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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의 이야기 (한 홍 지음)
1부 왕권 확립기
리더, 자리매김하다
늙고 쇠약해진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세우고 그에게 유언한 내용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리더십 지침이다. 다윗의 유언은 현대의 지도자들에게도 사표가 되는 지도자의 덕목이 될 것이다.
리더는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윗은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라고 유언하고 있다. 리더가 되면 유리관의 사람이 되어서 모든 사람에게 노출된다. 행동 하나 하나가 여론의 판단 대상이 될 것이다. 온 국민이 감시자가 되고 비판자가 될 것이다. 잘 하면 박수를 받겠지만, 열 가지 잘하다가도 한 가지 실수라도 하면 혹독한 여론의 방망이질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엄청난 책임과 과업이 큰 부담감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국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거대한 결정을 해야만 할 때는 뼛속 깊이 스며들어 오는 참담한 고독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리더는 상상할 수 없는 부하(負荷)가 걸리는 자리이다. “힘써 대장부가 되라”는 말에는 스피드와 절박감이 담겨 있다.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의 지혜와 용기로 대응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리더의 행동 강령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리더의 힘은 공의를 지키고자 하는 결단과 의지에서 온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의가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정의는 영원히 불변하는 인간의 모든 행동의 준칙이고 리더십의 기준이다.
하나님의 공의에 먼저 자기 자신을 예속시키지 아니하면 안 된다. 리더가 하나님의 정의에 스스로를 굴복시키는 것은 후세에 가장 강력한 멘토링이 될 것이다. 후세에 세속적인 영광을 물려주는 것도 좋은 일이지민, 하나님의 공의를 가슴속에 새겨놓는 작업이야말로 최고의 유산이 될 것이다. 리더는 공의에 대해 단호해야 한다. 다윗은 무고히 피를 흘린 측근 요압에 대해서 공의적인 결단으로 유언하고 있다. 요압은 권력에 과도하게 집착했던 인물이었다. 정적(政敵)은 가차없이 제거하고, 왕의 통치행위에 대해 부당하게 제동을 걸고, 자기의 세력권을 만들어 전횡을 일삼았다. 요압처럼 권력욕이 강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이 리더의 주변에 도사리고 있으면 리더십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기회주의자였던 시므온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현명한 조치’를 유언하고 있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인물은 항상 이권을 위해서 정의를 무시하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불법을 자행할 수 있다.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는 뇌물 청탁, 온갖 비리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사람이다. 리더는 범법행위를 한 사람에게 측근, 인척, 인연을 막론하고 추상같이 법을 집행해야 한다.
리더는 선한 인물에 대해서는 선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쿠테타로 어려움을 겪을 때에 그에게 도움을 준 바실래이를 잊지 않고 있다. 다윗은 바실래이의 집을 선대하라고 유언하고 있다. 리더의 자리는 인간경영의 자리이다. 다양한 인재가 필요하지만, 그러나 양심적이고 고상한 인품을 지닌 수준 높은 인재, 올곧은 도덕성과 순수한 충성심을 가진, 인격이 정돈된 인재를 곁에 두어야 할 것이다.
리더는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것이다. 다윗이 많은 형들을 제쳐두고 솔로몬을 후계자로 지정한 사실은 리더는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솔로몬이 리더가 된 것은 결코 다윗의 편애의 결과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실패하기는 했지만, 아도니야라는 다윗의 넷째 아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던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서 그럴듯한 슬로건을 내걸었다. “온 백성이 자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선거철이 되면, 대권 도전자들이 “국민이 나를 원한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발언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소수의 사람이 추종한다고 해서 국민의 여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일이 있으면 안 된다. 아도니야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몇몇 아부하는 무리의 말을 듣고 국민의 뜻이라고 착각을 했다.
솔로몬의 공의에 대한 결심은 단호했다. 요압과 시므이를 제거했다. 아버지의 첩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고 무례하고 패륜적인 요구를 했던 아도니야를 처형했다. 공의를 실현한 것이다. 솔로몬은 공의가 리더의 핵심적인 통치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알았던 인물이었다.
