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출신성분과 십자가 수용의 상관관계>의 줄거리:
데살로니가 유대인과 베뢰아 유대인을 비교하면 나타나는 결론이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출신 가문이 좋아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이렇게 기록 되어 있으니까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의 일반적인 성향을 말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아닙니다. 그들의 출신 가문이 좋다는 의미입니다.
출신 성분과 십자가 수용의 상관관계
(사도행전 17:1~15)
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오늘 말씀 중심으로 <출신 성분과 십자가 수용의 상관관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출신 성분과 십자가 수용의 상관관계’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아서 고상한 면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출신 성분은 고상하고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출신 성분에 대한 언급은 제가 자의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베뢰아에서의 전도를 기록한 부분 중 11~12절을 보면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드러난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과는 반응이 전혀 다릅니다. 이처럼 본문에서는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과 베뢰와의 유대인들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너그럽다”로 번역된 헬라어 유게네스테로이(εὐγενέστεροι)는 “좋은 출생”이라는 뜻의 유게네스(εὐγενής)의 비교급입니다. 직역하면 “더 출신이 좋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보면 너그럽다는 의미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신이 좋아도 너그럽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출신이 좋지 않아도 너그러운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신이라는 말을 강조하고자 한다면 “좋은 가문의 출신이라서 고귀하다”라는 식으로는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유게네스라는 표현이 베뢰아 사람들에게만 붙여졌다는 것이 본문의 독특한 점입니다.
물론 베뢰아에 있는 유대인들이 실제로 혈통상 귀족 가문의 훌륭한 출신 성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디아스포라 이민자들이었기에 외국에서 좋은 가문으로 인정받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며 굳이 출신이 좋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본문에서 너그럽다고 한 것은 평소에 드러나는 베뢰아 사람들의 성향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출신 성분이 더 좋았다는 것은 폭력배까지 동원하여 바울 일행을 탄압한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과 비교를 위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바울이 전하고 있는 십자가 복음에 대한 반응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문과 제목에서 말씀드린 출신 성분이란 십자가 복음 앞에서 보이는 태도에 대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과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바로 출신 성분의 차이로 복음에 대한 태도 또한 달랐습니다. 태도란 곧 인격을 이루는 생각과 말과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하는 좋은 출신이란 혈통상 가문이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격적 차원에 대한 언급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빌립보에서 약 160km 남서쪽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리고 베뢰아는 데살로니가로부터 다시 남서쪽으로 약 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였고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도 전략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도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베뢰아는 한적한 곳에 떨어져있는 전원 도시였습니다. 베뢰아는 교통의 발전이 더뎌 상업이나 산업의 발전이 미비하였습니다. 누가는 이 두 도시에서 있었던 사건을 비교하면서 십자가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두 도시에 살던 유대인들의 인격적 출신 성분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누가의 기록에 따르자면 그 이유는 인격적 출신 성분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따져볼 수 있는지 십자가 복음을 기준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지금 2차 전도여행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은 1차 전도여행 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각지에 퍼져있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다섯 가구 이상이 되면 회당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세 안식일이란 3주에 걸쳐 유대인들이 회당에 모이는 안식일 때마다 전도를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에서 회당을 중심으로 했던 이유는 회당에는 유대인들만이 모였던 것이 아니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도 모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회당을 낯선 이방지역에서의 복음전파를 위한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은 본문에서도 암시되어 있듯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세주 즉 기름부음 받은 자는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이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메시아이시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어떻게 예언되었는지를 가르쳐주었던 것입니다. 3절에서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는 것도 전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도시마다 존재하는 회당에서 가르치는 것이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메시아를 구약성경이 예언하고 있음을 전파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메시아가 세상에서 버림당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것이 예언되었습니다. 바로 그분이 나사렛에서 태어나 목수 일을 하시다가 삼 년의 공생애를 마치시고 사역을 완수하신 예수라는 젊은이임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 앞에서 데살로니가 유대인과 베뢰아 유대인의 인격적 출신 성분이 드러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을 박해함으로써 그 출신 성분이 고약하고 천박함을 드러냈습니다. 다만 이러한 박해는 데살로니가 유대인들만의 특징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언급되고 있는 이유는 빌립보 감옥에 갇혔던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유대인들 또한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세상의 좋음과 싫음에 대한 습관을 유지하고자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때 강한 반발심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대해 죽으신 분인데 이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모든 것들이 세상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라던 메시아이자 그리스도는 어디까지나 세상 안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다윗 왕국의 전성기를 재현하리라 믿었고,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들 위에 서게 되리라 믿었습니다.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번성을 이루게 하리라 믿었습니다. 결국 이들이 바라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들은 열어주고 싫어하는 것들은 막아주는 자였습니다. 그러한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심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세상을 탈출하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폭력배까지 동원하여 바울 일행을 박해하였습니다.
