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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이나교와 베다의 전통 >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듯이 불교와 자이나교는 그 특성상 베다에 반대하는 것이다. 베다의 전통에서는 그 자체가 브라만적인 작품들에 기록되어져 있고, 이러한 두 체계는 나스티카 그룹으로 분류된다. 이 두 체계는 엄격한 브라만의 경계 밖에서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 기원되었다. 이러한 두 체계는 동물의 생명을 죽이는 것이나 제사에서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원리이나, 제사문화 자체에 대한 강한 반감에 의해서 특징지어 진다. 이러한 두 체계는 베다의 권위와 브라마나의 지고함을 반대한다. "제사적 신앙으로 부터의 자이나교와 불교 체계의 주요한 이탈은 그들이 우주와 유정의 존재들, 특히 인간에 대한 실재나 지위의 이론을 형성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제사의 신앙은 개인적인 신앙들과 제사들로 분주하고, 제사의 실제적 거행등을 위한 것에만 국한되는 원리들이나 격언들에만 관심이 있었다."
자이나교와 불교가 브라마나의 제사적 원리들에 대한 반작용으로부터 발생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들은 베다 문헌들에서, 특별히 초기의 우파니샤드의 몇몇 종류의 표현에서 이미 발견되어진 몇몇 근본적인 원리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의 총화와 요지는 아트만과 브라만, 즉 개별적 자아와 보편적 자아의 일체(균등)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아트만이 인간의 맨 안쪽의 실체인 반면, 브라만은 우주의 궁극적 실체이다. 브라만에 있어서 우주는 브라만을 제외하고는 아트만에 있다. 찬도갸 우파니샤드의 다음과 같은 문장들은 전체의 것을 설명해 주는데, "죄악, 늙음, 죽음과 슬픔,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고, 그 욕망들이 진실되고, 그 인식들이 진실된 자아(아트만)는 갈구되어져야 하며, 물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그 자아를 아는 모든 그의 소망들과 모든 세계들을 얻는다." 또다시 "이러한 나의 맨 안쪽의 가슴에 있는 나의 아트만은 쌀의 낟알, 혹은 껍데기가 없는 옥수수, 혹은 겨자씨, 혹은 기장등과 같은 것들보다 더 작다. 나의 가장 내부에 있는 이러한 나의 아트만은 지구 보다도 크고, 하늘 보다도 크며, 천체 보다도 크고, 모든 천구들 보다도 크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동작들과 모든 소망들과 모든 냄새들과 모든 맛들이다. 그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그의 내부에 둘러 싸도록 한다. 그는 말하지 않고, 그는 어떠한 것들에 대해서 고생하지도 않는다. 나의 가슴 가장 안쪽에 있는 이러한 나의 아트만은 바로 브라만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 삶을 마감할 때, 나는 통합될 것이다.
p.167 베다 혹은 초기의 브라만적인 이론들의 문제점은 아트만과 외부세계사이의 관계에만 한정 되었다는 것이다. 배고픔과 목마름, 슬픔과 혼잡, 늙음과 죽음으로 가득찬 고통스러운 세상은, 그것이 모두 완벽하고, 모두 편재하고, 모두 아름다운 아트만과 동일시 될 때 자연적으로 절대적인 회의주의와 윤회의 개념과 태어남과 죽음의 끝없는 순환을 일으키며, 결국에는 어떠한 상태의 자아로부터 다른 상태의 자아로의 이동의 과정을 미리 결정하는 힘으로서의 카르마의 원리를 발생시킨다. 좋은 행위의 보상 조차도 어떠한 종류의 욕구로부터 일어나는 일시적인 것이며, 그러므로 해방(해탈)의 원리는 점차적으로 올바른 지식을 통한 모든 욕망의 정복에 근거하는 것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붓다와 마하비라가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는 붓다와 마하비라(고살라, 아지타, 산자야, 푸라나, 파쿠다)의 동시대성이 결론이 조금 다르긴 할 지라도 동일한 전제들에 근거한 그들의 교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카르마와 그 결실은 베다에 있어서 제사적 행위들과 그것들의 결과들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어떠한 도덕적인 향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복지의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행복이나 슬픔의 절대적인 소멸은 그 목표가 아니다. 이러한 초기시대의 권위들은 단지 제사와 베다의 명령에 관련된 지식들을 의미할 뿐이다. 그것은 그것의 가장 폭넓고 보편적인 의미에 있어서 취해진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자이나교와 불교가 베다의 선상으로부터의 중요한 출발을 가진다는 관점들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선상에 있어서의 진보는 불교와 자이나교에 의해서 지지되어지는 몇몇 특징들을 기대하는 우파니샤드에서 시작되어 졌다. 참된 지식의 탐구에 있어서 불교는 모든 창조와 피괴를 조건들의 집합에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결국에는 절대적인 찰나성의 원리에 이르렀다. p.168 자이나교에서는 또한 하나의 생각을 절대적인 찰나성으로 옮기는 대신에 변화들은 조건들의 집합에 의해서 생산 되어진다는 것을 믿었고, 상대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영원성의 원리를 받아들였다. 자이나의 철학자들은 어떠한 궁극적이거나, 한쪽으로 치우치고, 절대적인 사물의 견해들은 취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자이나교에 따르면, 사건들의 발생들 뿐만 아니라 모든 판단들 조차도 단지 제한된 의미에 있어서만 참된 것이라는 것이다. 조건들의 집합에 의해서, 사물들의 오래된 특질들은 사라지고, 새로운 특질들이 나타나며, 한 부분은 영원히 남게된다.
자이나교와 불교에 영감을 준다고 말하져지는 어떠한 근본들에 의한 베다의 전통들에 대한 사상들은 주로 카르마 이론이나, 자아의 윤회나 재탄생이나, 해방(해탈)과 같은 것들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 초기의 베다의 사상들에서 카르마는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러나 후기의 베다의 문헌들에서는, 특별히 우파니샤드에서는 그것은 생산의 최대를 나타내는 것이며, 우리가 뿌린 것을 거두어 들이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야고비는 그 농업적인 의미에 있어서 카르마 이론이 비베다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발전하고 우파니샤드에 있어서 지위를 발견하는 것은 가능하였다. 이러한 전제에 있어서 명백히 몇몇은 진실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카르마 이론이 두가지 형태로 나타내어 지는데 그것은 단순한 것과 복잡한 것이다. 카르마 이론의 단순한 형태는 선함의 씨앗들이 좋은 결실을 가져오는 것과, 나쁜 씨앗이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처럼, 인간이 선한 행위에 의해서 선하게 되고, 나쁜 행위들에 의해서 나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 윤리학은 각각의 행위는 반드시 세상에 있어서 그 본래의 결과를 산출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마음에 인상을 남기는 것과 같다. 인상, 즉 상스카라라는 것은 어떠한 사람이 했던 행위들을 반복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한 인간은 행위들을 탈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조정하는 것이며, 자기 신조에 의해서 선한 충동들을 강화시키고 악한 충동들은 약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복잡한 단계에 있어서는 카르마는 눈먼 비의식적인 원리로 간주되며, 모든 우주를 통치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심지어 신의 조정에도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카르마의 자이나 이론은 위에서 언급되어진 복잡한 형태로 부터의 그 주요한 충동들을 끌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체계들과는 달리 카르마는 자이나교에서 물질적인 것과, 물질이 되고, 그것들을 통하고, 그것들은 현세의 수준으로까지 끌어내림으로써 지바들을 퍼지게 되는 것으로 서술되어 진다. 신체 행위를 말과 마음을 통해서 카르마는 미묘한 물질로서 형성된다. 인간의 열정들은 카르마라는 물질을 끌어당기는 점성의 물체처럼 행동하는데, 그래서 카르마 물질이라는 것은 자아 속으로 퍼붓는 것이며, 그것에 달라붙어서 점차적으로 익어서, 개개인의 고생과 기쁨에 일치하여 그 자신을 소모시켜 버린다. p.169 몇몇 카르마 물질은 이러한 식으로 확장되는 반면에 다른 카르마 물질들은 동시에 축적된다. 적절한 자기신조를 통해서 모든 카르마가 수행되어 진다면, 지바는 자유로와진다. 지바가 얻는 카르마의 양에 따라서 고통과 기쁨을 겪는 지바의 개념은 또한 우파니샤드의 사상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지바라는 말은 'j?v'라는 어근에서 나왔는데, 그것은 '숨을 계속쉬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우파니샤드는 자아에 대한 또다른 두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보크타(경험의 주체)와 카르타(행위자)이다. 각각의 자아는 그것의 경험적인 존재를 통한 이러한 두가지 원리에 의해서 조건 되어진다.
