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그리스도 힐링코스의 일상화>의 줄거리:
그리스도 힐링코스를 소개합니다. 한 번 맛들이면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힐링코스를 매일 반복해서 걷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은 그리스도 힐링코스를 걷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삶이 괜찮습니다. 아니 괜찮은 것이 아니라 몸도 인격도 삶도 진정한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힐링코스의 일상화
(누가복음 9:18~27)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21.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그리스도 힐링코스의 일상화>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그리스도 힐링코스의 일상화’
우리나라에도 힐링코스라 불리는 여행지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일 유명한 곳이 제주 힐링코스일 것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강릉도 제주 못지않게 힐링코스라 불리기에 손색없는 곳이 있습니다. 제가 날마다 산책하는 그곳은 바닷가 모래밭에 이어서 소나무 숲이 4km정도 형성되어 있는 곳으로써 강문과 송정 사이에 있습니다. 푸른바다를 보면서 길을 걷다보면 곳곳에 주차장이 있는데 차에서 내려 바닷가로 뛰어가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서울 경기 지방에 사시는 분들에게 푸른바다는 특별한 광경일 것입니다.
한편 신앙적 관점에서 힐링코스는 일상화될 수 있습니다. 강릉의 소나무 숲과 바다를 뚝 떼어다 서울 경기 한복판에 가져다 놓는 것과 같은 일이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힐링코스는 언제 어디서나 가능합니다. 종로나 명동 한복판에서도 가능하고 뉴욕이나 파리 같은 외국에서도 가능하며 가정이나 직장이나 영업장에서도 그리스도 힐링코스는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몸도 마음도 삶도 치유가 됩니다. 그리스도 힐링코스는 힘들지 않습니다. 돈도 들지 않고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단순한 의식작용의 반복을 통해 그리스도 힐링코스를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으며, 아무리 많은 돈과 노력을 들여도 얻을 수 없는 몸과 마음과 삶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힐링코스는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세 단계를 머릿속에 정확히 그려낼 수 있다면 힐링은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어렸을 때 무협 영화를 좋아했습니다. 그때 주인공이 수련을 통해 내공을 키울수록 보는 것과 듣는 것이 달라집니다. 주막에 들어가서 식사를 할 때 파리가 날아다닙니다. 예전 같으면 그저 쫓아 보내겠지만 내공이 쌓인 주인공은 파리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젓가락으로 파리를 잡습니다. 보통 사람들 눈에 파리는 너무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파리채로도 잡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공이 무르익은 주인공의 눈에는 파리의 움직임이 크게 정확하게 보입니다. 수련을 쌓은 자에게는 여유로운 일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광석화처럼 빠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힐링코스의 세 단계를 정확하게 볼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저절로 진행되어 갑니다. 그렇다면 이 일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식작용을 통하여 일어나게 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사건이 마태복음에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일어난 일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러한 전후맥락을 생략한 채 불쑥 예수님과 제자들의 문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선 18~19절을 보면 예수님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고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대답이 마뜩치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20절을 보면 이번에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제자들의 의견을 물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 중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누가는 베드로의 대답을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의 내용에 비해 단순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이 특이합니다. 21절을 보면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다음 맥락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하시며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주어지자마자 십자가 사건을 예고하십니다. 십자가 사건은 곧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진행하실 세상구원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죽음이란 세상의 관점에서는 완전히 망하는 길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망하는 길을 그리스도의 세상구원 프로젝트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세상에서 버림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만을 예고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에 이어 삼일만에 살아나실 것 또한 예고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세분화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단계는 인간 세상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세상 밖으로 버림을 받으시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제삼일에 부활하시는 단계입니다. 이 세 가지 단계가 연속적인 일련의 과정을 형성하며 코스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겪으실 진행과정임과 동시에 우리가 체험해야 할 그리스도 힐링코스이기도 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23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는 단서를 붙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버림을 받는 단계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단계를 이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삼일 만에 부활하는 단계에도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코스를 정해주셨습니다. 이 코스를 따를 때 예수님을 제대로 따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내용의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코스를 따르는 것은 일회적인 사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통해 만들어진 세 단계의 그리스도 힐링코스를 걸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힐링코스를 걷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무협 영화에서 내공이 무르익은 수련자가 집중할 때에 날아다니는 파리조차 정확하게 볼 수 있듯이 본문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힐링코스의 단계의 의미를 정확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 힐링코스의 첫째 단계는 자기 부인의 단계입니다. 22절을 보면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단계는 이 세상의 지도자들로부터 세상 밖으로 버려지심을 통해 만들어진 단계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혈루증 여인을 통하여 세상에서 버려진다는 것의 의미를 그림을 그리듯이 제시해주셨습니다. 여기서 접촉이 중요하게 다루어졌습니다. 혈루증 여인은 세상에 접촉하지 못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힐링코스의 첫 단계는 바로 접촉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사역을 위하여 세상에 버려지셨고, 혈루증 여인은 본의 아니게 혈루증으로 인하여 부정하게 여겨져 세상과 접촉할 수 없었기에 버려졌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세상으로부터 버려짐을 자발적으로 수행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23절에서 말씀하신 자기부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상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버려질 수 있을까요? 자기부인을 위해서는 마음을 감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 마음이 세상과 접촉하고 있음을 발견할 때에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세상에 물들어서는 안 된다. 이런 나를 원치 않는다. 이러한 나의 상태로는 조금도 살고 싶지 않다.”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세상과 접촉하여 세상에 물들어 버린 나를 묵인하고 인정하는 것을 중단하고 부정하는 것이 자기부인의 골자입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에 마음은 그 대상에게 접촉하여 물들게 됩니다. 의식으로 접하는 대상에 마음이 물드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배우자뿐만 아니라 자녀가 될 수도 있고 의식으로 접촉하는 세상의 모든 대상이 마음을 물들일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승진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럴 때 마음도 승진에 물들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승진이 마음에 접촉하여 물든 상태를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승진에 대한 열망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승진에 물든 나를 부인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치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듯이 의식으로나마 승진에 대해 접촉하는 것조차 꺼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물든 상태에서 삶을 계획하고 소원하고 추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의식에 대해 끊임없이 감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의 의식이 세상을 의식하게 되었고 세상의 기운에 의해 마음이 물들게 되었다. 그렇기에 근심하고 걱정하게 되었고 세상일들이 잘 풀리기만을 소원하게 되었다. 이런 나는 안 된다. 이런 나는 진짜 내가 아니다.”라고 세상에 접촉하여 물든 나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힐링코스의 발을 들여놓는 첫 단계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배당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종교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이러한 자기부인에 대해 참으로 무지하였습니다. 자기부인과는 전혀 관계가 없이 살아왔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 한다면 반드시 자발적으로 세상 밖으로 버려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버려지기 위해서는 세상과 접촉하는 내가 부인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을 의식하고 그 상태를 묵인했습니다. 설교를 하는 사람도 자기부인의 과정이 누락된 상태에서 설교를 하였고, 설교를 듣는 사람도 자기부인의 과정이 누락된 상태에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세상에 정복된 심정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그것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였으니 올바른 믿음이 성장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를 믿었던 것뿐입니다.
