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畿湖地方[기호지방]-기호학파[畿湖學派]
다음 백과사전에 버젖이 畿湖地方 [기호지방]이
황해도 남부에서 서울 왕실, 경기지방, 충청 남북도 지방까지 라고 한정하여 규정하고 있다.
다음 한자 사전에는 황해 남부에서 경기, 충청 남북도로 한정한다.
최근 생긴 한민족 대백과 사전에서는 호서지방까지 라며 애매 모호하게 처리하고 있다.
畿湖地方 [기호지방]- 한자 그대로 경기지방에서 호남지방 까지를 말한다.
기호지방이란 말은 주자학에서 주기론과 주리론을 펼치는 과정에서 서로 학풍이 맞는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구분 표시였다.
주자학 주기학파는 경기도 개성의 화담 서경덕이 주자의 주리론에 대항하여 주기론을 창시하고
주기론을 믿는 학자들이 모여들면서 강릉출신의 이이가 이어 받아 파주에서 학풍을 이어간다.
정읍 태인에서는 이항이 수많은 문무관 주기학파 제자들을 길러낸다.
이이는 승려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어서 정계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주기학파의 사상철학을 깨우쳤기 때문에 정치적 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서경덕에 이어 제자들만 길러 내는데 치중하였다.
주기학파의 사상철학은 이성주의, 경험주의, 현실주의, 합리주의로 대표된다.
이때 혜성같이 등장한 성리학자가 기대승이었다.
기대승은 나주의 남인이었으나 광주로 옮겨 700권의 주자의 저서를 120권으로 압축하여
일일이 주석을 달아 해석해 놓은 주자문집 [주자문록]을 완성하고
서경덕의 주기설을 알게 되면서 서인화되는 인물이었다.
이황과 8년간의 사단칠정 논쟁을 거치면서 주기론 vs 주리론의 상호 통제론에 이어
주기론에 약간 더 치우쳐서 이성이 상호 통제한다는 이론적 결론으로 이황을 KO시켜 버렸기 때문에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로부터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황이 신봉하였던 주리론에 치우쳐서 상호 통제하는 게 아니라 서경덕의 주기론에 치우쳐서
이성이 상호 통제한다는 이성의 상호 통제론으로 사회 이성철학을 완성한 성리학자가 기대승이었다.
주기학파는 양광도동인 주리학파의 정신적 지주 이황이 신봉하였던 정이학이나,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였고 정신적 지주였던 송익필이 신봉한 정주학도 인정하지 않고
예학, 주자가례와 더불어 도교적인 학문인 정이학, 정주학 등을 주자학 내에서 퇴출시켜
맹자의 심성론, 천성설, 성선설만을 가르쳐 조선을 개화하여 근대화시키려 했던 학파였다.
1572년 기대승은 광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가 사간원의 대사간 직을 제수받으며 선조를 만나면서
대기실에서 오랜동안 기다리다가 차를 마시는 바람에 몸이 아파 사흘후 사임하고
광주로 내려가다가 정읍 고부에서 비명횡사한다.
정읍 태인에 주기학파 이항이 있었기 때문에 만나고 가려던 중에 만나기 전후 사망하고 만다.
대부분의 주기학파 제자들은 정읍 태인 이항의 수제자들이 명맥을 이어간다.
이항이 주기학파의 실질적인 대부였다.
강릉의 이이는 정계에 일시 진출한 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학파 분류에서 기호지방에 포함되지 못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맹활약을 펼치는 황박, 정담, 황진, 김경로, 이복남, 송상현, 선거이, 이순신 등이
이항의 제자이며 이밖에 이항의 수제자인 전주 부윤 남언경, 김천일 등 수많은 문관, 무관들이
주기학파[근대식개혁학파]의 사상철학인 근대 이성철학을 깨우쳐
호남지방을 방어하고 승리하는 원동력이 된다.
호서지방[湖西地方]은 한자 그대로 충남지방에서 전북 서부지방을 말한다.
호남지방[湖南地方]은 전라 남북도만을 가리킬 때 부르는 말이다.
호북지방[湖北地方]은 충청북도와 전북지방을 말하는데 현재 이 표현은 쓰지 않는다.
후일 추풍령과 죽령을 경계로 영서지방과 영동지방으로 분류하였기 때문이다.
