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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호-진리의 등대지기들
1.권두언
강병국 목사
제가 한번은 로마의 지하에 건립되어 있는 카타콤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퀴퀴한 냄새와 함께 계단을 따라 점점 더 깊이 내려 가면서 저는 그 장관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로 인도하는지 모를 정도로 갈래 갈래로 흩어져 있는 통로들, 그리고 벽마다에 안치되어 있는 수많은 시체를 담은 관들,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그 곳 벽들에 새겨져 있는 그림들과 글씨들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의 아침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었는지를 역력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희를 인도하던 안내자가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카타콤에 숨어있던 자들이 핍박을 피하여 숨은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 당시에 핍박은 없었습니다!”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러한 말을 할 수가 있을까요? 그렇게 분명하고도 엄청난 증거들을 보여주는 안내의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말을 하다니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하기야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이 유태인들을 핍박한 일이 없었다는 엉뚱한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과거 기독교 역사에서 핍박이 전혀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핍박이 있었다는 것은 진리를 위한 투쟁이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언제, 왜, 무엇 때문에 투쟁이 있었는지를 알 필요가 생기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과거의 역사를 올바로 알지 못하고서는 밝은 미래를 계획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역사를 올바로 알고 나서야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사명을 드디어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 호는 여러분들이 과거 기독교회의 역사를 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 변천사를 통하여 우리가 현재 어디에 와 있는지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사명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릴 것입니다.
2.진리의 등대지기들
강병국
진화론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지구는 작은 미생물에서부터 차차 진화되어 왔으며, 그 변화하는 힘이 그 물체 자체에 있다고.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창조론은 그 정반대이다.
성경은 이 지구가 하나님의 계획적인 디자인에 의하여 창조되었으며 변화의 힘이 피조물인 그 물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하나님께만 있다고 말하고 있다.
종교의 흐름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는 인간들의 구미나 변화에 맞추어 진화되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시작도 하나님의 능력이요, 그 흐름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기초는 성경이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이다. 이 신앙의 기초는 흔들릴 수도 없고 변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신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의 가르침들이 흔들리고 변조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교리들이나 신앙의 행습들을 인간의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식의 종교적 진화론들이 교회 속으로 스며 들어 왔다. 이렇게 교회의 가르침들이 성경의 원래 가르침으로부터 떠나가는 일이 너무나 오랜 세월을 두고 조금씩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사실조차 모른채 살아가고 있다. 그럴 때마다 교회 안에서는 원래의 신앙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종교개혁의 목소리들이 있어 왔다. 물론 그럴 때마다 반대와 핍박을 받아 왔고 많은 경우에 극단으로 몰려 외면당했다.
진리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편이다.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 얻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외면하고 편리한 다른 길로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며 그 분의 뜻대로 살도록 붙들어 매어 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10).
현대 교회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원래의 진리들과 그 신앙 사상에서 멀리 떠나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 가르침은, 현대 교회들의 성장 과정들과 또한 인간의 구미에 맞게 탈바꿈한 가르침들과 너무나 달라서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도대체 우리의 선구자들이 우리에게 그 진리들을 전수하여 주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과 핍박들을 감수해 왔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진리의 전사들
중세기의 종교 암흑 시대 동안, 이 세상은 캄캄한 어두움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진리의 빛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증인들,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의 중보자이심을 확실히 믿고, 성경을 인생의 유일한 지침으로 삼고, 하나님의 진리를 구별하여 지키는 증인들이 있었다. 세상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에 대하여 후세의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이단자로 낙인이 찍히고, 그들의 동기는 비난을 받고, 그들의 품성은 중상을 받고, 그들의 저서들은 압수당하고 오전되고 삭제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핍박에 굴하지 않고 굳게 서서 다음 세대에게 그들리 피로써 지킨 순결한 진리와 믿음을 물려 주었다.
불란서의 동남쪽, 이태리의 북서쪽에 자리잡은 알프스 산맥의 한 줄기에 피드몬트라는 골짜기가 있다. 그곳은 중세기 동안 극심했던 핍박들을 피하여 도망해 살았던 왈덴스인들의 본거지로 유명하다. 서부 유럽에 위치한 로마 교회의 권위가 득세하자 성경대로 살려고 하던 사람들에게 핍박이 시작되었다. 교회는 하나님 대신 인간을 교회의 머리로 삼고 정치와 타협하여 교회의 가르침은 물론 그 신앙의 행습들을 바꾸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소아시아 지방인 알미니아, 영국 쪽의 스코트랜드와 아일랜드, 또는 아프리카의 이다오피아나 인도 남부등으로 피신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에 알프스 산맥 피드몬트 골짜기에 모여 살게 된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우리는 왈덴스인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중세기의 종교 핍박 당시에 성경의 가르침을 고수하여온 자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그곳을 직접 찾아 방문하였을 때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들이 운영하던 작은 신학교 건물이 지금도 잔재해 있는데, 돌들로 지어진 작은 방 중앙에 큰 돌로 고여진 한 책상이 있고 그 돌 책상 위에는 하나의 성경만이 쓸쓸하게 놓여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의 가르침만이 그들의 신앙과 행실의 기초가 되었다. 그들은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는 그 당시의 교회의 명령에 불복하며 몰래 성경들을 복사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들을 과감하게 행하였다. 목사들과 청년들은 복사한 쪽 성경들을 품 속에 감추어 마치 행상들인 것처럼 가장하여 여행하면서 진리를 나누어 주었다. 책자들을 감추어 다니느라고 그들은 항상 품이 넓은 옷만 골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시대의 유행하는 옷들을 절대로 입을 수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교회가 명령하는 구원의 조건들을 따라 행하느라고 마음의 평화를 잊은 채 살아 가고 있었다. 로마 교회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교회의 권한에 두셨다고 가르쳤고 교회는 그 구원을 나누어 주기 위한 방편들을 제공한다고 설득하였다. 그래서 교인들은 먼 성지들을 순례하는 일이나 오랫동안 기도하는 로자리 기도들, 신부들에게 죄를 고하는 고해성사, 그리고 자기를 학대하는 고행들, 많은 금식들과 금욕의 생활들로 지쳐있었다. 그러한 자들에게 왈덴스인들이 전해주는 성경의 복음들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을 듣고, 고해와 행함으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소식에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였다. 이렇게 나누어진 진리들과 쪽 성경들은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가게 되었으며 바로 이러한 숨은 활동들이 드디어 종교 개혁을 낳게 된 것이다. 왈덴스인들이 뿌린 씨앗이 종교개혁으로 열매를 맺게 된 것이었다.
왈덴스인들이 당한 핍박은 끔찍한 것들이었다. 필자가 그곳 피드몬트 골짜기를 오를 때에 한 큰 바위 밑에 있는 적은 입구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그 바위 속에 있는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그 입구를 거의 엎드리다시피 하여 기어 들어가 보니 그 속에 꽤 넓은 방이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 숨어 예배를 드렸다. 한번은 로마 교회가 보낸 십자군들이 와서 그 입구에 불을 놓았다. 연기 때문에 견디지 못한 왈덴스인들이 어린아이들과 여자, 노약자들과 함께 바위로부터 기어 나올 때에 십자군들은 몽둥이로 그들의 머리를 내리쳐 무수한 피를 흘렸다는 것이다. 겨울철이라 그 주위에 내린 눈이 그 피로 붉게 물들었었다는 사실이 역사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어린아이들은 침묵을 지키는 철저한 훈련들을 받았다. 그들이 입을 열면 온 가족 아니 온 동네가 몰살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군대에게 잡혔던 한 왈덴스인 아이가 매를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 입을 열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사고 파는 권리를 빼앗긴 채 살아가야만 하였다. 그들의 별명은 유리하는 자들이었다. 진리 때문에 집과 재산들을 다 몰수 당하고 유리할 수 밖에 없었다. 진리를 고수하기 위하여 그들은 이 세상의 평안을 포기한 것이다.
