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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전두환 광주사태 광주사태가 정답이다 5.18광주사태(5.18폭동)
2012/02/14 22:51
http://blog.naver.com/yhnnhy12/130131371481
518 민주화운동같은 소리하네 ㅋㅋㅋㅋㅋ
민간인이 불법으로 무기를 소지하면 모다?
범죄~
그 불법소지한 무기로 군대를 향해 발포하면 모다?
폭도~
그게 또 커지면 모다?
반란~
결국 오일팔은 뭐다?
폭동~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들이대도 가려질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어떠한 그럴듯한 이유라도 민간인이 총을 잡고 자국의 군대를 향해 발포하는 건 명백한 반국가행위임. 법을 어기는 놈들은 몽둥이맛을 봐야지
북괴군의 선동으로 인해 선량한 시민들이 피해를 받은 아픔의 역사?
독재정권에 대항한 순국선열?ㅋㅋㅋㅋㅋ 4.3사건쯤은 되야 아픔의 역사라고 하지. 무기갖고 대항하다가 힘딸려서 몰살당한걸 민주화운동?ㅋㅋㅋㅋㅋ
아마 억지력이 더 강했으면 나라 엎으려고 했을걸ㅋㅋㅋㅋ아니라고 해봐라 얼른
그리고 어떤 분이 5.18 당시 광주에 계셨던 어머니 에피소드를 올림.
그때 우리어머니 고등학생이셨는데
대학생 양아치새끼들이 지랄꼴깝은 다떨어서 뵈기싫었다고 함
마치 광주사람들 모두가 무장폭동을 원했던듯이 말하나
실제론 뭐 대학생들 뿐이지 뭐
실제로 교전땐 진짜 총소리나고 무서워서 집에서 이불 꽁꽁 싸매고 그냥 집안에만 박혀있으셧다고 하시네
결론은 몇몇의 선동분자들이 개새끼
1. 518 최초 사망자가 전경 4명이었떤 이유(폭동분자들이 버스로 밀어버림)
2. 순식간에 유언비어가 퍼지며 무기고 7개를 동시 습격한 사실
3. 폭동분자들 탱크 몰고 민간인들을 잡아 다가 투항시킨 사실
4. 교도소 죄수들을 풀어준 사실
5. 방송국을 불지른 사실
6. 방송국 지하에 tnt 설치와 도청 장치 설치한 사실
7. 어린 청년들까지 폭동에 동원한 사실
8. 매년 북괴 들이 518 기념을 하는 사실
9. 김일성이가 5.18때 남하하지 못한걸 후회했던 사실
10. 윤기권 같은 색희가 돈 챙겨먹고 월북한 사실
11. 518 폭동관련 사망자 부상자 조사 결과 폭동군들이 사용했던 칼빈과 m1에 의한 민간 사상자가 더많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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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주 유언비어 중에 여학생의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여직원의 팔을 도끼로 자른다는 내용이 있음
이것은 유언비어로 과장된 선동문구로 흔히 알려져있는데
탈북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이것은 실제 북한에서 생방송되었으며, 수십 차례 재방송을 했음
<광주 청문회는 그러나 이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발포 문제와 지휘 책임 문제, 초기 과잉 진압 문제 등 핵심 문제에 대해 증인들의 증언이 상반되거나 엇갈려 실체규명의 확실한 실마리를 찾지 못해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발포 문제에 대해 최 웅 당시 11공수여단장 등 공수부대 관계자들은 5월 21일 오후 1시 반에 시민군이 먼저 총격을 가해 자위권 행사의 일환으로 발포를 했다고 증언했으나 야당 측과 피해자 측은 그 때는 시민군이 무장을 하기 전이며 공수부대가 발포를 해 시민들이 정당방위로 무장을 하게 됐다고 맞서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5.18시민군과 공수부대 중 어느 편이 선제 발포하였느냐는 5.18측으로서는 생사가 달린 문제였을 것이다. 총성이 올린 때는 정확히 오후 1시경이었고, 5.18측은 불과 30분만인 오후 1시 반 이후에 시민이 무장했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였다. 그리고, 이런 어거지 주장은 한달 후인 1989년 1월 26일 광주청문회 때 놀랍게도 시민군편 증인 김영택 기자의 증언에 의해 와장창 무너졌다. 위 동영상 시작후 2분 24초에서 우리는 김석진 기자의 다음과 같은 멘트를 듣는다:
<김영택 씨는 이에 앞서 관광버스가 돌진해오기 직전 시위대가 탄 APC 장갑차가 공수부대 대열로 뛰어들었으며 이 때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치어 한 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김영택 씨는 이처럼 낮 12시58분 공수부대가 첫 집단 발포하는 순간 시위대 쪽에서 다른 총 소리가 난 것으로 미루어 시위대도 함께 발포한 것으로 생각하며 이미 오전 중에 시위군중이 카빈총을 들고 간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함으로써 오전 1시 반 이후에 시민이 무장했다는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공수부대 집단 발포"라는 말은 국민을 속이기 쉬운 말이다. 그러나 그 사건의 진실은 5월 21일 전남도청 앞의 공수부대는 총 200발이 실탄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민군은 그보다 천배가 넘는 실탄, 즉 20만발이 넘는 실탄을 가지고 있었다. 위 사진에서 우리는 2005년에 또 발견된 당시 시민군 실탄을 본다. 그러면 실탄이 장진된 총을 가지고 온 시민군과 달리 실탄이 없었던 공수부대는 어떻게 그날 오후 1시경 200발이 실탄을 보유하게 된 것이었을까? 위 동영상 시작 3분 27초에서 김석진 기자의 멘트 "두 번째 증인으로 나온 임정복 당시 31사단 보좌관은 5월 21일 오후 도청 앞에서 31사단 병력이 헬기로 철수할 때 실탄 두 상자를 공수부대에 인계했으며"를 듣듯 그 실탄은 공수부대 실탄이 아니라, 보병부대 31사단 실탄이었다.