영서지방[嶺西地方]은 강원도 원주에서 추풍령 서쪽지방을 말한다.
영동지방[嶺東地方]은 강원도 원주 영월 이남에서 추풍령 동부지방을 말한다.
해서지방[海西地方]은 패서[浿西]지방이라고도 하며 황해도에서 평양남도 평양 이남 지방인
패수[浿水]지방을 말한다. 패려[稗麗]지방이라고도 한다.
서북지방[西北地方]은 자강도, 평안북도, 평안남도 평양 이북 지방을 말한다.
관서지방[關西地方]은 관동지방 서부지역에서 마식령산맥 서부 중앙 내륙지역을 말하는 것이었다.
관동지방[關東地方]은 태백산맥 대관령 동부지방을 말하며 강원도 중심 삼척,강릉 이북 지방을 가리킨다.
관북지방[關北地方]은 함경 남북도 지방을 말한다.
영남지방[嶺南地方]은 충북 영동 추풍령[秋風嶺]이남, 경북 문경새재 조령 이남,
충북 단양, 제천 죽령 동부 이남 지방을 말한다.
학파와 령[嶺]을 중심으로 기호학파인 주기학파, 주리학파가 나온 것이다.
주기학파가 기호학파라고 불리우게 된 것은 호남의 주기학파인 광주의 영의정 박순,
성혼[광주 출신 한성 태생/이이와 함께 파주 활동], 장성의 김인후, 정읍 태인의 이항을 중심으로
40여 명의 주기학파가 형성되어 동인 주리학파와의 협상을 통해 이이의 이기 이원론적 일원론으로
협상을 완료하였기 때문에 기호학파[畿湖學派]라는 말이 붙은 것이다.
그래서 畿湖地方 [기호지방]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기호학파[畿湖學派]중 주기학파가 444년을 앞서간 선각자들이었고,
주자학 내에서 정이학, 정주학, 예학, 주자가례 등을 혁파하고 혁신적인 개량을 하여
조선을 개화하여 근대화시키려 하였던 주역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주기학파 40여 명이 유배를 가면서 조선의 근대화가 사라지고 정묘, 병자호란을 맞이한다.
주기학파는 유배지에서 심장이 타들어 가는 시기를 보내며 조선의 근대화가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였다.
이후 주기학파의 사상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여
영남 낙동강 서부지역인 대북의 조식학파를 인조반정으로 몰아내고,
양광도 서인 송시열 [노론학파]정권은 송익필이 완성한 주가가례를 오히려 엄격히 적용하기 시작하였고,
남인 윤휴학파 정권 유직은 주기학파의 주기론과 이이의 이기 이원론적 일원론이 성리학의 이단이라며
맹공을 펼쳐 주기학파의 사상철학은 완전 소멸해 버리고 만다.
그 이후 윤휴학파 허목은 영의정으로 오른지 하루 만에 효종을 독살하고 북벌정책을 무너뜨린다.
이들은 주기학파의 사상철학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학파들이었다.
후일 양광도 동인 노론정권은 주기학파의 사상철학의 기본 이해도 하지 못하여
정조의 신분제 철폐론을 없애버리고 60년 세도정치를 이어가면서 천주교 박해 사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후 일제시대로 들어간다.
원래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나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는 주자학 이외에 기타 종교는
인정하지 아니하였다. [정이학, 정주학 안에 도학이 포함되어 있음]
주기학파는 주자학 이외의 기타 종교도 인정하는 학파였다.
도학(도교니즘)만은 철폐시키려 하였다.
이이가 승려 출신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필요하다면 불교를 비롯한 샤머니즘, 토테미즘 등도 인정하는
민주적인 학파였기 때문에 현대인보다도 더 진보한 현명한 학자들이자 천재 석학들이었다.
단지 기타 종교를 갖기 이전에 주기학파의 사상철학을 전 국민에게 전파하여 이해시킨 후
그래도 부족하면 기타 종교를 갖게 하려 함이었다.
이성이 정립되지 못하고 확립되지 못한 대군 양성은 끊임없는 권력투쟁과 군사반란만을
일으켜 왔기 때문에 주기학파의 사상철학을 통한 이성주의, 경험주의, 현실주의, 합리주의 철학을
전 국민에게 교육시켜 근대화시키려 하였던 학파였다.
