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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저를 가져주세요!>의 줄거리 :
나는 하나님 손에 들린 도구나 막대기나 방망이가 되고 싶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당신 손에 쥐시고 마음대로 무슨 일에든지 아낌없이 휘두르시면서 쓰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말한다. 그러나 나를 드린다는 생각과 말은 하지만 정말 어떻게 드려야 하나님이 나를 가지실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실제로 나를 가지실 수 있도록 해드리는 법과 하나님이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가지신 사람의 삶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 저를 가져주세요!
(출애굽기 30:1~38)
6. 그 제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7.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8. 또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12.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들을 계수할 때에 자기의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것을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 함이라
15.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20.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
21.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32. 사람의 몸에 붓지 말며 이 방법대로 이와 같은 것을 만들지 말라 이는 거룩하니 너희는 거룩히 여기라
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가져다가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하고
본문은 여러 문단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먼저 1~10절까지는 분향할 제단을 만들라는 말씀과 향불을 365일 밤낮으로 꺼뜨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문맥이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며 11~17절에는 생명의 값이라고 할 수 있는 속전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속전을 내지 않을 때 질병이 생긴다는 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의미이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생명값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부자라고 해서 스스로를 가난한 자보다 존귀하게 여겨서 생명의 속전을 더 낼 수도 없으며, 가난한 자라고 해서 생명의 속전을 더 적게 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명값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똑같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18~24절에는 놋으로 만든 물두멍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손과 발을 씻지 않고 성소에 들어가서 분향을 하거나 떡을 진열하거나 등대에 불을 켠다면 죽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번제단에서 화제를 사를 때도 손과 발을 씻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2~33절에는 붓는다는 의미의 관유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관유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고, 그것을 사람에게 쓴다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관유는 오직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이 구분되어야 함을 강하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34~38절에는 거룩한 향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향단에 피울 향을 만들 제조법을 말씀하시고, 관유와 마찬가지로 이 향을 자기를 위해서 만들면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다소 일목요연하지 않습니다. 단계적이고 점증적으로 전개되기보다는 맥락이 끊어지듯이 임의로 나열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하나님! 저를 가져주세요!’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우리는 오랜 기간 하나님을 믿어왔습니다. 제가 마음으로 느낀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내가 하나님의 손에 들린 막대기나 방망이와 같은 도구가 되어서 하나님이 마음대로 쓰시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나를 가지셨으면 좋겠다.’라는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말하며 하나님께 나를 드려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를 드린다는 말과 생각은 있지만 과연 어떻게 나를 드려야 하나님이 나를 가지실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을 가져서 하나님 부자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가지시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을 많이 해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본문의 주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본문은 다소 산만하고 맥락 없이 여러 내용이 기록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에는 ‘하나님! 저를 가져주세요!’라는 일관된 간구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를 가지시는 일이 왜 중요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신앙인이든 불신앙이든 모든 사람을 주권으로 다스리시지만 그들 전부를 가지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가지신다는 의미는 당신의 마음 안에 들여놓는 것이고 마음대로 쓰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마음에 악이 가득한 사람은 악을 뿜어내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마음 안에 들여놓지 않습니다. 오직 악을 다스리시는 방향으로 섭리하실 뿐입니다. 내가 악한 마음을 가지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도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악한 마음을 가지고 멋대로 사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막으시고 길을 여시는 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악함을 드러내는 것조차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가지실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하나님이 가지실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하나님이 가지신 사람에게서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상번제에 이어서 분향단에 대한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규격대로 분향단을 만들 것과 분향단의 불을 항시 유지하여 성소 안에 향기가 가득하게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분향단의 위치는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와 성소가 휘장으로 구분되고 그 성소의 휘장 앞에 두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5장 8절을 보면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라고 했고, 8장 3절에서는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기도를 뜻하는 분향단의 의미가 잘 표현된 구절들입니다.
이처럼 지성소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고 성소의 분향단은 성도의 기도를 가리킵니다. 선민이라면 기도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지시이자 분향단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언약궤 앞에 분향단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가지고 있고 이로부터 채우고자 하는 흡입력이 작용합니다. 기도란 사람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흡입할 때 보이는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쉽게 말해 기도는 무엇인가를 간구하는 것이고,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다고 여기는 것의 이름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대상을 갖기 위하여 간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언약궤 앞에 분향단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을 가지기 위하여 간절히 바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분향단의 기도로 표현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 대신 돈의 이름을 붙들고 있습니다. 이제 이 사람은 분향단이 뜻하는 대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실제 돈을 추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선민은 번제단에서 죽는 자입니다. 돈을 추구하는 마음을 번제단에서 죽여야 합니다. 마음의 공백을 위하여 흡입력이 작용할 때 언약궤가 상징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세상 것들의 이름을 붙잡았다면 세상을 향한 소망과 열망이 생깁니다. 이러한 소망과 열망이 드러나는 가장 대표적인 태도가 기도입니다. 번제로 죽일 때는 세상 것들의 이름을 붙잡고 세상 것을 간절히 원하는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가졌다면 누리려 하고 세상 것을 못 가졌다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추구하고 소망하는 나를 죽여야 합니다. 세상을 소망하는 나를 죽이고 나서야 비로소 언약궤 앞에 놓인 분향단의 의미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간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속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노예로서 바로의 소유물이었습니다. 이는 곧 세상의 노예이자 마귀의 소유물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에서 빼내어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속전이란 생명값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구를 계수할 때 누구나 생명값으로 반 세겔을 내게 하시고, 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모인 돈은 성막을 만드는데 사용되지만 본문에서는 단순히 성막을 짓기 위한 돈을 내라는 의미에서 생명값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생명값으로 반 세겔을 내면서 내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뼛속까지 각인하라는 뜻입니다.