그리고 31사단이라는 부대명으로 일컬어지는 광주향토사단 96연대 1대대 소대장 중위 한동석이 그 실탄을 전달한 장본인이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계엄군 장교=공수부대 장교 이미지를 시청자들에게 심어주나, 한동석 중위는 공수부대 장교도 육사출신 장교도 아니었다. 그는 ROTC 출신이었다. 무엇이 대학생과 전경의 차이인가? 학교 다니다가 전경으로 지원하면 학생신분이 불과 몇달만에 전경신분으로 바뀐다.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한동석 중위가 바로 그런 입장에 있었다. 그런 그가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울분을 느끼며 2007년 5월부터 역사학도의 블로그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를 찾았다.
900개가 넘는 댓글이 빽빽한 이 블로그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는 2007년 5월부터 몇달간 두가지 유형의 울분의 전투장이었다 (댓글이 워낙 많아 댓글 페이지 1을 찾아 댓글 입력일 표시가 <한동석 2008.05.08 19:10>로 되어있는 댓글부터 보셔야 함.) 그리고 너무 댓글이 많아 지금은 한참 댓글 페이지를 뒤로 돌려야 하는 그 블로그 댓글 토론장이 한동석 중위가 실명으로 역사의 비밀을 증언하는 증언장이었다. 한편으로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공수부대의 잔인성에 울분을 터뜨리며 그 울분을 거기 터뜨리는 네티즌들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 사건의 현장 증인 한동석님은 전혀 다른 종류의 울분, 즉 영화 "화려한 휴가"의 역사왜곡에 울분을 터뜨리며 생생한 증언 보따리를 하나하나 풀었다.
무엇이 팩트였는가? 21일 도청 앞의 공수부대에는 실탄이 없었다. 탄통 3개는 한동석 중위기 헬기로 철수하면서 본인의 판단에 따라 7공수에 전해 주었던 것이요, 심지어 31사단 탄통을 7공수에 인수인계하라는 명령조차 없었다. 위 동영상에는 나오지 않으나 <실탄을 가지고 출동하지 않았다>는 특전사 대대장의 증언이 있었다. 그러나 광주청문회 당시에는 그런 진실된 증언은 묵살되었었다. <실탄을 가지고 출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과연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었는가? 오직 헬기로 철수하면서 자신의 탄통을 7공수 모 대위에게 넘겨주었던 장본인만이 그 사실과 그 상황에 대한 증인이 되어줄 수 있었다. 그래서 청문회 당시 국회 청문회장으로 전화를 걸지 못했던 것이 오래오래 한으로 남는 한동석님은 그 심경을 이렇게 토로한다:
<<저는 5월 21일 오후 2시경까지 도청 광장에 포위되어 있다가 불행 중 다행으로 헬기로 탈출하기 전에 저희들이 휴대 중이던 <국가보안목표 경계근무용 M-16 탄>을 제7공수부대 *** 대위에게 전달한 장본인입니다. 1988년(?) 청문회 TV생방송 당시, 저의 신분이 신분(해군 군무원)인 지라 오히려 진실를 이야기해도 더욱더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 (?) 뭐라고 표현할 수없는 위압감과 가족들의 안전이 염려되어 ... 전화 다이얼을 돌려서 "특전사 대대장의 말<실탄을 가지고 출동하지 않았다>이 맞고, 31사단 병력 소대장(본인)한테서 받았음.을 증언해야 했었는데....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 진실은 언제나 하나 밖에 없고 반드시 밝혀지리라는 신념을 믿고 , 눈물을 머금고 인내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전두환 전대통령이 구속되기 직전에 <서울 지검>에 출두하여 위의 소신을 검사 앞에 처음으로 증언 하였던 것입니다. >>
영화 "화려한 휴가"에 스토리가 있는가? 광주사태의 진정한 스토리 중 하나가 바로 한동석 중위의 스토리였다. 그는 20일 밤 MBC방송국이 불타고 있었을 때 부하들과 더불어 그 속에 갇혀 목숨이 위태로왔다. 용산참사를 생각해 보면 불타는 건물 속에 갇혀있는 자들의 위기감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부하들과 더불어 모두 타죽는데도 소속 부대로부터 철수 명령이 없었다. 철수명령이 없는한 군인은 경계근무지를 이탈하지 못한다. 그러나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그는 방송국 옆집 담장을 넘는 방법으로 비상탈출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폭동을 일으키는 난동자들에게 붙들리면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기에 심야에 겨우겨우 부하들을 안전한 곳으로 탈출시키다보니 도청으로 와서 밤을 새게 되었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 무장시민군에 겹겹이 포위된 그곳이 또 하나의 사지였다. 다행히 31사단이 헬기를 보내 자기 소대 병력을 비상탈출시켜 주었으나, 사지에 공수부대를 남기고 탈출하는 것이 너무도 미안해 탄통을 넘겨주었던 것이었던바, 그 사실을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저는 그 당시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의 한동석 중위입니다.80년 5월 20일 밤 9시 30분경에 시위대의 방화로 불타오르고 있는 MBC방송국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당시 향토사단 군인 소대장입니다" MBC 방송국에서 우여곡절 끝에 비상 탈출하여, 밤 11시 경부터 다음 날인 5월 21일 <도청 발포사건>직후까지 (불행 중 다행으로 도청광에 공수부대와 같이 포위 되어 있었던) 도청광장에 있다가 오후 1시 반경에, UH-H 헬기로 31사단 연병장으로 철수했던 장본인입니다. 헬기로 철수작전하기 전에 , 5월 20일 밤까지 MBC방송국과 기독교방송국,전일방송국(?) 에 배치되어 있었던 3곳의 경계용실탄 3탄통(한 탄통 안에는 M-16소총 20발 짜리 탄창에 15발씩 장전되어 있었음)을 제7공수 *** 대위님께 전달하고 철수했던 바, 도청 광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직접 경험한 사람으로 .... 27년 전에 발생한 그 상황의 진위를 가리는데 한가닥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에서 글을 올렸습니다.>>
발포명령은커녕 실탄을 인수인계하라는 명령도 실탄을 인수인계받으라는 명령도 없었다. 단지 그것은 사지를 탈출하는 소대장과 사지에 남은 공수부대의 한 장교 사이의 우발적인 행동이었다. 사지에 남은 공수부대원들이 살아남으려면 공포탄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하겠기에 넘겨주었던 것뿐이었다. 너무도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우발적으로 취해진 그 행동에 대해 한동석님은 이렇게 증언한다:
<<7공수 외는 저가 잘모르지만 7공수는 실탄이 없었기에 철수하는 저희 병력에게 <실탄 인수인계>를 요구하지 않았겠습니까? 자기도 실탄을 보유하고 있는 데 다른 부대에게 실탄을 요구하는 경우는 어떠한 경우라도 없을 테니깐요.