주기학파를 주도한 학자들이 서인 기대승, 이이, 이항을 이어 광주의 영의정 박순을 중심으로
성혼, 김인후 등 40여 명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기호지방이라는 말이 확대되어 불리워 지게 된 것이다.
주기학파의 종교는 "인격완성을 위한 이성"이다.
주기학파에서 정립한 이론은 "인간이 신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의 주권을 가지고
스스로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즉, 주자학 주기학파에서의 종교는 이성이며, 이성의 본질을 설명하기를
"이성은 우주 절대 불변자의 일부이며 우리 인간 또한,
초월적인 존재의 일부란 사실을 깨닫고 수양철학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하고 이성을 회복하여
인격을 완성하고 나면 해탈하게 되어 초월적인 존재의 일부란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 존재와 대등해 지게 된다는 철학을 말한다."
기호학파, 기호지방은 말그대로 학파와 학풍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기 개성에서 시작되어 기대승으로 이어지며 이이[서인으로 활동]를 거쳐
광주 출신의 한성 태생 성혼, 정읍 태인의 이항, 장성의 김인후, 광주의 박순으로 이어지는 주기학파에
범 서인학파를 기호학파라고 하였으며, 여기에서 기호지방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주기학파는 이렇게 학파를 형성하였다.
영의정 박순이 중도파 성혼의 중재로 동인 주리학파와 협상을 완료하고
전 국민에게 가르치기 위해 교육을 시키고 주기학파 제자들을 양성하며 조선을 개화시켜 가며
근대화시켜 가던 중에 1592년 4월13일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앞세운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이
선조의 국서 조작 문제로 처벌을 피하려고 선제적으로 대응하여 십자가를 목에 걸고 부산을 침공하기 시작한다.
즉, 기호학파라고 하면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송익필, 정철, 윤두수, 윤근수, 김집, 김류,
충북 옥천의 송시열 노론학파로 이어짐]
주자학 중도파 [성혼, 조헌]-충남 논산 노성 윤증의 소론학파로 이어짐.
주자학 개혁 혁신파 [서경덕, 기대승, 이이, 이항, 박순, 성혼, 김인후 등 호남을 중심으로 하는 40여명]로
이어지는 근대식 개혁학파/근대 이성철학파를 총칭하는 말이다.
엄밀히 학풍으로는 기호학파와 주기학파는 각각 학풍이 다르지만, 같은 서인으로 친분 관계는
두터웠기 때문에 기호학파라고 불리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정여립 학파에 가담한 동인 이발, 백유양 등은 신분제 철폐를 거부한 송익필이
서얼 출신이란 사실을 알고 안처겸 가문에 송사 배후를 지원하여 노비로 환천되면서
도피 생활을 할 때 동인 주리학파 이산해가 도와주고 정여립 학파가 기축옥사로 타도되자,
송익필에게 이이를 비판해보라고 농락하지만 송익필은 이산해가 권력을 독점하려 했다면서
오히려 비판한다.
[송익필이 정여립의 기축옥사 사건을 비유적으로 비판한 것임]
1587년 정여립 학파의 대동계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위해 사전 탐색하러 나왔던
왜군 지리 정찰대를 토벌하면서 양광도 동인 권력에서 호남 동부의 정여립학파,낙동강 서안 [경상 우도]
조식학파 연합으로 동인권력이 급속히 이전되는 시기에 기축옥사(1589)가 발생하였다.
기축옥사로 정여립 학파가 제거되자 동인권력은 다시 양광도 주리학파 이산해, 류성룡파가 차지한다.
1572년 기대승이 당하고 정여립의 기축옥사에 이어 주기학파의 영수 박순과 성혼 등은
동인 주리학파 이산해, 류성룡파가 정치보복을 시도하자,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정철 등을 내세우고
물러났는데 정철도 1591년 2월 결국 당하고 서인권력까지 동인 주리학파가 차지하고
1년후 1592년 4월13일 임진왜란을 맞는다.
