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병이어
본문<요6:1-15>
오늘은 요한복음에서 등장하는 일곱 개의 표적 가운데 네 번째 표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세 가지 표적을 살펴보았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결례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표적,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표적, 그리고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표적이었습니다.
표적(세메이욘/sign)이란 가고자 하는 어떤 목표물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표지판입니다.
표지판이 가리키고 있는 그 목표물은 안보고, 그 표지판만 쳐다본다면 참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저기 보름달이다! 가리키는 손가락만?). 표적은 그 자체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병 고침, 예언, 기적, 방언 모두 표적들입니다. 표적은 하나님의 메시지, 뜻이 담겨 있지요. 이 표적들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령을 받은 교회에게만 주어집니다.(줄여서 말하면 표적=메세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이 표적들을 통해 소통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이들은 병을 고치는 예수님을 보며 병 고치는 예수님의 손만 바라봅니다. 그 표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은혜의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합니다.
예1) 나면서부터 소경을 치유하심~, 모든 인간은 태생적인 영적인 소경, 죄로 인해서..본성, 본질이 죄인임.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님, ㅎ님 일하심, 즉 ㅎ님 영광을 위해서..안배한 사건임.
-치유: IX의 십자가 대속으로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킴에 대한 비유, 따라서 병 치유를 따라 해서는 안됨/ 그런데 능력받기 금식? 그 능력이 어디서 왔는가? 마귀다
주님이 행하신 건 모두 표적으로서 하신 일인데 흉내 내거나 따라 하면 표적신앙이다.
예2) 방언도 표적임. 모르면 방언은사를 받고 평생 자기도 알지 못하는 방언 기도만 하다 지옥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표적 신앙에 빠져 있는 자들의 비참한 영적 현실입니다. 성령의 은사도 필요에 따라 ㅎ님이 주시는 것이지 인간들이 금식하면서 방언달라고 떼쓰며 받는 것은 모두 마귀가 준 것임(따따 뚜뚜, 랄랄..무슨 의미? 수십 시간씩 해봐야 자기만족에 불과)
- 표적 신앙은 표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듣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일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표적을 미혹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표적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가르쳐 주는 수단입니다. 모든 표적은 하나님의 의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입니다. 이를 보지 못하는 자들이 뱀의 후손입니다. 다시 말해서 표적은 하나님께 속한 자와 사탄에게 속한 자를 구별하는 장치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살후2:9-12> 읽으면서..(모든 능력과 거짓 기적과... 실제 기적이 일어나지만 ㅎ님과 무관하기에 거짓임.) 유혹을 역사되게 한다(마4장 마귀의 시험..성전에서 뛰어내려..은사주의 신비주의 경고) -교계에 거짓 은사주의 만연(신사도운동 혹은 빈야드 운동-장풍, 금이빨, 웃음치료,.)
- 성경의 모든 표적은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계시하는 수단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표적에서 살펴보았듯이 거기서 예수님은 물을 갖고도 포도주를 만드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포도주로 변화시킨 물은 그냥 물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외출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손발을 씻고,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결례의 물이었습니다.
인간이 깨끗함을 얻는 길은 인간의 율법 행함의 의가 아닌 IX의 십자가 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결례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킴으로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ㅎ님과 연합되는 기쁨의 혼인잔치가 배설된다는 메시지였던 것이지요. 그 포도주로 인해 혼인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기뻐했듯이 하나님의 의로 옷 입힘을 받은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이 허락되는 것입니다.
- 오늘 살펴볼 오병이어 표적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이 표적이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지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참고:4복음서에 모두 기록: 중요성)
• 1-4절/ 6: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6: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6: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6: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과 한 차례의 논쟁을 벌이신 후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돌아오십니다. 얼마 후 유월절이 가까운 시점에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갈릴리 바다 건너를 다른 복음서에서는 빈들 곧 광야라고 표현 했습니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듭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시는 표적을 본 자들이었습니다. 그 표적을 다시 보기 위해 광야까지 예수님에게 나아 온 것입니다.