<실탄 인수인계>라는 용어를 저가 표현한 것 뿐입니다.. 특전사 병력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그냥 전달해주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요.
아주 급박한 상황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들이라 그당시에 순간순간 지휘자(본인)의 판단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지 상부에 보고하고 할 겨를도 없었읍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7공수 대대장은 31사단 병력이 헬기로 철수하는 지도 몰랐을 것이며, 특전사 *** 대위도 사후에야 실탄 습득에 대한 보고를 했을 것일라 추측됩니다. 정상적인 보고후 지시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
전북 금마에서 온 7공수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실탄을 보유하지 않고 있었음이 아주 분명하다. 그러면, 서울에서 온 11공수 3개 대대 병력에는 실탄이 있었는가? 11공수에도 실탄이 없었던바, 그 사실을 1995년 2월13일 국방부 검찰부 고등검찰관실 신문조서에서 안부웅 광주사태 당시 11공수특전여단 61대대장은 이렇게 진술한다:
<<교신이 끝난 뒤 조금 있으니 UH-1H 헬기가 상무관 앞에 착륙하길래 제가 벌써 교대병력이 왔나 하고 살펴보니 상무관 앞 쪽에서 일반 보병부대 전투복을 입은 병사들이 헬기 쪽으로 뛰어 가서 탑승을 했습니다. 제가 주위 병사들을 보고 ‘저 병력은 뭐지?’ 하는 동안 헬기는 이륙했는데, ‘그 병력은 31사단 병력인데 MBC 방송국을 경계했던 병력이랍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혼자 생각하기를 ‘배속받은 병력은 나 몰라라 하고 제 자식만 챙기는 놈들’이라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대대장님! 병사들이 31사단 병사들로부터 실탄을 얻은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해 제가 ‘그러면 안되는데, 병사들이 실탄을 가지면 안되고 최소한 중대장급 이상이 휴대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병사들이 진짜 실탄을 얻었는지 확인을 해야 하는데, 당시 저도 너무 피곤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당시 제가 병사들이 실탄을 얻었는지, 그리고 병사들에게 배분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것이 실책입니다. 당시는 병사들이 31사단 병력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실탄을 얻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31사단 병력이 몇 명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http://cafe.daum.net/518cafe/8yGb/78 )
이로써 11공수에도 실탄이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한동석 중위가 7공수 모 대위에게 넘겨준 세 개의 탄통에 들어있던 실탄 수는 총 200 여발이었는데, 7공수가 독차지하지 않고 그 중 일부를 11공수 병사들에게도 나누어주었던 것이다. 저 위의 탄통은 시민군 탄통이지만,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21일 도청 앞의 시민군은 20만발이 넘는 실탄을 가지고 있었다 (탄약고에서 시민군에게 피탈당한 실탄 수를 근거로). 그러나, 근 천 명의 공수부대원들에게는 고작 총 200발의 실탄밖에 없었다. 이 숫자대로라면 병사 한 명당 5개 이상의 실탄을 가질 수 없었다. 행정병 등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하사관급 이상의 병사와 장교들에게 10발씩 지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상부 명령에 의한 지급은커녕, 현장 지휘관의 명령에 의한 지급도 아니었다. 31사단 96연대가 철수하면서 우발적으로 넘겨준 실탄이 일부 병사들에게 우발적으로 배분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의 원인이 되었던 그 200 여발의 실탄을 한동석 중위가 보관하고 있게 된 경위는 무엇이었는가? 한동석님이 그 경위를 설명한다:
<<3탄통의 실탄은 저희 대대(담양)에서 출동할 때(5월 중순경) 소대장 3명과 30여명의 병력이 3곳으로 나누어서 광주 시내에 <국가보안목표경계임무>를 띠고 배치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MBC 방송국, 그리고,전일방송국 & 기독교 방송국에 *중위와 *소위가 배치되면서 경계용실탄 1탄통씩 보유하고 있었지요. 그러니까, 저희병력이 5월 20일 밤 9시 반경에 MBC방송국에서 비상탈출할때 실탄과 소총만 휴대하고, 긴급하게 나와, 우여곡절 끝에 XX경찰서을 잠시 경유한 후에 무등산 방면으로 도주하다가 우연히 도청 광장에서 먼저 철수한 *중위와 *소위를 만나 저희 부대원 전원(장교 3명 & 30여명의 병사)이 합유하게 되어서 각각 보유하고 있던 실탄을 합한 것이 모두 3탄통이 된 것입니다. (그 3탄통의 수량이 약 200 여발 정도 될 겁니다) 그리고, 2 -30 여분 후에 저희 31사단 병력은 UH-1H 헬기로 31사단 연병장까지 철수하게 됐던 것입니다.>>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는 공수부대에 살인 목적이 있었다는 거짓 인식을 주기 위해 조작되었다. 그러나, 실제 사건에서 살인 목적을 가진 자들은 시민군 틈에 있었다. 화염병이 일으킨 용산참사를 생각해 본다면 도청 앞에서 시민군 화염병에 맞아 온몸이 화염에 쌓이거나 시민군 장갑차에 깔려 죽거나 다친 병사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라. 한동석님은 그 광경을 이렇게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 당시(5월 21일)에 계엄군(31사단병력과 공수부대병력)은 도청 분수대를 거점으로 도청 광장에만 남아 있었지요. 그래서 도청 광장에 있는 군인들을 몰아 내기 위하여 도청 건물 뒤 뿐만 아니라 사방 팔방에서 차량, 화염병, 돌멩이 등 등 모든 것들을 동원해서 공격을 했으며, 최후의 저지선만 남아 있다가 금남로 대로 쪽이 먼저 뚤리면서 발포가 났고,후진하던 공수부대 장갑차에의해서 공수부대 요원이 피해를 보았고, 그 직전 까지는 맨몸으로 인간 바리케이트를 치고(대형을 갖추고 버팀) 밀집된 대형의 앞이 보이지 않는 관계(키가 큰 장병이 앞에 선두에 서고 키가 작은 장병은 후미에 섰기 때문에) 후미에 서 있던 공수부대 장병들은 날아오는 화병병을 볼 수 없기에 피하지 못하고 철모에 화염병이 맞아서 순식간에 머리부분 부터 몸 전체로 화염에 쌓이는 처참한 광경도 목격하면서 분개했던 기억도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부터 퍼진 광주학살 유언비어는 시민군 무장을 정당화시킬 목적으로 조작되었다. 