이와 같이 왈덴스인들은 마틴 루터가 나타나기 수세기 전에 하나님을 위하여 증거하였다. 여러 나라로 흩어진 그들은 위클립 시대에 시작된 종교 개혁의 씨를 뿌렸는데, 그 운동은 루터 시대에 이르러 한층 더 깊고 넓게 자라났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계 1:9) 모든 고난을 즐거움으로 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마지막 시대까지 계속하여 진행될 것이다.
순교자들의 외침
중세기의 종교 암흑시대 동안에만 무려 5천만내지 1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길을 걸었다고 역사는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진리들을 위하여 우리의 선조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과 시련들을 감수하여 왔는지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순교자들, 고문실과 감옥 속에서 죽어 간 많은 종교 개혁자들이 무덤 속에서 우리를 향하여 외치고 있다. 당신은 성경의 진리를 보전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현대 교회는 엄청난 타협의 물결 속에 살아가고 있다. 어떤 때에는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오류인지조차 구분하기가 힘든 어두운 상황들이 전개된다. 요즘처럼 이렇게 교회가 발전했던 시대는 과거에 없었다. 그러나 그 기반이 진리의 반석이 아니라 타협의 모래 위라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다.
진리는 구원의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방주를 통하여 홍수에서 구원하셨다. 성경 진리는 이 세상의 죄악의 물결과 마귀의 속임수에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방주와 같은 것이다. 이 성경 진리를 타협시켜 하나님의 교회를 타락시키는 것이 사단의 계획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끊임없이 보호되고 보존되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부르셔서 종교 개혁을 시도해 오셨다. 그 사업은 모든 시대마다 점진되어 왔다.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확실하고 분명한 종교 개혁이 필요한 시기이다. 종교개혁 사업은 아직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이번 호는 여러분들에게 기독교회 역사의 흐름을 보여드림으로 우리가 현재 어디까지 흘러 떠내려와 있는지 그 좌표를 볼 수 있도록 도와 드리기 위하여 편집되었다. 독자들의 마음 속에 빛 되신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도하는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 존재해 온 수많은 교회들 중에서 어떤 교회를 당신의 “참 교회”로 인정하셨을까? 이 두려운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말씀으로 답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성경)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사야 8:20.
그렇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 말씀에 일치하는 교회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란 어떤 교파를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조직이 아니다. 성경은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 딤전 3:15.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모든 그리스인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맡기고 사는 집의 “기둥과 터”가 진리 위에 올바로 서있는지를 확인하는 안전 검사를 받아야만 한다. 이번 기사는 이 글을 읽는 그리스도인들 각자가 스스로 자신이 서 있는 신앙의 “기둥과 터”를 검사할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진리를 보존해 오셨다. 기독교회 2000여년의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교회를 통하여 진리의 맥을 보존, 전수해 오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역사 가운데서 떠올랐다가 사라진 수많은 교회 중에서 어떤 교회에게 진리를 주셨으며, 어떤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하고 배도와 타락을 길을 걸어 갔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 제자들과 사도들이 세운 초대 기독교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타락과 배도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 또한 하나님께서는 어떤 교회와 어떤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서 변질된 진리를 올바로 회복시키셨는가? 그리고 오늘날까지 완전하게 회복되지 못한 진리들 중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이번 살아남는 이들에서는 이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분명한 답변을 제시해 주고자 한다.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의 편집인들은 이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인 요한계시록에서 찾아 보았다. 요한계시록에는 사도들이 세웠던 초대 교회의 진리가 타락되어 가는 과정과 그것의 회복 과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예수께서 재강림하시기 직전인 마지막 시대에 변질되고 타협된 진리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완전하게 회복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예언되어 있다. 그러면 이제부터 진리가 타협되고 변질되는 과정과 마지막 시대에 진리가 완전하게 회복되는 과정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자.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일곱 교회 예언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타나 있는 일곱 교회 예언은 세상 역사에 나타나는 교회를 일곱 시대로 나누어 기록한 것이다. 일곱 교회는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즉 사도시대부터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까지 하나님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진리가 사단의 끊임없는 도전과 공격을 받으면서 걸어가는 과정을 그 시대적 특성에 따라서 일곱으로 나눈 것이다. 에베소 교회(초대 교회 시대), 서머나 교회(로마 제국의 핍박과 순교 시대), 버가모 교회(교회의 세속화와 타협의 시대), 두아디라 교회(교황권이 주도한 종교 암흑시대), 사데 교회(종교 개혁과 교파의 분열의 시대), 빌라델비아 교회(복음 선교 시대),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마지막 심판 시대) 로 구분된 일곱 교회 예언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진리가 중세기의 암흑시대를 거치면서 타락되었던 역사와 과정을 일깨워 줄 뿐 아니라, 중세기의 종교 암흑시대가 끝날 즈음에 시작되는 사데 교회 시대부터 여자의 남은 무리에 의해서 진리가 점차적으로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러 교파의 성경학자들이 일곱 교회의 성격에 대해서 기록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곱 교회는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대표한다 ... 사도 요한이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는 각 시대마다 교회의 영적 상태와 도덕적 수준이 어떻게 변천하여 나갈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캠브리지 바이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형편은 사도 요한이 계시를 통하여 보았던 교회의 변천 역사를 묘사하기에 가장 적당하다. 일곱 교회는 각 나라와 민족 사이에 펼쳐져 있는 그리스도 교회를 대표하는 것으로써, 세상 마지막까지 교회의 역사와 상태가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윌리엄 밀리건, 계시의 책.
“사도 요한이 일곱 교회에게 보낸 서신에 대한 가장 적절한 분석은, 일곱 교회는 연속적으로 전개되어온 그리스도 교회 역사에 대한 예언적 묘사라는 것이다. 즉, 일곱 교회는 그리스도의 승천부터 재림까지 이어지는 교회의 타락과 회복 그리고 실패와 회개의 연속적인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A.J. 골든, The Spirit of Ministry 132페이지.
“일곱 교회에게 보낸 사도 요한의 서신을 반드시 그 당시 즉, 1세기에 존재했던 일곱 교회에게만 적용시켜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편지들은 예언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서신은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일곱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으며, 아울러서 일곱으로 나누어진 각 시대마다 특징적으로 나타나게 될 교회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윌리엄 멕카렐, 교회에게 보내는 그리스도의 일곱 서신.
** 일곱 교회 예언에 대한 보다 상세한 연구를 원하는 분들은 살아남는 이들 제14호를 신청하여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6장-네 말탄 자 예언
사도 요한은 장차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계시를 받으면서 하늘로부터 네 말탄 자가 달려오는 광경을 보았다. 그 광경을 보면서 요한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 계시에서 자신이 온 생애를 바쳐서 세운 기독교회가 사단의 공격을 받아서 깊이 타락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6장에 기록된 네 말탄 자의 예언 역시 하나님의 교회가 타락되어 가는 과정과 다시 회복되는 모습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1. 흰 말 시대 (승리 시대) : 흰 말은 순결한 사도 교회를 나타내는데, 제 1세기의 초대 교회는 예수께서 남기고 가신 순수한 진리 그대로를 가지고 악을 정복하였으며, 복음으로 세상을 쳐서 이기는 능력의 교회였다.
2. 붉은 말 시대 (핍박 시대) : 붉은 색은 핍박으로 인해서 흘려진 피를 상징한다. 사단은 하나님의 참 교회를 무섭게 공격하였다. 사단은 로마 제국을 앞세워서 하나님의 교회를 피로 붉게 물들였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콜로세움의 원형극장에서 야수의 밥으로 또는 화형대의 불꽃으로 사라져 갔다.
