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에 대한 시
차례
흑백사진 / 정일근
흑백사진 -백석 / 강세환
흑백사진 -배호 / 정일근
흑백사진 / 최경민
흑백사진 한장 / 허수경
어머니의 흑백사진 / 박효석
이 한장의 흑백사진 / 신경림
흑백사진을 찍었다 / 박남준
흑백사진(노래) / KCM
흑백사진 / 정일근
- 7월
내 유년의 7월에는 냇가 잘 자란 미루나무 한 그루 솟아오르고 또 그 위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 내려와 어린 눈동자 속 터져나갈 듯 가득 차고 찬물들은 반짝이는 햇살 수면에 담아 쉼 없이 흘러갔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착한 노래들도 물고기들과 함께 큰 강으로 헤엄쳐 가버리면 과수원을 지나온 달콤한 바람은 미루나무 손들을 흔들어 차르르차르르 내 겨드랑에도 간지러운 새잎이 돋고 물 아래까지 헤엄쳐가 누워 바라보는 하늘 위로 삐뚤삐뚤 헤엄쳐 달아나던 미루나무 한 그루. 달아나지 마 달아나지 마 미루나무야, 귀에 들어간 물을 뽑으려 햇살에 데워진 둥근 돌을 골라 귀를 가져다 대면 허기보다 먼저 온몸으로 퍼져오던 따뜻한 오수, 점점 무거워져 오는 눈꺼풀 위로 멀리 누나가 다니는 분교의 풍금소리 쌓이고 미루나무 그늘 아래에서 7월은 더위를 잊은 채 깜빡 잠이 들었다.
- 정일근,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푸른숲, 1994)
흑백사진 / 강세환
- 백석白石
백석은 백석이었다 팔십 년대 중반 북에서 찍은 백석의 가족사진을 [대산문화] 겨울호에서 마주쳤다 백석의 흑백사진 한 장은 백석의 생애를 한순간 상징하고 있었다 단추 다섯 개 꼭 채운 인민복 상의도, 옆으로 약간 기웃한 앉은 자세도, 속 깊은 눈길도, 양 무릎에 올려 논 두 주먹도 백석의 그늘과 그림자처럼 보였다 백석은 먼 곳에 있었다 어떤 명예도 수식어도 슬픔도 미칠 수 없는 그 갈매나무처럼 먼 곳에 있었다
백석의 흑백사진 한 장은 낙관도 비관도 아닌 달관도 아닌 흑도 백도 아닌 한 정점을 머금고 있었다 백석은 백석 바로 뒤에 서 있던 자녀들도 잠시 잊은 듯 문득 그림자도 제 손으로 조용히 거둬놓은,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어디 한겨울 갈매나무처럼 그곳에 있었다 어떤 배경 하나 없는 흑백사진 한 장이 백석의 미발표 시 한 편 같은 순간이었다 백석은 백석일 뿐이었다
- 강세환, 『벚꽃의 침묵』(도서출판 황금알, 2009)
백석의 가족 사진
흑백사진 / 정일근
- 배호
내 첫사랑은 흘러간 유행가 속의 여자, 만남은 없고 늘 이별의 뒷모습뿐인 여자, 그 여자를 무작정 사랑했네. 언제나 사랑은 잠시, 사랑하는 사람은 떠나고 나는 비에 젖었네. 가로등에 어깨 묻고 비애에 흐느꼈네. 죽은 사람이 부르는 아아득한 목소리, 운명의 목덜미를 잡아 흔들어 달아나기에는 늦은, 반음 늦은 60년대의 사랑법. 한 번은 그런 빛깔 그런 눈물로 사랑하고 싶었네.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그 사내처럼, 비에 젖어 돌아서는 그 사내처럼.