[동인 주리학파가 힘이 쎘던 이유는 주희[주자]의 주리철학을 이어가는 학파였고,
주기학파의 주기철학은 주자학을 정면으로 거부하며 성리학 반란 사건을 일으키고
완성된 학문이었기 때문에, 동인 주리학파가 중국에 고자질하면 완전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전전 긍긍하였으며, 이것으로 정치적으로 권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여
1591년 2월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 이산해, 류성룡파가 권력을 독차지하며,
조선 최초로 세력 중심 권력체제로 들어간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선조가 파주 근처에서 성혼을 만났을 때 성혼이 선조를 쳐다 보지도 않고
고개를 뻣뻣이 들고 인사도 하지 않고 냉소적으로 대하며 협력하지 않게 된다.
성혼은 주자학 중도파의 수장으로 제자로 김포의 조헌 등이 있으며 충남 논산 노성 윤증의 소론이
그 중간 단계인 양명학으로 대체하여 대를 이어가지만 양광도 서인 노론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는다.
소론에서 주기학파의 사상철학을 이어 실학사상, 개화사상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1591년 2월 정철이 주색에 빠져 국사를 그릇쳤다며 모함을 받아 강계, 강릉, 강진 등으로
유배와 좌천을 반복하게 하고 서인 정권에서 동인 주리학파 이산해파 정권으로 교체된다.
동인 주리학파 정권은 중앙 요직인 선전관, 비변사의 비변랑 등 군사 핵심 요직에서
동인으로 교체하고, 호남파 문무관들을 모두 고향으로 5~7품계 직급 강등하여 좌천시키면서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1591년 2월 이순신도 정읍 현감 [종6품]으로 좌천된다.
이순신은 니탕개의 난 [尼湯介의亂 1583년] 이후 서인정권 당시 1585년 잔당들이 쳐들어 올 때
조산보 만호 [종4품], 녹도 만호 [대령과 준장사이의 직급]였으며 직속 상관 이일의 도주로
패전 책임을 지고 1586년 잔당 소탕작전에 백의종군하였는데 1586년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이순신을 거두어 조방장[종3품~정3품]으로 기용한다.
이때 이미 주기학파 이순신은 장군 반열이었다.
그 후 이광이 중앙 선전관 요직으로 보내 선전관, 비변사를 거쳐 활동하다가
1591년 2월 정철이 탄핵을 받아 유배를 가고 동인정권으로 교체되자 바로 종 6품 정읍 현감으로 좌천된다.
그런데 정읍 태인에서는 주기학파 이항이 호남에서 주기철학을 배우기 위해 태인으로 집결한 남언경,
김천일 등 수많은 문무관 주기학파 제자들을 길러낸 곳이었다.
니탕개의 난 때 신립과 함께 출정하여 대승을 거두고 선전관, 비변사의 군사 핵심 요직인 비변랑을
두루 지낸 웅치전투의 승전장 정담은 김제 군수로 좌천되고 남원의 이복남은 나주 판관으로,
웅치 1차방어선 주장 황박[黃璞]장군은 김제로 낙향해 버리고, 김경로는 김해 부사,
송상현은 부산 동래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밖에 황진,김천일 등 이름있는 참모급 장수들도 호남으로 좌천되었다가 임진왜란 발발 후
전주성과 남원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들 문 무관들이 모두 주기학파 이항의 제자들이었다.
이들이 신립과 함께 1583년 니탕개의 대군을 토벌한 주역들이었으며 서인정권 때만 되면
임진왜란, 정유재란 전쟁에서 맹활약을 펼친다.
그래서 개성으로 몽진해 가는 선조 행렬을 찾아가지도 않고 성혼이 냉소적으로 대하며 비협력하게 된다.
선조는 뒤늦게 성혼을 만나보고 가겠다며 파주로 사람을 보낸다.
1592년 6월 9일~12일 평양 몽진지에서 임진왜란 발발 책임, 개전초기 패전책임, 한양 함락책임을 물어
동인정권에서 서인정권으로 교체한 후 1592년 7월 7일 웅치, 슬치, 이치 전투에서 부터 금산전투,
상주전투, 성주성 전투, 진주대첩, 행주대첩, 함안전투, 무주 무풍대첩, 진안 성주성 전투, 죽산성전투
성산 전투, 거창 지레 사랑암 전투, 영덕, 영해전투, 울산전투 등 1593년 10월24일 한양 환도 때까지
연전연승을 한다.