• 5-7절/ 6: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6: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 지금 이 본문의 상황에 대한 좀더 큰 그림을 보려면 다른 복음서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눅9:11-12절을 보면 “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9:12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온 무리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시며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이들은 명절을 지키고자 예루살렘에 갔을 때 예수님이 그곳에서 병을 고치는 표적을 직접 본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이 빈들 광야까지 나아온 것입니다. 이 무리들 가운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일일이 다 고쳐 주십니다. 그 결과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날이 저물며 음식이 다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대부분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져온 음식도 변변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에서 떨어진 빈들이었기 때문에 음식을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무리들을 인근 마을로 보내 그곳에 유하며 먹을 것을 구한 뒤 다음날 다시 돌아오게 하자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들을 먹일 수 있겠느냐”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빌립에게 물어본 것이 아니라 이미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기 위해 이 질문을 하셨던 것입니다(6절).
예수님은 우리의 의견이나 조언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언어나 행동은 모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계시들입니다. 그 어떤 것도 그냥 소홀히 지나치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이기에 단어 하나 모두 중요합니다. 주님의 입에서 선포되는 단 하나의 말씀도 놓쳐선 안됩니다. 주님이 빌립을 시험하사 ‘우리’라고 한 말씀에는 이유가 있었지만 빌립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떡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이백 데나리온은 오늘날 이천만원의 가치(일당 10만원 기준)입니다. 이천만원 어치의 떡이 있어도 이들을 다 먹일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양식을 제공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라는 것이 빌립의 결론이었습니다.
• 8-9절/ 6: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 이때 불쑥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등장합니다. 안드레는 이 무리들에게 양식을 제공해 주시길 원하는 예수님의 뜻을 알고 자신이 뭔가 해보려고 무리들에게 가서 음식을 찾아보았던 같습니다. 이때 한 어린 아이가 도시락을 갖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무리들 가운데 남아 있었던 유일한 음식이었습니다. 그 도시락을 갖고 예수님에게 돌아온 온 것입니다.
그 도시락에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안드레는 이것으로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먹이겠냐고 난감해 합니다. 음식이 떨어져 배고파 하는 무리들에게 무엇인가 해 주시길 원하는 예수님의 뜻을 어떻게든 이루어보고자 했으나 이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한계였습니다.
• 10-13절/ 6: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6: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6: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 마14:16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이 무리들을 인근 마을로 보내 음식을 사 먹게 하자고 제안했을 때 예수님은 그러지 말고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런 저런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자신들이 그들을 먹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해 진 것입니다.
빈들인 광야에서 남자만 오천명이니까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하면 2만 명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이 많은 자들에게 어떻게 양식을 주어 먹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왜 이런 표적을 광야에서 일으키시는 것일까요?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출애굽 당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광야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만나와 물을 먹이신 사건을 재현코자 하시는 것입니다.
신8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신8:2~3> 읽고,
2절에 시험하사~아무 일을 안해도 농사나 길쌈을 안해도 약 2백만 명이 40년간 척박한 땅 광야에서 먹고 마시고 입히고 살게 하신 ㅎ님의 능력을 경험하면서도 늘상 ㅎ님을 배신하고 우상숭배하고 원망 불평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하시는 게 시험이었다는 말입니다. 출애굽의 기적, 홍해 도하의 기적, 광야의 만나와 물의 기적 속에서도 감사가 없고 불평하는 허접한 존재들임을 깨달으라는 의도로 광야라는 환경을 허락하심: 이게 시험(그런 너희를 구원했다)
배고픈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만나를 신기해하면 잘 받아먹었습니다. 그러나 매일 똑같이 배나 채워주는 척박한 음식에 금새 질려서 파와 부추와 마늘을 찾고 고기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만나의 의미가 ‘이게 뭐야?’ 라는 의미 입니다. 또 이거야? 이까짓게 뭔고? 낫팅! 이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빌립을 시험하사~ 그러면서 5절에서 ‘우리가’ 라는 용어를 쓰십니다. 너 혼자가 아니라 나 예수가 함께하는 우리라는 말을 강조 하셨는데도, 빌립은 주님을 믿는 믿음 없음을 드러낸 거지요. 그래서 ㅎ님이 함께 하시는데, 이것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인간의 방법으로 대책을 세워 2백 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고 말함으로 실패하는 모습을 봅니다.