3. 검은 말 시대 (타협 시대) : 검은 색은 영적 암흑을 상징한다. 세월이 흘러서 제자들이 죽고, 로마 제국의 핍박이 멈추고,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기독교회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인정받게 되면서, 교회(교황권)는 타협과 세속의 길을 걷게 되었다. 수많은 정치인들과 이교도들이 기독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오면서 교회의 거룩한 표준은 땅에 떨어지게 되었고, 진리는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이교도들의 풍습에 따라서 교회 안에 우상이 세워지기 시작하였으며, 십계명에서 둘째 계명(우상을 금지하는 계명)과 네째 계명(안식일 계명)이 변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중세기의 배도한 교회가 당신의 백성들을 핍박하면서 십계명을 변조시킬 것이라는 예언을 선지자 다니엘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려 주셨다.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핍박하며 ...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것이며” 단 7:25.
4. 청황색 말 시대 (영적 죽음의 시대) : 네번째 말의 색깔인 청황색은 죽은 시체의 색깔이다. 그래서 그 말을 탄 자의 이름 또한 “사망”이었다(8절). 이 시대에는 수많은 진리들이 온갖 세상 철학과 이방 종교의 사상으로 대체되었다. 온갖 진리가 변질되고, 교회가 가지고 있던 영적 표준이 땅에 떨어지자, 교회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영적으로 죽은 교회(교황권)는 진리를 올바로 세우고, 교회의 표준을 유지하고자 애쓰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청황색 말 시대에 하나님의 참 교회는 배도한 교회의 핍박을 피하여 광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5. 진리의 등대지기들이 일으킨 종교 개혁 운동 시대 : 율법이 변조되고, 교회의 거룩한 표준들이 땅에 떨어지자, 하나님께서는 개혁자들을 일으키셔서 교회의 개혁과 부흥이 일어나도록 섭리하셨다. 왈덴스인들, 위클립, 허스, 마틴 루터, 아나뱁티스트, 요한 칼빈, 그리고 요한 웨슬레 등과 같은 위대한 개혁자들이 일어나서 잘못된 오류를 바로 잡고, 진리의 맥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진리의 빛은 점진적으로 밝게 전진하는 것이다. 특히 중세기 1260년 동안의 종교 암흑시대를 통해서 진리가 너무나 깊이 타협되어 버린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는 완전한 진리의 빛으로 회복되어 나가야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서는 중세기 동안에 감추어 졌거나 변조되었던 진리, 또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진리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통하여 자신 앞에 나타날 때마다 겸손한 마음으로 그것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살펴보고, 그것이 성경적이면 새로운 것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 종교 개혁자들은 어떤 특정 교파를 세우기 위해서 피로 얼룩진 개혁의 길을 걸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진리를 올바로 회복하기 위하여 그들의 생애를 바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종교 개혁자의 후예인 현대 개신교회는 교파라는 벽을 두껍고 높게 쌓아 놓음으로써, 계속 전진하는 진리의 빛을 따라가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 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탄 자 예언에 대한 보다 자세한 연구를 원하시는 분들은 살아남는 이들 제51호를 주문하여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12장-진리의 맥을 전수해 온 참 교회의 역사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용(사단)은 여자에게서 막 태어나려고 하는 아이(예수 그리스도)를 삼켜 버릴 수만 있다면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계 12:4. 그러나 그 아이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자 곧 예수 그리스도셨다. 그 남자 아이를 죽이려던 용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반면에 그 남자 아이는 사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갔다(계 12:5절). 격노한 용은 남자 아이가 이 땅에 남겨 놓은 여자(참 교회)를 맹렬하게 공격했지만, 그 여자(참 교회)는 하나님의 기이하신 섭리 하에 광야로 옮겨져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1260년 동안의 종교 암흑시기)동안 피신해 있게 된다.
요한계시록 12장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워 놓으신 참 교회의 특징과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12장 1절에서 여자로 상징된 하나님의 참 교회는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면서 제자들에게 남겨준 진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교회를 뜻한다. 그러나 참 교회는 1260년이라는 중세기의 길고 긴 기간 동안 용(사단)의 사주를 받은 배도한 교회(교황권)의 핍박을 받아 깊은 산과 동굴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알아야 할 사실은 참 교회가 있고, 배도한 교회가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중세기의 종교 암흑 시대 동안, 사단의 사주를 받은 배도한 교회(교황권)가 하나님의 참 교회를 1260년 동안이나 핍박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성경 전체에 7번이나 반복하여 기록해 두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단의 기만과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셨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나타나 있는 이 예언은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하여 진리의 맥을 이어 오셨으며, 사단은 누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참 교회와 진리를 공격해 왔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
1. 다니엘 7:25 :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2. 다니엘 12:7 :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 까지”
3. 요한계시록 11:2 : “저희가 거룩한 성을 42달 동안 짓밟으리라”
4. 요한계시록 11:3 :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을 예언 하리라”
5. 요한계시록 12:6 :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1260일 동안 ... 있더라”
6. 요한계시록 12:14 :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7. 요한계시록 13:5 :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 하는 입을 받고 또 42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
** 한 때(1년)와 두 때(2년)와 반 때(반 년)=42달=1260일은 모두 1260년으로 환산되는 상징적 예언 기간이다. 왜냐하면 기간을 나타내는 상징적 예언에서 1일은 1년으로 환산하는 것이 예언 해석 원칙이기 때문이다(민 14:34 참조).
요한계시록 12장 후반부에는 하나님께서 위기의 순간에 당신의 참 교회(여자의 남은 자손)를 신대륙 미국으로 인도하시는 모습이 나타나 있는데, 요한계시록 12장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절 : 참 교회의 모습과 특징
2~5절 : 1세기의 참 교회(초대 교회).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헤롯왕의 살해 명령, 그리고 12제자들을 주축으로 세운 참 교회를 이 땅에 남겨두고 하늘로 승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6,13~14절 : 중세기의 배도한 교회의 핍박과 광야로 피신하는 참 교회. 1260년 간의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 동안에 나타나는 배도한 교회(교황권)와 참 교회의 모습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음.
15~16절 : 18세기의 참 교회. 유럽 대륙에서 펼쳐지는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신대륙 미국으로 피신하는 청교도들.
17절 : 18세기 이후의 참 교회. 1260년 동안의 광야 경험이 끝난 후에 예수 재강림을 위하여 준비하는 여자의 남은 자손이 나타남. 마지막 시대에 용(사단)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는 여자의 남은 자손(참 교회)의 모습과 특징이 나타나 있음.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7
** 요한계시록 12장에 나타나 있는 참 교회의 역사에 대한 예언을 보다 자세하게 공부하기 원하시는 분들은 살아남는 이들 제51호를 주문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13장과 14장-마지막 시대의 참 교회
요한계시록 12장은 사단의 맹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자의 남은 무리를 통해서 진리의 맥을 보존하고 전수해 오셨던 사실을 분명하게 조명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짐승의 표가 강요되는 마지막 시대에는 누구를 통해서 진리를 완전하게 회복시키고 대쟁투의 막을 내리실 것인가? 요한계시록 12장 예언과 역사를 통해서 확인했던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도 여자의 남은 무리를 통해서 일하실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 점에 있어서 분명하게 묘사하였다. 1260년 동안의 종교암흑시대가 끝난 후에 출현한 여자의 남은 자손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증거를 가진 자들”이었던 것처럼(계 12:17), 예수 그리스도의 재강림 직전에 온 세상에 하나님의 마지막 자비의 경고의 기별을 전하게 될 사람들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계 14:12).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중세기 동안에 사단의 사주를 받아서 일했던 교황권 세력(첫번째 짐승)이 미국(두번째 짐승)과 손을 잡고 짐승의 표을 온 세계적으로 강요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살아남는 이들 제33호와 48호 참조). 그리고 이어지는 요한계시록 14장 서두에는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의 참 백성을 상징하는 144,000인에 대한 예언이 나오고, 중반부에는 그들이 전하는 마지막 경고의 기별이 세 천사가 전하는 복음으로 예언되어 있으며, 9절부터 11절까지는 마지막 경고의 기별을 거절한 사람들이 받게 되는 짐승의 표와 재앙들이 나온다. 그리고 12절에는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마지막 여자의 남은 무리의 정체와 모습이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2:14. 요한계시록 12장 17절과 14장 12절에 나오는 여자의 남은 자손이야말로 마지막 시대의 참 교회이며, 못 다 이룬 종교 개혁 운동을 완성시키는 사람들이다.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여자의 남은 자손(참 교회)이 펼치게 될 마지막 종교 개혁 운동에 독자 여러분들도 꼭 동참하여 짐승의 표와 재앙을 피하고 하늘 도성에 들어가게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바이다.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 나무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또 그 문들을 통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계시록 22장 14절.
