서 받은 자의 마땅한 본분까지 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회개할 뿐만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까지 맺도록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그 중 한 가지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이유로 앞서 언급한 요한복음 13장의 내용을 생각할 수 있는데, 아무리 거룩한 사람에게도 금생에서는 죄의 잔재가 붙어 있습니다. 목욕했다고 해서 발이 더러워지지 않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죄 용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복들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네 번째 간구, 양식으로 표현되고 있는 우리 몸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아 누리면서도 죄 용서함 없이 받아 누린다면 그것이 어떻게 복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불신자들에게 몸에 필요한 모든 것이 채워질 때 죄 용서함이 없다는 그것은 저주가 아닌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더더욱 거기에 몰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복을 누리는 것은 반드시 죄 사함이 전제가 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요리문답은 죄 사함에 대해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서, 불쌍한 죄인인 우리의 허물들과 언제나 우리에게 붙어 있는 악들을 우리에게 돌리지 말 것을 구하라고 가르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이지만 남아 있는 이 부패성 때문에, 그래서 그로부터 나오는 죄 때문에 우리는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허물이 있으며, 특히 요리문답은 우리에게 붙어 있는 악들이라고 표현하는데, 우리에게는 늘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제거가 되지 않습니다. 완벽히 제거가 될 때는 개인적인 죽음이나 종말로 말미암아 산 자들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때입니다. 그 전에는 우리 안에 있는 이 부패함이 악한 것으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땅에서는 완전성화가 불가능합니다.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죄 사함을 위해 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를 위해 대신하여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기 때문입니다. 피 흘리신 것은 대략 2,000년 전이지만 그 피의 효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시기 전 구약 백성에게, 또한 피 흘리신 후 신약 백성에게 늘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우리의 허물과 악함을 용서해 주시기를 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주기도의 내용을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잘못 이해하면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원인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 용서를 조건으로 하지 않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 스스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고 말씀하시고 죄인에서 의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이 원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까지 우리를 대신하여 내놓으셨던 겁니다.
그럼 왜 다섯 번째 간구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가? 골로새서 3장 13절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한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그것도 우리 편에서 보자면 은혜와 긍휼로 거저 용서하신 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그런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면서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을 용서하도록 하는 그 열매를 찾으십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비교 내용입니다. 주인과 두 사람이 있는데, A라는 사람은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졌습니다. 평생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것입니다. 반면 B라는 사람은 A라는 사람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졌습니다. 갚을 수 없는 것에 비하면 이것은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은 평생 갚을 수 없는 빚을 주인에게서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탕감 받고 나가다가 B라는 사람을 만나 빨리 갚지 않는다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주인이 어떻게 말하느냐?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마18:32-33) 주기도의 다섯 번째 간구의 앞부분은 바로 이 내용입니다.
요리문답은 주의 은혜의 증거가 우리에게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 이웃을 진심으로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서, 불쌍한 죄인인 우리의 허물들과 언제나 우리에게 붙어 있는 악들을 우리에게 돌리지 말 것을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용서 받을 수 있는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그의 공로 때문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의 결과로 나타나는 마땅한 바가 무엇인가 할 때 우리가 우리 이웃을 진심으로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주의 은혜의 증거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웃에 대한 용서, 그리고 그런 용서를 통해 나타내는 이웃 사랑의 정신은 참된 믿음과 회개의 증표인 겁니다. 우리는 이 증표를 가지고 있을 때 역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덧붙여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용서라는 의미는 더 이상의 빚이 없다는 것입니다. 용서로 말미암아 빚이 없는데도 아직까지 빚이 있는 것처럼 관계가 형성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마태복음 18장의 비유는 이런 내용으로 정리가 됩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용서했다는 말만 있어서는 안 되고, 마음으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여섯 번째 간구인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7문입니다.