빌립과 안드레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폭로하는 장면입니다. 앞서서의 3번이나 놀라운 표적을 보고(가나 혼인잔치, 왕의 신하의 아들, 38년 병자)도 이것을 연계시켜서 주님만 계신다면 아무 걱정이 없이 평안하다 기쁘다가 아니라, 문제 앞에서 주님은 내 팽개치고 인간의 방법을 따라 해결하려는 우리의 믿음 없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고난이라는 시험이 올 때 우리의 믿음이 시험 당하고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전10:13절을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사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시는 일만을 고집하십니다. 이를 알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실 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갈4:4절을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이라고 말합니다. ‘때가 차매’라는 말은 ‘구원에 대한 인간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때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왜 좀더 일찍 즉 구약 시대에 등장하지 않으시고 그토록 늦게 보내셨는지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죄를 깨닫게 될 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게 되면 이런 의혹들은 쉽게 풀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잔디에 앉게 한 뒤 떡을 갖고 축사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보리떡과 두 개의 물고기를 조금씩 떼어 나눠주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떡과 물고기가 바닥나지 않습니다. 그 무리들이 다 배불리 먹고 남길 때까지 오병이어는 그 모습 그대로 있는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나눠주어 먹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먹고 남은 빵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다고 합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을 예수님께서 너무나 쉽게 단번에 해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네 번째 표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표적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이것이 오늘의 핵심 주제입니다.
보리떡은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아주 가난한 자들이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반면에 밀은 부유한 자들이 먹는 양식이었습니다.
보리는 빈민들의 양식이거나 짐승의 먹이로 쓰여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가 들고 있던 보리 떡 다섯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음식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물고기 두 마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문에는 작은 물고기 두 토막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작은 멸치만한 물고기 두 토막은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을 빗댄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만나와 같은 개념을 갖고 있는 말입니다. 이게 뭔고? THIS IS NOT'g!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자기 백성의 죄값을 대속하기 위해 오신 IX의 십자가 사건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나사렛 예수와 십자가는 사람들이 비웃는 무기력의 상징입니다.
마태복음 14장19절을 보면 이 오병이어의 이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14:19)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여기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시매" 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12제자들과 최후의 유월절 만찬 때에 행하셨던 것과 같은 표현으로 쓰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 때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축사하시고는 12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면서 이 떡은 내 몸이라고 하였고, 포도주를 일컬어 내 피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자신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죄인들을 위하여 당하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상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자신이 피와 살을 12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최후의 만찬에 모습으로 하고 있습니다(그래서 4절에 유월절이 언급되는 것임)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유월절 만찬과 같은 방법으로 하신다는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고난과 죽음을 미리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병이어는 예수님께서 장차 이루실 십자가에 대한 표적인 것입니다.
정리하면 광야에서 보리떡이 찢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몸이 찢어지는 것이고, 군중들이 보리떡을 먹는 것은 예수님의 몸을 먹는 것입니다.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와 살로 새로운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생겨날 것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두 광주리의 떡은 새로운 12지파 곧 12제자를 상징하는 떡입니다. 12제자는 모두가 한 떡에서 나왔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몸이 찢김으로서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12제자는 예수님께서 대신 죽어 주심으로 생겨난 자들입니다. 새 언약에서의 이스라엘은 모두가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찢김으로서 생겨났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흔적들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로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인 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보리떡과 같은 존재라고 여기지만 그 예수님 속에는 온 인류를 배부르게 하고도 남을 만한 풍성한 생명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보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있겠느냐며 무시하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런데 무시하여 보잘 것 없다고 여긴 그 예수님이 자신의 살과 피를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로 주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게 하시고 거기에 영생의 비밀을 숨겨두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의 역사는 세상 속에서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에 대한 비유를 “천국은 마치 겨자씨와 같고 또한 가루 서 말 속에 감추어진 누룩과 같다” 고 하시면서 이 세상에서 일어날 천국운동은 보잘것없이 미미하게 이루어지실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속에서 천국 운동을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며 일하시는 것은, 타락한 인간들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구원이 인간적인 방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적인 가치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크고 많으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적고 낮은 것은 나쁜 것이라고 여깁니다.