리더, 하늘의 지혜 얻다
리더는 지혜로워야 한다. 지혜는 리더에게 있어서는 모든 구상과 정책과 결정이 흘러나오는 두뇌의 기획실이다. 리더는 판단과 결정의 홍수 속에 쌓이게 된다. 경솔하게 판단한 결정이 엄청난 회오리바람을 몰고 오는 경우도 있다. 서투른 집행이 일파만파의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도 일어난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하나님께 드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기이한 지혜와 총명을 부여받은 사건이 열왕기서에 소개가 되어 있다. 솔로몬의 통치자로서의 역량과 능력은 이때부터 극대화되기 시작했다. 솔로몬이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에 지혜와 총명을 집중적으로 하나님께 구했던 것은 리더의 통치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일을 슬기롭게 처리하는 지혜와 사리 분별력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총명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탁월한 통치로 말미암아 성취된 국가의 부(富)가 외적으로 나타난 유형적인 산물이라면, 통치의 소프트웨어, 통치를 이루는 정신적인 가치, 다시 말하면 무형적인 가치가 지혜라는 것이다. 만일 그 지혜가 하늘에서 주어진 지혜라면, 비상하고 놀라운 결실을 생산할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당시 온 세계의 군주들이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를 듣고 그 얼굴을 보고자 모여들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열왕기상 10장 24절에 소개가 되고 있다. 당시 국제 사회가 오늘날과 같이 한 국가의 정보가 세계로 확산되는 매체가 빈약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열방에 소문으로 퍼져나갔던 솔로몬의 지혜의 정도와 그 수준을 헤아릴 수가 있다. “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노래는 일천 다섯이며,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으로부터 담장의 우슬초까지, 또 짐승과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했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다. 무려 16개 분야의 천재였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훨씬 더 능가하는 탁월한 지혜가 솔로몬에게 넘치고 있었다. 이런 지혜가 국정 운영에 직접적으로 나타났다면, 그 결과는 찬란한 열매로 귀결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리더, 인재를 선택하다
조직을 경영해본 사람은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실감하게 될 것이다. ‘조직이 인재를 고르는 시대가 아니라 인재가 조직을 고르는 시대’가 되었다. 유비가 삼고초려를 통해서 제갈량이라는 인재를 얻는 것처럼 좋은 인재를 기용하기 위해 그만큼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인재를 기용해서 그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므로 인재의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도 인재 확보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솔로몬이 왕이 되자 조직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솔로몬은 조직이 어떤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부친 다윗의 시대에는 군대장관이 먼저 거론되었는데, 솔로몬 시대에 와서는 먼저 제사장이 거론되고 있다. 이 사실은 시대가 전시가 아니라 평화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리더가 모든 일을 전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력 있는 리더는 인재를 통찰하고 그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인재의 조합을 효과적으로 경영하는 사람이다. 솔로몬은 훈구와 신진을 적절하게 배합하고 조화시키므로 균형 있는 인사 정책을 도모했다. 부친 다윗시대에 중직에 있었던 인재들을 그대로 끌어안거나 그 후손을 과감하게 기용하는 정책을 폈다. 구시대의 사람들을 포용했던 것은 그들의 전문성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은 과감하게 신진 세력을 영입해서 조직을 확장하거나 변화를 주기도 했다. 만일 리더가 균형 감각을 상실하고, 편식을 하는 사람처럼 입맛에 맞는 편중된 인사를 도모한다면, 국정이 건강하게 운영되기보다는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처럼 절름거리는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솔로몬은 전국을 12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고 이를 관장할 12장관을 세웠다. 한국으로 말하면 도지사를 임명한 것이다. 12관장이 관할한 지역은 이전에 열두 지파가 차지한 지역을 근거로 나누어졌다. 이것은 솔로몬이 기존 시스템을 수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2관장 중에는 누구누구의 아들이라고 거론된 인물이 5명이나 나온다. 이 사실은 과거에 영향력 있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솔로몬이 인사정책에서 편파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선과 악, 호와 불호,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시재라는 기준으로 나누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과거 청산이 나쁜 것은 아니다. 반성이라는 분명한 명제가 과거청산을 생산적으로 끌어가고 있다면 모르지만, 맹목적이고 포괄적인 청산이 되어 버리면 거기에서 건져낼 보배 같은 경험들과 자원들까지 매장시켜버리는 비효율성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솔로몬은 이런 면에서 매우 탁월했다.