카르마 이론은 자아의 윤회와 재탄생의 이론과 뒤엉켜서 혼합 되어있다. 인도의 철학체계들의 보편성과 마찬가지로, 자이나교 또한 자아의 윤회를 믿지만, 그러나 윤회의 이론을 다루고 있는 다른 철학 체계와는 다른데, 그것은 우리가 위에서 본바와 같다.카르마 물질은 과거의 생들의 불확실한 횟수를 통해서 자아, 주위에 축적되는데, 그것은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카르마-샤리라'라고 불리며 그것은 이 생에서 부터 다음 생에까지 통과할 때, 자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리그베다의 내세론에서는 자아의 윤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거나, 어떠한 형태로든지의 재탄생의 이론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브라마나 문헌에서는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는 사상을 발견할 수 있지만, 이 사상은 이론적인 구성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세가지의 구별되는 단계들에 있어서 자아의 윤회에 관한 이론의 명백한 발달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단지 우파니샤드에서이다. 첫번째 단계에서 초기의 천상에 관한 베다의 이론, 즉 야마의 거주지에 관한 것은, 그 아버지를(피트리)의 즉, 신(deva)들의 야나, 즉 길에 관한 개념으로 교체되었다. 두번째 단계에 있어서는 윤회의 개념은 카르마나 행위들의 결과들에 대한 사상의 언급없이 제시되어 진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 있어서는 우리는 엄밀하게 카르마의 원리의 용어들에 있어서만 자아의 윤회의 완전한 나타남을 가진다. 선업과 악업에 따라서, 인간은 그의 행동에 따라서 결과를 받고, 그는 이러한 세계에서 또다시 태어나려고 한다. 한 생에 있어서의 선한 행위들은 다음 생을 위한 더나은 미래를 보장해 주고, 이러한 과정을 그가 마지막 구원을 받을때까지 계속된다. 자이니교에 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불교도 또한 이러한 우파니샤드의 개념을 많이 도출했다. p.170 이러한 연관에서 특별한 주목을 받을만한 것은 자이나의 윤회하는 자아가 다양한 모양들과 크기들을 가진다고 추측 되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지바와 동일한 크기인 것이다. 그 초기의 단계들에 있어서 그것이 지바로 들어갈 때, 그것은 매우 작은 것이지만, 그 자체가 지바를 완전히 채우기 위해서 한 번 들어간다면, 그 자체가 확장되는 것이다. 또다시 지바의 몸을 떠나려 할 때에는 그것은 수축의 과정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며, 미세한 입자로써 몸 밖으로 나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아의 모양과 크기의 개념은 원시적인 애니미즘의 신앙들의 특징을 가지는 것이다.
윤회의 카르마 이론들과 같이 자이나교와 불교의 해탈의 개념은 우파니샤드의 사상들과 관련을 가진다. 자이나교에서는 자아의 해탈은 단지 카르마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때, 가능한 것이다. 초기의 베다의 문헌들에서, 해탈의 개념은 없었다. 우파니샤드에서의 해탈, 즉 무크티는 인간이 그 자아가 브라만이 될 때, 획득 되어지는 무한성의 상태를 의미한다. 세상이 비참함과 고통으로 가득차고, 탄생과 재탄생을 꺼리게 된다. 모든 고통들과 한계들은 우리가 자신 스스로를 모를 때 진실해 지는 것이다. 인간은 그 자신내에서 거대한 몸(아나마야-코샤), 삶의 생명적 기능들(프라나마야-코샤), 의지와 욕구(마노야마), 그리고 생각과 사상들(비갸나마야)의 훌륭한 요소들을 지탱하는 것이며, 그가 현재의 삶과 다가올 다른 삶들에서 일련의 경험을 통한 영역들과 지나감들에, 그 자신을 유지하는 한 그는 기쁨들과 고통들, 질병과 죽음을 겪게된다. 그러나 만약 그가 이러한 것들로 부터 그의 진실한 변하지 않는 존재로 물러간다면, 그의 진실한 자아는 순수한 지성, 순수한 존재, 그리고 순수한 행운의 상태인 그에게 있어서 그 자체가 명백해진다. 명백하게도 그러한 생각들은 목샤 즉 해탈과 같은 자이나의 개념에 대해서 약간의 관련을 가지고 있다. 지식이 지바의 바로 그 정수를 조직한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후자는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정확히 안다.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그 인식의 힘을 방해하는 카르마에 의해서 어두워지기 때문에 파편 조각의 상태인 것이다. 교화의 축적은 방해물들이 제거될 때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 때 개별적인 지바가 全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케발라갸나, 즉 매개물이나 의심이 없는 절대적 이해라는 것이다. 이것이 완성될 때, 자아는 끝이 없는 행복이 시작되는 것이다.
< 자이나와 불교 >
우리는 자이나교와 불교가 특정한 점들에 있어서 다르다 할 지라도, 다른 경우에는 동일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p.171 그들의 초기의 단계들에 있어서, 복잡한 면에서는 아닐지라도, 그들은 동일하고 유사한 원리들을 나타내고 있다. 이 두 체계는 지적인 첫번째 원인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으며, 신격화된 성자들을 숭배하고 도덕적 가치들과 올바른 행위와 자기 신조를 강조하고 베다의 권위와 브라마나의 지고함에 반대하고, 생명을 죽이는 것을 죄악으로 생각한다. 두 체계는 그들의 종교적인 개념들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소간의 유사한 술어들을 사용한다. 그것이 19세기 몇몇 유럽학자들이 자이나교를 불교의 한 분파, 혹은 그 반대의 경우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던 이유이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된 근원들에도 불구하고, 인도 종교사에 있어서 불교와 자이나교는 경쟁적인 신앙들에 속하는 것이었다.
불교경전에서는 자이나교와 그들의 교리들에 관한 수많은 언급이 있는데, 똑같이 자이나교 문헌에서도 불교에 관한 언급들이 있다. 앙구타라-니카야(팔리 經藏의 5니카야 중, 增支部 : 增一阿含경)에서는 마하비라가 모든 것을 알고, 완전지와 신앙을 주장하는 것과 옛날 카르마의 엄격한 수행에 의한 소멸과 새로운 카르마의 비활동성에 의한 예방을 가르치는 자이나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자이나교에서는 카르마가 소멸될 때 고통이 멈춘다. 고통이 멈추면 인식이 멈추고, 인식이 멈추면 모든 고통들은 끝나고 인간은 순수한 죄악의 소멸에 의해서 구원되어 진다. 마하바가(팔리律藏의 大品)에서는 리차비스의 장군인 한 시하(?)가 언급되는데 그는 마하비라의 평제자였으며 붓다를 방문하려고 노력했을 때 그는 그 자신에 의해 단념되었다. 자이나교에서 불교로 귀의하는 우팔리는 마지마 니카야(中部 : 中아함경)에서 언급되어진다. 앙구타라는 자이나 평신도의 몇몇 실생활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디가 니카야(長部 : 長아함경)에 관한 주석에 있어서 붓다고샤는 자이나교와 아지비카교의 차이점을 언급하고 있고, 또한 마하비라에 대한 파르슈와의 네가지 서약들을 잘못 서술하고 있는 동일한 문헌의 유명한 사마나팔라經의 문장을 다루고 있다. 수야가다와 같은 초기의 자이나 문헌들에서와과 같이, 불교는 순간적인 존재의 다섯가지 스칸다(루파, 즉 실체들과 그들의 속성들, 베다나, 즉 기쁨과 슬픔으로서의 감정들, 비갸나, 즉 사물들의 특징들의 인식,샹가, 즉 인식과 지식, 그리고 상스카라, 즉 단점과 결점-실란카의 해석)의 교리를 얻는 바보들로 묘사되었다. p.172 불교는 영원한 자아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후기의 불교철학적 문헌들과 자이나의 문헌들은 상호비방대신 특정 주제들에 관한 진정한 철학적 논쟁을 하게된다. 불교와 자이나교의 근본적인 이론적 차이점들은 찰나성에 대한 문제에 있다. 불교는 모든 변화들의 특징들이 절대적으로 찰나적인(크샤니카) 조건들의 집합이라고 보고, 영원한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자이나교도 또한 변화들은 조건들의 집합에 의해서 산출되어 지고, 어떠한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세계관이 논리적으로 취해질 수 없기 때문에 세계의 영원한 실체는 적어도 몇몇 근본들은, 나란히 변화의 문제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불교는 변화하는 속성들은 홀로 인지 될 수 있어서 그들 뒤에 어떠한 변화하지 않는 실체란 없다고 한다. 점토흙과 항아리의 보편적인 예는 여기에 대한 예증이 될 수 있다. 점토흙과 같은 물체는 다양한 형태를 띠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점토흙 그 자체는 영원하게 남아있다. 변화는 단지 질적으로 일어난다. 불교는 우리가 점토흙으로 인식하는 것이 특정한 속성이고, 우리가 물단지로 보는 것은 또 다른 속성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속성과 별도로 어떠한 실체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변화들이 본질적으로 질적이기 때문에, 어떠한 영원하고 변화할 수 없는 실체라는 것은 단지 무지에 따른 허구라는 것이다. 반면에 자이나교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떠한 영원한 실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 뿐만 아니라, 속성들의 변화도 이야기한다. 조건들의 집합에 있어서 사물들에 있어서의 오래된 속성들은 사라지고 새로운 속성들이 나타나고 어떠한 속성들은 영원히 남아 있게 된다. 그래서, 물단지의 경우에 있어서 점토흙은 몇몇의 형태에 있어서는 잃어 버리지만 다른 형태에는 그 자체가 발생하고 영원히 남게 된다.
