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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을 하는 지금은 12월 14일 오후 20시
비상개엄 선포된 지 11일이 되는 날이다
드디어 윤석열 탄핵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이제는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안 보아도 된다 이제는 21세기인 지금 기이한 일이 일어나 기가 막히지 않아도 된다
근 3년 가까이 또다시 나의 삶에 암흑이 된 3년이었다 그 암흑에서 해방된 날이다 기쁘다
내인생 그전 보수의 대통령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어리석어서) 정치에 관심없는 삶이었기에 평범했었다
그리고 내가 대학 졸업후 사회에 나간 1993년 이후 대통령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때는 사회가 상식적이었다
물론 아이엠에프를 겪고 2000년 아이티 버블를 겪으며 국민들이 힘든 면도 있었지만 대통령 통치 전반을 받아들일 만 했다
그러나 그 뒤 이명박이 되고 나서 보수가 다스리는 정치에서의 국민 개인의 삶이 너무나 피폐해지고 국가가 개인 국민을 얼마나 도구로 이용하는지를 깨닫고나서는 정치에 점점 관심을 갖고 보수들 정치 실체를 깨닫게 되었다
정치가 그 무엇이기에 하잘것없는 나 같은 범부의 삶에 영향을 주었을까 하지만 나 스스로 그동안 너무나 삶이 답답했다
그리고 나서 맞이한 박근혜 대통령 때는 세월호 사건 등 더 울분에 휩싸이는 시절을 보내고 결국 그를 타파하기 위해 촛불집회에 참가 대통령을 탄핵시키는데 행동을 같이 했다
그리고 맞이한 문재인 대통령 시절 한때 기쁘고 한때 나의 뜻과 같은 나라의 정치에 환호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그 정치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 나락이 바로 보수의 은밀한 카르텔들의 조작과 책동임을 한편 의심하며 지냈다
그러나 그 나락으로 또 윤석열이라는 보수의 대통령이 탄생하고 그는 그 이전 보수 대통령보다 더 악랄하게 더 비상식적인 극우로서의 대통령으로 통치의 대부분을 할애했다 전혀 내가 이해하지 못할 사회였다 그 때문에 나같은 사람에게 그 3년 가까운 세월은 온통 불만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시련의 시간이 이제 끝나려 한다
오늘 그 종말을 고하는 1차적인 산을 넘었다 정말 이젠 윤석열 같은 보수 대통령의 통치하에서 매일 불만을 토로하지 않아도 된다
너무나 기쁘다 비록 앞으로 시련이 더 있을지라도 우리 나라 대한민국의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힘이 무모하지 않음을 느껴 기쁘다
2일전 탄핵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로 올랐다 오늘은 기차편이 다 매진되어 있고 너무나 많은 군중이 있으리라 해서 2일 전인 12일 여유가 있어 탄핵집회에 참가차 서울에 간 것이다
이전 구로구 궁동의 권대임, 정선옹주 묘역을 거치고 이어 유순정, 유홍의 묘역을 거친 후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들렀다
날씨는 구름이 잔뜩 끼여 그렇지 않아도 겨울로 가는 초엽이라 싸늘하고 을씨년스러운데 바람까지 있어 더욱 추위가 파고드는 날씨였다
사육신묘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다.
사육신묘는 조선의 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1456년(세조 2) 목숨을 바친 6명의 신하인 사육신의 무덤이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온 장안 사람들이 세조의 전제에 벌벌 떨고 있을 때에 거리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주섬주섬 담아다가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1681년(숙종 7) 숙종이 이곳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곳에 민절서원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를 세웠으며 1955년 5월 육각의 사육신비를 세웠다.
후에 서원은 철폐되었으며, 1978년 묘역을 확장하고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 불이문, 홍살문, 비각을 새로 지어 충효사상의 실천도량으로 정화하였다.
노량진역에서 흑석동쪽으로 가다보면 야트막한 산이 나타나고 그 사이 공원으로 오르는 길 홍살문이 나왔다
그 홍살문으 지나면 사육신을 기리는 사당 삼문이 나타나고 그 삼문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육신의 시비, 왼쪽에 육신묘 비명이 나타난다
1681년에 사육신 묘역에 사육신의 사우(祠宇)로 민절서원(愍節書院)이 세워지고 1692년에 편액(扁額)이 하사되었다. 또, 이 때 박팽년의 7대 손인 좌익찬 숭고(崇古)가 육신묘를 수축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사육신묘가 공식화되어 사람들의 존숭을 받게 되었다.