2부 솔로몬을 통해 본 지도자
대업을 준비하다
솔로몬은 그가 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에 모든 사업에 우선해야 할 최고의 대업으로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결심했다. 당시 여호와 신앙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공통적인 관심사였고, 이스라엘의 구심점이었기 때문에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국가적이고 민족적인 프로젝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다. 그의 부친 다윗 왕이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계획이었다. 엄청난 물자를 준비했고, 설계도를 준비했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레바논 백향목이라는 건축자재와 건축 기술, 돌을 뜨는 기술, 인력 동원, 기술자 확보 등과 같은 제반 조건들이 포괄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판단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두로왕 히람과 외교 협상을 벌이게 된다. 외교라는 것은 단지 한 국가의 리더와 리더가 만나는 단순한 접촉이 아니다. 밀고 당기는 기술도 필요하고, 상대방을 기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절묘하게 설득하는 설득력도 필요하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줄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선도 적절하게 그을 줄을 알아야 하고, 함께 동반하는 수행자들에게도 지엽적인 협상을 통해서 최대의 이익을 챙기게 하는 종합적인 전략을 지휘할 줄도 알아야 한다.
두로는 원래 다윗왕 시대부터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다. 열왕기상 5장 1절에 보면 “히람이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사실은 두로와 다윗왕국과의 관계가 국가적인 이익을 주고받는 건조한 거래관계가 아니라 인적 유대관계가 끈끈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윗이 외교 정책의 영역을 정의와 친분이라는 정신적인 자리까지 진행시켰다는 것을 말해주고, 다윗이 진행한 외교정책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두로왕 히람은 솔로몬의 제안을 흔쾌하게 받아들이고 외교적인 협상이 마무리 된 자리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노라“라고 고백하고, 솔로몬의 통치자로서의 정통성과 타당성을 아울러 인정하는 매우 중요한 외교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외교는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는 자리가 될 수도 있음을 솔로몬과 히람의 외교적인 협상과정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일생에 남을 과업을 이루다
솔로몬은 일생에 남을 가업을 완성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 건축이었다. 지도자는 자신들의 재임 기간에 엄청난 역사적 과업을 성취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존재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큰 건수를 올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세상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걸었던 통속적인 흐름을 따르지 않았다. 솔로몬 왕은 제위 4년이 시작되는 해부터 그의 제위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영광스러운 프로젝트를 시도했다. 바로 하나님의 성전 건축이다. 이것은 부친 다윗의 유언이기도 했고, 그 자신의 신앙적인 열정의 분출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개인적인 야심이나 성취욕과 같은 사적인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았던 순수하고 아름다운 결단을 본다. 자기를 비우지 않으면 제위의 첫 작품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리더의 통치 과정에서 첫 단추를 잘 꿰는 것은 그 이후의 통치 행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시작점이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자기의 개인적인 야심과 욕망을 접고,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 성전 건축에 몰입한다는 것은 백성을 가슴에 끌어안고, 섬기는 정신으로 통치를 펼쳐나가겠다는 고결한 결심의 표현이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은 이스라엘의 구심점과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솔로몬의 부친 다윗왕을 통해서 주셨던 성전의 설계도는 거대한 궁궐을 만드는 도면이 아니다. 성전의 가로가 9내지 11미터, 세로가 27내지 32미터 정도, 높이가 13내지 16미터 정도로 일반 가옥의 2배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는다. 진시황이 건축했다는 아방궁의 세로가 700미터, 가로가 120미터였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초라하고 작은 규모인가?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거처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규모에 스스로를 낮추어 맞추고 계신 것이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다
지도자가 기도하는 지도자로 백성들에게 기억된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베푸는 큰 선물과 같은 것이다. 백성들은 기도하는 지도자를 보면서 안정감과 희망을 갖는다. 리더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진실하고 겸손한 자세를 보인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이만저만한 홍복이 아니다. 적어도 리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이상 리더의 정신은 매우 건전하고 바람직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얼마나 많이 기도했던지 밤이 새도록 기도했던 대통령의 기도를 옆에서 들으면서 저러다가 병이라도 나지 않겠는가 하고 염려했다고 하지 않는가!
