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열반 10주기 특별기획] ⑯ 시인 법정스님의 면모
존재론적 고민 넘어 사회민주화 염원까지 담아
“내 안에서도 움이 트는 것일까”
초기에는 존재론적 고민 담긴
사회민주화운동 참여하면서
사회부조리 비판 내용도 발표
‘참여시인의 면모’ 보여주기도
서울로 올라와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경전번역에 몰두하며 머물렀던 봉은사 별당 다래헌의 현재 모습. 사진제공 = 봉은사
법정스님이 시(詩)를 썼다는 것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법정스님은 특유의 문학적 감수성으로 1960년대 초기부터 틈틈이 시를 써서 대한불교(불교신문의 전신)에 게재 했다. 이러한 시편들은 2019년 11월에 불교신문이 출간한 <낡은 옷을 벗어라>에 들어있다. 출가 후 해인사에서 경전을 공부하며 부처님가르침을 체득한 법정스님은 해인사와 서울을 오가며 경전번역에 몰두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느낀 생각의 편린들을 모아 시로 남겼다.
법정스님의 문재(文才)를 알아 본 사람은 고은 시인(당시는 출가수행자로 법정스님의 사형인 ‘일초스님’으로 활동)이었다. 고은 시인은 출가 전 법정스님과 만남이 있었고, 출가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파악된다. 일찍이 한국문단에 이름을 알렸던 고은시인은 대한불교 제작에 상당한 관여를 했고 그 과정에서 법정스님과 함께 한 것으로 보인다.
문학에 관심이 있었던 법정스님은 불교경전의 내용을 옮기면서 각색을 한 불교설화를 짤막하게 대한불교에 실었다. 이와함께 삶에서 느끼는 문학적 감수성을 담은 시를 대한불교에 게재하는데 1963년 3편이 보이고 이후에도 총 12편을 싣는다. 그 첫 번째 시가 ‘봄밤에’로 1963년 5월1일자에 실려 있다.
“내 안에서도 / 움이 트는 것일까 / 몸은 욕계(欲界)에 있는데 / 마음은 저 높이 무색계천(無色界天) // 아득히 멀어버린 / 강(江) 건너 목소리들이 / 어쩌자고 또 / 들려오는 것일까 // 하늘에는 / 별들끼리 / 눈짓으로 마음하고 // 산(山)도 / 가슴을 조이는가 /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 // 나도 / 이만한 거리에서 / 이러한 모습으로 / 한 천년 무심한 /바위라도 되고 싶어”
당시는 법정스님이 불교사전 편찬에 참여한 뒤 운허스님을 도와 경전번역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시기다. 그 이듬해인 1964년이 동국역경원 창립이었으니 운허스님은 봉은사를 근거지로 하여 법정스님을 비롯한 유능한 번역사들을 등용해 경전의 한글화에 박차를 가한다.
‘봄밤에’는 법정스님이 쓴 시로 외부에 드러난 최초의 시(詩)다. 겨울을 지내고 봄이 오는 여정을 언급하며 “내 안에서도 움이 트는 것일까”라는 어구로 자신을 들여다본다. 비교적 개인적인 감성을 담아낸 시는 자연친화적인 소재로 불교적 사유를 담아내고 있다.
2개월 후인 7월1일자에 보이는 두 번째 시 ‘쾌청(快晴)’에서도 분위기는 비슷하다.
“지루한 장마비 개이자 / 꾀꼬리 새목청 트이고 / 홈대에 흐르는 / 물소리도 여물다 // 나무 잎새마다 / 햇살 눈부시고 / 매미들의 합창에 / 한가로운 한낮 // 산(山)은 / 그저 산山인 양 한데 / 날개라도 돋치려는가 / 이내 마음 간지러움은 / 이런 날은 / ‘무자(無子)’도 그만 쉬고 / 빈 마음으로 / 눈 감고 / 숨죽이고 / 귀만 남아 있거라”
역시 자연의 변화를 끌여들여 마음의 변화추이를 관조하는 시에서 법정스님은 “이런 날은 ‘무자(無子)’도 그만 쉬고 빈 마음으로 눈 감고 숨죽이고 귀만 남아 있거라”라고 노래한다. 당시 스님의 참선화두는 ‘무(無)’였음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시 3개월 후인 10월1일자에 보이는 시 ‘어떤 나무의 분노’는 앞의 시와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해인사 학사대에 서 있는 노거수 전나무의 상처를 보며 노래한 시인데 시인의 감정이 더욱 이입돼 있다.