그 뒤 1782년(정조 6)에 이르러 육신묘비인 신도비(神道碑)가 건립되었다. 신도비의 비명은 태학사 조관빈(趙觀彬)이 찬하고, 글씨는 당(唐)나라의 안진경(顔眞卿)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먼저 의절사에 들러 참배를 하고 방명록을 썼다 오늘 상경한 이유가 있느니만큼 이 나라 정치가 바로 잡히길 바라는 마음을 사육신에게 호소했다 그리고 방명록에 예나 지금이나 상식적인 정치가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썼다
조선초기 그 때나 지금 윤석렬이 통치하는 21세기 지금이나 정치는 한결같이 어지럽고 악당들이 판친다 그 때문에 이렇게 사육신묘 같은 슬픈 유적이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과거가 현재를 만들고 있다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죽고 12세의 어린 왕세자가 즉위하자, 이 때부터 조정 안에는 불안한 공기가 감돌게 되었다.
어린 왕의 보필을 맡은 이는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은 원로대신과 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학사 출신의 소장문신이었다.
하지만 원로대신들은 이미 칠순 고령이어서 정치 문제에 왕성한 정력을 경주할 수가 없었고, 소장문신들은 아직 관위가 낮아 국가 대사에 직접 참결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때 왕의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심복 대신을 제거하고 정권 찬탈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1453년(단종 1) 10월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亂)을 일으켰다.
이 정변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필하는 황보인·김종서 등의 대신을 주살, 제거하고 자기의 정권 찬탈의 야망을 달성한 폭력 행사였다. 이 정변으로 단종의 보좌 세력은 전부 제거되고 수양대군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수양대군의 추종 세력인 정인지(鄭麟趾)·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권람(權擥)·홍윤성(洪允成) 등은 1455년 윤6월 수양대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단종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그러자 과거에 세종·문종에게 특별한 은총을 받았던 집현전학사 출신인 성삼문·박팽년·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 등 문관은 무관인 유응부(兪應孚)·성승(成勝)·박쟁(朴崝) 등과 모의, 상왕(上王: 단종)을 복위시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집현전학사 출신 문관이 주동이 되어 단종 복위거사를 모의한 것은 1455년(세조 1) 10월경이었다. 즉, 책명사(冊命使)인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겠다고 통고한 이후부터 진행되어, 1456년 6월 초하루 창덕궁의 명사신 초대연의 자리에서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날 세조 제거의 행동책을 맡은 별운검(別雲劍: 임금의 신변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무신)이 갑자기 제외되어 거사 계획은 실행 일보 전에 일단 실패하게 되었다.
이에 거사 주동자들은 거사 계획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있었는데, 동모자의 한 사람인 김질(金礩)과 그의 장인 정창손(鄭昌孫)의 고변으로 사육신과 그 밖의 연루자가 모두 처참(處斬)되고 단종 복위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곧 주모자인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성승·박쟁·김문기 등이 일망타진되어 가혹한 국문을 당한 다음 능지처사에 처해졌고,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성삼문 등이 사육신으로 불리게 된 것은 남효온이 지은 《추강집》의 〈육신전〉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에서 남효온은 참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선비의 기개를 잃지 않았던 사육신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일례로 국문장에서 세조가 자신이 선위를 받을 때는 저지하지 않고 충성하는 척하다가 왜 이제 와서 배반했느냐고 묻자 성삼문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때는 사세가 불가능했다. 그 자리에서 저지하지 못할 바에는 물러나서 기회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공연히 죽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우리가 지금까지 참으면서 버틴 것은 오늘의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성삼문은 세조 옆에 있던 신숙주를 보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놈아. 옛날에 우리가 함께 집현전에서 숙직할 때 세종께서 원손을 안고 뜰을 거닐면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천추만세 뒤에 너희들이 모름지기 이 아이를 잘 생각하라.’ 하셨는데 네가 어찌하여 그 일을 잊었느냐?
성삼문의 매서운 질타에 신숙주가 낯을 붉히자 세조는 그를 자신의 뒤로 피해 있도록 했다. 심문 도중 세조가 제학 강희안의 거사 연루설을 캐묻자 성삼문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강희안은 무고하다. 나리가 선조의 명사들을 다 죽인 탓에 이 사람만 남았는데, 우리와 모의하지 않았으니 남겨서 쓰도록 하라. 이 사람은 진실로 어진 사람이다.
성삼문은 그해 6월 8일, 동지들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를 당했다. 그때 그의 동생 삼빙·삼고·삼성과 아들 맹첨·맹년·맹종 및 갓난아이까지 죽음을 당했으므로 그의 집안은 대가 끊겼다. 그가 죽은 뒤 집안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봉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고 가재도구는 방바닥에 거적 하나뿐이었다.
세조는 일찍이 자신이 충청감사로 임명했던 박팽년을 회유하려 살려주려고 했다. 총애하는 후궁 근빈 박씨가 박팽년의 누이였으므로 그에 대한 미련은 더했다. 하지만 세조는 그가 충청감사 시절에 보낸 장계에 ‘신(臣)’자를 모조리 ‘거(巨)’자로 쓴 것을 알고 입맛을 다셨다. 무인 유응부는 극심한 고문을 당하면서 세조를 ‘족하(足下)’라고 칭하며 조소했고, 이번 거사가 고지식한 선비들 때문에 실패했다며 한탄했다.