Q & A
감리교라는 이름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아세요?
Methodist라는 교회 이름은 영어 단어 Method에서 유래했다. 메서드(Method)는 방법, 방식, 꼼꼼함을 의미한다. 옥스퍼드대학을 중심으로 존 웨슬리(John Wesley)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그리고 G.휘필드 등의 대학생 그룹을 중심으로 일어난 감리회 운동이 도화선이 되어 감리교를 낳았다. 그들은 신성클럽(Holy Club)을 조직하고 성경이 요구하는 종교적 의무를 신실하게 행하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메서디스트(Methodist, 방법론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들은 주어진 모든 빛을 성경에 비추어 보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성경의 원리 원칙대로 살고자 했기 때문에 계명과 성경의 원칙들을 무시하는 그 당시의 사람들이 그것을 비웃는 마음에서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그들의 경건 부흥 운동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점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자, 그 당시의 주류 교회들은 서둘러 그들을 이단으로 낙인 찍으면서 그들을 출교시켰다. 그들의 설교와 삶이 너무나 경건했고 고결한 영성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요한 웨슬리가 집회하는 곳마다 술집들이 문을 닫게 될 정도였다고 한다.
감리교회, 이단으로 낙인 찍히고 출교 당한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시작한 교회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믿으며, 왜 그렇게 믿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이었다. 누가 무엇이라고 조롱하고 놀려도 그들의 마음을 흔들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감리회 운동의 정신이 너무나 많이 쇠퇴한 것을 보고 슬픈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그대는 그대가 다니고 있는 교회를 세운 신앙의 조상들처럼 주어진 빛을 감사한 마음으로 따르고 있으며, 알고 있는 성경의 진리에서 조금이라도 뒷걸음질침 없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그대는 주변에 있는 다른 수많은 교회들 중에서 꼭 그 교회를 다녀야만 하는 분명한 성서적 이유를 가지고 있는가?
혹 주위에서 너무 원칙대로 살려고 한다는 비웃음을 들을지라도 그대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가? 지금은 세월이 바뀌어 감리교라는 이름은 개신교 중에서도 주류로서 꼽힌다. 지금은 아무도 감리교인들을 방법론자들이라고 놀리지 않는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단순히 감리교인들의 숫자가 많아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더 이상 감리회 정신과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번 깊이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1 세기의 교회 에배소 교회, 흰 말 - 초대 교회의 승리 시대
사도시대 이래 처음 몇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계에는 요사이 말하는 그런 형태의 교파는 없었다. 1세기 말에 쓰인 요한계시록에 나타난대로, 교회는 단순히 그 위치에 따라,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등으로 불리웠을 뿐이다(계 2:1, 8, 12).
1세기에는 예수께서 직접 세우신 사도들이 이러한 교회들을 다스렸고, 그 후에는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도교부들이 일어나서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지켰다.
2,3 세기의 교회 서머나 교회, 붉은 말 - 로마제국의 핍박과 순교 시대
2세기에 들어서면서 로마제국의 황제에 대한 예배가 강요되면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자, 교부들이 일어나 교회를 보호했다. 로마제국의 끔찍한 핍박은 2백년 이상이나 계속되었지만 교회는 그래도 신앙의 순결을 유지하며 순교자들의 피를 씨앗으로 하여 로마제국 전역으로 세차게 번져 나갔다.
4,5 세기의 교회 버가모 교회, 검은 말 - 교회의 세속화와 진리의 타협시대
순교자의 피가 흘려진 곳마다 새로운 신자들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가혹한 핍박 하에서도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크게 증가되었다. 정치적으로 불안감을 느낀 로마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껴안음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로마 황제는 정책을 바꾸어 종교자유를 허락하는 관용 정책을 통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313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는 종교 자유를 허락하는 밀란의 칙령을 내렸으며, 같은 해 그리스도교회 성직자들에게는 병역과 납세의 의무를 면제하고 사법상의 특혜를 베풀고, 국고에서 하사금을 지급하는 등의 특별 혜택이 주어졌다. 315년에는 그리스도인이 된 노예는 쉽게 자유인이 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했고, 교회가 유산을 증여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교회는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했다. 324년 황제는 자신은 미침자이면서도 침례받는 로마 시민에게는 특전을 베풀어 한 해 동안 로마에서는 12,000명이 침례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325년 황제는 신하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도록 조치했다.
이토록 갑작스러운 종교정책의 변화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신속한 타락을 몰고 왔다. 저마다 성직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속된 야망은 성직 매매를 초래했고, 도시 교회의 감독 임명시에는 거리의 폭력배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교회는 온갖 퇴폐와 부정의 온상이 되었고, 정치의 시녀가 된 교회는 교리적 논쟁을 해결하는 일에도 황제의 개입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의 장로교 신학자 뵈트너 박사의 증언은 4세기 그리스도교의 진상에 대한 적절한 요약이다.
“4세기 초 서방을 다스리던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교에 호의를 베풀기 시작하고... 324년,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종교로 만들었다. 결과로 신자가 되면 누릴 수 있는 특전을 얻기 위해 수많은 이교도들이 교회로 밀려 들어왔다. 그들은 교회가 미처 가르치고 동화시킬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숫자였다. 화려한 이교 의식에 익숙한 이교도들에게 단순한 그리스도교 예배는 만족을 주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이교적인 신조와 종교 행사들을 끌어들였다. 사람들은 점점 성경의 진리를 소홀히 여기게 되었고, 진리에 대한 신자들의 무지로 인하여 교회는 점차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교회라기보다는 오히려 이교의 교회라고 불러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교의 행습을 본받아 교회 안에는 화려한 복장을 차려입고 제사를 드리는 사제와 화려한 의식, 돌과 나무로 새긴 각종 성상들, 성수, 분향, 수사들과 수녀들, 연옥의 교리, 구원은 은혜보다는 행함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이교적 신앙이 일반 신자들과 성직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갔다. 로마제국 전역의 교회들에서도 그랬지만, 특히 로마에 있는 교회는 더 이상 사도적인 교회가 아니었으며, 하나의 종교적 기형체가 되었다.”
Liraine Boettner, Roman Catholicism, 11.
설상가상으로 당시 로마제국에 유행하던 페르샤의 태양신 미드라숭배에 익숙했던 콘스탄틴 황제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321년 3월 7일 그 유명한 “일요일 휴업령”을 반포했다. “존경할 만한 이 태양의 날에 모든 판사들과 도시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휴업하도록 하라” 는 황제의 칙령은 단번에 이교도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로마 황제는 “일요일 휴업령”을 통해서 토요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던 기독교인들과 일요일에 태양신에게 예배드리던 이교도인들의 예배 날짜를 하나로 묶음으로써,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보다 쉽게 개종하도록 유도하였고, 이를 통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끊임없는 폭동으로 인해 로마제국의 증오와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 유대인들과 구별되기 원했던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2세기 이래 예배일인 토요일 외에 일요일에도 산발적인 모임을 가져왔다. 이미 로마제국의 호의에 길들여진 그리스도 교회의 지도자들을 위시한 성직자들은 거침없이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서기 364년 라오디게아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안식일 준수를 유대교 신앙행위로 규정하여 이를 저주하고 일요일 성수를 교회 법으로 정식 채택함으로써 안식일 대신에 일요일이 공식적인 성일로 확정되었다.
