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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종교 없는 영성 충만의 삶>의 줄거리:
흔히 예수님을 기독교라는 종교의 창시자라고 합니다. 난센스 중에 최고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두 번째의 난센스가 바로 종교가 인간의 영적인 활동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입니다. 기독교 포함하여 종교는 전혀 영적이지 않고 단지 너무나 세속적일 뿐입니다. 인간의 영적 삶의 주님이신 예수님과 종교는 서로 근접이 불가능한 상극 관계입니다.
종교 없는 영성 충만의 삶
(마가복음 12:1~9)
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종교 없는 영성 충만의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종교 없는 영성 충만의 삶’
오늘 말씀의 제목은 상당히 모순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흔히들 종교는 인간의 영성의 산물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 이와 같은 관점에서 예수님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이러한 관점은 틀렸습니다.
본문에서 제시된 비유는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유대교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선민의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은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 과정이 본문의 비유를 통해 잘 드러납니다. 다만 버려진 것은 예수님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먼저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과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상극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유대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유대교가 종교로써 갖는 본질이 다른 모든 종교에서도 공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라는 종교의 본질은 불교에서도 발견되며 이슬람교에서도 발견되고 기독교와 천주교에서도 발견됩니다. 따라서 유대교와 예수님이 상극이라면 그 본질이 공유되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도 예수님은 상극의 관계를 갖고 계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앞서 흔히들 종교는 인간의 영성의 산물로 여긴다고 말씀드렸는데 이것은 난센스입니다. 종교는 절대 영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종교에 의해 버림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의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종교에 의해 버림받기를 자청한다는 것이며 또한 종교를 버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내린 자는 빌라도였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 빌라도는 이들의 계략이 이행되는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형은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버리는 방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종교로부터 버림받으신 주님을 받아들이고 믿는다는 것은 결코 종교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 사실을 모른 채 예수님을 믿어왔습니다.
십자가 복음에 치중하여 성경을 해석할수록 복음은 종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절대 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종교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방법이 십자가형이기에 십자가를 받아들였다면 종교와 상극인 자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좀 더 본질적인 의문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종교란 무엇일까요? 종교는 이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실현하기 위하여 세상을 초월한 존재를 동원하고자 하는 방식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종교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실은 세상을 무척 사랑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랑을 방해하는 모든 대상을 죽이고자 합니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얻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루어지기 힘듦을 느끼고 세상을 초월한 존재의 힘을 동원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종교 활동은 언뜻 보기에 영적인 행위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어쨌든 세상을 초월한 존재와의 연결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 만날 수 있는 영적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세상의 가치들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상태에서는 귀신의 영에 의해서 조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과 마주대하고 관계하여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귀신의 노예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영적인 간섭은 일어나고 있지만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 동기와 과정이 영적인 활동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종교 활동은 지극히 육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악한 영인 귀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인간이 세상을 사랑하여 육적인 활동만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진짜 영성이란 무엇일까요? 영성은 유일한 참 영이신 하나님을 좋아하는 인격적 특성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함은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세상의 가치들보다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을 좋아하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마음에서 첫 번째 현실로 느끼는 상태가 바로 영성입니다.
여기서 종교와의 차별점이 생겨납니다. 종교가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활동임에 비해 영성은 하늘의 가치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영성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성을 갖는다는 것은 특이하게도 수업 중에 한눈을 파는 것과 닮았습니다.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채움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이신 하나님을 좋아하는 마음 즉 영성입니다.
본문에서는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포도원 농부들이 욕심에 눈이 멀어 주인의 종들과 아들까지 죽이게 됩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포도원은 선민 이스라엘이며 그 아들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악한 농부들은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을 상징합니다.
실제로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종교로부터 버려진 예수님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것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진실이기에 우리는 결코 종교와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동안 기독교인이라는 종교인이기를 자청하며 살아왔기에 예수님 믿는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2절을 보면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농부인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서 얻고 싶었던 것이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7절을 보면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농부 즉 종교지도자들이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돌려드리고 싶어 하지 않고 도둑질하고자 했던 유산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셨던 소출이자 유대종교지도자들이 도둑질하고 싶어 했던 유산은 바로 선민들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선민들을 잘 지도하여 그 마음을 하늘로 보낼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탐낼만한 가치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유혹으로부터 마음을 잘 지켜서 세상을 등지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찾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좋아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족이나 건강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종교지도자들에게 바라셨던 것은 선민들이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 마음이 하나님을 찾아 올라가는 일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모든 가치보다도 하나님 아버지를 더 좋아해서 마음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하나님께서는 선민도 지도자들도 너무나 예쁘게 여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에서 나타나는 대로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기대에 부합하기는커녕 하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여 하늘로 올라가야 될 선민들의 마음을 잡아끌어서 땅에 묶어버렸습니다. 마음을 땅에 묶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유대교라는 종교로 변질시켰던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만든 일종의 이론체계가 바로 유대교라는 종교입니다. 교리와 조직을 만들어서 이것을 따를 때에만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선민들을 속이고 잡아 끌어들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교리와 조직이 목표로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유전 죄를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을 등지고 망각한 채 세상을 좋아합니다. 세상의 가치를 통해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상태를 문제시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추구하는 것 또한 세상의 가치였기에 선민들의 유전 죄를 묵인한 채 세상을 더욱 추구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어떤 심령도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땅에 묶어버리는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유대교는 이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 되어버렸고 그러한 교리와 규정은 더욱 강화되어 갔습니다. 선민에게는 하나님이 아닌 종교에 대한 헌신이 요구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기다리셔도 선민들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가치보다 하나님을 좋아하여 선택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김 사장이 돈을 좋아하여 돈을 벌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이럴 때에 종교지도자들은 그 마음이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을 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일어난 일은 이와는 반대되는 일이었습니다. 종교를 위해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사업을 더 크게 확장시켜주셔서 돈을 더 잘 벌게 될 것이라는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는 김 사장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기는커녕 더욱 돈에 묶이게 됩니다.