성막은 선민에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일깨워 주는 곳입니다. 이러한 성막을 만드는 돈을 나의 생명값에서 낸다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였습니다. 세상의 노예이자 마귀의 소유물이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나를 빼내어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생명값을 낸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로부터 분향단과 속전의 연관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분향단은 기도를 뜻합니다. 밤낮으로 향불이 꺼져서는 안되듯이 기도는 쉬지 않고 해야만 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 가지기를 쉬지 않고 열망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내가 하나님의 것임을 의미하는 속전이 등장합니다. 이로부터 내가 하나님을 가지는 것과 하나님이 나를 가지는 것의 연관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사람은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좋다고 여겨지는 대상의 이름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대상을 기도의 방식으로 추구합니다. 기도는 갖고 싶어 하는 것을 간절히 원하는 태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이 등장합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갖고 싶어 할 때 동시에 그 대상은 나를 갖습니다.
예를 들어 몸이 건강하기를 소원합니다. 내 마음이 몸의 건강을 향해서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상황을 건강의 관점에서 보자면 건강이 내 마음을 소유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건강했으면 좋겠다.’라고 바라는 순간에 건강은 ‘너는 내 소유다.’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돈을 소원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돈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돈을 향해 기도의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상황을 뒤집어서 돈의 관점에서 보자면 돈이 내 마음을 가진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돈 좀 있으면 좋겠다.’라고 바라는 모든 순간에 돈은 ‘너는 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길을 가다가 꽃이 예뻐서 꺾었다면 동시에 꽃은 내 마음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가지시는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분향단의 의미를 통해 잘 드러납니다. 번제단에서 세상 것을 좋아하는 나를 죽입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 마음으로 지성소의 언약궤가 가리키는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던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을 갖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 자체가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가지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계속해서 하나님께로 가는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나를 가지시게 되는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분향단은 하나님을 가지고 싶어 하는 열망을 표현하는 기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어서 언급된 속전은 내가 하나님의 것임을 스스로 각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가 하나님을 갖고 하나님은 나를 가지심을 분향단과 속전의 의미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만 드러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로미오가 줄리엣을 가지고 싶어 할 때 이미 로미오는 줄리엣의 것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가지고 싶어 하는 기도를 상징하는 분향단과 하나님이 나를 가지심을 상징하는 속전이 연결되어 언급된 이유입니다.
한편, 속전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이 반 세겔을 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소유로 삼으실 때의 값어치는 세상의 형편과는 무관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수조 원의 재산을 가진 재벌이든 월세방에 살고 있는 사람이든 그 생명값의 무게는 똑같습니다. 부자가 자기 인격적 가치를 가난한 자들보다 낫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가지실 수 없는 이유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가 자기 인격적 가치를 부자보다 못하다고 여긴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이 가지실 수 없는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가지실 때는 세상의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구분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고 하나님의 소유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성막 본체와 번제단 사이에 있는 물두멍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제사장은 번제단에서 일하거나 성막에 들어가서 일을 할 때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 손과 발에 세례를 주라는 것입니다. 제사장도 사람이기에 의식주의 문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제사장 집안의 남자들은 다 제사장이 됩니다. 제사장이라고 해서 제사장들끼리만 관계했던 것은 아닙니다. 집안의 가족들을 대면하며 일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사장이 딸을 시집보내고자 합니다. 이 문제로 온 가족이 상의하다가 제사를 드릴 시간이 됩니다. 이때 제사장은 딸의 시집에 대한 문제를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성소에서 떡상을 만지고 분향을 하고 등대에 불을 켜는 일을 하면 죽으리라는 것입니다.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는 것은 세상 문제로 더러워진 마음을 씻어냄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은 이 세상 문제에 찌든 상태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없는 사람처럼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분향단이 뜻하는 대로 하나님을 가지고 싶어 하는 열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하나님이 나를 가지시는 정도가 강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단단히 붙드시는 만큼 나를 마음대로 쓰실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에 내가 하나님의 것이 되었을 때 이제부터 내가 하는 일은 다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반면 내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달려들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제사장도 아버지로서 딸이 시집을 잘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딸의 것이 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손과 발을 씻는 것에는 위생적인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중동 땅은 흙먼지가 많은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본문에서 기도를 상징하는 분향단에 대한 이야기와 스스로 하나님의 소유임을 고백하는 속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후에 물두멍이 언급된 것에는 연관성이 있습니다. 선민은 하나님의 것으로서 만인 제사장이 뜻하는 대로 모두 제사장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내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성소와 번제단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인 제사장이 뜻하는 대로 우리의 일상 전체는 하나님의 일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로 알고 살아간다면 죽임을 당하듯이 하나님과는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선민도 아니며 만인 제사장이 뜻하는 대로 제사장도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음이란 마음에서 세상의 흔적을 씻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살던 자로서는 절대로 제사장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세상일의 연장선일 뿐이기에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과 끊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물두멍의 필요가 생깁니다. 세상일에 대해 손과 발을 씻고 하나님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하늘에 올라가면 하나님 것이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것으로 삼으신 나를 통해 이 세상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제사장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하늘로 올라갔더니 하나님이 나를 가지시고, 하나님이 나를 가지신 상태에서 이 땅에서 일을 하게 되면 성막에서 일을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유에 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관유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면서 관유를 사람에게 쓴다면 죽을 것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관유는 하나님의 것에만 바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떡상에 관유를 바르면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됨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떡상에 올리는 진설병은 거룩해집니다.