그리스도 힐링코스의 둘째 단계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단계입니다. 자기 십자가 지기는 세상에 대한 접촉을 거부하고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자기부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세상과 접촉한 나를 부인하는 방법은 바로 십자가를 통해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라는 말은 종종 오해되고는 합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내가 져야 하는 십자가의 내용이 전혀 다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바로 내가 져야 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저주받은 자리이며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형벌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본래 저주와 형벌을 받으셔야 할 이유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나 때문입니다.
오래된 “회전의자”라는 노래에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회전의자는 사장님의 자리입니다. 누구나 출세해서 사장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할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누구나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실 이유가 없으셨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죽어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의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의 마음이 세상에 물들어서 더럽고 추악해졌고, 그 결과 하나님을 가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죽으셨다.”라고 이유를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 지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세상에 접촉하여 물든 나 자신을 몸서리치며 싫어할 수 있는 자들만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이유를 제공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십자가가 됩니다.
한편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또 다른 의미에서 오해되고는 합니다. 내게 부담이 되거나 고통이 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일이나 함께하는 사람이나 사건을 자기 십자가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이해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이유를 제공해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래 죽으셔야 할 이유가 없으심에도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물든 나의 부정함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이유로 제공해드릴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십자가가 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도박에 빠져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남편과 접촉해서 괴로워하는 아내의 마음, 아버지와 접촉해서 괴로워하는 자녀들의 마음은 부인되어야만 합니다. 남편과 아버지의 기운에 접촉하고 물들어서 괴로움을 느끼는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힐링코스를 올바르게 따름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해방과 힐링도 주어질 수 있습니다.
스스로 괴로움과 고통을 끌어안고서 십자가를 진다고 여기는 것은 가당치 않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만이 나의 십자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를 날마다 져야 한다는 것은 그동안 내 마음에 고통을 주던 모든 상황으로부터 완벽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됨을 의미합니다.
다른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자녀가 자폐나 장애를 앓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녀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괴롭고 힘이 듭니다. 실제로 이러한 고통을 견디다 못해 아이와 함께 자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자녀의 자폐나 장애가 아닙니다. 나의 마음이 자녀에게 접촉하는 동안 하나님을 끌어안을 수 없을 정도로 세상에 물들어 버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자기부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끌어안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자신을 싫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폐나 장애를 가진 아이를 싫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에게 물든 마음을 싫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제공해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이 자녀에게 물들어서 주홍빛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에 주님께서 죽으셔야만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곧 자녀에게 물든 마음을 가진 나의 죽음이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르게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을 때 진정한 해방과 회복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제 자녀의 자폐나 장애에 대해서는 나의 뜻과 생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표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광풍노도 속에서도 주무실 수 있었던 이유는 환경에 마음을 접촉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광풍노도를 잠재우십니다. 세상과 접촉이 끊어질 때에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은 나타나게 됩니다. 자유와 해방이 있고 삶도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힐링코스의 셋째 단계는 부활의 단계입니다. 24절을 보면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물든 상태의 삶을 아까워한다면 오히려 삶을 잃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물들었다는 것은 세상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멸망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셨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마음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만을 구할 수 있게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접촉이 우리의 몸과 마음과 삶을 총체적인 힐링의 단계로 이끌어갑니다.
우리는 몸을 가지고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접촉을 이룰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접촉하지 않고는 온전한 힐링을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단계에서는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부활의 단계에서는 내가 애써야 할 것이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게 된 자들에게 부활은 저절로 주어지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소망하는 동안에 몸과 마음과 삶에 힐링의 역사는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스도 힐링코스는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 지기, 부활의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말씀대로 언제 어디서든지 그리스도 힐링코스를 걸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접촉함으로써 몸과 마음과 삶에서 진정한 힐링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로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주님의 십자가의 길은 망하는 자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길이 우리의 몸과 마음과 삶을 구원하는 진정한 힐링코스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길을 따라 살아갈 때에 세상에서 망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시고, 이 길만이 살 길임을 깨달아 오늘도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 지기와 부활로 이어지는 그리스도 힐링코스를 왕복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