그래서 자이나교에 따르면, 우주에 정말로 영원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모든 것은 찰나적으로 변한다는 하는 사람들은 변화와 영원성은 모두 사실이기 때문에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한다. 실재성은 세가지 요소로 이루어 진다. 그것은 영원성, 기원성, 쇠퇴성(우트바다-바야-드라우뱌유크탐)이다. 찰나성의 이론에 맞서서 자이나교는 모든 것이 찰나적인 것으로 취해진다면 기억, 인식, 개인의 동일성의 즉각적인 감정같은 것들을 설명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p.173 따라서 해탈의 개념은 해방된 어떠한 영원한 자아의 부재를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모든 것이 순간적인 것이라면 그 순간적임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에 어떠한 도덕적 삶도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 때 한 사람의 행동의 결과들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찰나성은 변화하는 양태들(파라야스)뒤에서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에 찰나성은 어떠한 개별적인 연속들의 조직을 설명할 수 없으며, 변화하는 상태들이 개별성에 있어서 영속성을 형성하기 위해 함께 모여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찰나성의 교리는 또한 인식이나 추론에 의해서 증명 되어질 수 없다. 이러한 지식의 유용한 원칙들은 변화만 있고 어떠한 영속성의 요소가 없는 세계에 있어서의 어떠한 것들의 존재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지식의 이론이 관계되는 한, 자이나교는 외부적인 대상들의 인식에 의한 모든 지식은 우선 첫째로, 불확정적이고, 단정적이지 않은 불교의 견해에 공헌한 것은 아니다. 자이나교에 따르면 인식의 문제에 있어서 자이나교와 불교의 가장 주요한 차이점은 인식이 색깔이나 형태들과 같은 그들의 다양한 특성들과 일치하는 외부적인 대상들을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 비갸나바바딘 불교(유식불교)에서처럼 대상들은 지식의 형태들일 뿐만 아니라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다. 무지는 장막처럼 자아를 가리고 있고, 이 장막은 확고한 인식에 의해서 제거되어 진다. 자이나교에서는 불교와는 반대로 불확실한(니르비칼파) 단계의 인식을 부정하고 확실한(스바비칼파) 인식의 단계에 이른다. 반면에 불교는 불확실한 감각의 물질들의 표상이 구성된 첫번째 단계는 인식의 단지 유용한 부분이고, 확실한 단계는 진실로 표상하는 부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상상, 기억 등과 같은 정신적 범주들의 적용의 결과라고 간주한다.
자이나교에서는 불교의 실재가 원인이 되는 능률에 있다는 견해를 부정하는데, 그 견해란 다시 말하면, 그 대상이 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것이 가능할 때만 그 대상이 실재한다는 것이다. 자이나교는 가공의 뱀이 두려움등과 같은 결과를 일으키는 것처럼, 환영의 뱀이 실제적인 것으로 불리는 것과 같은 그러한 이유로 이러한 접근을 거부한다. 사실 결과의 산출이라는 것은 불교에서처럼, 유일한 존재의 정의이다. p.174 각각의 결과의 단위는 어떠한 다른 단위와 다르지만, 결과의 다른 단위들의 연속은 각각의 순간의 새로운 실체들의 연속을 나타내고, 그것이 모든 사물들이 일시적인 이유가 된다. 자이나교는 다음과 같은 근거로 이러한 견해를 논박한다. : 우리는 단지 사물의 존재가 대응하는 경험에 의해 나타내어 진다고 단언할 수 있다. 생산된 결과의 각각의 단위가 각각의 시간의 새로운 지점에 동일하지 않고, 그러므로 모든 사물들이 순간적이라는 불교의 견해는 거짓된 것이고, 왜냐하면 경험이 모든 대상의 매 순간에 변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금 장식품에 있어서 금이 귀걸이나 팔찌 같은 것으로 변하는 것이 형성되지만, 영원한 것으로 남게되는 것으로 발견되어 진다. 그러한 경험에 맞서서 모든 사물이 매순간 소멸하고 새로운 것들이 연속된 순간에 다시 생산된다고 단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이나교에 따르면, 이 근거없는 분석이 불교를 미 발견적 허무주의에 이르게 하는 호기심 많은 arthakriy?k?ritva 원리를 낳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에 의하여 간다면, 우리는 자아나 외계를 부정할 수 없다. 경험을 통한 인식의 발생은 어떠한 사물들의 병치에 대응 되어질 수 있다. 마하야나(대승불교)의 두 학파들, 즉 순야바다(공론학파)와 비갸나바다(유식학파)를 제외하고는 불교는 현실주의의 감각에서 시작하여 석녀의 딸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 만큼이나 완전히 비현실적이고 잘못된 것으로 경험적인 세계를 간주하는 절대적인 이상주의에 이른다. 그 철학사의 과정에 있어서 자이나교는 또한 몇몇 이상주의적인 경향들을 발전시켰으나, 자이나교의 논점의 실제적인 본성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자이나교는 그들이 감각기관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공론학파나 유식학파에 반대한다. 의존적인 기원을 가진 불교의 이론은 그 자신의 개별적인 방법에 있어서 생멸하는 일련의 속성들을 품고 있으나, 그것은 이러한 속성의 근원들의 형태에 있어서의 어떠한 원자적 형태로 위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이나교는 인식 가능한 세상위에 미묘한 요소들의 완전히 구별되는 두가지 유형의 불확정적인 수를 위치시키는데, 그 하나는 물질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적인 것이다. 거대한 세상은 그것에 따라서 미묘한 물질적 요소들의 단지 결과(카랴), 혹은 변경(파리마나)이다.