사건의 선후에 대해 속이는 이 유언비어와 달리 무장시민군이 계엄군을 공격하는 사건이 먼저 있었다. 공격하는 시민군 편에서 계엄군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그 실제 상황을 생각해 보라. 무장시민군 편에서는 헬기로 철수하는 31사단 병력이 공수부대에 실탄을 넘겨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민군 장갑차가 공수부대를 덮쳤을 때 시민군 편에서는 공수부대에 실탄이 있는 줄 몰랐기에 그렇게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전날 밤 시민군 편의 선무방송이 "계엄군은 포위가 되었으니 투항하라"는 식으로 들렸다. 만약 당신이 ROTC 출신 장교로서 현장에 있었다면 그 상황을 어떻게 느끼며 받아들였겠는가? 한동석님의 다음 증언이 그 상황을 객관전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어떻게 글로 설명하기가 그렇습니다만, 전쟁터라고 생각하시는 게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50월 20일 밤 상황은 시민들한 테 잡히면 끝장입니다. 그래서 챙피스러운 이야기지만, 무기로 시민들을 제압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무작정 돌과 화염병을 맞을 수도 없고, 외부에서 지원병력이 시내로 들어올 수도 없이 고립이 된 상황인데, <귀가>라니요! <야영> 잠을 잘 수가 있나요? 목숨이 촌각에 달려 있는 데... 오죽하면 저가 단독으로 MBC방송국에서<탈출을 결심>하고 무전기 까지 끄고 병력을 인솔하는데 방향만 무등산 쪽으로 향했겠습니까?
그런데 운 좋게도 광주 경찰서(?) 까지 1차 탈출에 성공하여 잠시 쉬고 있는데, 뒤를 돌아 보니 MBC 방송국 건물과 옆의 병원 옥상까지 불길이 완전히 쌓였던 장면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무전병이 실수로 무전기를 개방하여 교신하는 과정에서 2소대(분대병력)와 3소대(분대병력) 가 안전한(공수부대가 집결되어있었음) 도청광장으로 먼저 대피를 하게되었고, 저희 병력은 경찰서에서 간편한 복장으로 무기와 실탄만 챙겨서 무등산 방향으로 2차 탈출을 시도하다가 우연히 2,3소대 병력을 만나게 되어서 선임 소대장인 저가 96연대 1대대 소속 3개팀(선임소대장 저를 포함하여 두명의 소대장<중위 & 소위>)을 재편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가 자정 무렵(5월 21일 0시) 입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영화에도 나오는 젊은 여성의 선무방송은 지금도 소름이 끼칠 정도 입니다. (계엄군은 포위가 되었으니 투항하라는 식의 엠프 방송)>>
위 동영상에서 김영택 기자는 12시58분경 시민군 APC 장갑차가 공수부대 대열로 뛰어들어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치어 한 명이 현장에서 사망하는순간 시민군과 공수부대가 동시에 발포하였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총성에 대해 보다 정확하고 전문적인 감각을 가졌던 한동석 중위는 분명히 시민군 총성이 먼저 울렸다고 증언한다: "저가 주장한 5월 21일 최초 총소리는 금남로 방향의 특전사 인간 바리케이트가 "탕 !~ "하는 사제총(?) (M-16소총 소리는 아님)가 나면서 뒤로 밀리면서 양쪽으로 갈라졌던 것입니다."
안부웅 광주사태 당시 11공수특전여단 61대대장 역시 시민군 편에서 선제 발포하였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13시경에 이르러 시위대가 장갑차와 차량의 시동을 걸고 ‘부릉부릉’ 거리는 등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대대병력들에게 방독면을 착용시켰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장갑차와 빵빵 소리와 함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1개가 날아와 62대대 장갑차 있는 곳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장갑차가 화염병을 보고 뒤로 빠졌으며 그와 동시에 시위대 전열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t 트럭이 계엄군 쪽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 차량을 막을 재간이 없어 도청을 향해 병력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시위대 차량이 빠른 속도로 저희 병력을 향해 들어왔더라면 많은 병력이 깔려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장갑차 1대만 빠른 속력으로 도망가는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여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충장로 쪽으로 갔습니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옴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났습니다.>> (
http://cafe.daum.net/518cafe/8yGb/78 )
안부웅 중령과 김영택 기자가 목격한 이 상황이 바로 한동석 중위가 헬기로 철수하면서 본 상황이었다. 실탄을 인수인계하라는 명령을 받은 적도 없었으며, 실탄을 인수인계했다고 보고할 겨를도 없었다. 탄통 3개를 7공수 모 대위에게 넘겨주며 30명의 96연대 병력을 헬기에 태우는순간 시민군 편에서 먼저 총성이 울리고 이어 약 1분간의 맞사격이 있었으며, 모든 것이 아주 순식간에 발생하였다. 한동석님은 그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은 도저히 보고 절차를 밟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실탄 인수인계>라는 용어를 저가 표현한 것 뿐입니다.. 특전사 병력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그냥 전달해주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요.