솔로몬이 온 백성들을 성전으로 모이게 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성전의 지성소에 들여놓고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는 광경은 화가가 그릴 수 있는 가장 값진 그림과 같은 장면이다. 하나님의 성전 낙헌식에 온 백성을 참여하게 한 일은 국가와 민족의 구심점이 ‘인간’이라는 리더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이다. 대중을 모아놓고 대중에게 잘못된 이념과 사상을 주입해서 대중의 정신을 흐리게 하므로,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는 리더들도 많았다. 리더가 백성들을 모아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하고, 백성들 앞에서 기도하는 진솔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백성에게 제공하는 어떤 선물보다 고귀한 선물이 될 것이다. 적어도 이런 솔로몬의 경건한 자태가 유지되고 있는 동안에는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만끽했으며 국가의 번영은 상승기류를 탔다.
첫째, 언약을 기억하여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했다. 둘째,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응답해 달라고 기도했다.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라고 기도했다. 죄를 짓고 이 성전을 향해 백성들이 기도하면 사하여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성결에 대한 지도자의 의지를 보여 준다.셋째, 성전을 두고 한 맹세에 대해서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는 기도를 한다. 하나님의 판단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재앙을 당할 때 기도하면 허물을 용서하시고, 축복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다. 다섯째, 이방인들의 간구에 응답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기적인 선민의식을 스스로 깨어 부수는 큰 스케일을 들어낸다. 여섯째, 포로가 되었을 때에도 이 성전을 향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영광과 타락
솔로몬의 영광은 스스로의 능력이나 수완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신 결과물이다. 활발한 해상 무역과 조선 사업으로 막대한 부가 쌓여져 갔다. 솔로몬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 열 왕보다 컸다는 열왕기상 10장 23절의 기록은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하나님이 솔로몬으로 애굽의 지경과 블레셋 사람의 땅과 유프라데까지, 더 나아가서 천하의 열방을 관할하게 하셨다고 이스라엘의 역사서인 역대하 9장 26절은 전한다.
솔로몬의 통치 20년이 지날 무렵에 하나님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심으로 솔로몬을 분발케 하고자 하셨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부귀영화의 절정에서 무서운 매너리즘의 늪에 빠져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실패한 군주가 될 것을 우려하신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에는 깨어지고, 겸손해지고, 괜찮아진다. 그러나 승승장구할 때에는 타락의 본성이 나타난다. 그래서 허영에 빠지고, 사치와 향락을 일삼고, 쾌락과 방탕의 나락으로 추락할 가능성이 많은 존재다.
