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4월 28일 전국 각지에서 150여 개의 교회들이 대전에 모였다. 여러 명의 선교사들도 참석했다. 임시의장인 장일수 목사의 사회로 개회된 모임은 돌연 그 모임의 성격이 총회로 탈바꿈되었다. 신진파의 복안대로 총회장에 장일수 목사, 제1부총회장에 김기석 목사, 제2부총회장에 박성태 목사가 선임되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일부 목회자들이 항의하였고, 더러는 의분을 참지 못해 강단에 뛰어올라가 의장을 끌어내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저지하는 사람, 말리는 사람, 실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더 이상 회의는 진행되지 못하고 결국 산회(散會)되었다.
다음 날 회의는 계속 되었지만 실행위원 선출권을 몇 사람에게 위임하고 그 결과를 추후에 각 교회로 통보하기로 했다. 그리고 현 총회임원 6명(김용해, 안대벽, 노채천, 이원균, 한기춘, 김주언)에 대해 불신임결의를 하고 폐회했다. 이렇게 해서 대전총회는 발족되었다. 선교부의 입장에 대해 나요한 선교사는 침례교회가 개교회주의기 때문에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다수 교회가 참석하여 결정한 사항을 인정하고 협력하겠다는 태도를 밝혔다.
한편, 1959년 5월 25일 대한기독교침례회 정기총회가 포항교회에서 개최된다는 소집통지가 각 교회에 도착했다. 예정대로 본 총회가 진행된다면 지난 4월 28-29일 대전에서 있었던 총회는 자동으로 불법총회가 된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교권을 쟁취하고자 한 세력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포항총회를 저지하여 유회(流會)시키려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차제에 분열하여 새로 총회를 구성하고 별개 교단으로 나가려는 세력도 있었다. 장목사는 전자에 속했고, 그와 맥을 같이하는 수습대책위원 22명 가운데 교단의 역사성이 있는 최소한 8명은 같은 행보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교부와 전입 교역자들 일부는 후자를 희망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일부 임원들은 즉시 포항교회의 김창복 목사를 만나 그를 설득하여 대전총회를 지지하고 포항교회를 총회장소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합의를 받아냈다. 그 후 김목사는 다음과 같은 공문을 전국 교회에 발송했다: “본 교회에서는 작일 사무처리회 모여서 4월 29일 모였던 대전총회를 찬성키로 절대 다수로 가결하고 5월 25일 본 교회에서 개최한다는 집회에는 불참할 뿐 아니라 장소도 불허하기로 되었으니 자이 양지 하옵기 바라나이다.”
1959년 5월 18일, 이 공문은 포항교회 사무처리회장 김창복 명의로 전국 교회에 발송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총회임원들은 즉각 포항교회를 방문하여 진상을 알아보니 그것이 담임목사의 단독행위임을 알게 되었다. 그 일로 김목사는 교회를 떠나 타 교단으로 넘어갔다.
총회는 전국 교회에 동요하지 말고 참석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마침내 25일 전국 각지에서 267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신혁균 총회장은 병고로 불참하고, 김용해 부총회장 사회로 총회가 시작되었다. 이 총회에서 몇 건의 불신임이 만장일치로 결의되었다. (1) 대전불법총회를 조성한 9명의 교역자(장일수, 한태경, 민영호, 조효훈, 김기석, 이덕여, 전흥상, 유영근, 윤덕훈)에게 5년간 총회의 회원자격을 부여하지 않기로 하다. (2) 4인의 선교사들(나요한, 말라, 월락스, 굳윈)을 불신임하고 본국으로 소환 요청하는 연판장을 발송하기로 하다. (3) 침례회보의 편집인을 해고한다.
새로운 임원으로는 총회장 김용해, 제1부총회장 이원균, 제2부총회장 김장배, 총무 이종철, 전도부장 이덕흥, 교육부장 이덕근, 사회부장 안대벽, 출판부장 이봉래, 재무부장 김주언 등이 선임되었다. 역사적인 제49차 총회는 이렇게 평온한 가운데 마쳤다.
대전총회를 주도했던 신진세력은 의외로 포항총회가 성공적으로 진행됨을 보고 자기들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결국 장일수 총회장과 박성태 부총회장이 사퇴하고 임원들은 재조정되었다. 그리하여 총회장 강성주, 제1부총회장 이덕여, 제2부총회장 김기석, 총무 김승학, 전도부장 존스(선교사), 교육부장 조효훈, 사회부장 마라(선교사), 출판부장 장시정, 재무부장 박종록 등이 선임되었다.
총회가 이처럼 양립하니 개교회들도 평소 감정이 좋지 못했던 신도들끼리 분열하며 다툼이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끌고 자기가 좋아하는 총회로 옮기거나 교회를 쟁탈하는 일도 일어났다. 각 지방마다 예기치 않았던 문제들이 야기되었다. 감언이설이 난무하며, 모략과 중상이 성행했다. 교단의 공공건물인 신학교, 침례병원은 선교부에, 수양관, 고아원, 총회건물은 총회에 예속되었다. 대전파는 교단명칭을 “대한기독교침례회”에서 “기독교대한침례회”로 변경했다. 결국 “대한기독교”와 “기독교대한”이 싸우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들이 다시 합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측이 하나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 앞으로 교단을 합쳐야 한다는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또한 장차 교단을 책임지고 갈 젊은 신학생들은 분열을 원치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갈라지는 것은 쉽지만, 합치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고 합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민족이 백의민족이요 단일민족이어서 하나로 합칠 수 있는 것처럼, 한국 침례교인들도 대개 일가친척지간인 경우가 많았다. 성도들끼리 통혼(通婚)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번 교회분열은 형제와 자매의 분열이며 일가친척의 골육간 분열이었다.
총회 분열 이후 본국으로 소환된 나요한 선교사의 환송기념(195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