일반적으로 인식의 문제들 중에서, 자이나교는 인식의 자신 현현의 특성적 논점에 관한 유식학파에 속하는 불교와 일치 하지만, 반면에 유식학파는 인식과 별개인 대상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식의 특수한 한 부분은 특수한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자이나교는 외부 대상들을 인정하고, 인식을 발생된 현상으로 간주한다고 주장한다. p.175 유용한 인식과 유용한 인식의 도구를 의미하는 인식방법의 문제가 관련되는 한, 불교 논리학자들은 자의식이나 자기 현현의 사상을 도입한 것인데, 그것은 시다세나와 사만타바드라와 같은 초기 자이나 논리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인식의 한 부분의 유용성과 무용성이 내재하거나 외부적인가 하는 문제에 관련해서, 샨타라크쉬타에 의해서 지지되는 것처럼 불교의 견해는 인식의 한 부분의 유용성과 무용성은 어떠한 한 경우에 있어서는 내재적일 수 있다고 하고, 다른 경우에 있어서는 외부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반복된 지식(아뱌사-다샤)의 경우에 있어서는 첫번째 지식(아나뱌사-다샤)에 있어서 인식의 한 부분의 무용성만의 유용성은 외부적인 것으로 간주 되어져야 하는 것과는 다르게 그것이 내부적인 것으로 간주 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이나교의 위치는 또한 샨타라크쉬테에 의해 제시된 불교의 경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인식방법의 결과들의 본성에 관해서는, 불교전통은 두가지 견해들을 주장한다. : (1) 그것은 대상의 인식에 존재하는 것이며, (2) 그것은 자기의식에 존재하는 것이다. 자이나교의 전통에 따르면, 프라마나의 곧장의 결과는 무지를 제거하는 것이지만, 떨어진 결과는 대상을 받아 들이고, 거부하고, 무시하는 결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이나교에서는 기억(스므리티)을 인식의 도구로 간주하고 그것을 비인식적인 지식의 아래에 분류하지만 불교는 이 사상에 관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부분을 불교 원자론에 관한 간단한 언급으로서 마무리 하는데, 불교원자론의 개념은 자이나교의 이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원자론의 이론은 불교의 사르바스티바다 학파(설일체유부 학파)에서만 찾을 수 있다. 자이나교에 따르면 원자들은 영원하지만, 불교는 그렇지 않은데, 그 이유는 불교는 교리적으로 볼 때 모든 것들을 무상한 것이라고 단언하기 때문이다. 불교에 따르면 원자들은 에너지의 촛점에 비교될 수 있는 기능적인 역할만을 가질 수 있다. 네가지 요소들의 원자들과 또한 그들의 분자들은 오감과 관련되어 진다. 네 요소들은 구별되는 속성들과 기능들을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어 地의 경우에 있어서는 단단함과 유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고, 水는 습기와 점착력을 가지고 있고, 火의 경우에는 열과 익게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空의 경우에 있어서는 움직임과 확장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원자들은 네 요소들 중 적어도 하나의 원자를 포함하는 분자들을 구성하고, 두드러지게 그들을 구성하는 원자들에 따라서 그것들의 특성들을 획득하는 것이다. p176 그러한 개념들은 니야야․바이셰시카에 더 밀접한 자이나의 이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 자이나교와 아지비카교 >
자이나교의 전통으로 볼 때 금욕주의자로서 그의 경력의 초기에 있어서 마하비라는 아지비카교의 교주인 고살라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거의 분명하다. 고살라와 마하비라의 관계가 그리 영속적이지 못하고, 그들의 종교적 경력의 결과적인 측면에서 볼때 두 지도자간에는 매우 나쁜 관계로 발전하는데 그쳤을 지라도, 초기에는 아지비카교의 문헌이 없었기 때문에 그 불교와 자이나 문헌에서 살펴볼 때, 초기의 자이나교는 몇몇 측면에서 고살라의 교리에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불교경전에서 니르간타와 아지비카의 용어들이 혼동되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아지비카교의 일반적 결과는 니야티, 즉 운명(죽음)에 관한 교리인데, 그러나 그 교리는 자이나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특수한 몇가지 점에서 볼 때, 자이나교와 아지비카교는 많은 공통된 점들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아비자티, 즉 인간의 여섯 부류에 관한 아지비카교의 개념은 분명히 자이나의 존재의 분류와 레샤의 자이나의 개념과 관련을 가진다. 계층은 존재의 다른 부류들에 있어서 색깔의 추정된 속성으로 이루어 졌다. 최고의 즉, 우유 흰색의 계층은 고살라의 신도들과 그의 두 전임자들을 포함한다. 그 아래에 아지비카교의 다른 계층들을 포함하는 흰색 부류가 있으며, 그 아래에 아첼레카교에 속하는 초록색 부류가 있다. 그 아래에 니간타교가 입고 있는 하나의 옷을 이루는 붉은색이 있다. 도둑으로 살며 카르마를 믿는 비구들의 부류가 푸른색이다. 도둑들과 사냥꾼들과 폭력에 의해 살아가는 검은 부류로 구분 되어진다.
자이나교와 아지비카교의 관계에 관해서는, 야코비 교수의 말이 타당성이 있다. "내가 믿기로는 마하비라 교리들의 발전의 상당한 영향은 막칼리의 아들인 고살라에 기인 되어진다." 바가바티의 15장에 나와있는 그의 삶의 역사는 우바사가다사오의 그의 번역에 부록에 있는 호에른에 의해서 간단히 번역 되어졌다. 그것은 고살라가 그의 제자로서 마하비라와 고행을 행하며 6년간 같이 생존 했었다고 하지만, 나중에는 고살라가가 마하비라로부터 독립하여서, 그 자신의 교리로 새로이 시작하여 지나가 되었고, 아지비카교의 교주가 되었다고 기록 되어져 있다. p.177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를 수행승들의 오래된 확립된 순서에 따른 아첼라카 파리바자카교의 난다 바카와 키사 삼기차의 계승자로서 언급 되어지고 있다. 우리는 마하비라와 고살라가 어느 기간동안 고행을 함께 수행 하였다는 자이나교의 진술들에 의심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들간의 관계가 자이나교에서 믿는 것과 아마도 다를 것이다. 나는 추측하기를, 또한 나의 의견을 뒤받침하는 몇몇 논거들을 인용할 것인데, 마하비라와 고살라가 그들의 두 부류를 하나로 묶고 융합시키기 위해서 만난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이 두 교주들이 오랫동안 함께 살았다는 전제하에서 그들의 견해들에 있어서 몇몇 유사성들이 보인다. 사베 사타, 사베 파나, 사베 부타, 사베 지바와 같은 표현들은 우리가 동물들을 에켄드리야, 드빈드리야 등으로 구분하는 것으로 부터 배우는 주석서로부터 고살라와 자이나에 모두 흔한 표현이며, 에켄드리야, 드빈드리야와 같은 것은 자이나교 문헌에 매우 흔한 것이며, 그것은 또한 고살라에 의해서도 사용 되어진다. 여섯 레샤라는 흥미롭고 거의 역설적인 자이나 교리는 로이만 교수가 처음 봤을때 고살라의 인간의 여섯 부류로의 구분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자이교가 아지비카교로부터 이 사상을 차용했다고 보며, 자신들의 나머지 교리들을 그것과 일치시키기 위해서 변화시켰다고 믿고 싶다. 행위의 규범들에 관해서는 획득 가능한 집합적 증거는 마하비라가 고살라로부터 더 엄격한 규율들을 도입했다는 증거에 다다르는 것이다.
바샴교수는 아지비카 교리에 관련된 불교와 자이나교의 문헌들과 주석서들로 부터 아지비키교의 용어들과 개념들의 수를 발견하였다. 우리는 아지비카교가 자이나교에 영향을 끼치거나 자이나교가 아지비카교에 영향을 주는 그것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들을 간단히 언급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현 수준에서 가지고 있는 자료의 단편성 때문에 사실상 논의하기는 불가능하다. 불교 장아함경과 그것에 관한 주석인 붓다고샤의 수망갈라-빌라지니의 사마갸팔라經에서, 그리고 증일아함경과 자이나교의 바가바티 수트라에서 요니-파무카, 즉 자궁 혹은 탄생과 같은 개념들을 접할 수 있다. 카르마(Kar?a) 즉 그것들의 수와 분류, 파티파다, 즉 경로들( 불교의 中道와 비교), 안타라-카파, 즉 세계의 나이들, 아비자티 즉 인간의 분류들, 푸리샤-부미 즉 인간존재의 여섯가지 단계들(만다:어리석은 단계, 키다:기쁨의 단계, 비밤사:관찰의 단계, 우주구타:위로 걷는 단계, 세카:배움의 단계, 사마나:승려의 단계, 지나:계몽의 단계, 파나:인식의 가장 높은 단계-자이나의 구나스타나와 비교). p.178 아지바, 파리바자카, 나가바사 즉 뱀의 지역, 인드리야 즉 감각들. 2000회, 니라야 즉 영혼의 정화, 라조-다투(상키야의 라자스와 비교), 사니-가바 즉 낙타나 황소 등등의 유정의 생명들, 아사니-가바 즉 쌀, 밀, 보리 등등의 의식이 없는 생명들, 니간티-가바 즉 사탕수수, 대나무, 갈대등등의 결절이 있는 생명체의 유형들, 데바 즉 7부류의 신들, 마누샤 즉 인간들(?),자아들(?),천상들(?),생명의 단계들(?), 페스카 즉 악귀, 사라 즉 호수들, 파투바, 파파타 즉 절벽, 수피나 즉 꿈, 마하카파 즉 무한히 긴시대, 등등이 있다.