솔로몬은 13년에 걸쳐서 화려한 왕궁을 건축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토목 공사를 일으켜서 국민들을 노역으로 혹사시켰다. 리더가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성취욕과 욕망 충족에 골몰한다면, 백성들을 괴롭히는 괴물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솔로몬의 역사를 통해서 증명해주고 있다. 그 엄청난 부귀영화는 나누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의 천문학적인 부를 나눌 줄을 몰랐다. 솔로몬은 아집과 이기성과 허욕의 사람이 되어갔고, 무려 1000명이나 되는 부인들의 치마폭 속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의 아름답고 고귀한 초심이 행방불명된 것이다. 지도자들의 입에서 자주 듣는 말이 ‘초심’이라는 말이다. 국민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내세웠던 고귀한 비전과 순수한 결심, 청렴의 정신과 애민정신이 끝까지 일관된 지도자가 흔치 않는 세상이다. 솔로몬의 초심이 무너지고 하나님과 멀어지고, 나중에는 온 나라를 우상 단지로 만들어버리는 광경을 보면서, 인간의 뿌리 깊은 약점과 그 죄성을 본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서 손을 떼기 시작하신다. 에돔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수리아가 일어나 이스라엘에게 위협을 가한다. 주변의 허약한 개미 군단들이 갑자기 강국으로 변해서 솔로몬을 곤경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성실한 인간은 흥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타락한 인간은 약해지고 쇠해진다는 진리를 솔로몬의 역사가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3부 남과 북, 왕국의 분열
리더, 분별력 잃다
리더의 분별력이 중요한 것은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서 국가의 운명이 달라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수많은 공직자들과 보좌관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그 의견을 청취하고, 그 의견을 수렴해서 국가적인 큰 정책을 결정해야 할 자리에 있는 리더에게서는 옳고 그른 의견, 최선과 차선과 최악을 구분해내는 총명, 충성자와 아부꾼을 분간해낼 수 있는 안목, 여론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파악해서 그 여론을 국정에 반영할 수 있는 능력은 리더가 가져야할 필수품들이다.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다. 당시 사회 여건은 이스라엘의 국력이 약해진 상태에 있었고, 반란의 기미가 농후했었다. 르호보암이 왕으로 추대되기 위해서는 세겜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왕으로 추대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기름을 받고 대관식이 행해져야 하는데,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던 이유는 무엇인가? 세겜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서 남쪽의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뺀 북쪽의 열 지파의 중심지이다. 이스라엘의 구심점이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이다.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간 것은 열 지파의 충성서약을 받아내겠다는 정치적인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정치적인 분별력은 옳은 판단이다. 그러나 르호보암의 분별력은 여기까지였다. 그 이후에 나타난 르호보암의 행동을 보면, 충성자와 아부꾼을 분별하지 못하는 아둔함을 볼 수가 있고, 백성들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불만이 무엇인가를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자기의 결심 여부에 따라서 거대한 위기가 자기의 신상에 다가올 수도 있는 위기 통찰력이 없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이스라엘의 열 지파는 르호보암에게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부친 솔로몬이 과다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혹사하고 민생에 큰 부담을 주었으므로 과중한 부역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를 추종했던 젊은 계층의 참모들이 원로들의 요구를 비틀었다. 도리어 부역을 더 강화시키고, 솔로몬은 채찍으로 징치했지만 르호보암왕은 전갈로 백성을 처리해야 한다고 르호보암을 충동질했다. 르호보암은 젊은 참모들이 솔로몬의 허리보다 르호보암의 새끼손가락이 더 굵다는 아부성의 말을 듣고 기고만장해졌다. 사람이 기고만장해지면 올바른 분별력을 갖기가 어려운 법이다. 르호보암은 젊은 참모들의 의견을 열 지파의 원로들에게 전하고 감역관 아도니람을 세겜으로 보냈으나 이스라엘의 열 지파들은 아도니람을 돌로 쳐 죽이고,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제 열두 지파의 나라 이스라엘은 열 지파로 구성된 북 왕국 이스라엘과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된 남 왕국 유다로 분단되어 버린 것이다. 분별력 상실이 가져온 참담한 결과이다.
여로보암, 자기 멋대로 믿다
기준이 분명한 사람은 가치관도 일정하다. 어떤 사람의 인생은 구름과 같다. 바람의 속도에 의해서 속도가 달라지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방향도 달라진다. 모양도 수없이 바뀐다. 동그란 모양, 길쭉한 모양, 크게 되었다가 작아졌다가, 새털 모양이 되기도 하고 양털 모양이 되기도 한다. 사람이 자기 멋대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좋은 모양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기의 인생을 구름 같은 인생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보여준 여로보암은 하나님이라는 절대 기준을 버리고 개인적인 감정과 판단, 이권과 이기적인 야심을 삶의 기준으로 삼을 때에, 그 종말이 어떻게 되는가를 교훈하고 있다.
