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글을 쓸 때 100편을 쓰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글을 쓰다보니 더 이상 쓸 얘기가 없다.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내 딸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다. 아빠가 어떻게 살았고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내 둘째딸은 문예창작과을 나와 웹소설 작가로 데뷔를 했고 , 게임회사 스토리텔링 작가로 일을 했다. 아마도 오랜 시간을 글을 쓰는 일을 하며 살아갈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혹 나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을 때 이 글을 토대로 글을 쓸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쓰게 되었다. 나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여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적다. 아버지의 사랑을 느껴보지 못해 내가 자식을 나면 듬뿍 사랑을 나눠줘야지 생각했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딸들의 어린날을 생각해보면 딸들을 위해 해준것이 별로 없다. 공부를 잘하라고 종용해본적도 없다. 그냥 잘 하겠거니 지켜보기만 했다. 큰 딸은 공부를 곧잘 했던것으로 안다 그래서 내가 다녔던 선린에 입학하라고 권했다. 선린은 상고에서 인터넷고동학교로 바뀌었다. 선린인터넷고등학교를 입학하기 위해선 중학교 성적이 상위 10% 안에는 들어야 했다. 그리고 선린을 졸업하면 서울 명문대학교로 입학을 할 수도 있고 외국유학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딸은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 웹운영과를 다녔는데 자기 적성하고 잘 맞지 않은듯 했다. 학교가 있는 남영동은 집에서 멀었다. 집 근처 고등학교를 다녔다면 힘도 들지 않고 대학교도 본인이 원하는 대학을 다닐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선린을 선택한 나는 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딸은 전문대학 의상디자인 학과를 졸업했으나 사회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알바 등을 전전하고 있다. 이 모든것이 나의 잘못이다. 그나마 어릴 때 다닌 영어유치원과 캐나다 영어 연수를 통해 영어는 약간 자신이 있는듯 했다. 그래서 영어와 관련된 일을 재택으로 하고 있다. 어째든 한 세월 살아가는데 불편함 없이 살아 갈 수 있다면 좋겠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딸이 30살이 넘었음에도 남자가 없다는 것이다. 나나 집사람이 얼마나 딸들과 오래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죽고 나면 자신을 편들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것 같아 걱정이 된다. 미우나 고우나 결혼을 해서 지지고 볶으며 자식을 낳고 남편과 자식을 의지하며 사는 인생이 혼자 사는것 보단 백배 천배 좋을것 같은데, 좋은 남자를 만나는것이 쉽지 않은가 보다. 그렇다고 우리 부부가 딸들의 결혼에 적극적이지도 않다. 나는 딸들의 인생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냥 옆에서 지켜볼 뿐, 잘되던 못되던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단지 남자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슬플것 같다. 온 세상을 불태우는 사랑은 아닐지라도 남자를 만나 몸도 섞고 마음도 썩으며 살아가길 원한다. 내가 해줄수 있는것은 기도 밖에 없는것 같다. 둘째 딸은 언니와 달랐다. 어릴적엔 적극적으로 나서는것을 무서워 하지 않았다. 대여섯 살 때쯤 어딘가로 여행을 가다 고속도로 휴게소를 잠시 들렀다. 휴게소에선 어린이들을 상대로 노래자랑을 하고 있었다. 딸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그리고 상픔을 받았다. 어린시절만 봐선 어디서든지 잘 어울리고 잘 적응할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중학교에 올라가선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 어디가 아파서인지 아니면 왕따를 당해서인지 잘 몰랐다. 중학생이 되고 나선 말이 없어지고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사춘기의 시작이었다. 사춘기 딸을 지켜보는것은 비가 많이 와서 둑이 터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잘 안기던 딸이 옆집 아저씨를 보듯 나를 처다볼 땐 처신하기가 어려웠다. 인근 고등학교에 들어간 딸에게 학교생활을 잘하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학교까지 대중교통이 좋지 않던 딸을 자가용으로 실어 나를 뿐이었다. 고3 여름이 되었는데 갑자기 소설작문법을 배우는 학원에 다녀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딸이 진지하게 책을 읽는것을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딸은 학원을 다녀 문예창작과에 입학하겠다고 했다. 6개월 정도 학원을 다닌 후 서울에 있는 대학교 문창과에 합격을 했다. 다른 친구들은 고등학교 입학 후 3년동안 학원에 다녔지만 합격이 안된 친구도있다고 했다. 내 딸에 대하여 너무 몰랐을까, 아니면 타고난 재능이 있었을까? 대학4년 동안도 딸이 책을 읽는걸 많이 보진 못했다. 오히려 내가 딸보다 더 많은 책을 읽은것 같았다. 그러나 딸은 대학 졸업 후 바로 웹소설 작가로 데뷔를 했다. 타고난 글쓰기 재주가 있는것 같았다. 글을 써서 먹고 살기는 쉽지 않다. 작가란 직업만으로 돈을 벌어 생활하기가 쉽지 않다. 웹소설을 연재해서 약 15백만원의 소득을 올린것 같다. 웹소설을 쓰는 7~8월 동안 밤 잠을 못자고 써내려 갔다. 마감 시간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것 같았다. 창작을 한다는것은 보통 어려운일이 아니다. 그런데 들어오는 수입은 상대적으로 너무 적었다. 물론 작가로 데뷔조차 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을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되어 글을 쓰는것이 노동판의 막일처럼 힘들어 보였다. 특히 웹소설은 마감시간이 있어 스트레스가 많았다. 연재가 끝난 후 다른 소설을 창작 출판사에 제출 했는데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출판사는 여러 작가들을 관리하며 작가들이 쓴 소설로 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작가로 산다는것은 연예인으로 사는것과 같았다. 어떤 작품이 터지면 인기도 끌고 돈도 많이 벌지만, 그런 사람은 1%나 될까 생각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닌 이상 현실 생활을 해나가긴 쉽지 않았다. 나는 딸이 평생 글만 쓰고, 먹고 사는건 내가 해결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었다. 딸은 서너달이 지나 게임회사에 스토리작가로 입사를 했다. 딸이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다른사람들과 함께 협업하여 일하게 되어 나는 안심했다. 작가는 혼자 글을 써야 하기에 시야가 좁아질까 걱정했다. 회사생활이 다른 글을 쓸 때 소재로 사용될 수 있을것으로 생각했다. 딸은 오늘도 만원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했다.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아 직원들이 많이 해직되었다고 한다. 딸도 조만간 해직될것 같다고 한다. 남의 돈을 벌어 먹고 살기가 그만큼 어렵다. 비록 내가 딸들을 이세상에 태어나게 했지만 해줄 수 있는것이 많지 않다. 그저 지금까지 그랬던것처럼 지켜보고 있을 뿐, 이 아비가 해준것이 없지만 딸들은 잘 커왔다. 단지 바라는것은 좋은 사람 만나 아비가 없더라도 두 손 꼭 붙잡고 평생을 의지하길 바랄뿐이다. 이것조차도 너무 큰 기대일까
이것으로 이 글을 마치려 한다. 내 생애 전반을 되짚어 보니 행복도 있었고 위기도 있었다. 그러나 그저 평범했던것 같다. 평범하게 살아온 내 자신에게 고생했다고 위로하고 싶다. 이제 살날이 살아온 날보다 짧지만 그냥 이대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길 천지신명께 기원해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