이는 비단 유대교에 한정된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의 구조가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종교에 속했든 사람의 마음은 땅을 떠나 하늘로 가야만 한다는 사실 자체가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내세를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가장 무섭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는 문제를 나름대로 해결해주기 위하여 내세의 존재를 주장하지만 실제로 죽어서 내세로 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실제로 좋아하는 가치는 세상에 다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로써의 기독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은 별의별 좋다는 말로 묘사되고 있어도 정작 천국에 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번영하고 형통하고 건강하고 장수한 뒤에야 일어나야 할 일로 여깁니다. 천국을 어디까지나 세상의 가치 뒤에 있는 차선책이지 최선책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러한 천국은 사후에 대한 보험정책 정도로 만들어진 이론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마음이 세상을 좋아하는 상태에서는 영이신 하나님을 만날 길은 없습니다. 이러한 종교가 되어버린 기독교에서 지도자들은 교인들의 마음을 장기판에서 장기알을 옮겨 놓듯이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을 뿐입니다. 실제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영이신 하나님을 만날 방법에 대해서는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잘 드러낸 성경이 이사야서입니다. 이사야 1장 12절을 보면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이 이사야 전체의 핵심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 와서 온갖 행사를 벌이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음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또 이어지는 16~17절을 보면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민들 중에 그러한 사람이 없어지고 말았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삶의 현장에는 가정 직장 학교 시장 등이 있습니다. 사회단체나 모임 혹은 취미활동의 장소도 있습니다. 영성의 삶을 산다는 것은 이러한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영이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한 사람이 영이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 이상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과 연결될 때에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을 가지게 됩니다. 그럴 때에 이 땅의 삶은 영이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성적 삶입니다.
그러나 종교는 유일한 참 영이신 하나님과의 연결을 철저하게 차단합니다. 종교는 조직에 속한 사람들의 마음이 하늘로 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또한 개인이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오직 종교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이름 부르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영성은 결코 종교와 같은 의미일 수 없습니다. 하물며 종교의 조직이나 교리 혹은 의무나 습관이 영성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영성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신 방식입니다. 그 십자가가 영이신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모임에서 영성 충만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하나를 가지고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시장에서도 학교에서도 각종 모임과 단체에서도 영성 충만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할 때에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의 과정에도 연합하게 됩니다. 이 과정은 하나의 패키지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패키지의 사건에 참여하게 되면 예수님이 지금 하늘에서 삼위일체로 계신 것처럼 그 관계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가 아닌 복음의 사건입니다. 복음은 종교가 아니며 교리와 조직도 아니며 의무나 습관이 아닙니다. 복음은 내가 마음으로 참여해야 될 하나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연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전부입니다. 이러한 복음이 적용되는 영성의 삶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과 바람대로 진척되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삶이 어떠한 모습으로 진행되어 나가든 우리의 마음은 하늘에 앉힌바 되어서 하나님을 나의 재산이자 보물과 보석으로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성은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갖는 인격적 속성입니다. 부성은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갖는 인격적 속성입니다. 사회성은 한 사람이 사람들의 모임에 대해 갖는 인격적 속성입니다. 전문성은 한 사람이 특정분야에 대해 관계할 때에 갖는 인격적 속성입니다. 목적지향성은 목적을 최우선하여 관계하는 인격적 속성입니다. 이로부터 종교성과 영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종교성이란 좋아하는 세상을 얻기 위해 초월자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인격적 속성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관계할 수 있는 실제 영적 존재는 없습니다. 종교가 말하는 신은 전부 허구이고 망상일 뿐입니다. 세상으로 채워져 있는 마음으로는 결코 영의 세계와 관계할 수가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악령에 의해 조종당할 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종교는 마귀가 인간의 죄악을 이용해 만들어낸 최고의 창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절대자요 초월자로써의 신이신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을 통해서만 관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종교일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사건이라는 복음에 마음을 참여시킴으로써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루어지게 됩니다.