여로보암은 초점을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자신에게로 옮겨버렸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라는 기준을 버리고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 때마다(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남 왕국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행위를 국가존립의 위기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 왕국 백성들의 이 신앙 여행을 막기 위해서 단과 벧엘에 성전을 임의로 건축하고, 그 성전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그 금송아지를 섬기도록 백성들을 종용한 것이다. 이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가 우상 숭배인데, 여로보암은 백성으로 우상을 섬기게 하고, 그 자신도 우상을 섬기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관찰해보면, 왕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의를 지키며, 말씀에 순종하면 창대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뒤안길로 후퇴해서 자기 멋대로 행동했던 왕들에게는 고난과 낭패의 사건들이 소용돌이쳤던 사실을 열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여러 차례 여로보암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돌이키지 않았다. 결국은 그의 왕조는 그의 아들 나답 2년 때에 멸망을 당하고 만다.
영적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끝난 왕들의 이야기: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영적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끝났다는 뜻은 최상품의 질이 끝까지 지속되지 못하고 최하품으로 격하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사건들이다. 처음에는 대중의 폭발적인 인기와 사랑을 받았던 유명 탤런트가 마약과 불륜으로 퇴폐적인 사생활을 즐기다가 쇠고랑을 찬 이야기도 있다. 집권의 시작점에서는 위풍당당하게 등장했다가 나중에는 옹색하고 초라한 처지로 곤두박질친 지도자들의 이야기도 있다, 국가의 경제를 들었다 놓았다 했던 대기업의 회장이 마지막에는 기업을 말아먹고 경제범으로 낙인이 찍혀 법정에 죄인으로 서야 했던 이야기도 있다.
솔로몬의 아들 로호보암왕이 처음의 실수를 교훈 삼아서 열심히 분발한 모습은 하나님을 감동시킨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특히 북왕국 여로보암을 떠나서 수많은 레위인들이 남 왕국 유다로 들어와서 하나님을 섬기므로 남 왕국 유다의 국권은 튼튼한 기반 위에 다시 올라선 듯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하나님 앞에 다시 범죄함으로 백성들까지 동반타락을 하게 했다 .그의 신앙적인 타락의 배후에는 그의 모친이 등장한다. 그의 모친 나아마는 암몬 사람으로 우상을 섬겼던 인물로 추측된다. 성경은 이 모친의 이름이 상당히 뚜렷한 모습으로 소개가 되고 있다. 르호보암에게 지속적으로 악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는 불과 3년 동안 제위에 있었다. 아비야 시대에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 간에 전면전이 일어났다. 여로보암이 이끄는 북 왕국의 이스라엘의 군대와 아비야가 이끄는 남 왕국 유다의 군대 사이에는 현격한 숫자의 차이가 있었다. 여로보암의 군대는 80만 명, 아비야의 군대는 40만 명, 배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 전쟁의 양상을 보면 의외성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열세의 유다 왕국이 우세의 이스라엘 왕국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부수고 있는 것이다. 전사한 북 왕국의 군사의 숫자가 50만 명이나 된다. 여로보암의 군대는 아비야의 군대 앞에서 항복했다.
이 전쟁의 승리의 비결은 무엇인가? 아비야가 이 전쟁에서 준비한 장비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기도와 나팔이다. 아비야의 군대가 앞뒤로 포위되었을 때에 아비야와 그 군대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제사장은 나팔을 불었다고 이 전쟁 과정을 이스라엘의 역사인 역대하 13장 14절은 전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비야의 군대에 개입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승리의 관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비야의 이후 삶을 보면, 타락의 일로를 걸었고 그는 제위 3년 만에 죽었다. 끝까지 같은 색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일관성이 귀하고 보배로운 가치로 평가되는 것이다.
아비야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된 사람이 아사왕이다. 아사왕의 재위 기간은 무려 41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었다. 아사왕 생애의 구조를 보면, 머리와 몸통은 통통하게 살이 찌고 기름이 번들거리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러나 꼬리 부분이 지극히 초라하고 빈약하며 최후에는 말라비틀어졌다. 하나님 신앙으로 시작했다가 인간으로 종지부를 찍어버린 인생이다.