많은 다른 아지비카 범주들이 그의 마지막 참회에서 고행자의 행위를 다스리는 네가지의 파나가임과 아파나가임의 법칙들을 포함하는 자이나교의 바가바티 수트라에서 발견 되어지는데, 그것은 여덟개의 카리마임 즉 궁국적인 것들과 여섯개의 아니카마니자임 즉 필수적인 것들(라바 즉 얻음, 알라바 즉 잃음, 수하 즉 기쁨, 두카 즉 슬픔, 지비야 즉 생명, 마라나 즉 죽음)이다. 아지비카교는 일곱 요소들의 범주들의 존재를 믿었는데, 그것은 지,수,화,풍,고,락,영혼이다.(제2부에서 언급되어진 파쿠다의 교리와 비교해 볼 것.) 일곱가지 요소들은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불모이거나 확고하고,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발전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닌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남쪽의 아지비카교에서는 원자 이론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마니메칼라이, 닐라케치와 치바냐나-치티야르에 의해서 제시 되어진 증거에 의해서 증명되어진다. 원자들은 움직이고 결합하고 댜양한 종류들의 사물들을 형성하기에 느슨하게 결합 될지도 모른다. 원자들의 결합은 고정된 비율로 일어난다. 자아와 또한 기쁨과 슬픔은 원 자적 관계들에 의해서 느낄 수 있다. 아지비카교의 특징을 나타내는 자아의 크기와 색깔의 개념은 자이나교의 자아의 개념과 관계를 가진다. "자이나교의 주석가들의 증거는 아지비카교가 자이나교의 트라이라쉬카 부분의 그것과 매 유사한 그들 자신의 인식론과 논리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이나교의 트라이라쉬카와 같은 아지비카 인식론 체계의 가장 큰 특징은 일곱개로 나뉘어지는 자이나교의 정통체계와 대조적으로 세가지 범주들로 나뉘어지는 명제들의 구분이다.
< 자이나교와 유물론 >
p.179
수야가다 S?yaga?a에서는 이미 이 책의 두번째 파트에서 보았지만, 두가지 유물론적인 이론들이 언급되어 졌다. 첫벗째 이론에 따르면, 육체와 영혼은 하나이고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두번째 이론은 모든 것을 구성하는 다섯가지 영원한 요소들의 원리와 관련된다. 부처님과 마하비라와 동시대인인 푸라나, 파쿠다, 이자타의 철학적 견해들은 나중에 차라와카파로 알려진 순수하게 유물론직인 철학들의 발전에 기여했음이 틀림없다.
< 자이나교와 상키야 >
p.181
아마 자이나교와 불교가 인도에서 아마 가장 오래된 철학적 사색들 중의 하나였던 상키야로부터 몇몇 그들의 철학적 특징들을 차용했을 것이라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오래됨에도 불구하고 (고대 문헌에서 상키야에 관한 많은 언급들이 있었음이 증명되었다.) 실제로는 상키야의 어떠한 권위있는 초기의 문헌이 없기 때문에 그 기원적인 형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중세와 후기 중세의 주석서들을 제외하고는 확실히 남아있는 것은 두가지 문헌인데 그것은 기원후 500년 가량의 상키야 카리카와 기원후 1400년 가량의 상키야-수트라이다. 이러한 문헌들과 또한 그것들의 주석서들은 베다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므로 상키야의 진정한 본질과 최초의 내용들에 대한 이해는 절대적으로 믿을수는 없는 것이다. 그 비베다적인 기원은 (1)우주의 물질적 원인인 프라크리티 P?ak?ti의 상키야의 개념은 브라만의 베단타의 개념과 상되는 것이다라는 것, (2)베다체계에 대한 가장 중대한 도전자로 간주되는 상키야 철학을 논박하기 위해서 브라마수트라에서는 매우 지대한 주의가 기울여진다는 점, (3)항상 베단타의 입장에서 상키야를 재해석하려는 의식적인 시도가 있었다는 점들에 의해서 지지되어 질지도 모른다.
p.182 가브는 "상키야 학파의 기원이 우리가 그것을 브라마나교에 의해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인도의 종교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때만 적절한 것으로 보이고, 단지 이성적으로 세계와 우리들의 존재의 의문들을 설명하려는 첫번째 시도가 이루어 졌다. 왜냐하면 상키야 철학은 그 본질에 있어서 무신론적일 뿐만 아니라, 베다에 적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 자이나교와 요가 >
p.188
상키야의 25번째 교의들은 요가에 의해서 수용되어진다. 파탄잘리는 상키야의 형이상학적인 구조아래에 요가의 개념을 체계화 시킨다. 신에게 들어가는 것을 허가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요가는 실제로 후기 상키야와 똑같다. 요가는 "신과 함께 있는 상키야"라고 불린다. 상키야는 영원한 신의 존재가 증명에 의해서 확립되어질 수 없다고 단언하다. 푸루샤의 영원한 존재가 신의 무한성과 창조성과는 불일치한다. 프라크리티는 푸루샤와의 관계를 통해서 세계를 진화시키지만, 상키야는 이러한 관계가 어떻게 일어 나는지 분명하고 범주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요가 학파에서는 이러한 것이 신의 행위에 의해 발생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신의 개념은 요가의 체계에 외부적인 접목이다.
< 자이나교와 미망사 >
p.191
미망사는 인도철학 체계에서 독특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요가처럼 미망사도 원시 문화와 결실이 풍부하고 행복한 인간 존재에 찬성하여 자연의 과정에 영향을 주도록 고안된 원시적인 제식과 의식의 계승이다. 미망사 철학자들의 목표는 발전과 원시적인 주술적 신앙들과 제식들의 효력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의 미분화된 고대기의 집단적인 삶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베다의 제식주의 양상들을 지지하고, 그것을 적절히 수행하는 것에 도움을 주는 해석의 방법론에 의존하고 방법론을 제공해 주는 이러한 제식주의에 관한 철학적 정당성을 제공해주는 이유가 된다. 미망사의 베다에 대한 무과실성과 권위에 관한 의도는 사실 단지 베다들이 상징인 과거의 전통적인 지식에 대한 전심으로의 관심이다.
p.197 < 자이나교와 베단타 >
속박과 해탈의 사상을 제외하고는 자이나교는 실질적으로 베단타와 공통점이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두 학파간의 해탈의 사상에 대해서도 다른 상징과 암시를 가지고 있고, 유사성은 단지 용어적인 데 있다. 사실 자이나교와 베단타는 서로 실제적으로 반대의 입장에 있다. 그들의 관계는 기름과 물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철학적으로 자이나교는 다원적 실재론을 나타내고 있으나 베단타는 단지 극단적인 일신론적인 이상주의이다. 자이나교에서는 지식(갸나)과 행위(카르마)가 서로 보충적이다. 베단타 학자들에게는 이 둘은 정반대로 반대되는 것이다. 자이나교에서는 일반적인 지식의 모든 가능한 원천들에 의존한다. 감각들을 통한 내적․외적 대상들의 인식은 자이나교에서는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베단타는 일반적 지식들에 대한 모든 가능한 원천들을 부정하고 단지 꿈들과 감각적 환상들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자이나교는 인과 관계를 믿는다. 자이나교에 따르면 거대한 세상은 단지 미묘한 물질적 요소들의 결과(카랴 k?rya) 혹은 변형(파리마나 pari??ma)이다. 베단타에 따르면 원인은 홀로 실재하고, 결과로 보이는 것은 단지 환상이다. 자이나교는 의식의 요소들의 다양성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의식적 영혼의 다양성의 원리를 믿는다. 반면에 베단타는 최상의 영혼을 믿는다. 그들에게는 브라만 즉 자아(아트만)만이 단지 실체이고 그 세계의 형태적 변형은 단지 환상이다. 자이나교에 있어서는 세상은 무시무종( 無始無終)이고 영원하고 따라서 그것은 브라만과 같은 어떠한 상상의 원리들의 변형이 될 수는 없다. 베단타에 따르면 세상은 단지 꿈이나 환상속에서의 물체와 같이 단지 겉모습만 있는 것이다. 자이나교는 이 사상을 절대적으로 부질없는 생각으로 부인하고 있다.
< 자이나교와 니야야-바이셰시카 >
p.194
자이나교의 무신론과 논리학을 다룰때, 우리는 자이나교와 니야야-바이셰시카와의 관계를 다루게 된다. 우리는 자이나교의 무신론이 니야야-바이셰시카의 유신론에 대한 논박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방면에서는 자이나교의 주 공격대상이 니야야-바이셰시카의 유신론적인 입장에 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논리학이 관련되는 한 자이나교는 니야야-바이셰시카로 부터 매우 많은 것을 도출해 왔다. 다시 말하면, 니야야-바이셰시카의 원자 개념은 초기의 자이나교 사상가들 내에서 발전 되어진 동일한 개념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졌던 것처럼 보인다.