종교에 속할 때에 종교는 우상시되고 종교의 틀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세상의 가치들을 등지고 하늘로 올라오기만을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틀에 갇힌 영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종교는 원천적으로 하늘로 올라가려는 사람의 영을 땅에 묶고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4대 성인 중의 하나로 여깁니다. 4대 성인이라 함은 예수,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입니다. 그저 어려서부터 4대 성인이라는 말을 듣고 살았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영성과 종교의 차이를 염두에 둘 때에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소리입니다.
석가모니와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한 마디로 종합해본다면 어떤 말이 될까요? 도가를 창시한 노자나 세상의 모든 지혜자들의 사상들을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상의 핵심은 바로 “이 세상에는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직접적으로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을 만나서 얻은 결론은 그들이 모르면서도 아는 줄로 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불교는 본래 철학이었으나 후대에 종교로 변하게 되었는데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는 공사상으로 대표됩니다. 이 말을 번역하면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라는 말입니다. 간단히 해석하자면 색은 물질적 현상이며, 공은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것이니 마음이 얽매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지는 세상에 답이 없다는 간단한 결론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답을 찾게 되는 이유는 곧 마음 채움과 연관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비어있게 지음 받았기에 채워지고자 합니다. 채워질 때에 기쁨과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석가모니나 소크라테스가 성인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이 세상에는 마음을 채울 답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도 소크라테스도 이 세상에서 답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한편 공자는 나름대로 그에 대한 답을 내며 경천애인(敬天愛人)사상을 주장하였습니다. 하늘을 사랑하고 하늘을 경외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늘을 사랑하고 경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땅에는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살면서 자발성을 가지고 행하는 어떤 행위에도 답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사상들이 인간이 가진 본질적 문제를 지적하였기에 이들이 성인으로 추앙받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성인의 반열에 포함되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답을 찾는 수험생의 입장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은 모두 답을 찾다가 이 세상에는 답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들에게 답이 없었던 이유는 마음은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만으로 채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석가모니에게도 소크라테스에게도 공자에게도 노자에게도 당신을 계시해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마음 채울 방법을 제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한 수험생의 입장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써 문제의 출제자이셨습니다. 출제자가 수험생과 같은 묶음에 속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이신 분으로써 마음 채움이라는 문제를 내신 분이시며, 그 답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채우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답에 이르는 길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답은 석가모니도 소크라테스도 공자는 물론이거니와 노자를 비롯한 이 세상의 어떤 철학자들도 풀 수 없었습니다. 이는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뿐만 아니라 현대의 노벨상을 받은 석학들도 결코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교에 버림받아 죽으신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답을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에게 버림받으실 것을 아셨습니다. 성인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몰랐던 답을 모든 사람에게 허락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채워질 수 있고 기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고 변하지 않는 평강을 소유할 수 있느냐에 대해 주님은 그 답을 종교가 아닌 복음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종교는 세상을 좋아하여 세상의 가치를 얻고자 초월자를 스스로 만들어냅니다. 예수님은 그 종교에 의해 버림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는 자들만이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이어지는 패키지 과정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답을 얻는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의 영성은 삶의 현장에서 드러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시장에서 학교에서 보이지 않으시고 들리지 않으시며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을 나의 첫 번째 현실로 느끼는 상태가 영성입니다.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느끼기 위해 필요한 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어떠한 사상이나 교리나 조직도 우리에게 하나님을 느끼게 해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서 지식을 쌓아도 하나님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하나만이 필요합니다. 그 사건이 바로 내가 죽은 사건임을 고백할 때에 어떤 삶의 현장에서든 하나님은 첫 번째 현실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성전의 등잔대가 의미하듯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태양이 되시고, 떡상의 의미대로 하나님만이 나를 만족하게 하는 재산이자 보물과 보석이 되시는 영성 충만의 상태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예수님이 죽임 당하신 방식이었습니다. 이제는 종교를 버리고 영성을 추구할 때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의지하고 있다면 이미 기독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세뇌당한 것입니다. 저 또한 그런 잘못된 가르침을 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살아계신 하나님보다 더 우상시하는 상태에 놓여있지 않은가에 대해 반성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종교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종교에 의해 버림받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하나만을 복음으로 붙잡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나의 영원한 답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목숨이자 유일한 자랑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뿐입니다. 그 십자가는 모든 종교가 공유하고 있는 본질에 충실했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방식이었습니다. 그 동안 기독교라는 종교인으로 사는 것을 예수를 믿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이제라도 십자가에서 죽어 상극인 종교로부터 해방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삶의 현장에서 영성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성령으로 감화 감동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