“보라! / 내 이 상처투성이의 얼굴을 // 그저 늙기도 서럽다는데 / 네 얼굴엔 어찌하여 빈틈이 없이 / 칼자국뿐인가 // 내게 죄라면 / 무더운 여름날 / 서늘한 그늘을 대지에 내리고 / 더러는 / 바람과 더불어 / 덧없는 세월을 노래한 / 그 죄밖에 없거늘 / 이렇게 벌하라는 말이 / 인간헌장(人間憲章)의 / 어느 조문(條文)에 박혀 있단 말인가 // 하잘것없는 이름 석 자 / 아무개! / 사람들은 그걸 내세우기에 / 이다지도 극성이지만 / 저 건너 / 팔만도 넘는 그 경판(經板) 어느 모서리엔들 / 그런 자취가 새겨 있는가 / 지나간 당신들의 조상은 / 그처럼 겸손했거늘 / 그처럼 어질었거늘… // 언젠가 / 내 그늘을 거두고 /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 / 나는 증언하리라 / 잔인한 무리들을 / 모진 그 수성(獸性)들을 // 보라! / 내 이 상처투성이의 처참한 얼굴을”
이 시의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각주가 달려 있다. “물 맑고 수풀 우거진 합천 해인사. 거기 신라의 선비 최고운(崔孤雲) 님이 노닐었다는 학사대(學士臺)에는, 유람하는 나그네들의 이름자로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수백 년 묵은 전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상처받은 나무의 아픔을 보듬는듯한 시 ‘어떤 나무의 분노’에서 법정스님은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기도 한다. 그 내용은 자신이 경전을 번역하면서 이름을 내세우기를 꺼려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하잘것없는 이름 석 자 / 아무개! / 사람들은 그걸 내세우기에 / 이다지도 극성이지만 / 저 건너 / 팔만도 넘는 그 경판(經板) 어느 모서리엔들 / 그런 자취가 새겨 있는가 / 지나간 당신들의 조상은 / 그처럼 겸손했거늘 / 그처럼 어질었거늘… ”이라는 구절에 담겨 있다. 어쩔 수 없는 곳에서는 스님의 이름을 붙였지만 법정스님은 자신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경전에는 ‘000 간행위원회’라는 명칭을 써서 세상에 자신의 명리를 내세우지 않는 하심(下心)을 실천했다.
1965년 4월4일자에 실린 시 ‘병상에서’는 법정스님의 존재론적 고독감이 물씬 풍기는 인간적인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누구를 부를까 / 가까이는 부를 만한 이웃이 없고 / 멀리 있는 벗은 올 수가 없는데… //지난밤에는 열기(熱氣)에 떠 / 줄곧 헛소리를 친 듯한데 / 무슨 말을 했을까 / 앓을 때에야 새삼스레 / 혼자임을 느끼는가 / 성할 때에도 늘 혼자인 것을 // 또 / 열이 오르네 / 사지(四肢)에는 보오얗게 / 토우(土雨)가 내리고 / 가슴은 마냥 가파른 고갯길 // 이러다가 육신은 / 죽어가는 것이겠지… // 바흐를 듣고 싶다 / 그중에도 ‘토카타와 후우가’ D단조를 / 장엄한 낙조(落照) 속에 묻히고 싶어 // 어둠은 싫다 / 초침 소리에 짓눌리는 어둠은 불이라도 환히 켜둘 것을 // 누구를 부를까 / 가까이는 부를 만한 이웃이 없고 / 멀리 있는 벗은 올 수가 없는데…”
몸이 아파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느낀 감정을 노래한 이 시에서는 “혼자임을 느끼는가 / 성할 때에도 늘 혼자인 것을 / 이러다가 육신은 / 죽어가는 것이겠지…”라는 구절을 통해 존재론적 고독의 밑그늘을 들여다보고 있다. 또한 “바흐를 듣고 싶다 / 그중에도 ‘토카타와 후우가’ D단조를”과 같은 구절을 통해 평소에 좋아한 클래식 음악의 취향을 드러내고 있기도 한다.