니야야-바이셰시카의 범주는 지식의 측면이 가능하고 유용하고 인식가능한 것으로 정의된다. 카나다는 모든 것들이 분류될 수 있는 여섯 범주들, 즉 폭넓은 범주들을 언급한다. 그것들은 (1)실체(드라뱌), (2)속성(구나), (3)운동(카르마), (4)보편(사만야), (5)궁극적 특수성(비셰샤), 그리고 (6)관계 혹은 내속(사마바야)이다. 그러나 후기 니야야-바이셰시카에서는 일곱번째, 아바바 즉 비존재를 추가 시켰다.
이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체(드라뱌)이다. 자이나교에서는 실체는 두가지 광범위한 부류로 분류 되는데, 그것은 연장되지 않은 것(시간에 관련된 것)과 연장된 것(지바와 아지바 그리고 그 하위 그룹들의 범주들에 속하는 것들)이다. 니야야-바이셰시카에서 실체는 地(프리티비), 水(압), 火(테자스), 風(바유), 아카샤, 時(칼라), 공간(디크), 自我(아트만), 그리고 意(마나스)의 아홉가지로 분류된다, 앞의 다섯은 부타 즉 하나 혹은 다른 외부적인 감관에 의해서 인식 가능한 특정한 속성을 가진 실체들로 불리워 진다. 이것은 자이나의 푸드갈라의 개념에 상응한다. 니야야-바이셰시카의 디크와 아카샤는 자이나의 아카샤는 아카샤 혹은 공간 개념에 일치하는 것이다. 니야야-바이셰시카의 아카샤는 실체의 형태이다. 그 개념은 또한 실체들이 점유하고 퍼지는 것들이고, 공간이 점유되고 퍼지는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자이나교와 공유되는 것이다. 그러나 니야야-바이셰시카가 아카샤가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반면에, 자이나교에서는 그것은 로카와 알로카의 두부분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p.195 처음의 네가지 부타들, 즉 地등은 두가지 변화, 즉 영구적인 것과 비영구적인 것으로 나타내어 진다. 地등의 비영구적인 변화에 의해서 이러한 원자의 산물들을 의미하는 반면 영구적인 변화등에 의해서 그들의 원자들은 의미를 지닌다. 또한 자이나교의 물질, 즉 푸드갈라는 원자들의 복합물의 본질이다 원자들이나 그 산물들은 푸드갈라의 감촉, 맛, 냄새, 색깔의 속성들을 가진다. 니야야-바이셰시카의 견해에 있어서, 모든 원자들은 속성에 있어사 균질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地의 원자들과 水의 원자들은 각각 다른 것이며, 水의 원자들과 地의 원자들도 마찬가지이며, 다른 원자들에 대해서도 동일하다. 이점이 니야야 바이셰시카의 원자론과 모든 원자들이 속성상 균질이라는 자이나의 원자론과 다른 중요한 관점들 중 하나이다.
구나 즉 속성은 니야야-바이셰시카에서는 실재들의 특징적인 범주로서 인식 되어진다. 자이나교에서는, 구나는 실체에 필수적인 특성이다. 실체는 변하는 양태들(파랴야) 뿐만 아니라 몇가지 불변의 필수적인 특성들(구나들)을 가진다. 니야야-바이셰시카에 있어서는 구나는 실체에 내재되고, 의존하는 것으로 이해 되어진다. 동시에 그것은 실체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 자신에 의해서 인식 되어질 수 있고, 이런 식으로 독립적인 실재들이 된다. 니야야-바이셰시카에 있어서의 카르마 즉 운동은 구나와 마찬가지로 실체에 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나, 그것은 또한 독립적인 실재들로 이해 되어진다. 여기에 운동이 다섯 유형으로 열거된 동작과 동일한 것이 되었다. 이것은 자이나의 다르마와 아다르마의 개념을 연상시키며, 주요한 운동과 정지의 원리로써 간주 되어진다. 니야야-바이셰시카의 사만야 즉 보편은 자티와 동일한 것이며, 類(유)속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인 반면에, 비셰샤 즉 특수는 사물들의 차이로서 간주되어진다. 사마바야 즉 내속의 경우에 있어서도 동일한 것이 유효하다.
자이나교는 인식의 자기 현현적인 특징의 주창자들이다. 인식, 추론에 의해서든지 증언에 의해서 얻어지든지 간에, 각각의 인식은 직접적인 언급에 의한 그것의 각각의 본질을 인식하는 반면 그것은 '추론'이나 '구두에 의한'등으로 불리는데, 그것은 파악된 사물의 본질 때문이다. 니야야-바이셰시카는 인식을 그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떠한 것에 의해 지각적으로 인식되는 존재에 대한 감각에 있어서 자신 현현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p.196 인식에 관해서 자이나교에서는 니야야-바이셰시카의 불확정적이고 확정적인 인식의 사상과 일치한다. 니야야-바이세시카 체계에 따르면, 감각기관들의 물질적인 원인은 모두 물질적인 실체들인 地등과 같은 다섯가지 부타들이다. 자이나교는 또한 감각기관의 물질적 원인은 푸드갈라의 특정한 종류라고 주장한다. 자이나교에서는 다른 속성들이 다른 감각기관에 의해서 인식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속성이 그것이 하나의 속성이라는 것의 실체로부터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감각기관들은 실체들 만큼이나 속성들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니야야-바이셰시카는 눈으로 보는 감각기관과 촉각의 감각기관만이 실체들을 인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욕망, 혐오, 기쁨, 고통 등등과 같은 정신적 속성들과 이러한 속성들의 경험은 영혼 혹은 자아라는 이 두 체계 모두에 기원 되어지는 것이다. 영혼 즉 자아는 다시 말해서 아트만은 니야야-바이세시카의 원자와 연결되고 자이나교의 카르마의 원자들(카르마누)과 연결되는 것이다.
추론의 제시에 괸한 기술에 괸해서는, 니야야-바이셰시카는 다섯 요소의 삼단 논법 체계 확립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자이나교의 논리학자들이 실재적으로 이것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절대적이지 않은 견지에 있어서는 그들은 추론에 있어서의 단계들의 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소간 그런 것이다. 'proban'의 본질의 양상들에 관련하여서, 그 다섯 층의 본질들에 관해서 니야야-바이셰시카는 : 이루어진 주제들의 주제면에서 본 존재(파크샤-사트바), 동질적인 것에 있어서의 존재(사파크샤-사트바), 이질적인 것으로 부터의 비존재(비파크샤-뱌브리티), 주제에 관한 소멸에 있어서의 비존재(아바디타-비샤야트바)와 균형을 이루는 'proban'(아사트프라티-파크쉬타트바)을 주장하는 것이다. 자이나교의 전통은 'proban'이 단지 단일한 본질, 즉 'probandum'의 비존재에 있어서의 비존재'(아니나바바바)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전술한 양상들에 관한 몇몇 비존재에 있어서 조차도 결론적인 추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가능한
것이다. 'probantia'의 우리가 자이나교의 문헌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형들로의 분류는 주로 바이세시카 수트라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probantia'를 다섯 유형으로 구분하는데, (1) 'probandum'의 결과(카랴)이고, (2) 'porbandum'의 원인(카라나)이고, (3) 'probandum'과의 연결(상요가)이고, (4) 'probandum'내에 있는 내속(사마바야)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그리고 (5) 'probandum'에 대해서 모순되는 것이다. p.197 니야야-바이셰시카와 자이나교는 결과는 적절한 'proban'이고 'proban'은 모든 이질성이 없어질 때 유용한 것이고, 그것의 동질성이 나타나든지 않든지 하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대해서는 동의한다. 이러한 입장은 니야야와 자이나교에서 동일하게 지지하는 것이다.
< 각 학파들의 주제면에서 본 비교 연구 >
p.199
앞에서 우리가 논의한 것처럼, 우리는 인도의 다른 철학체계들과의 주제면에서의 비교 분석을 통한 입장에 있어서의 자이나교의 관점을 평가하는 단계에 와 있다. 인도의 철학적인 체계를 주요한 두 부분들로 나누는 것이 가능한데, 그것은 관념론적인 것과 비관념론적인 것과의 분류이다. 전자의 것은 마치 석녀의 딸의 아름다움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부의 인식 가능한 세계와 모든 것을 인식의 경험적인 감관들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아드바이타 베단타와 불교의 마댜미카파(中觀派)와 요가차라(瑜伽行派)가 그에 해당한다. p.200 비관념적인 부류는 차르와카, 니야야-바이셰시카, 미망사와 상키야와 불교의 바이바시카(비바사파, 有部)와 사우탄트리카(經量部) 학파에 의해서 형성된다. 이것들 중에 차르와카 학파만이 순수한 유물론이며, 반면에 다른 학파들은 그 기원은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시작하였지만, 그들의 역사적인 성장과정에서 다소간의 관념론적 경향으로 발전했다. 자이나교도 또한 경험적인 감관에 의한 인식을 실제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 부류에 속한다. 또한 모든 이러한 체계들 중에서, 그것이 관념적인 부류든 비관념적인 부류든지 간에 니야야-바이세시카와 베단타, 요가학파만이 유신론적이며, 나머지는 솔직히 말해서 무신론적이다.