아 주 급박한 상황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들이라 그당시에 순간순간 지휘자(본인)의 판단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지 상부에 보고하고 할 겨를도 없었읍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7공수 대대장은 31사단 병력이 헬기로 철수하는 지도 몰랐을 것이며, 특전사 *** 대위도 사후에야 실탄 습득에 대한 보고를 했을 것일라 추측됩니다. 정상적인 보고후 지시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시위대가 순간적인 기습 공격으로 인간 바리케이트 방어대형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대형 트럭의 질주<공격>로 대기 중이던 대형이 각자 흩어져서(도청 정문 을 통해 내부로) 부대를 재정비하는데 지휘자들은 정신이 없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읍니다. >>
그리고 시민군 편에서 선제 발포하였다는 사실은 시민군 김수영이 증언하는 시민군 총기오발 사고로 증명된다. 최초로 총성이 울리던 순간을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당시 공수부대가 도청 안에 있었는데, 시민들이 계속 밀고 들어와 나와 삼촌은 떼밀리다시피 해 도청 앞까지 가게 됐다.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
"공포다."
누군가 외쳤다. 까닭을 모르는 뒷시위대열은 자꾸만 앞으로 밀려왔다. 삼촌과 나는 앞사람을 꼭 붙잡고 미문화원 쪽으로 빠지는데 뒤에 따라오던 청년 한 명이 소리쳤다.
"아저씨 아저씨, 나 총 맞았어요." >>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801.html 에서 네번째 작은 제목 "21일 도청 앞 발포" 이하.)
인산인해를 이룬 인파는 무장시민군이 섞인 인파였다. 운집한 전체 시민 수는 이십 만이요, 무장시민군 수가 오천이라 했다. 총성이 울렸는데도 사람들이 도청 앞쪽으로 밀려왔다. 만약 공수부대 집단발포라는 것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밀려올 리가 있겠는가? 현장의 시민들은 공포로서 이해했으며, 더구나 총소리 방향을 모르고 있었다. 김수영은 공수부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그가 들은 것은 뒤에 따라오던 청년이 총 맞았다고 소리친 것, 그가 본 것은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뿐이었다.
시민군 진영에서 먼저 총성이 울렸음을 한동석 중위와 안부웅 대령이 분몋이 들었다. 그리고, 시민군 진영에서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었음을 시민군 김수영이 분명히 목격하였다:
<<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오발사고가 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총구는 하늘로'라는 구호를 외쳤고, 지나가던 지프차 위에서 또 오발사고가 나 차에 탔던 학생이 어깨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내가 하늘을 향해 공포 2발을 쏘고 나자 어떤 아저씨가 메가폰을 통해 총을 못 쏘는 사람이나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총을 반납하라고 했다. 그때 나는 총을 반납해 버렸다. 동구청 옆(현재) 야광카바레 부근으로 갔는데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총알이 3-5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청년의 다리를 맞혔다. 청년이 다리를 잡고 뒹굴었다. 또 한 청년은 복부에 총을 맞고, 임신한 아줌마는 가슴에 총을 맞아 즉사했다.>>
시민군 지프차 위에서 오발 사고가 났다고 한다. 시민군 지프차가 왕래하고 있었다는 것은 도청을 점거할 목적으로 시민군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말한다. 시민군 지휘부가 지프차를 타고 금남로 일대를 왕래하며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지프차 위에서 총기 오발 사고가 있었다는 것은 시민군 진영에서 계속 발포 사건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최초의 총성은 시민군 진영에서 울렸다. 즉, 5.18시민군이 선제 발포하였다. 어쩌면, 그것은 시민군 김수영이 서술하듯이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김수영이 목격한 잦은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는 탈북군인들이 증언하듯 폭동 선동을 위한 의도적 오발사고였을 수도 있다. 그 경우 살인의도를 가진 자들은 시민군 틈에 있었던 것이다.
이 사진에서 더러는 철모까지 쓴 폭도들이 지프를 타고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의 진실은 시민군 편에서 총성이 울렸다는 것이며, 그 총성 중에는 시민군 김수영이 증언하는대로 시민군 지프에서 발생한 총기오발 사고도 있었다.
(* 상단 동영상은 1988년 12월 22일, 1989년 1월 26, 27일의 광주청문회 영상물을 함친 동영상인데, 세번째 영상물인 27일자 광주청문회 표지 다음에 26일자 동영상이 겹쳤습니다. 도청진압작전 사망자 수에 대한 5.18측의 허위 주장이 드러나는 1989년 1월 27일자 광주청문회 영상물은 http://study21.org/518/video/auditing_5-27.ht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개소리하네 병신새끼들 무슨 약쳐먹은적도 없고 당시 투입부대는 전라도 출신 부대장에 전라도 출신군대들이었는데 뭔 팔이 짤려 임신부가 죽긴뭘죽어 개소리 하고 자빠졋네 아오 진짜 이걸 믿고 시위하러 나왔다가 경찰서 털고 시작된게 5.18의 시작이고만
http://study21.org/518/video/auditing_518lie.htm
광주폭도들의 최초 무장시점
지들 주장으로는 20일 21일 즉 진압이 시작되고 정당방위차원 으로 무기고를 털었다는데??