127문. 여섯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인데, 이는 “우리가 너무 연약하여 우리 자신만으로는 한순간도 설 수 없사오며(시103:14-16, 요15:1-5), 더욱이 우리의 철천지 원수인 마귀와(고후11:14, 엡6:10-13, 벧전5:8) 세상과(요15:18-21) 우리 자신의 육신이(롬7:23, 갈5:17)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오니, 주의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존하시고 강건케 하사(마10:19-20, 롬5:3-5), 이 영적 전쟁에서 굴복하지 않고(마26:41, 막13:3, 고전10:12),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얻기까지 언제나 강건하게 대항하게 하시옵소서(고전10:13, 살전3:13, 5:23).”라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간구의 핵심은 시험에 들어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달라는 것입니다. 시험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에 의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험은 믿음의 시련으로 이 시련을 통해 인내를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할 목적을 가진다고 말씀합니다(약1:3-4). 그러나 마귀로부터 오는 시험은 또 다른 면에서는 자기 욕심에 끌려 죄와 맞물려 있는 그런 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약1:14-15). 이런 측면에서 야고보서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종종 우리가 오해할 수 있는 것,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는다고 할 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시험이 있고 그 시험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 탓으로 돌릴 수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 데 있다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시험이라 할지라도 마귀는 그리고 우리의 욕심은 죄와 맞물러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으로만 계실 뿐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우르시누스의 말을 조금 옮기면,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악령들을 통해서 악인을 벌하시고 경건한 자들을 징계하시고 시험하시면서도, 그가 마귀로 말미암아 범해지는 죄들의 원인도 아니시고, 마귀의 악함에 함께 참여하시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악인은 악인으로 벌을 받을 것이요, 또한 선한 자가 징계를 받고 훈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롭고도 거룩한 역사하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인이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악인의 부패함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들의 죄 짓는 것을 원하시지도, 승인하시지도, 이루시지도 않으시며, 다만 그의 의로우신 심판으로 그것들을 허용하시는 것뿐이며, 그의 일과 목적을 그들을 통하여 이루어 가실 때에도 그는 그의 뜻을 그들에게 계시하거나 그들의 의지에 영향을 주셔서 그의 계시된 뜻을 목적과 법칙으로 삼아 처신하도록 하시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에로 이끄시는 것으로 나타날 때에 우리는 그것을 그가 그의 지극히 정의로우신 뜻과 판단에 따라서 우리를 시험하시고 증명하시고자 하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반면 마귀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고 말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가 우리를 미혹하고 꾀어 죄를 짓게 하도록 허용하시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 것을 간구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두 가지 형태의 시험에서 구원 받기를 기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첫째, 하나님께서 시험하신다 할지라도 그 시험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둘째, 마귀나 세상이나 육체가 우리를 미혹하여 죄에 빠지도록 허용하지 마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혹은 그렇게 허용하실지라도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에 빠지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럼 악에서 구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르시누스는 악을 형벌의 악과 죄책의 악으로 구분합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물리적인 악과 윤리적인 악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공의의 형벌이 형벌의 악 혹은 물리적인 악입니다. 반면 죄와 관련된 것은 죄책의 악 혹은 윤리적인 악입니다. 그러므로 악에서 구하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죄책의 악, 윤리적인 악으로부터 구해 달라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않도록 기도하는 이유는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죄책의 악, 윤리적인 악, 다시 말해 죄와 관련해서만 구하도록 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형벌의 악, 물리적인 악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공의의 형벌로서 우리에게 환난이 있을 때 우리는 그런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악에서 구해 주십사 기도해야 합니다. 형벌의 악이든 죄책의 악이든, 혹은 물리적인 악이든 윤리적인 악이든 하나님께서 모든 악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혹 하나님의 뜻이 있어 우리에게 악을 보내신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우리의 구원에 기여하여 우리로 하여금 유익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그런 과정 속에서 마침내 우리를 내생에서 완전히 구원하시고,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요리문답은 우리가 너무 연약하여 우리 자신만으로는 한 순간도 설 수 없다고 설명하는데, 이것이 우리가 여섯 번째 간구를 해야 할 이유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 받은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죄와 전혀 상관없는 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부패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 사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처럼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죄가 사함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연약하기까지 합니다. 얼마나 연약한지 작은 시험에도 넘어지기 쉬운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스스로는 서 있을 수조차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모든 악에서 구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요리문답은 우리의 연약함만이 아니라 우리의 원수 마귀와 세상과 우리 자신의 육신이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마귀는 때로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유혹합니다(고후11:14). 때로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도 합니다(벧전5:8). 그래서 성경은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6:10)고 권면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는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6장의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4-17) 여러 가지로 나누어 놓았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연결된 것들입니다.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은 다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된 것들이란 것입니다. 즉 마귀의 유혹, 그리고 마귀의 공격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공생애에 앞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때 말씀으로 물리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럼 이것만 있는가? 에베소서 6장의 이어지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말씀으로 모든 마귀의 시험을 물리친다고 할 때 그것도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니기에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써야 합니다. 나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는 것입니다(딤전4:5).
마귀뿐 아니라 세상도 우리를 공격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가지고 있는 원리는 성경의 원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 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가? 우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23)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때문에 연약한 우리 스스로는 결코 올바르게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악에서 구해주시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요리문답은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에 주의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존하시고 강건케 하사 이 영적 전쟁에서 굴복하지 않고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얻기까지 강건하게 대항하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달리 말하면 완전한 승리가 주어질 때까지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존되고 강건하게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우리는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 말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늘 죄에 노출되어 있고 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부패함이 있고, 또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기도 하고, 그런 시험에서 넘어져 악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계속해서 용서하십니다. 그런 우리가 나타내야 할 마땅한 자세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하고, 더 나아가 악에 빠지지 않도록 모든 시험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보존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책임지십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 구하고 받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때문에 구하지 않고도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때문에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 무엇보다 영적인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