아드바이타 베단타는 궁극적 영원성(케발라-니티야트바)의 원리를 믿는데, 왜냐하면 그들에 따르면, 모든 변화들은 단지 그들 자신의 비실제성을 가진 모습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불교는 궁극적인 변화(케발라-아니티야트바)의 원리를 믿는데, 왜냐하면 그들에 따르면 모든 것들은 순간적인 존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영원성의 사상은 불교에서 많이 강조되어 지는데, 그것은 전 포괄적인 형이상학적인 원리로 발전하게 되었고, 경쟁적인 교리들은 그들 각자의 입장들을 세움으로써 그것을 논박하는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주로 자이나교와 베단타에서 불교에 공격을 했다. 불교는 만약 아트만이 영원한 것으로 간주된다면, 선험적인 속박과 해방 혹은 어떻게 행위의 주체자가 또한 그 행위에 대한 결과를 누리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하므로써, 자신들의 입장을 방어하게 된다. 자이나교에서는 절대적인 영원성이나 절대적인 비영원성의 원리 모두에 반대하며, 실재적인 실재물은 그 양태들 뿐 아니라 실체이고, 비존재 만큼이나 존재하는 것도 실체이며, 순간적인 것 만큼 영원한 것도 실체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노력한다. 니야야-바이셰시카 학파 등에서는 어떠한 실제는 완전히 영원하며 어떠한 다른 것들은 궁극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며, 그러므로 그들의 견해는 변화와 영원의 원리(니티얀티야-우바야)라고불린다. 상키야와 같은 학파들에서는 의식의 요소들과 별개인 모든 것들은 변화하는 영원성(파리나미니탸트바)이라고 주장한다. 자이나교에서는 모든 것을 변화하는 것만큼 영원한 것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변화와 짝을 이룬 영원성의 원리(니티야니티야마카)라고 불리어 지게 된다. 마지막의 세 원리들은 영원성과 변화의 문제가 관련되는 한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다. 자아의 사상은 거의 모든 학파들에서 발견되어 지지만, 그러나 그것은 매우 명쾌하거나 잘 정리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자아의 사상에 대한 인상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p.201 자아를 나타낼 때 흔히 사용하는 용어는 영혼과 동일한 것이고 물질적이기도 하고 비물질적이기도 한 '아트만'이다. 아트만이라는 용어는 또한 자이나교에서는 자아의 제한된 감각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며, 그 학술적인 이름은 상키야-요가에서는 푸루샤, 불교에서는 나마이다. 아트만은 윤회하는 상태에서와는 달리 상키야-요가에서는 프라크리티와, 니야야-바이세시카에서는 원자들과, 베단타에서는 아비드야 혹은 마야와, 불교에서는 루파와, 자이나교에서는 카르마의 원자들(카르마누)와 연합하는 특정한 방식들에 관련되어 있다. 반면에 자아의 존재와 관련하여서 일반적인 일치가 있는 반면, 그 본질에 대해서는 폭넓은 의견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차르와카에서는 자아와 물질의 몸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불교는 자아를 의식의 흐름으로 간주하는 것같이 보이기는 해도, 그 개념이 모호하다. 니야야-바이셰시카와 미밍사의 한 학파는 자아는 어떠한 조건들 하에서는 의식의 특성을 획득하는 비의식적인 실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미망사의 다른 한 학파는 자아는 무지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숨겨진 의식적인 실재라고 주장한다. 아드바이타 베단타는 자아는 모든 신체에 있어서 하나인 순수하고 영원한 의식이라고 주장한다. 상키야에 따르면 자아는 항상 인식의 주체가 되는 의식적 영혼이며, 결코 어떠한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모든 이러한 체계들은 이 아트만 즉 자아를 신체와 같은 물질적인 실재로부터 다른 것으로 여기며, 그것을 윤회에 원인이되는 원인 요소로 간주한다. 이러한 자아는 편재적이거나 편재적이지 않고, 순간적이거나 영원하며,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이지만, 그러나 윤회의 원인이 되는 원인 요소들(아갸나, 아비드야, 카르마 혹은 그것에 무슨 이름을 붙이든지 간에)의 그 결합에 관해서는 학파들간에 논쟁하지는 않는다. 자이나교의 자아는 본래 완벽한 것이다. 무한한 지식, 신념, 힘과 행복은 자아의 방해가 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다. 장애물들은 자아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본래적인 특질들을 압도하는 물질로 구성된다. 이러한 자아는 그것이 감정이나 자기과시성이 없어질 때, 그러한 것들에 의한 눈 먼 상태와 같은 자기 현현의 상태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차르와카에 따르면, 감각-인식은 지식의 유일한 기관이다. 추론이나 증언은 발견물들이 그것들의 감각-인식에 의해서 확정되지 않는다면 유용하지 않을 것이다. 아드바이타 베단타와 불교의 공론학파(중관파)와 유식학파(요가차라)에서는 마나스와 같은 비감각적인 기관이나 시타와 같은 경험적인 내관의 기관이나, 선험적인 감각의 기관이며, 의식의 궁극적인 원리이며, 진정한 지식을 산출하는 아트만과 같은 기관의 유일한 능력만을 주장한다. p.202 감각기관이나 비감각기관이나 동일한 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학파가 상키야-요가, 니야야-바이셰시카, 미망사와 불교의 바이바시카학파(有部)와 사우트란티카학파(경량부)들이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획득 되어지는 지식을 실체화하도록 기대되어지는 비감각적 감관은 안타카라나인데, 이것은 상키야-요가에 따른 것이며 니야야-바이세시카, 바이바시카-사우탄트리카는 마나스를 주장한다. 진지(眞知)를 발생시킬수 있고 마나스와 아트만이라는 그 두 비감각적인 감관 각각에 추가시키는 감각기관들이 독자적으로 眞知를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자이나교도 또한 이 부류에 속하는 것이다.
니야야-바이셰시카와 미망사는 아람바바다 즉 원인과 결과 사이의 구분에 따른 진귀한 창조의 원리에 동의하고, 그 결과는 새로운 창조이며, 그 출현 이전의 비존재라는 것이다. 물질적 세계를 구성하는 원자들은 원인으로서는 그 자신들 홀로 무시무종(無始無終)이며 변화없는 것이지만, 그들에 의해 산출된 결과는 시작과 끝과 변화가 있는 완전히 다른 특성이 되는 것이다. 상키야-요가에서는 이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파리나마바다를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결과는 원인의 변형으로서 인식한다. 결과와 원인간에 아무런 구분이 없다. 특별한 결과는 그 원인속에 내재되어 있다. 이 세계는 단지 물질적 원인의 인식 가능한 변형이다. 불교는 프라티트야-사무트파다바다, 즉 그 자신의 독특한 방법에 있어서 생멸하는 일련의 속성들과 성질들을 생각하는 의존적인 기원을 가진 이론을 믿고 있으나, 이러한 속성들과 특성들의 기체의 형태의 어떠한 영원한 원인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베단타는 비바르타-바다의 원리, 즉 영원한 브라만의 환상적인 변형의 원리를 믿는데, 원인만이 실제적이고 결과는 비실제적이거나 환상적이라는 이론에 따라서, 단지 환상만이 나타난다. 자이나교의 경향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강조되는 파리나마바다의 경향에 있다.