김대중 세력이 제2의 광주사태를 일으키겠다며 미국 쇠고기에 관하여 지난 여름에 퍼뜨렸던 유언비어들이며, 국민 여배우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토론게시판의 유언비어성 글들은 아직도 우리 한국사회가 얼마나 유언비어에 취약한지를 보여주는바, 한국 근현대사에서 그 대표적인 예가 광주사태 당시 그리고 그 이후에 퍼졌던 유언비어들이다. 광주에 상처가 있었다. 그러나 분명 그 가해자들은 당시 시민군이라 불리어졌던 5.18무장단체들이었음에도 선량한 군인들이 누명을 뒤집어썼다. 폭동을 일으킨 자들과 그 동조 세력은 책임전가를 위해 유언비어를 지어냈으며, 지난 28년간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그런 불순한 픽션에 속아왔다.
광주사태 논의의 대상은 폭동이지 시위가 아니다. 5.18측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시민군이라 규정하였으며 시위대라 부르지 않았다. 즉, 5.18사건이란 시위가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폭동이 발생한 사건이었다. 시위란 5월 17일까지 진행되었던 시위를 말하며, 5월 18일 이후에는 학생들이 주도하는 시위가 더 이상 없었고, 단지 정체 불명의 무장단체가 주도하는 유혈무장폭동이 있었을 뿐이었다. 박남선씨와 김대중의 최측근 윤상원 등이 시민군 리더였으되 아직도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별도의 무장조직이 있었다. 위의 광주청문회 영상물에서 우리는 당시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가 시민군편 증인이었음에도 복면 무장조직이 있었음을 증언함을 듣는다 (아래의 복면무장단체 사진 참고).
광주청문회 위원장이 문동환이었다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자는 격이었다. 문동환은 증인으로 출석해야 할 인물이었지, 결코 광주청문회를 주관하여서는 아니될 인물이었다. 광주사태는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유혈폭동을 선동하는 자들이 있었기에 일어났다. 김대중과 문익환 목사가 제2의 동학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연설했었을 때 바로 그것이 유혈폭동 선동이었다. 특히 문익환 목사는 동학난과 같은 유혈폭동을--유혈폭동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역사의 목적으로 여기는 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민중의 계급투쟁을 역사의 목적, 역사적 사명과 동일시하던 문익환 목사의 사관은 분명 공산주의 사관이었으며, 최소한 좌익사관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폭동을 선동하였던 자들의 이념이었기에 문익환 목사의 동생 문동환의 편파적 시각에 청문회를 맡겨서는 이니되었다.
폭동 선동가들에게 민중의 계급투쟁이란 이념이 있었다 하더라도 폭동 선동의 방법은 매우 치졸하였다. 윤상원으로 대표되는 김대중 최측근들은 5월 18일 아침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을 여수로 보낸 후에 이른바 "박관현 사망설"이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리고, 광주경찰에 의한 "박관현 사망설"이 폭동의 기폭제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5월 18일 오후 한시 반부터 금남로 일대에서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가 퍼져나가기 시작하자마자 수천 명의 시민이 갑자기 난동자들로 변해 광주의 여섯 파출서를 돌과 화염병으로 파괴하였다. 그리고, 그날 5월 18일 낮의 화염병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김대중의 최측근 윤상원이 미리 제조해 놓은 것이었다. 따라서, 왜 김대중 세력이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화염병을 미리 제조해 놓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어야 했었으나 문동환 위원장이 주관하는 광주청문회는 한번도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었다.
5월 18일 박관현은 죽은 것이 아니라, 여수에 있었으며 여수에서 광주폭동을 생중계하는 북한방송을 듣고 있었다. 1980년 5월 18일 저녁부터 북한에서 광주폭동이 생중계되고 있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증언이 바로 박관현과 동행했던 당시 전남대 학생회 총무 양강섭씨의 증언이다 (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706.html ). 그리고, 5월 18일부터 북한에서 다른 방송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광주폭동을 생중계하였다는 사실은 그날 이미 북한 세력이 광주에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그러면 북한 세력이 어떻게 미리 알고 광주에 잠입해 있었으며, 어떤 방법으로 실시간 북한에 사태의 전개상황을 전송하고 있었는지도 청문회 질문 대상이었어야 했었을 것이다.
박관현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일단 김대중 세력이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를 퍼뜨린 후에는 다시는 광주로 돌아올 수 없었을 뿐이었다. 만약 확인되지도 않은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에 흥분하여 파출서들을 돌과 화염병으로 파괴하고 세무서에 불을 지르는 것이 광주시민들의 반응이었다면 오늘날 최진실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인가? 박관현은 죽은 것이 아니었지만 최진실은 정말로 죽었다. 전자의 경우 사망설은 단지 유언비어 뿐이었는데도, 일본에서 푸른 눈의 목격자로 훗날 알려진 힌츠페터가 달려오게 할 만큼 그 영향력이 컸던데 비해, 후자의 경우 사람들이 국민 여배우를 너무 쉽게 잊고 있다. 그러나 양자 모두의 경우에서 유언비어는 정당화될 수 없다. 확인되지도 않은 사망설 유언비에 흥분하여 파출서를 파괴한 행위도, 한 가련한 여성을 상대로 무수한 군중이 미확인 유언비어로 공격한 행위도 결코 정당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박관현 사망설은 단지 유언비어뿐이었는데도 폭동을 일으켜야 했을 이유였다면 5월 20일 시민군이 버스로 순경 4명을 숨지게 하였다는 뉴스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만약 광주청문회가 공평하려 했다면 분명히 짚고 넘어갔어야 했을 사안이었다. 윤상원으로 대표되는 김대중 최측근들은 이미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수일 전에 버스를 징발하여 유혈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기에 이것은 광주사태 발생원인에 직결되는 문제요, 따라서 결코 간과할 문제가 아니었다. 또 그날 새벽 시민군이 시민군 차량으로 3공수 정관철 중사를 깔아죽인데 대한 광주시민들의 반응은 무엇이었던가?