354년에는 그 동안 태양 신의 아들 담무스의 생일로 기념되던 12월 25일이 최초로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둔갑하여 로마 교회 달력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때까지 초대 교회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지켜오던 유월절 행사가 이교적 배경을 가진 “이스터”, 곧 부활절-일요일 축제로 날짜를 바꾸어 지키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 이다.
참으로 급속한 변화였고 신속한 변절이었다. 2백년 이상 계속된 끔찍한 핍박에서 승리함으로 살아남았던 교회가 일개 로마 황제의 정치적 관용과 선심 공세와 세속적 번영에는 단시일 내에 힘없이 무너진 것이다.
중세 로마 교황권의 확립
처음 몇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에는 지금과 같은 교파는 없었지만, 그리스도교의 본산으로 알려진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로마 교회, 콘스탄티노플 교회,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교회들이 신학적 차이를 빙자로 서로 우위를 겨루는 주도권 분쟁은 계속됐다. 그러나 역사는 로마 교회의 편에 있었다.
로마 교회는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순교지라는 전통적인 자부심과 함께 대대로마제국의 수도라는 정치적 강점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330년, 로마 제국의 수도가 동방의 콘스탄티노플로 이전하면서 로마 교회 감독은 정치적 권력도 갖게 되었다.
392년,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정치와 종교의 유착이 가속되는 가운데 시작된 게르만 민족의 로마 침입을 외교를 통해 막아낸 로마교회 감독 레오는 최초로 “아버지”를 뜻하는 오늘날의 교황의 명칭인 “Pope” 타이틀을 451년 로마 제국의 정부로부터 공인 받음으로써 최초의 교황이 탄생한 셈이다.
538년 저스티니안 로마 황제는 게르만 민족에게 유린된 서 로마를 회복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힘을 이용하기 위하여, 서 로마의 정신적 지도자가 된 로마교회의 감독을 전 세계 교회의 머리로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에 장애가 되는 게르만 부족들인 헤룰리(493년), 반달(534년), 동 고드(538년)를 각각 제거함으로써 바야흐로 로마 교회가 주도하는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가 6세기에 시작되어 18세기 프랑스 혁명으로 몰락되기까지 12세기 이상(1260년 동안)이나 지속된다.
비슷할 때인 서기 622년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마호멧의 이슬람도 로마교회의 주도권 확립에 큰 몫을 했다. 로마교회의 경쟁 상대였던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등 동방의 3대 교회가 7세기 초에 모두 이슬람의 수중으로 넘어감으로써 로마교회의 존재는 한층 고유하게 되었다. 또한 732년에는 유럽을 서쪽으로부터 침입하는 이슬람 세력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전공을 앞세워, 찰스 마텔은 게르만 민족이 세운 최대 왕국인 프랑크의 왕위를 불법으로 찬탈했다. 그가 이룩한 카롤링기안 왕가 출신의 피핀을 도덕적으로 합당한 통치자로 인정하고 왕관을 씌워준 보답으로, 로마교황은 756년 이태리에 있는 동 로마제국의 땅 일부를 기증받음으로써 오늘날처럼 영토까지 갖춘 최초의 종교 국가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오래 동안 주도권을 놓고 다투던 콘스탄티노플의 동방교회와는 성만찬 예식에 사용하는 빵에 누룩을 넣는 여부를 놓고 맞부딪쳐 서기 1054년 서로를 파문함으로써 희랍정교로 알려진 동방교회가 분리되었다.
이처럼 영토와 교권을 확보한 교황권은 11세기에 이르러 중세기 봉건제도에서 정치와 경제의 노른자인 서임권마저 뜻대로 쟁취함으로써 중세기 절대권력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절대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는 논리는 교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이미 4세기에 일어난 배도에 앞장 섰던 로마교회는 급속도로 퇴폐와 타락의 길을 치달았다.
6~16 세기 초의 교회 두아디라 교회, 청황색 말 - 종교 암흑 시대
이렇게 하여 4세기 이래 성서 신앙의 닻줄이 끊긴 로마교회는 6세기에 확립된 교황권을 앞세워 세속적 조류에 진로를 맞긴 채, 중세기 영적 암흑시대를 향하여 기나긴 배도의 표류를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중세 교회의 배도는 그 후 1,260년 동안 계속되어 그 내역을 쌓아갔다. 다음의 목록은 장로교 신학자 뵈트너박사의 저서에서 간추린 것이다. 깊어질 대로 깊어진 배도의 깊은 골짜기를 누가 메울 것인가?
중세기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배도의 역사와 내역
364년, 안식일을 저주하고 그 신성성을 일요일로 옮김(Laodicea 종교회의). 네째 계명의 파기
375년, 천사와 죽은 성자들 숭배, 성상사용
431년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로 높이기 시작함(Ephesus 종교회의)
500년, 이교 제사장들의 본을 따른 복장으로 집전함.
593년, 교황 그레고리 1세에 의하여 연옥 교리가 소개됨.
600년, 마리아나 죽은 성자들에게 직접 기도 드림.
756년, 프랑크왕 피핀(Pepin)에 의해 교황에게 영토와 세속권이 부여됨.
786년, 속죄와 예배의 수단으로 십자가, 성상 및 유물 숭배. 둘째 계명의 파기
787년,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와 죽은 성자들에게 기도드리는 일이 인정됨(Nicea종교회의)
850년, 사제에 의해 축성된 성수사용
890년, 요셉(마리아 남편) 숭배.
995년, 교황 요한 15세에 의해 처음으로 죽은 성자들을 시성함
11세기, 예배가 아니라 제사로서의 미사가 드려짐
11세기, 교황 그레고리 7세에 의하여 성직자의 독신 제도가 확립됨
12세기, 물에 잠그는 침례 대신 물을 뿌리는 세례를 인가함.