이것을 나에게 적용해 봅니다. 내가 하나님을 가지려고 할 때 하나님이 나를 가지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것이 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할 때 나에게서 거룩함이 나타납니다. 배우자와 관계한다면 배우자는 거룩하게 되지 않을지라도 그 관계는 하나님의 일로써 거룩한 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소유하셔서 당신의 것인 나를 통하여 일을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접촉하여 관계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일이 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 것이 된 사람들의 삶입니다.
관계가 하나님의 것이 되면 이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마음대로 표현하십니다. 물론 상대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몰지각한 제자들의 관계는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일로서 진행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에 거룩한 관유를 바른 것처럼 내가 하나님의 것이 될 때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것으로만 살아갈 때 주어지는 평강과 기쁨을 경험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과 상황과 환경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것이 된다면 거룩해지고 나와 관계가 어떠하든 나는 평강과 만족과 기쁨 안에 머무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마지막으로 향품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향품이 분향단과 따로 언급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분향단의 목적은 쉬지 않고 기도함에 있습니다. 그 기도는 언약궤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가지기 위하여 쉬지 않고 열망하는 것입니다. 한편 향품은 본문 전체를 포괄적으로 요약하는 것입니다.
향품이란 하나님이 내게서 특별히 갖고 싶어 하시는 부분을 가리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 크기의 공백이 있어서 채우고자 하는 흡입력이 작용합니다. 하나님은 그 흡입력을 당신의 것으로 가지고 싶어 하십니다. 마음의 공백에서 비롯된 흡입력이 하나님께만 적용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지고 싶다. 충만하고 싶다. 만족하고 싶다. 채우고 싶다.’라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러한 욕구가 ‘하나님을 가지고 싶다. 하나님으로 충만하고 싶다.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싶다. 하나님으로 채우고 싶다.’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나를 통째로 갖고 싶어 하시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나에게서 갖고 싶어 하시는 핵심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욕구는 1%도 예외 없이 하나님께만 드려져야만 하고, 하나님이 나를 완전히 가지실 수 있어야만 합니다.
대수롭지 않게 ‘오늘 점심에 짜장면이 먹고 싶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민이라면 그 마음조차도 번제단에서 죽여야 합니다. 짜장면을 먹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짜장면을 안 먹어도 될 정도로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해주시옵소서.’로 바꿔야 합니다. 충만과 만족과 채움을 바라는 마음은 반드시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만을 향한 열망이 되어야 합니다. 채움을 바라는 욕구가 하나님만을 향함으로써 하나님이 나를 가지실 때 위에서 보내지는 삶이 됩니다. 손과 발이 깨끗한 상태의 삶이 가능해집니다. 내 손과 발이 닿는 모든 관계가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이로부터 사람들의 반응이나 상황의 변화에 상관없는 절대 평강과 절대 기쁨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완전히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하나님 손에 쥐신 도구로 마음대로 휘두르시며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소원은 우리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많이 가지겠다는 열망을 키우면 키울수록 하나님은 나를 강렬하게 쥐실 것이고 가지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강하게 쥐시면 쥐실수록 이 세상의 삶도 마음대로 휘두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야구 선수들이 공을 치기 위해 배트를 단단히 쥐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마음대로 휘두르시기 위해서는 단단히 쥐실 수 있어야 합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장악력은 내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열망과 비례합니다. 점심에는 짜장면을 먹고 싶다는 사소한 마음까지도 다 환산해서 하나님께로만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티끌 모아 태산을 만들듯이 하나님에 대한 열망을 키우면 키울수록 나에 대한 하나님의 장악력은 강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나를 휘두르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삶의 모습은 강렬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갖는 재벌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을 열망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장악력이 강렬해짐으로써, 하나님이 마음대로 휘두르셔도 손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하나님의 것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께 장악되어 하나님 것이 된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만으로 채워지는 만족을 위하여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어제보다 오늘 더욱 더 강렬하게 키워갈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