5월 20일 새벽에야 광주에 도착한 3공수는 19일 온종일 식사를 하지 못했기에 19알 저녁식사분이라도 늦게나마 급식 수령에 나서야 했다. 그런데 일군의 난동자들이 급식차를 쓰러뜨리니 놀라고 당황하여 달려온 정관철 중사를 난동자들은(그 다음날부터 시민군이라 불리움) 그 자리에서 시민군 차량으로 깔아죽였던 것이었다. 5월 20일 새벽 광주에 갓 도착하였기에 아직 폭동 진압에 동원되지도 않았으며, 전역 명령을 받고 한 달 후 제대할 몸이었으며, 더구나 임신 9개월 된 부인이 있었는데 광주시민들이 그를 죽여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시민군에 의한 정관철 중사 살인사건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정서는 무엇이었던가?
시민군은 경찰과 군인만 차량 사고로 죽인 것이 아니라, 무수한 광주시민을 차량사고로 죽였다. 광주사태의 처참한 사진들이 있다. 그러나 그 타박상 가해자들은 시민군 차량 사고를 낸 시민군이었다. 시민군의 책임전가 유언비러에 의해 선량한 군인들이 누명을 뒤집어 썼으되 실제 가해자는 시민군이었다. 광주사태 당시 자가용 운전기사였으며 훗날 전남대 총무과 근무했던 오병길씨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여기저기 군용차량이 흩어져 있었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빼온 것 같았다. 자동차에 대한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차량사고도 많이 발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군용납품차량을 운전경험이 미숙한 시위대들이 무작정 끌고 다녔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장에 있었던 납품차량은 시운전도 하기 전의 것으로 냉각수도 안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
총기 오발 사고에 의한 시민군 사망 역시 모두 시민군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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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의 집단발포 사건의 진상은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에 의한 4명 사망이요, 시민군이 시민군 장갑차로 군인들을 깔아죽이면서 선제 발포하자 이에 놀란 공수부대원들이 공중으로 공포탄을 발사하였기에 누명을 쓰게 된 것뿐이었다. 청문회에서 발포명령자를 찾았으나 실탄 지급 없는 발포 명령이 있을 수 있겠는가? 7공수는 단 한 개의 실탄도 없어 광주향토사단 한동석 중위에게 경계근무용 실탄 2상자(200발)를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민군은 30만발의 실탄을 보유하고 있었다. 탈북군인들은 시민군끼리 총격전이 있었다고 증언하거니와 전남대 오병길씨 역시 시민군 편의 발포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앰뷸런스 소리, 소방차 소리, 불타오르는 건물, 피어오르는 듯한 예광탄 , 클랙션 소리, 그리고 스트레스 해소를 하듯 쏘아 대는 총소리 등등으로 휩싸인 도시를 보았다. 그때 광주 시내에는 계엄군이 한 명도 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쏘는 총성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중에 사망자를 부검 해보니 군에선 쓰지 않았던 카빈 총상으로 죽은 이들이 많았다. 광주 탈환 뒤 회수된 아세아 자동차의 트럭을 중엔 뒤집어 지고 부딪친 것이 무척 많았다. 이런 교통사고에 의해 숨진 사람들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탈북군인들은 북한군이 광주에 침투한 주요 목적 중 하나가 시민군끼리 오인 총격전을 벌이게 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하거니와 광주사태 당시 재수생이었던 시민군 장준영도 실제로 피아를 혼동한 시민군끼리의 총격전이 빈번하였음을 증언한다 (
http://cafe.daum.net/518cafe/8yGb/29 ). 여기서 북한군의 개입 여부는 별도로 한다 하더라도 시민군 총격전에 의한 시민군 사망의 가해자가 누구냐의 문제는 간과할 수 없다. 5월 21일 이후 계엄군이 한 명도 없었던 광주 시내에서 시민군이 시민군에게 총구를 겨느고 있었을 때 그 가해자가 누구였는가? 왜 엉뚷나 군인이 누명을 써야 하는가?
그러기에 광주청문회에서 5.18무장단체의 최초무장시점에 대한 규명은 무 척 중요한 문제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5.18측은 광주청문회 때 그 문제에 정직하였는가? 총기로 무장하고 발포하면서 하는 시위는 없기에 5월 21일부터 시위대 대신 시민군이란 명칭이 통용되었거니와 그 시민군의 최초무장시점은 나주경찰서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한 5월 19일 3시였다. 흔히 광주청문회에서 다 밝혀졌다고 말한다. 무엇이 밝혀졌는가? 정상용 당시 광주도청 항쟁 지도부 외무부장의 위증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밝혀진 것은 5월 21일 낮 12시 이전에 시민군은 이미 총기 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시민군 편 증인 김영택 기자와 국군 편 증인 임정복(당시 31사단 작전참모 보좌관) 모두 시민군이 5월 20일 이미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사실을 증언하거니와 위의 푸른눈의 목격자 힌츠페터의 영상물 역시 시민군이 5월 20일에 이미 총기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입증한다.
영상보실려면 위에 주소 참고하시길
5.18 광주시민군이 광주 시민들을 끓어앉히고 총구를 겨누고 있다.
민주화운동 맞습니까?
다시묻습니다 민주화운동입니까?
정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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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한번 묻습니다 민주화운동입니까?
정말입니까?
여러분 길게 말하지 않겟습니다 저건 법원에서 쓰인 실제 증거자료로 법원이 인정한 증거자료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좌편향교과서에서 시민군이 장갑차를 쓰고 수류탄을 쏘고 경찰을 잡아죽이고
국군을 20명사망시키고 100명이상을 다치게햇단는것은 들어보셧습니까?TNT설치는요?