한편 베뢰아 유대인들은 태도가 사뭇 달랐습니다. 누가는 이를 출신 성분이 좋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베뢰아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전했습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을 통해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할 것이며 3일 만에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는 것이었고 그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임을 전했던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거부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과정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누가는 이것을 출신 성분이 좋다는 뜻의 유게네스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성령님께서 누가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어떤 말로 십자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더라도 출신 성분이 좋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13절 이후를 보면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쫓아와서 바울을 박해하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이에 바울은 결국 아덴 즉 아테네로 떠나게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여기서 말하는 출신 성분이란 십자가 복음을 대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과는 어쩔 수 없이 관계할지라도 업무적이고 피상적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결별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반면 이 세상에서의 신분과 상황과 여건과는 상관없이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인격적 출신 성분이 같은 것입니다. 출신 성분이 같다는 것은 한 가문의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과는 진정한 성도의 관계를 맺어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에 대한 태도는 곧 인격입니다. 인격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부터 비롯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의 인격 즉 생각과 말과 행동은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근원으로부터 유래되는 것이고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출신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인격의 출신은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만이 들어오실 수 있도록 공백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하여 무엇이든 끌어당기고자 합니다. 끌어당기는 힘이 좋아함이며 가질 때에 공백의 마음이 채워지리라 믿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으로 마음이 채워지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연인이나 배우자에 대해서도 마음을 채워 주리라는 믿음이 존재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것은 돈에 대한 믿음이고, 연인을 좋아하는 것은 연인에 대한 믿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승진을 좋아하는 이유는 승진이 공백의 마음을 채워 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부터 비롯된 말과 행동은 믿음을 출신으로 삼고 있습니다.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으로부터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나오고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인격의 출신 성분은 마음 채움을 위하여 무엇을 좋아하고 있는가가 결정합니다. 돈을 좋아한다면 돈이 인격의 출신 성분입니다. 자녀를 좋아한다면 자녀를 통해 마음이 채워지리라 믿는 것입니다. 자녀가 인격의 출신 성분입니다. 육체적으로는 내가 자녀를 낳았지만, 인격적으로는 자녀가 나의 출신 성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건강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은 건강이 인격의 출신 성분입니다. 그러나 돈이든 자녀든 건강이든 그것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인격은 세상 출신이 된 것입니다. 서울 출신이든 경기도 출신이든 강원도 출신이든 결국 대한민국 출신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돈이든 자녀든 건강이든 세상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면 그 인격은 결국 세상 출신입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부터 비롯된 말과 행동은 결국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에서 결정됩니다. 세상에 속한 것을 좋아한다면 세상 출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렸지만 마음이 세상 출신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손에 쥐기만 하면 마음이 채워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믿음은 스스로 인격의 출신 성분을 결정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을 출신 성분으로 삼고 있던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빌립보에서의 사건을 통해 좋고 싫음의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으심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는 돈이 잘 벌리는 것을 좋아할 수 없으며, 돈이 안 벌리는 것을 싫어할 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파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주는 자입니다. 따라서 내가 하나님을 좋아할 수 없다면 하나님을 주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 복음을 박해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돈이 많이 벌려도 좋은 것이 아니고 돈이 벌리지 않아도 싫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려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마라.”고 하실지라도 저는 부끄러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말을 하시는 사람의 출신 성분 때문입니다. 출신 성분이 세상이기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 베뢰아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전파하자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나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좋으심의 대상이고, 예수님께서 바로 그 하나님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음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따르기로 결정하는 것은 세상에서 좋아할 것도 싫어할 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누가는 이것이 가능한 이유를 바로 인격의 출신 성분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좋으심의 대상으로 느낄 수 있는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돈이나 자녀의 형통이나 건강이나 승진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 것과 다릅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계시지만 세상의 기준에서는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으심의 대상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돈으로 마음이 채워질 수 있으리라 믿음으로써 돈을 좋아하듯이,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질 수 있으리라 믿기에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좋아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시고 싫어하는 것을 막아주는 분이십니다. 좋아하는 것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는 이런 소리가 다 정신 나간 사람의 소리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을 믿는 하늘의 유전자가 출신 성분을 결정합니다. 세상의 기준에서는 돈이 벌려도 좋아할 일이 아니며 돈이 벌리지 않아도 싫어할 일이 아니라는 소리는 미친 소리입니다. 몸이 건강해도 좋아할 일이 아니며 몸이 아파도 싫어할 일이 아니라는 미친 소리입니다. 그러나 이 미친 소리가 복음으로 들려진다면 고상하고 고귀한 하늘 유전자의 출신 성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갇혔을지라도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유일하게 좋으심의 대상으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출신 성분이 고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학총장 집안이나 대대로 판검사 집안에서 태어났을지라도 세상을 떠나자는 십자가 복음은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세상의 가치들을 많이 얻는 방편으로 능력만을 얻으려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출신 성분이 미천하고 천박한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를 통해 제시된 성령님의 관점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으심으로 믿어지고, 하나님만을 좋아하기 위하여 죄의 체질 때문에 느껴지는 세상에 대한 좋음과 싫음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기로 용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베뢰아 사람들처럼 출신 성분이 고귀하고 고상한 사람입니다. 아무쪼록 십자가 복음방송을 듣는 모든 분들이 베뢰아 사람들처럼 출신 성분이 고상하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처럼 출신 성분이 천박하고 미천한 사람들이 없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출신 성분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사랑 안에서 고귀한 자들일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십자가 예수님을 기꺼이 받아들임을 통하여 우리의 출신 성분이 고귀한 것임을 확신하게 할 수 있게 해주셨으니 이에서 더 큰 은혜가 없음을 알고 감사에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