1965년 5월30일자에 실린 시 ‘식탁유감’은 채식 중심의 종단 스님들의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인해 생기는 영양불균형을 “한국 비구승의 창백한 식성”이라고 꼬집기도 한다. 이 시는 스님이 이웃종교인들과 함께 모임을 하는 자리에서 자유롭게 음식을 먹지 못해 일어난 헤프닝을 시로 표현한 것으로 전해진다. 1965년 10월17일자에 실린 ‘내 그림자는’이라는 시에서는 서울생활의 피곤함과 산으로 가고 싶은 심정이 그대로 담겨있다.
“너를 돌아다보면 / 울컥, 목이 매이더라 / 잎이 지는 해질녘 / 귀로(歸路)에서는 // 앉을자리가 마땅치 않아 / 늘 서성거리는 / 서투른 서투른 나그네 // 산에서 내려올 땐 / 생기(生氣) 파아랗더니 / 도심의 티끌에 빛이 바랬는가? // ‘피곤하지 않니?’ / ‘아아니 괜찮아…’ // 하지만 21번 합승과 / 4번 버스 안에서 / 너는 곧잘 졸고 있더라 / 철가신 네 맥고모처럼 // 오늘도 너는 나를 따라 / 산과 / 시정(市井)의 기로에서 / 수척해졌구나 / 맑은 눈매에는 안개가 서리고… // ‘스님, 서울 중 되지 마이소’ / 그래 어서어서 산으로 데려가야지 /목이 가는 너를 돌아다보면 / 통곡이라도 하고 싶어 / 안스러운 안스러운 그림자야 ”
법정스님은 해를 거듭할수록 시에 자신의 문학적 감수성을 이입함과 동시에 사상을 녹여냈다. 1967년 11월9일자 시 ‘다래헌(茶來軒) 일지’에는 봉은사 별당인 다래헌에서 자신이 경찰에 의해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내용을 암시하는 듯한 내용과 그로인해 고초를 당하는 자신을 비유하는듯한 암시가 담겨 있다.
“연일 아침안개 / 하오(下午)의 숲에서는 마른 바람소리 // 눈부신 하늘을 / 동화책으로 가리다 / 덩굴에서 꽃씨가 튀긴다 // 비틀거리는 해바라기 / 물든 잎에 취했는가 / 쥐가 쓸다 만 맥고모처럼 / 고개를 들지 못한다 // 법당 쪽에서 은은한 요령 소리 / 낙엽이 또 한 잎 지고 있다 // 나무들은 내려다보리라 / 허공에 팔던 시선으로 / 엷어진 제 그림자를 // 창호(窓戶)에 번지는 찬 그늘 / 백(白)자 과반(果盤)에서 가을이 익는다 // 화선지를 펼쳐 / 전각에 인주(印朱)를 묻히다 / 이슬이 내린 정결한 뜰 / 마른 바람소리 / 아침 안개”
씨알의소리 1975년 1,2월호 표지
법정스님이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유신헌법의 부당함을 비판한 시 ‘1974년 1월’이 게재돼 있는 ‘씨알의 소리’ 1975년 1,2월호에 실린 시(詩).
사회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1970년대에 법정스님은 시를 통해 사회부조리를 비판하기도 했다. 1975년 1,2월호 <씨알의 소리>에 거재한 ‘1974년 1월-어떤 몰지각자의 노래’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저 포악 無道한 / 專制君主 시절에도 / 上疏하는 제도가 있었다 / 억울한 백설들이 두들길 / 북이 있었다. /그런데 / 自由民主의 나라 大韓民國 / 1974년 1월 / 백성들은 자갈을 물린 체 / 손발을 묶인 채 / 두둘길 북도 / 상소할 권리도 없이 / 쉬쉬 눈치만 살피면서 / 벙어리가 되었네 / 장님이 되었네/” <‘1974년 1월-어떤 몰지각자의 노래’ 중 일부>
법정스님의 시에는 스님의 문학적 감수성과 사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초창기에는 문학적 감수성을 존재론에 담아 내 표현하였으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사회민주화의 염원을 담은 참여시가 눈에 띈다. 사회민주화에 적극 동참한 민주와운동가의 면모가 드러나는 시점이자 ‘참여시인 법정’의 또다른 모습이다.
취재협조 : (사)맑고 향기롭게
[불교신문3608호/2020년8월26일자]
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