인식론이 관계되는 한, 자이나교는 프라바카라-미망사와, 베단타, 유식학파의 불교와 같으며, 그것은 인식의 자기 현현적인 특징을 주장하는 것이다. 상키야-요가와 니야야-바이셰시카의 철학자들과 쿠마릴라-미밍사에서는 반면에 인식을 비자현적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인식을 본질에 있어서는 인식 가능하지만 자인식적이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프라마나의 결과의 본질에 관해서는, 니야야-바이셰시카와 미망사는 불교가 두 가지를 궁극적으로 구별되지 않는 것으로 보는 반면에 프라마나의 결과를 그것과 궁극적으로 다른 것으로 다룬다. p.203 그들의 비절대적 관점으로 부터 자이나교는 프라마나와 그 결과를 부분적으로 구별되고, 부분적으로는 구별되지 않는 것으로 본다. 기억이 프라마나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자이나교는 그것을 프라마나 인 것으로 보고, 그것을 비지각적인 범주 아래에 분류한다. 인도 사상의 모든 다른 학파들은 기억을 프라마나로 간주하지 않는다. 니야야-바이셰시카와 미망사는 지속적인 인식을 프라마나로 간주 하지만 그들은 방어의 두가지 다른 노선을 채택한다. 불교는 이러한 점에 많은 강조를 하지 않는다. 자이나교의 전통에 따르면, 지속적인 인식은 프라마나이지만 자이나 철학들의 몇몇은 그것을 찰나성등과 같은 특수성들을 고려함으로써 제한된 의미로 받아 들이려고 한다. 인식의 본질에 관해서는 불교는 그것을 인식의 두 조각의 결합으로 본다고 주장하는데, 그 두 조각이란 기억과 인식이다. 니야야, 미망사 등과 같은 학파들은 인식이 본질에 있어서는 한 조각이라고 주장한다. 자이나교의 논리학자들은 이 두가지를 모두 거부하고 인식을 단지 감각-지각의 변화로 간주한다.
차르와카를 제외하고 자이나를 포함한 모든 철학 학파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식을 경험적인 것과 초경험적인것의 두가지로 구분한다. 불교의 논리학자들과 아드바이타 베단타의 학자들에 따르면, 선험적인 인식은 단지 불확정적이라고 하지만, 반면에 니야야-바이셰시카와 자이나교에 따르면 그것은 모두 확정적이고 불확정적이다. 니야야-바이셰시카, 상키야-요가, 불교와 미망사의 체계에 따르면, 인식의 배(船)의 결정 요소는 접촉(사니카라샤)을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사실이다. 다소간의 유사한 견해는 자이나교에서 공유되고 있다. 초기의 자이나교의 전통은 후기의 전통에서 이러한 접촉을 감각기관과 마나스에 돌리는 반면에 그 접촉을 영혼에 돌린다. 불확정적인 인식의 모든 추종자들은 그것이 그 대상에 대해서 발가벗은 존재(사타마트라)라고 주장한다. 불교전통에 있어서의 이러한 존재는 기능을 수행하는 능력을 나타내며, 순간적인 특수에 속하는 것이며베단타에서는 나눌 수 없는 편재적인 브라만을 나타내는 것이며, 니야야-바이셰시카와 미망사에 있어서는 단지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다. 상키야-요가와 자이나교에 있어서는 이러한 존재는 순간적인 특수성에 제한된 것도 아니고, 브라만의 본질의 특수성에 제한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기원-그에 딸린것-파괴-그에 딸린것-영원성(우트파다-뱌야드라우뱌-스와루파)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위에서 진술한 견해에 있어서처럼, 인도철학에서는 어떠한 체계도 순수하게 혼자 다루어지는 체계는 없다. 각각의 발전은 대개 그 상호연계와 다른 학파들에 대한 논박으로 조건이 이루어진다. p.204 모든 인도의 학파들의 몇몇 공통된 특징들이 있다. 그 공통된 특징이란 나중에 일부가 되는 외부로부터의 몇몇 특별한 종교.윤리적인 사상들의 유입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인식의 과학(다르샤나)이라는 철학이 해탈(목샤)의 과학으로 간주된다는 것이 그러한 사상들의 영향에 기인하는 것이다. 모든 철학체계들에 접목된 윤리.종교적인 사상들은 미망사에서는 아푸르바의 개념의 형성에 있는 것인데, 그것은 제사의 결실의 미래의 기쁨을 보장해주는 법칙이며, 니야야-바이셰시카에 있어서의 그 윤리.종교적인 사상들은 아드리쉬타의 개념인데 그것은 선하고 악한 행위들로 부터 발생하는 악덕과 부덕의 저장이다. 그러나 카르마의 일반적인 개념은 결국 앞장서는 것이다. 그것은 선하고 악한 모든 행위들아 개인의 생활에 있어서의 적절한 결과를 산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카르마의 법칙은 여섯 정통 학파에서 수용하며 불교와 자이나교에서도 수용한다. 니야야-바이셰시카와 같은 몇몇 학파들은 카르마의 법칙을 신의 안내와 조정하에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상키야, 미망사 불교, 자이나교에서는 카르마의 법칙은 자율적인 것이다. 또다른 공통된 견해는 실재에 대한 무지는 속박의 원인이 되고, 해탈은 지식, 자제와 명상에 의해서 획득 되어질 수 있는 완전함의 상태라는 것이다. 상키야, 아드바이타-베단타, 불교와 자이나교는 해탈은 바로 이 생에서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차르와카를 제외한 모든 인도 학파들은 해탈은 이 세상에서 인생이 초래하는 모든 고통들의 완전한 파괴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공통된 특징들의 근원에 대해서 인도철학에 관한 대부분의 작가들은 우리들의 고대의 철학자들에 대한 종합적인 조망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과장된 생각이다. 인도철학의 분야에서의 발전을 일으키는 힘을 구성하는 것은 반박의 논리라고 하는 것이 보다 더 논리적이 될 것이다. 우리들의 철학적인 글들의 바로 그 방식은 그것에 반대하는 사상들의 논리적 반박을 통해서 한 사람이 가진 견해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자이나교의 무신론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어떻게 다른 학파들의 철학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논박하면서 그들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는지에 대해서 알아 보았다. 사상들의 충돌이 철학적인 문헌들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흔히 개방된 공식 토론에서도 표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토론들은 흔히 왕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매우 화려하게 배열되기도 하고 패배하여 불신임된 철학자들은 비참한 운명을 맞이해야만 했다. 서양철학의 역사에 있어서는 다른 학파들이 한 학파에서 다른 학파로 계승적으로 존재했다. 인도에서는 다른 학파들이 오늘날까지 그들의 각각의 추종자들의 무리들을 가지고 함께 번창한다. 현존하는 학파들에 대해서, 우리들은 그들의 조직과 훈련상의 규율들을 가진 자이나의 교도들과 베단타 학자들을 언급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상키야 학파의 많은 승원들이 있다. 흔히 종합적 조망이라고 불리는 기본은 베단타에 모범을 보일 목적으로 후기 중세기처럼 빨리 형성되었다. 그래서 유식학파와 다른 학파들은 베단타의 관점에서 상키야를 만들고, 그리고 그 전통에 따라서 M. M. 요겐드라나드 타르카-상티야-베단타-티르타 즉 찬드라칸타 타르칼랑카라와 같은 위대한 학자들은 "다른 철학적 흐름들은 하나의 불이적 브라만의 대해에 도달한 후의 완전한 동질성에 혼합되었다." 즉 "니야야 등의 철학적 주의가 정말로 베단타의 것과 반대가 되는지 생각해 볼 이유가 없고, 우리는 베단타의 견해가 진실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라다크리슈난도 다소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만일 한 사람이 상키야의 승원에 가서 그 추종자들이 이 모든 것들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는데 곤란을 느낀다면 그러한 형식의 불모성을 탐지될 수 있을 것이다. 상키야 승원은 실제로 매우 적은데, 찬드라하티의 마을에 하나가 있고, 서벵갈의 후글리 지역의 티르베니 근처에 하나가 있는데, 그곳에서는 그들의 매우 구별되는 학파의 상징물들을 가진 수도승들이 상키야를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그들의 종합적인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체계가 베단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많은 철학파들과 신봉자들 가운데서 근본적인 차이들을 발견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특별히 베단타, 상키야, 자이나교와 같은 그러한 중요한 철학적 체계들이 여전히 그 지방의 현존하는 신앙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우대한 자이나교의 저술가인 구나라트나는 심지어 명확한 구분을 해주는 학파들의 상징이나, 제식등을 구분하는데도 실패하였다. 그에 따르면, 니야야 철학자들은 그들의 아침 봉헌후에 재를 몸에 세 번 바르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결혼헌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들 중에 아내가 없는 사람도 있었다. 각 학파들의 대표자들은 경쟁적인 신앙들의 그들의 논박의 근거를 형성하는 진리로서 자신의 견해들을 간주하였다. 문헌들의 해석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인 이론의 우승자들에 의해서 제시된 것은 사상들의 진정한 충돌을 숨기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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