세상에는 항상 적은 것은 외면당하게 되어있고 크고 많은 것은 환영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일은 언제이고 초라하고 힘없는 모습으로 해 오셨습니다.
누구도 보리떡 같이 볼품없는 예수가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비밀을 안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도는 미련하다고 한 것입니다.
(고전 1: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23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화려하게 성공하여 자신의 믿음 있음을 증거 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지금도 여전히 열두 광주리에 남은 보리떡 같이 보잘것없는 종들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도들을 고난과 핍박을 겪게 하시고 만물의 찌기 같고 구경거리로 두셨습니다. 영웅으로 두지 않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두셨습니다. 하지만 그 보리떡 같이 보잘 것 없는 종들에게 생명의 복음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로부터 싫어 버린바가 되어 외면당하시던 보리떡 같이 초라한 예수님에게는 사람들에게 배부름을 주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봅니다.
<사 53:1-3절>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람들 눈에는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는 전혀 메시아답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에게게! 저게! 무슨 메시야! 라는 식으로 조롱당할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그를 귀히 여겨서 그분이 우리에게 보답으로 구원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원한 적도 없고 관심을 가진 적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주님을 주님답게 대접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무식한 열심으로 스데반을 죽였듯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무지한 충성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고, 헌금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이 무가치하고 틀리고 나쁘다는 말이 아니고 신앙의 본질로 하나님 앞에 내 세우고 자랑할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전도, 예배, 헌금, 봉사가 없어도 하나님은 자신이 행하셔야 될 일이라면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열심히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봉사가 있어야 되고 내가 능력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크게 하여야 ㅎ님이 ㅎ님답게 대접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에 대한 관심보다도 우리에게 베풀어질 이적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것 때문에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피해서 산으로 가실 수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을 임금 삼아서 내 유익을 챙기려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4-15절> 6: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 음식을 마음껏 먹고 배가 부른 후에 자신들이 어떻게 배불리 먹을 수 있었는지 그 실상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의 도시락이었던 보리떡과 생선 두 토막으로 자신들을 배불리 먹이고 또한 열 두 바구니에 가득 남기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이 예수는 누구일까에 대해 생각했을 것입니다.
- 이 사건은 1,500년 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와 광야를 행진할 때 만나로 그들을 40년간 먹였던 일의 재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예수를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했던 것입니다.
- 그 선지자란 1,500년 전 모세가 예언했던 장차 등장할 선지자를 말합니다.
(신18:15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장차 하나님께서 보내실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그들의 눈앞에 그 선지자가 등장한 것입니다. 예수가 바로 그 선지자임을 확신한 그들은 예수를 임금 삼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대망했던 메시아 왕국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세워질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질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2천년 동안 그 율법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시겠다고 하십니다. 왜 그들에게 다른 선지자를 보내시겠다고 했을까요? 또 다른 선지자가 등장해야 할 필요는 무엇이었을까요?
율법에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이 담겨 있습니다. 그 율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대로 사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그 누구도 그 율법의 기준에 맞게 행할 수 있는 자가 없음이 드러났습니다. 그토록 의로운 왕 다윗 역시 율법에 철저히 실패했습니다. 평화의 왕 솔로몬 역시 말년에 율법에 철저히 실패한 자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가운데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았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세 역시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등장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에 모세도 필요했고 모세와 같은 다른 선지자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앞으로 등장할 모세와 같은 선지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모세를 완성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모세의 역할은 예수님이 오실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마5:17절을 보면 예수님이 오신 목적에 대해 언급합니다. 마5:7절을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살인?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이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죄인들)
이처럼 율법은 정죄하고 죽이는 기능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대신 율법을 자기 의를 쌓는 수단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와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가르쳐 주어야 했습니다.