- 정일근,『첫사랑을 덮다』(좋은날, 1998)
흑백사진 / 최경민
그가 문을 열었을 때
새들은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고 노래하지 않고
석양쪽으로 날아가고 있었지
붉게 꽃핀 담장 너머
멀리 공장의 굴뚝 다섯, 하늘을 이고 있었네
그는 손을 들어
잘린 손가락을 들여다 보네
짧게 잘린 마디는 마치 촛농으로 덮어씌운 듯 했지
상처만이 고통을 기억하고 있네
더 이상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남아있는 손가락을 천천히 세어보네
사진 속 친구들의 얼굴도 들여다 보네
붉은 철근 더미 위에 앉아
한순간 웃던 얼굴들이 사진 속에선 영원히 웃고 있네
또한 영원히 울고도 있네
눈을 들었을 때
키 큰 순서부터 공장의 굴뚝들은
어둠에 허리를 짤리우고 있었지
이제 그는 창문을 닫네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넣고
빈 새장 속으로 걸어들어가 보네
누군가 와서
그를 잊지 않았다고
모이를 주고 물을 주면,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고 노래하지 않고
석양의 집으로 날아갈 수 있을 텐데
부리를 다친 새처럼 그는
가슴에 얼굴을 묻네
문은 밖으로 잠겨 있네
-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흑백사진 한장 / 허수경
도시 거리에는 때때로 장이 선다 수박을 실은 수레가 있고 수레를 끄는 나귀는 똥을 누느라 고요하다 닭과 소와 돼지의 피냄새는 신선하고 짐승의 창자를 들여다보는 백정의 눈은 고요하다 해가 뜨고 달이 지고 별은 도시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고 붉은 콩과 검은 깨는 자루에서 쏟아져나온다 하얀 국수는 무쇠솥에서 더운 춤을 추고 대사리에는 넓적한 물고기들이 마르고 있다 누가 이 시장 한가운데 눈이 맑고 다리를 저는 소년을 세워두었는가 어미와 누이를 한없이 기다리는 소년을 세워두었는가
- 허수경,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문학동네, 2022)
어머니의 흑백사진 / 박효석
6・25때 돌아가신 달랑 단 한 장 남은 어머니의 흑백사진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마치 그동안 참고 참았던 눈물 한 번에 쏟아지듯 홍수에 휩쓸려 어머니는 또 그렇게 흔적 없이 사라지셨다 그 후 홍수 상습지역에서 이사한 후 더 이상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 박효석,『엄마라는 이름으로』(그림과책, 2018)
이 한장의 흑백사진 / 신경림
빛바랜 사진 속에서 그들은 걸어나온다.
어떤 사람은 팔 하나가 없고 어떤 사람은 귀가 없다.
얼굴이 도깨비처럼 새파란 처녀들도 있고
깡통을 든 아이들도 있다.
모두들 눈에 익은 얼굴이다.
아득한 그리움과 깊은 슬픔에 빠지면서 나도 모르는 새
그들 속에 뒤섞인다.
어울려 거리를 누비고 함께 노래를 부른다.
그러다가 나는 두려워진다.
이들을 따라 내가 저 흑백사진 속에 들어가
영원히 갇혀버리면 어쩌나.
깨닫고 보니 나는 어느새 흑백사진 속에 갇혀 있다.
비로소 나는 안도한다.
- 신경림,『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
흑백사진을 찍었다 / 박남준
자꾸 뒤돌아보는 사람이 있다 그가 강을 건너온 것은 옛날이었다 옛날은 다시 돌이킬 수 없으므로 스스로 늙어 자폐되었다 언제였던가 꿈결처럼 다가왔던 저편의 강가 그때 비로소 강가에 이르렀을 때 꽃과 나무와 새들의 시간이 과녁처럼 가슴을 뚫고 멀어져갔으며 낡고 바래어 희미해졌던 전생의 아수라 같은 삶들이 너무나 완강한 흑백으로 뚜렷해지던
누가 등뒤에서 부른다 강에 이르는 길이 저기쯤일 거다
- 박남준,『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문학동네, 2000)
◇ 흑백사진(2021)
작사/ 이주현, 작곡/ 조영수
노래/ KCM
https://www.youtube.com/watch?v=GUlAgjeERL8
아주 오래전 눈이 커다란 소녀를 봤어
긴 생머리에 예쁜 교복이 너무 잘 어울렸어
너의 그림자를 따라 걸었지
두근대는 가슴 몰래 감추며
어느새 너는 눈이 따스한 숙녀가 됐어
아름다움에 물들어가는 너를 바라보면서
너는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축복일 거라고
감사해 감히 사랑한다고 말할까
조금 더 기다려볼까
그렇게 멀리서 널 사랑해 왔어
내겐 너무나 소중한 너 다가설 수도 없었던 나
그래도 나 이렇게 행복한 걸
아직도 나는 너의 뒤에서 애태우지만
시간이 흘러 아주 먼 훗날 그땐 얘기해 줄게
니가 얼마나 날 웃게 했는지 설레게 했는지
감사해 감히 사랑한다고 말할까
조금 더 기다려볼까
그렇게 멀리서 널 사랑해 왔어
내겐 너무나 소중한 너 다가설 수도 없었던 나
그래도 나 이렇게 행복한 걸
가끔은 두려운 거야 혹시라도 내가 널 잊을까 봐
그대 소리쳐 이름 부를까 그럼 내 사랑 들릴까
그렇게 멀리서 나 망설여왔어
내게 세상을 선물한 너 무엇도 줄 수 없었던 나
그래서 나 웃어도 눈물인 걸
[출처] 시 모음 938. 「흑백사진」|작성자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