한양 환도 사흘 후 동인 주리학파는 정철에게 광해군을 왕세자로 옹립하라고 사주하여
광해군을 싫어했던 선조에 의해 서인정권이 실각당하고, 다시 동인정권으로 교체되면서부터
연전연패하며 강화 시기로 접어들어 가게 된다.
동인 정권 시기에 이순신이 부산포로 출전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끌려가
옥고를 치루고 백의종군하게 되는 시기다.
이것만 봐도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부친 이정)이 전북 정읍이거나 전남 남해안의 남인 출신으로
호남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서인 전라 관찰사 이광이 일부러 남인을 전라 관찰사의 군사 참모 조방장으로 임명할 가능성이
낮았으므로, 현조부, 조부가 정읍 출신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순신 부인은 전남 보성 군수를 지낸 방진의 딸).
[조부 이백록이 조광조의 기호 사림파인 개혁파에 가담했을 때 서울 건천동(인현동) 남인 지역에 자리잡음.
기호 사림파 때는 당파 형성 초기 시대라 남쪽에서 올라 갔으니 건천동에도 같은 호남인이 있어
그대로 자리잡은 것으로 판단됨]
광주의 김덕령이 강화 시기에 왜군을 토벌했다며 1596년에 일어난 한현, 이몽학의 난에 연루시켜
김덕령이 정강이 뼈가 부러지는 고문을 당하다가 춘산곡을 남기고 장독으로 인해 죽고 만다.
이순신은 정읍 현감을 지낸 지 1년후 1592년 3월 경 전남 해남 고사리 첨사 [종3품], 만포 첨사 [종 3품],
진도 군수 [종 3품]를 거쳐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전라 좌수사[정3품]로 오르게 된다.
[군수는 원래 종 4품인데 전라도만 종 3품 장군급.
수군은 누구나 가기 싫어했기 때문에 좌천성으로 임명된 것임].
선조 시기까지만 해도 호남 출신들은 호남으로 발령받거나 좌천되었고,비리 관련자만 북한 지역으로
좌천시키거나 유배를 보냈으며, 동인, 남인은 북방으로 발령받거나 좌천시켰다.
동인, 남인이 중앙 요직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북방 근무가 필수적이었다.
호남 동부지방 출신은 김해, 부산지방까지 발령받거나 좌천되었다.
[정읍의 동래부사 송상현 동래성 전투]
서울, 경기, 충청인들은 동남부 지방으로 발령받았다.
[청주의 김시민 진주대첩, 연천의 수군 첨절제사 정발 부산진 전투]
동인 주리학파 이산해파 때부터 이 구도가 깨지기 시작하여 동인을 영남지방으로 발령을 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1년후 풍신수길의 선봉 군단 고니시가 국서 조작문제로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부산을 침공하기 시작한다.
1583년 니탕개의 난 때 신립이 왜 승리할 수밖에 없었고 임진왜란 개전 초기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는
8천 기마대군이 그리 쉽게 패했는지는 사령관이 참모급 장교와 전술 지휘관 누구를 거느리고
싸웠는지에 따라, 승패가 확연히 달라진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즉, 주기학파의 교육을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 영향을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의 차이는
현대인과 중세, 고대인의 차이 만큼이나 그 간극이 크다는 것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에 비해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은 1천 기병으로 여산전투에서 왜군의 척후 선봉연대를 궤멸시킨다.
임진왜란 최초의 정부군 승전전투는 최원의 1천기병의 승전으로 시작되었다.
백과사전은 다분히 의도적인 분류를 하였으며
2천년 이전까지만 해도 기상청[기상대]에서 사용하던 것을 자기들 맘대로
엉터리로 분류해 놓고 있는 것이다.
p/s
정읍 태인까지가 우륵(우르)가야 문화가 발견되는 지방으로
호남 동인의 최서부 지방이었고, 경상 우도[낙동강 서안지방]까지 대변하였음.
영조의 모친인 숙빈 최씨가 태인 출신으로 범동인 중 영호남 동인을 대변하였음.
이인좌의 난이 숙빈최씨 때문에 종 5품 이상 99년간 등용 금지에서 5년 후부터
점차적으로 풀리게 되는 원인이 됨. [김유신의 시조 구형왕(김구해)묘도 경남 산청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