1090년, 베드로(Peter)라는 이름의 은둔 수사에 의하여 성모에게 바치는 “장미 꽃다발”의 뜻인 “로사리오” 즉 묵주 기도가 고안됨
1184년, 종교재판(Inquisition)제도가 설정됨(Verona 종교회의)
1190년, 면죄부(Indulgences)판매
1215년, 화체설이 교황 인노센트 3세에 의해 선포됨
1215년, 하나님 대신 사제에게 죄를 고하는 고해성사가 교황 인노센트 3세에 의해 선정됨(Lateran 종교회의)
1229년, 성경을 금서 목록에 넣어 평신자들의 접근을 금지함(Valencia 종교회의)
1414년, 성만찬시 평신도들에게 포도즙 잔을 금지시킴(Constance 종교회의)
1439년, 연옥이 정식 교리로 선포됨 (Florence 종교회의)
1513년, 교황 레오10세는 영혼 불멸을 교리로 확정하고 조건적 불멸 신앙을 이단으로 선언함 (Lateran 종교회의)
1545년, 교회의 전통이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다고 선언함(Trent 종교회의)
1546년, 영감 받지 아니한 경외서들을 성경에 포함시킴(Trent 종교회의)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는 성모 마리아는 탄생 때부터 원죄도 없고 해산의 고통도 없었다는 성모무염시태를 교리로 선포함
1864년, 교황 피우스 9세는 로마 교회가 인정치 않는 각종 시민의 자유 (종교, 양심, 언론, 과학, 등)를 정죄하는 교서(Syllabus Errorum)를 발표함(Lateran 종교회의 비준)
1870년, 교황은 결코 오류나 잘못을 범할 수 없다는 교황 무오설을 선언함 (Vatican 종교회의)
1950년, 교황 피우스 12세에 의해 마리아는 죽은 직후 육신 그대로 승천했다는 성모 몽소승천을 교리로 선포함 (축일은 8월 15일)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로 선포됨
장로교 신학자 뵈트너박사의 저서, Loraie Voettner, Roman Catholicism, (The Prebyterian and Refomed pub-Iishing Co., 1979). 7-9
이 빗나간 가르침들을 어떻게 하면 다시 올바로 세워 놓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종교 개혁이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개혁의 주체인 개신교의 피할 수 없는 책임과 역사적 사명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가 이 깊은 배도의 골짜기를 메우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지금 현재 우리가 믿고 있는 교리와 가르침들 가운데 어떤 것들이 성서 신앙에 어긋나는 배도의 내역들인지 자세히 살펴보자. 1200여년 동안에 걸쳐서 파내려간 깊은 배도의 계곡을 루터와 칼빈과 웨슬리가 단번에 모두 메울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가? 중세기의 기나긴 배도와 오염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교회가 참으로 있을 수 있을까? 만약 교회가 배도와 오류로부터 분리되어 완전한 진리를 소유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진리의 완전한 회복, 바로 그것이 개신교회를 존재하게 한 종교개혁의 원인과 목적과 실제적 역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중세기 로마 교회의 교황권으로부터 물려받은 이교적 교리들을 아무런 생각없이 따라가고 있는 개신교인들을 보노라면 깊은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이제까지 배도의 역사와 내역을 살펴 보았으므로, 다음 기사에서는 빗나간 가르침과 오류들이 진리의 등대지기들인 개혁자들에 의하여 올바로 회복되어 온 역사를 살펴 보도록 하자.
Q & A
문: 저는 이민 와서 4년째 침례 교회에 다니고 있는 그리스도인 입니다.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에서 가끔씩 언급하는 영혼불멸설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주실 수 없는지요? 주변에 있는 분들께 여쭈어 보았지만 속 시원한 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답: 오늘날 기독교에는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서 두 가지 가르침이 공존하고 있는데, 그것은 영혼불멸설과 조건적 멸절설입니다. 이 두 가지 교리에 대한 이해와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영혼 불멸설: 영혼은 육체와 분리될 수 있기 때문에 육체는 죽을지라도 영혼은 의식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영원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죽는 순간에 즉시로 영혼이 몸으로부터 분리되어서, 천국, 지옥 또는 연옥으로 가서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는 가르침.
2. 영혼 멸절설(조건적 불멸설): 영혼과 육체는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육체가 죽을 때에 영혼도 함께 소멸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는다고 할지라도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빠져 나오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세상 끝에, 의인들은 생명의 부활로 일어나 새로운 생명과 육체를 받고 하늘로 승천하여 영원히 살지만, 악인들은 심판의 부활로 일어나서 유황불의 형벌을 받아 완전히 소멸된다는 가르침.
영혼불멸설은 중세기 종교암흑시대에 로마 교황권을 통하여 기독교에 들어온 이교적 신앙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서적 개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 이외에 불교, 무속인 등을 포함해서 모든 종교인들은 영혼불멸설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죽은 자가 모두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이미 가 있다면,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에는 도대체 누가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가는 심판ㅇ르 받는단 말인가 라는 말로 부활 신앙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영혼불멸설에 대하여 부정하였습니다. “영혼이 불멸한다는 신조는 터무니 없는 다른 견해들과 함께 로마 교황권의 교리집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되어 진다.” The problem of immortality, p256, 1520년 11월 29일에 발표한 41개 신조.
루터는 죽는 순간까지 영혼불멸설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의 사후에 루터를 따르던 지지자들은 영혼불멸설을 믿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이단이라고 지목을 받게 되자, 그들의 스승인 루터가 마치 영혼불멸 신앙을 지지했던 것처럼 위장시킴으로써, 마틴 루터가 생명을 걸고 고수한 진리의 빛을 감추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18세기 성공회 학자이며 사제인 블랙번은 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이단이 될 것에 대한 어리석은 염려 때문에 자신들의 스승의 가르침을 옹호하는 대신에 자기 스승은 결코 그런 교리를 고수하지 않았던 것으로 증명하려는 입장에 자신들을 두었다.” A Treasure in Millennium, vol.2, 328. 또한 종교 개혁의 새벽별이라고 불리는 위클립도 “죽음 이후부터 부활의 순간까지 완전한 무의식 세계에서 잠을 잔다”고 가르침으로써, 왈덴스인들의 믿음을 신학적으로 체계화시켰습니다.(wyclif-select writing). 이외에도 영국을 대표하는 종교 개혁자인 틴데일, 실락원의 저자인 쟌 밀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톤, 그리고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인 스위스 오스카 쿨만도 성서적 신앙인 영혼의 조건적 불멸을 지지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분명한 진리일진대, 죄인이 죽어서 지옥에서 영원토록 죽지도 않고 유황불 속에서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죄의 삯은 사망이 아니라, 영원한 고통이라고 성경 말씀을 바꾸어 놓아야 되지 않을까요? 오직 의인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영혼불멸설과 조건적 불멸설에 대해서는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제 20호에서 특집으로 자세하게 다루었습니다. 꼭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점점 더 밝은 빛으로 회복되어 온 진리의 등대
영적 암흑이 칠흙같던 12세기, 참다운 구원의 길을 제시해야 할 교회의 가르침이 중세기 로마 교회의 배도로 심각하게 오염되어, 더 이상 구원의 신앙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생명의 빵과 물을 구하는 애타는 영혼의 절규가 울려퍼졌으며, 진리를 갈급하는 영혼들이 개혁의 선봉에 서기 시작하였다.
개혁의 선두주자,왈덴스인들
종교 개혁의 밑거름
언제나 먼저 목마르고 굶주린 것은 평신도였다. “교황권의 대낮은 세계의 한 밤중이었다” 는 역사가 윌리의 표현처럼 로마 천주교회의 전성기였던 12세기는 참으로 영적인 한 밤중이었다. 마침내 1170년경 프랑스 남부로부터 그들의 지도자의 이름을 따라 왈덴스인으로 불리는 일단의 평신도들이 일어나, (1) 로마 교회의 전통을 거부하고 순수한 성서신앙을 제창했으며, (2) 연옥교리를 부정하고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를 반대했으며, (3) 성만찬의 빵과 포도즙이 사제의 기도로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형한다는 화체설을 부인했다. (4) 로마 천주 교회는 결코 잘못할 수가 없다는 무류설을 반대하고 평신도의 전도할 권리를 요청했다. (5) 이들 가운데 성서적 안식일인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무리도 일어났음이 역사가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험준한 알프스 골짜기를 피난처로 삼고 행상을 하며 전도한 이들은 로마 천주교회의 혹독한 핍박으로 수없는 희생자를 내며 유럽의 22개국으로 번져나갔다. 왈덴스인 교회는 아직도 이태리에 남아있는 최초의 개신교이다.
종교 개혁의 새벽별, 영국의 위클립
사데 교회 - 종교 개혁 시대의 시작
왈덴스인들이 외롭게 이어 온 진리의 빛은 위클립에게 옮겨졌다. 왈덴스인의 개혁이 영국에까지 이른 무렵, 14세기 유럽의 최고 명문인 옥스포드 대학의 가장 유능한 학자요 국왕의 궁중 사제였던 위클립이 일어나 왈덴스인의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정립하여 선포했다. 그는 (1)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시며, 교황은 “적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선언했다. (2) 연옥을 부정하고 성자 예배와 유물 숭배를 반대했으며, (3) 화체설을 공박했으며, (4) 고해성사와 교회의 무류를 부정하고, (5) 구원은 인간 공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다고 가르쳤다. (6) 1382년, 금서였던 성경을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하여 백성들의 영적 안목을 회복시켰으며, (7) 왈덴스인의 본을 따라 롤라드로 알려진 평신도들을 훈련시켜 전국을 순회하며 전도하게 했다.