단종복위운동에 참가했다가 죽음을 당한 사람은 사육신 외에도 김문기·송석동·윤영손·이휘 등 무려 70여 명에 달했다.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 권씨의 어머니 최씨도 아들 권자신과 함께 극형을 받았다. 세조는 예전에 세상을 떠난 현덕왕후의 아버지 권전까지 폐서인하고 무덤지기와 제사를 없애버렸다.
문종의 고명딸 경혜공주는 부마인 영양위 정종이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어 광주로 귀양 갔다가 1461년(세조 7년)에 사사되자 유복자 정미수를 낳은 뒤 순천의 관비가 되는 수모를 겪었다.
사건이 일단락되자 정인지는 세조에게 복위 음모를 알고 있던 상왕을 내쳐야 한다고 종용했다. 결국 1456년(세조 2년) 7월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의 서강 청령포에 위리안치되었다. 1457년 9월에는 유배 중이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상왕 복위를 계획하다 관노의 고발로 발각되자 서인으로 강봉되었고, 한 달 뒤인 10월 21일에 사사되었다.
당시 17세였던 단종의 최후는 권력을 빼앗긴 군왕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겠지만, 그의 비극에는 사육신과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그렇게 단종도 죽음으로 청령포를 한많은 장소로 남겨야 했다
원래 이 사육신 묘에는 박팽년(朴彭年) · 유응부(兪應孚) · 이개(李塏) · 성삼문(成三問)의 묘만 있었고, 하위지(河緯地)와 유성원(柳誠源)의 묘는 없었다. 그러다가 서울시에서 1977∼1978년까지 사육신 묘역의 정화 공사를 할 때, 하위지와 유성원의 가묘(假墓)를 추봉(追封), 사육신의 묘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이 묘가 있는 곳은 지난날 사형이 집행되던 곳이라는 말이 전하기는 하나, 사육신 중 박팽년은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옥사했고, 유성원은 잡혀가기 전에 자기 집에서 자인(自刃 : 칼로 자결함)하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군기감(軍器監) 앞길에서 거열(車裂)을 당했으므로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
훗날 《조선왕조실록》과 《추강집》의 기록이 달라 사육신(死六臣)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개·성삼문·박팽년·하위지·유성원·박중림·권자신·김문기·성승·유응부·박쟁·송석동·최득지·최치지·윤영손·박기년·박대년 등 17인이 반역을 꾀했고, 주모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김문기 6인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유응부가 빠져 있다. 당시 김문기는 도진무(都鎭撫)로서 박팽년과 모의할 때 군사 동원의 책임을 맡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료에 따라 정부에서는 김문기를 현창(顯彰)하고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있는 사육신묘에 그의 가묘를 설치했지만, 종래의 사육신 구성은 변경하지 않았다. 한편 사육신과 별도로 ‘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 생육신(生六臣)으로 추앙되는 여섯 명의 신료들은 관직에서 물러나 평생 야인생활을 함으로써 세조의 부도덕한 왕위 찬탈에 저항했다. 이들이 사육신, 생육신으로 불린 것은 사림이 기세를 떨치던 중종 때부터였다.
사육신역사관 뒤에는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한강방어선 노량진 전투지
이렇게 유적지 안내문은 단순하지만 이곳도 한국전쟁 때 국민을 속이고 대전으로 피신한 이승만에 의해
피난하는 한강 북쪽의 일반 국민을 침공한 공산군의 사지에 그대로 남겨놓게 한
우리 국군의 국민을 배신한 한강교 폭파 현장 그 산 현장지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정치가 밑에 있는 국민은 그들의 노예나 도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존재가 된다
그래서 국민은 바른 정치가를 선택해야 하고 그 정치가에 무언의 압력을 가해야 하는데 역시나 오늘 이 시점도 우리는 단순히 권력을 쥔 정치가의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듯 하다
그런 정치가의 폭정을 끊고자 오늘도 이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다
비록 이 한몸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이 한 몸이 모이고 모이면 국민의 힘은 대단해 질 수 있다
그리고 해냈다
고려시대 윤관은 고려를 여진에서 구하며 자신의 후손이 그 구한 한반도를 해칠 것을 알았을까?
조선시대 윤증은 송시열로부터 조선을 구하며 자신의 후손이 그 구한 한반도를 유린할 것을 알았을까?
한강 작가 말처럼 과거가 현재를 만들고 죽은 자가 산 자를 만든다는 그 역사의 진리처럼 그 역사에서 오늘을 구해냈다
이렇게 긴 역사를 반복하며 처절하게 이어온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어느 한 무리의 악당에게 넘어갈 그런 단순한 이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