아사의 인격은 겸손이었다. 겸손은 리더의 중요한 자질이다. 겸손한 리더는 독선에 빠지지 않는다. 여론을 살피고 자기 통치의 좌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모든 매스 미디어에 초미의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리더가 겸손을 잃어버리고 교만에 빠지면 독선의 사슬에 매이게 되고, 정학한 정치적인 좌표를 상실함으로 표류하는 신세로 전락할 수가 있다. 교만은 사람을 고독하게 만드는 독성이다. 교만한 사람에게는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하나님도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 가장 아름다운 겸손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관심은 겸손한자에게 집중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사왕의 행적을 보면, 하나님을 위해서 올인하는 감동적인 장면이 많이 소개된다. 유다 왕국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고자 했다. 잘못된 제도를 하나님의 기준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구스가 10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공격해왔을 때에 불과 58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맞서되, 하나님을 의지해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모친 마아가가 우상을 섬기자 태후의 자리를 박탈했다. 하나님의 성전에 막대한 물질을 봉헌했다.
태평성대가 계속되고 나라가 평안해지자 아사는 긴장이 풀어졌다. 그리고 깊은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리더들이 명심해야 할 또 하나의 포인트는 결코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리더의 자리는 전쟁 수행자와 같다. 모든 국민의 안녕과 행복이 리더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더의 자리는 책임의 자리이다. 책임이 가슴에 큰 비중으로 자리를 잡은 리더는 절대로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을 것이다. 탁월한 리더 아사왕이 제위 말년에 심각한 매너리즘에 빠져 하나님을 외면한 사건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가슴 아픈 사연이다. 하나님이 아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그의 신앙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마지막 사용했던 카드가 발병(a disease in his feet)이었다. 그러나 아사왕에게는 이 발병 카드가 듣지 않았다. 아사는 발병 2년 만에 숨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4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비극
이 세상은 목마르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중에서 열 지파의 나라이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고 약속의 백성들이다. 출애굽의 영광스러운 역사, 장쾌한 가나안 승전사(勝戰史)를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자긍심이 높은 민족이다. 이런 민족이 아합이라는 리더의 포악한 통치, 바알신이라는 우상 숭배의 강요로 멍이 들대로 멍이 들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존재가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지워져가는 심각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힘든 시대에 하나님이 사용하신 인물이 엘리야라는 선지자이다. 선지자는 히브리어로 나비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입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청와대 대변인처럼, 엘리야는 하나님의 대변인 역할을 감당했던 인물이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언론이었다. 오늘날에도 언론의 역할과 기능은 막강한 것이다. 리더의 좌표를 수치적으로 파악해서 공표하기도 하고, 리더가 독단과 전횡으로 편향하면 신랄한 비판과 지적을 통해서 제동을 시도하기도 한다. 국민의 이름으로 국정 감독자의 역할을 자청하기도 하고, 지도자에게 방향 설정을 제시하므로 정책 전환을 유도하기도 한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언론으로서 실정의 극을 달렸던 아합왕에게 당당히 맞섰던 인물이었다. 아합이 군대를 동원해서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던 사실은 그 만큼 엘리야의 존재가 아합에게 꺼림직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농업 국가인 이스라엘에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을 것임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게 되는데, 이 기도대로 이스라엘 온 땅이 혹독한 가뭄으로 피폐화되자 아합왕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당시 아합과 그의 부인 이세벨이 섬겼던 우상은 풍요와 비의 신 바알과 아세라 신이었다. 바알은 남신이었고 아세라는 여신이었다. 이 신들은 음란하고 피를 좋아했다. 즉 폭력적이고 전투적인 신이었다. 그들이 바알과 아세라에게 드리는 예배 행위는 말이 제사지, 사제들이 음란한 행위를 예사로 일삼고, 산 사람을 죽여 제물로 바치기도 하는 피의 제사였다. 사람은 자기가 경배하는 존재를 닮아가게 되어있다. 이스라엘 벡성들은 이런 음란하고 폭력적인 신을 섬기면서 성적 타락과 음란 문화, 폭력 문화에 오염되어갔고, 그것은 국력 쇠퇴를 가져왔다. 순결한 신 하나님이 음란한 바알을 용납할 수가 없고, 평화의 신 하나님이 폭력의 신 바알을 용서할 수가 없다. 거기다가 비를 내려 풍요를 보장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미혹당한 백성들이 바알에게 비를 달라고 제사를 드리는 행위를 하나님이 참으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비를 멈추게 하시므로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그리고 참 신임을 각인시키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3년 반이라는 가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아합 정부에 내리신 징벌이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강경 수단이었던 것이다.