종교 개혁의 큰 별, 마틴 루터와 루터교
성경에는 전혀 근거가 없는 연옥 교리를 소개하여 속죄의 필요를 역설한 중세 천주 교회는 고해성사와 함께 고행을 강조하며 면죄부로 자신의 죄의 형벌을 감면할 뿐 아니라, 연옥에 있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신속히 천국에 보낼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로마 천주교회의 배도와 잘못된 가르침은 이미 요한 허스가 일으킨 개혁에 자극을 받아, 행함이 아닌 믿음에 의한 구원을 체험한 젊은 신부요 신학 교수였던 마틴 루터로 하여금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게 만들었다. 루터는 그 동안 자신의 신앙적 양심을 괴롭혀 온 로마 천주 교회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95개조 논제를 1517년 10월 31일 정오에 위턴베르그 성당문에 게시하였는데, 이로써 세계 역사를 바꾼 대 종교 개혁의 막이 올랐다.
마틴 루터는 즉시 교황권에 의해서 이단으로 고발되었으며, 신성 로마제국의 국회로 소환되어 1521년 4월 18일 심문을 받고 그의 주장을 포기하도록 요청받았으나 이를 담대히 거부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분수령을 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신성 로마제국에 잡히면 화형에 처해지는 이단의 선고를 받은 루터의 대표적 가르침은, (1) 신앙의 최종 권위는 로마 교회의 전통이나 권위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성경”에 있으며, (2)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사람의 선행이나 로마교회의 사제가 나누어주는 공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며, (3) 구원은 그러한 믿음을 통해 누리는 “오직 은혜”로 주신 선물이며, (4) 또한 신자들은 신부나 사제를 통하지 않고도 직접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는 만인 사제직을 제창했고, (5) 연옥 교리와 함께 그것을 뒷받침하는 영혼 불멸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조건적 불멸을 가르쳐 부활신앙을 강조했다. “영혼이 불멸한다는 신조는 터무니 없는 다른 견해들과 함께 로마 교황권의 교리집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되어 진다.” The problem of immortality, p256 , 1520년 11월 29일에 발표한 41개 신조. 루터의 개혁은 개신교 신앙의 기초를 놓으며 후에 장로 교회의 주춧돌을 놓은 요한 칼빈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재침례파가 비춘 보다 밝은 빛
독일에서 루터가 개혁을 시도하는 동안 스위스에서는 독일보다 더 철저한 개혁이 별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경건한 로마 가톨릭의 사제요, 학자며 애국자였던 쯔윙글리는 성경을 연구한 결과로 얻은 확신에 따라, 로마 가톨릭의 이교적인 예배의식과 면죄부 제도를 전면 부정하고, 극도에 달한 성직자들의 도덕적 퇴폐를 공박하는 대담한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화체설을 반대하고, 성만찬의 빵과 포도즙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기념이라고 가르쳤다.
루터나 쯔윙글리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원하는 일단의 개혁자들이 스위스의 쮜리히에서 일어났다. 재침례파, 혹은 “형제들”로도 알려진 이들은, (1) 신앙의 유일한 근거로 깊은 성경연구를 강조하고, (2) 국가와 교회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했으며, (3) 죄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할 수도 없는 어린 아이들에게 베푸는 로마가톨릭의 의식인 유아세례가 비성경적인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성인 신자에게 이를 다시 베풀었때문에 재침례파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4)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죽음을 수면과 같은 무의식 상태라고 가르치고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속한 재림을 강조하는 신앙을 받아 들였다. (5) 교회로부터 각종 성상들과 이교적 의식들을 일체 제거할 것을 주장하고, (6)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고 맹서를 금했으며, (7) 전쟁을 반대하고 무기 사용을 금했으며, 핍박을 받을지라도 대항하거나 원수를 갚지 않았으며, (8) 모든 교회는 신자들이 자율적으로 믿고 다스려나가는 회중제도를 택했다.
메노나이트가 발전시킨 진리의 등대 빛
핍박을 받은 많은 재침례파 신자들은 홀랜드로 도피했는데, 로마가톨릭 사제였던 메노 시몬스가 카톨릭의 교리 중 하나인 화체설에 의문을 품고 성경을 연구하던 중 가톨릭 신앙의 오류를 깨닫고 1536년 재침례파로 개종하여 그들의 유능한 지도자가 되었다. 재침례파의 모든 가르침과 함께 요한복음 13장의 교훈에 따라 성만찬 전에 서로 발을 씻기는 세족예식도 시작했다. 지도자의 이름을 따라 불리는 메노나이트 재침례파 신자들은 당시에 알려진 가장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었으나 가톨릭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미처 그들을 신앙을이해치 못한 개신교도들로부터 혹독한 핍박을 받아 많은 순교자를 냈으나 때마침 열린 신대륙으로 건너가 1683년 이후부터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메노나이트와 같은 계통인 퀘이커 교도들과 함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비무장 평화주의, 의료봉사를 통해 미국의 인권옹호와 민주사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종교 개혁의 총아, 요한 칼빈과 개혁(장로) 교회
철저한 가톨릭 신봉 국가였던 프랑스는 루터의 개혁 신앙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대대적인 핍박을 시작하였다. 루터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던 20세의 젊은 청년 요한 칼빈은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스위스로 피난하여 제네바를 중심으로 신정정치까지 베풀며 루터의 개혁과 양대 주류를 이루는 개혁을 추진시켰다. 칼빈이 강조했던 점은, (1) 신앙은 성서에 기초해야 하고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성서신앙을 강조하고, (2) 창조와 구속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했다. (3) 예배 의식에서 중세 로마교회의 우상적이고 이교적인 요소를 일체 배제하여 개신교 예배의 기초를 놓았다. (4) 은총만을 치우치게 강조한 루터와는 달리 의와 성화의 표준으로 율법의 기능을 적절히 강조했다. (5) 교회행정에 있어서는 감독제도와 회중제도의 중간인 장로제도를 채택했으며, (6) 루터와 쯔윙글리보다 성만찬의 영적 의미를 한층 깊게 했다. (7) 교육을 강조하고 직업을 소명으로 가르치는 등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된다.
기본적으로 칼빈의 개혁 신앙은 루터의 사상을 계승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철저하게 규명하여 발전시킨 것으로써 종교개혁의 진전에 있어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칼빈의 개혁신앙을 따르는 교회는 유럽에서는 “개혁 교회”로 알려졌고, 영국 등 영어를 쓰는 지역에서는 “장로 교회”로 불리워 지고 있다.
영국 국교회의 태동
16세기 종교개혁이 유럽 대륙에서, 독일의 루터파, 스위스의 재침례파, 칼빈의 개혁교회와 같은 세 주류를 이루며 진전되고 있는 동안, 섬나라인 영국에서는 별도의 이유로 별도의 개혁이 전개되고 있었다. 14세기 옥스포드의 학자인 위클립이 일으킨 개혁의 파문은 보헤미아의 개혁자 허스를 통하여 루터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으나 막상 영국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주도한 정치적 여건으로 개혁이 진전되지 못하였다.
독일에서 일어난 루터의 개혁사상이 영국에서 문서로 소개되자 헨리 8세는 이를 글과 힘으로 분쇄하여 천주 교회의 교황으로부터 “믿음의 옹호자”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교황이 자신과 스페인의 왕녀요 죽은 형의 미망인인 왕후 캐더린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1534년 영국 교회를 로마카톨릭으로부터 독립시켰다. 이리하여 성공회의 모체인 영국 국교회가 탄생했으나, 머리가 바뀐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루터파 개혁자인 대주교 크랜머는 헨리 8세와 그의 아들 에드워드 4세를 도와 칼빈의 개혁 신앙을 흡수하여 국교회를 크게 개혁해 나갔다.