모세 이후 선지자들이 많이 등장했지만 이들 역시 율법의 의도를 정확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예수님에게 주어진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오시기 전까지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산상수훈이 시작되는 마5장부터 주님은 분명히 의도를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은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구요.
바리새인의 의는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율법의 의의 최고봉을 상징합니다. 누가 바리새인 보다 더 온전히 율법을 지켜낼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서 바리새인의 보다 더 나은 의란 다른 차원의 의를 말합니다. 사람의 의가 아닌 ㅎ님의 의를 말하지요. 바울사도는 이것을 롬3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외에 다른 의를 주셨는 바, IX를 믿는 믿음의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준 옛언약의 율법은 철저히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래서 IX가 오셔서 새언약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새언약은 인간의 행함은 완전히 배제한 채 오직 IX의 십자가 의만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 의가 바로 ㅎ님의 의입니다. IX를 믿는 것이 아들의 말을 듣는 것이고 생명의 떡을 먹는 일입니다
-(요6:48~51 읽고,...모세는 모형이고 그림자)
- 신18:1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모세와 같은 그 선지자가 등장할 텐데 그때 너희가 해야 할 일은 ‘그의 말을 듣는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 선지자가 하는 말을 들을 때 모세가 전한 율법이 비로소 완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오병이어의 표적을 본 사람들은 예수가 그 선지자라는 것을 알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예수를 그 선지자로 보았다면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의 말을 듣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표적을 본 뒤 자신들의 욕망이 현실이 되어지는 일에 술 취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소망을 이루어줄 예수를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맹인 되어 있기 때문에 그 표적이 가리키고 있는 예수의 말씀을 듣는데 까지 나아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의 임금 되는 일에 일절 관심이 없으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서 “예수 우리 왕이여”라는 찬송을 제아무리 목소리를 높이고 불러도 주님은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 이 표적을 보고 예수를 임금 삼고자 하는 이 유대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들 역시 예수님의 말씀 듣는 일에 일절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이루어 주실 예수를 임금 삼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입니다.
- 1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자신을 임금 삼으려는 이들을 예수님은 피해 떠나십니다.
(마14:22-23)절을 보면 이 상황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을 직접 집으로 돌려보내십니다. 그 동안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앞서 갈릴리 건너편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기 위해 산에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 무리들에게서 떼어놓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자들이 예수를 임금 삼고자 하는 무리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예수를 주군으로 모시며 주를 따랐던 자신들이 이제 보상을 받게 되는 날이 코앞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육신의 생각에 오염되지 않도록 그들을 이 무리들로부터 격리시킨 것입니다.
오늘날 자신들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정성과 열심으로 기도하기를 힘쓰고 있는 한국 교회가 ㅎ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교회 성장을 위해 기도하고, 환우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수능생들을 위해 기도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남편의 사업과 직장에서의 진급을 위해서 기도하고, 가족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한국 교회에 예수님이 함께 하실 거라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거짓 예수를 임금 삼아 종교 노릇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말을 듣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등장한 사탄의 말을 듣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는 일만 하실 뿐입니다. 육신의 욕망으로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주님은 알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맹인되어 있는 자들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는 예수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보면서 그 선지자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그 선지자로 오신 예수를 임금 삼아 버립니다. 이들이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며 ‘예수 나의 왕이여’ 라고 찬양하는 자들이 바로 이런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보리떡처럼 찢겨 주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킨 모든 표적은 십자가를 겨냥하고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이외에 인간의 열심과 정성도 필요하고 가치 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오직 예수 십자가만이 자랑스러워야” 합니다.
십자가 '만' 자랑스럽다고 하는 것은 오직 십자가 이외에는 자랑거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에겐 십자가 이외에 다른 지랑거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십자가 만이어야 합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여러분이 바로 열두 광주리에 남겨진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아멘!)
..
*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