저게 민주화 운동이면 왜 천안문사태는 민주화운동이 아닌거죠?천안문사태는 매우 평화롭게 시위를 진행햇는데 광주폭동보다도 몇십배의 사상자가 낫습니다 왜 천안문은 사태이고 광주는 민주화운동입니까?총을들고 교.도.소를 털고 무기고를 털어도 민주화운동입니까?
애초에 시민들이 돌을들고 화염병을 던지고 시위한 이유자체가 김대중이 잡혓다는이유만입니다 그리고 경상도군인들이 환각제를 먹고 전라도사람을 죽이러 온다는 유언비어가 돌앗죠 근데?저위에서 보셧다시피 경상도군인만 잇는게 아니엇죠 그리고 주동자 윤기권이 2억원을 받고 북한으로 월북해서 아직도 북한을 찬양하는 지금 광주폭동의 현실입니다 여러분 환상에서 깨십시오 저것이 진실입니다 교과서에 전교조에 속아선 안됩니다
정리해드리겟습니다 최초에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문세광과 연관되서 김대중이 그 단체회원으로써 자금을 관리하였음 분명히 문세광을 도와주고 이 사건을 공모함 그럼으로 감옥에 간것은 당연한처사 근데 갑자기 전국적으로 민주화 바람이 붐(이건 좋은현상 사실 나도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를 탄압했단건 인정함)근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임 다른 지역은 대부분 모두 수그러들고 자중을 하였는데 광주에서만 유독 심화되기시작하더니 여러 유언비어가돌더니(위에 참고)김대중을 석방하라는 미묘한 바람이 붐 그리고 점점 시위는 격화되고 그를 진압하는(이때 진압이라 해봣자 그냥 방망이 딱 하나 그것도 경찰들이)경찰들을 공격하고 경찰서를 모두 파괴함 그래서 공수부대를 투입시킴(애초에 경찰서를 모두 때려부시고 경찰죽이고 인질로 잡은 사람들보고 공수부대투입은 뭐라 할것도 안됨)
그리고 이 부문에서는 역시 공수부대라서 그런지 경찰들처럼 쉽게 당하지않앗음 서로 쌍방간 교전이 있었음 근데 분명한건 공수부대는 처음부터 폭력을 쓰지않았음 5월18일 대학교를 모두 폐쇄하게함(당연한거 아닌가?폭도들에 의해 경찰서가 모두 털리고 치안이 마비된상태)근데 대학생200명은 죽어도 들어가겟다며 돌을 꺼내서 공수부대를 공격하고 공수부대는 이에 반응해서 서로교전함 문제는 여기서부터임 이 대학생들이 작전이라도 짯다는듯이 서로 흩어지며 거리를 활보하며 문제의 저 유언비어들을 퍼트리며 김대중석방과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를 활보함(민주주의 같은 소리하네 ㅡㅡ 경찰서 턴놈들이)그에 유언비어에 속은 시민들이 나와서 폭도대열에 들어가고 공수부대는 그때부터 본격적인 그야말로 진압을 시작함
좋다 이거야 여기서부터는 공수부대도 과하게 진압한면이 없지않아있음 일부 학살도 인정함 근데 생각해보길 먼저 경찰서 턴것도 폭도쪽 유언비어 퍼트린쪽도 폭도쪽(계엄군을 무슨 학살자 취급함 진압하기도전에)그리고 공수부대를 먼저 자극한쪽도 폭도쪽
대체 뭐가 정당방위인지?
그래서 폭도들은 안되니까 무기고를 털고 수십개의 건물을 방화하기시작함(대표적으로 MBC KBS가 방화당함 그리고 세무서랑 여러 건물들 경찰서 공공건물들이 수십개 불탐)그리고 더 코믹인건 위에서 봣듯이 공수부대의 적극적 진압은 20일부터인데 이미 19일날 나주무기고는 털렷다는 기록과 증언이있음 아니 대체 뭐가 정당방위임?
게다가 5000정의 화기와 수십대의 장갑차 수 톤의 TNT화약(이걸 해체한게 계엄군인데 학살자라고 매도할수있음?)
이때부터는 진짜 민주화고 뭐고 없엇음 모든 시민들이 집에 들어가서 벌벌떨었고 화려한휴가에서 보여주는 그 방송으로 뭐 감성개병신짓하고 그런건 레알 하나도없엇음요 진짜
이미 광주시내는 전쟁터였음 치안마비(무슨 서로 친하게 지내긴 개뿔 김밥털리고 하루에 수십건씩 총기사고가 났는데 ㅡㅡ)
그렇게 도청밑에 TNT를 깐 폭도들을 계엄군이 진압함(이 점에 대해선 진짜 난 불만없음 어느 병신새끼들이 도청에 TNT를 설치를함?병신아님?)TNT를 해체시키고 계엄군은 정상대로 진압을 했음 그리고 가장먼저 계엄군이 한 행동들?
위의 사진은 5월 단체들과 운동권 방송국이 국민에게 보여주지 않는 도청진압작전이다. 도청진압작전 완료와 더불어 계엄군은 5.18무장단체로부터 무기와 실탄을 회수하였던바 광주에 치안이 회복되는 순간이었다. 시민군을 무장해제시키고 무기를 회수함과 동시에 군인들은 폭도들이 난잡하게 어지럽힌 광주 거리를 깨끗이 청소하여 주었다.
자기 동료들이 130명이상 죽거나 다쳣지만 개의치 않고 그 동안 방화됫던 건물들 잔해를 모두 치우고 그 동안 굶어가던 광주시민들에게 쌀을 나눠줌 이게 포악한 공수부대들임?
한마디로 정리하면 폭도와 계엄군 서로 잘잘못이 있음 솔직히 폭도족이 원인이었고
그래서 민주화운동과 폭동의 중간말 광주사태를 교과서에 기록해야된다는것이 나의 생각
정말 민주화운동 맞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