아합, 은혜를 외면하다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서 아합을 돌이키고자 하셨다. 아합은 수많은 선지자를 죽이고, 악을 물 마시듯이 행했던 강도 같은 인물이다. 그러나 아합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꺼질 줄을 모른다. 아합은 3년 반 동안 하나님이 비를 내리지 아니하시므로 국가가 경제적인 파탄에 직면하는 심각한 어려움도 경험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실존을 생생하게 목격하기도 했다.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서 다시 하늘이 열리고 비가 쏟아지는 기적도 체험했다. 온탕 냉탕 전략을 통해서 아합의 의식을 환기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성이 눈물겹기까지 하지 않는가! 그래도 아합은 하나님을 향해서 문을 열지 않는다. 아람왕 벤하닷이 30개국의 맹주가 되어서 연합군을 편성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해왔다. 하나님은 벤하닷의 엄청난 군사력 앞에서 아합의 기를 꺾으신다. 이 전쟁에서 아합이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이 전쟁을 불과 232명의 소년 장교를 선봉대로 내 세워 대 승리를 거두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존재를 강렬하게 부각시켰다. 그래도 아합은 오욕과 불의와 우상 숭배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리더 한 사람이 하나님의 정의를 지키고, 정도를 행하며, 백성들에게 도덕과 진실의 사표가 되어서 공정하고 지혜로운 정치를 펴 나갈 때에 국가와 민족은 하나님의 상승기류를 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음란과 섹스, 폭력과 쾌락 문화로 혼탁해지면, 다가오는 것은 멸망과 심판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이 아합왕에게 집요할 정도로 집착하시고, 다각적인 방법으로 손질을 하시는 것은 지도자가 회개하면 일파만파의 엄청난 효과가 생산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합 같은 악당에게도 이렇게 관심을 가지시고 기다리시고 손질하시는 사랑과 자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커트라인을 알게 하신다.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넓다는 것을 이 아합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증언하시는 것이다.
한국의 실정은 어떤가? 인터넷에 점술과 역술 문화가 성업 중이고, 무당 학교가 매력적인 교육기관으로 버젓이 자리매김을 하고, 강남 역삼동에는 점술의 거리가 생겨나고, 이와 같은 점쟁이사업이 날이 갈수록 번창하고 있다는 것을,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자연스러운 사회적 풍조이며, 인간의 종교성이 낳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직업 선택의 자유가 결과한 당연한 귀결이라고 단정해 버릴 것인가? 이런 사단 문화가 대중문화로 정착해 가는 현실에 대해서 리더는 통치의 밖의 문제라고 외면해 버릴 것인가? 만일 지도자가 이런 퇴폐적이고 타락한 대중문화에 대해서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해법을 구하고, 국가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정화작업에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으로 방향설정을 모색한다면, 국가의 장래는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행해가지 않겠는가?
아합은 기회를 잡지 못하면 위기로 돌변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특히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합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벤하닷을 풀어주는 행위는 아합의 자의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리더의 자의성이 지나치면 독단에 빠지게 되고, 독단에 빠지게 되면 권력의 전횡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벤하닷을 죽이지 않고 풀어주는 행위가 결국은 아합 왕에게 치명적인 올무가 되었다는 것을 이스라엘 역사는 교훈하고 있다. 리더에게 많은 권력이 집중되어있는 것은 사실이다. 국법의 틀 안에서 임의적으로 처리해야 할 사안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결정은 여론을 묻고, 국민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최상의 결과물을 산출해야할 사안도 있다. 다시 말하면 자의성이 배제되어야 할 것들이다. 아합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의대로 벤하닷을 놓아주었다가 나중에 이 벤하닷의 나라 아람과의 전쟁에서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를 당하는 부메랑 같은 비극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