그러나 헨리 8세의 가톨릭 왕후 캐더린이 낳은 딸 메리가 왕위에 오르면서 개혁은 역전되어 개혁신앙을 가진 3백명의 학자와 성직자가 화형에 처해졌고 8백여명은 대륙으로 피난했으며 1,200명의 성직자들은 직분을 빼앗겼다. 경건한 학자요 감독이었던 리들리와 라티머는 가톨릭 화체설과 이교의 제사 방식인 미사 예배 형식을 끝까지 반대한 죄로 1555년 10월 16일 화형에 처해졌다. 집행 전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오래 기억되고 있다. “리들리 선생, 용기를 가지고 사내답게 처신합시다. 오늘 우리는 확신하는 바 하나님의 은혜로 결코 꺼지지 않는 불을 영국에 붙이게 될 것이요.”
화형이 두려워 개혁 신앙을 취소했던 크랜머 대주교도 다음 해 자신의 개혁 신앙을 재천명한 뒤 화형주에 올라, “교황은 그리스도의 적이요, 그의 거짓 교리와 함께 적 그리스도로서 그를 거절한다”고 선언한 다음, 지난 날 개혁신앙 포기를 자술했던 오른 손을 먼저 불 속에 넣어 태우면서, “이 손이 범죄하였도다”라고 부르짖으며 불꽃에 사루어졌다.
이러한 뼈저린 희생을 치루며 지켜온 한가닥 한가닥 개혁 신앙의 귀중함을 망각하고, 성서적으로 명백한 오류임을 깨닫고도 개혁의 의지를 상실한 채, 신앙적 양심에 아무 부담도 느끼지 않고, 개혁을 위한 어떠한 희생도 원치 않는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진정한 종교개혁의 후예들인가? 오늘날 누가 과연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진리의 맥을 이어 가기 위해 일어설 것인가?
칼빈주의 개혁 신앙의 진수, 청교도
1558년에 즉위한 메리 여왕의 이복 동생 엘리자벳 여왕은, 자신을 합법적인 후사로 인정치 않는 교황권에 맞서 살아남기 위하여 정치적 이유로 개혁 신앙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하에서 지난 날 대륙으로 피신했던 개혁자들이 대부분 칼빈주의 개혁신앙을 가지고 속속 영국으로 귀국하였다. 카톨릭 신앙에 칼빈과 루터의 개혁신앙을 혼합한 국교회 신앙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히 개혁하여 순결하게 하려는 칼빈주의 청교도들이 이들로부터 일어났다. 1648년 칼빈주의 개혁신앙의 헌장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구성을 주도한 것도 청교도들이었다. 영국에서 진리의 맥은 청교도들이 이어갔다. 그들은 이교적인 예배의식, 사제들의 복장,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각종 제일들, 사제와 신부의 면죄 행위, 십자가 사용, 대부모 제도의 폐지와 함께 성일로 간주된 일요일의 철저한 준수 등을 요구했다. 그들은 교황 대신 교회의 머리가 된 국왕이 감독들을 앞세워 교회를 다스리는 성공회의 감독제도를 반대했다.
청교도 신앙의 진수, 회중교회
영국의 국왕이 머리로 남아있는 영국 국교회가 완전한 개혁을 받아들일 전망이 어두워지자, 영국 국교회를 떠나 완전한 분리를 원하는 보다 철저한 청교도들이 1581년 캠브리지 출신의 지도자 브라운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는데, 이들 청교도들은 국왕이 머리가 된 국교회를 부정하고, 여러가지 속박을 가져오는 칼빈의 장로제도도 배제하고,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언약으로 연합된 회중이 자율적으로 목사 등 지도자들을 선출하고, 성경에 의하여 계발된 신앙양심의 판단에 따라 믿음을 행사하도록 촉구했다. 이리하여 칼빈주의 청교도 신앙의 진수에서 최초의 회중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회중 교회의 장자, 침례 교회
엘리자벳 여왕 이후의 영국 왕들도 국교주의를 고집하며 분리주의 회중파 청교도들[회중교]에 대한 핍박이 계속되자, 대부분의 신자들은 고국을 떠나 보다 나은 신앙의 자유가 있는 홀랜드로 피난했다. 당시 영국의 게인스보로에 있던 일단의 회중파 청교도들은 국교회의 목사에서 개종한 스미스 목사의 지도 아래 1608년 홀랜드의 암스텔담에 정착했다. 그들은 거기서 홀랜드의 재침례파인 메노나이트 신자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의 경건한 생활에 감명을 받았으며, 동시에 가톨릭의 의식인 유아세례가 비성서적임을 깨닫게 되었는데, 1609년 스미스 목사는 자신을 비롯하여 동료 헬위스 등 36명에게 침례를 줌으로써, 침례를 베풀고 회중이 교회를 다스리는 최초의 침례교회가 홀랜드에 세워졌다. 그들은 1611년 영국으로 돌아와, 1612년 영국에서는 최초로 런던에 침례교회를 세웠다. 이처럼 최초의 침례교회는 분리주의자로 불리우던 청교도들의 모임이었던 회중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침례교회는 17세기 영국의 신앙 부흥과 신대륙에서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 등 개신교 신앙 정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복음을 설교한 죄로 12년간 옥살이를 하며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 흑암과 빈곤의 대륙 인도 선교를 위해 몸을 사룬 윌리암 캐리, 신대륙 미국에 신앙과 양심의 자유의 원칙을 심어준 로저 윌리암스, 구속사적인 재림운동을 일으켜 세상을 각성시킨 윌리암 밀러 등이 모두 자랑스런 침례교인들이다.
오늘날 미국에만도 2,900만의 신자를 가진 최대의 교파인 침례교는 다른 개혁 교회들처럼 고정된 신앙고백이 없이 신자들이 계발된 신앙양심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고 확신한 바대로 살도록 권장하고 있어 새로운 진리에 대해 개방적이다. 침례교의 기본적인 교리는 일반 개신교와 같지만, 그 밖에도 (1) 유아세례와 물을 뿌리는 세례를 비성서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물에 잠기는 침례만을 인정하며, (2) 회중제도의 교회조직과 (3) 국가와 교회의 완전 분리, (4) 개인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극도로 존중히 여기는 점들은 루터나 칼빈 등이 추진한 개혁을 더욱 진전시켰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근원에 재침례파의 신앙이 포함되어 있음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침례교의 근원으로부터 후에 종교개혁의 절정인 안식일 진리를 발견한 제칠일 침례교회가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회중 교회의 장녀, 필그림 파더스 (Pilgrim Fathers)
영국 국교회 목사였다가 개종한 경건한 지도자 로빈슨 목사의 지도를 받던 일단의 회중파 청교도[회중교]들은 1609년 핍박을 피하여 홀랜드로 건너가 레이든에 정착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생활의 안정이 어려워지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국왕도 없고 교황도 없는 땅인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갈 결심을 하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1620년 9월 평신도 지도자 브루스터의 인도 아래 102명의 신자가 돛배인 메이플라워 호를 세내어 위험한 항로인 대서양을 건너 11월 21일 마사추세츠주의 플리머스 항에 도착했다. 그들 중 절반은 추위와 질병으로 첫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갔는데 이들이 바로 미국의 건국 조상이 된 “필그림 파아더즈”들이다. 회중교회가 신대륙에 출가시킨 위대한 맏딸이었다.
청교도 운동에서 시작된 십계명의 회복
16세기 후반에 출현한 청교도들이 창조한 새 역사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은 회중교와 침례교의 산모가 되었으며, 신대륙에 이룩한 신앙과 양심의 요람인 미국을 건설한 조상을 낳았다. 그뿐만 아니라 청교도들은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우며, “역대의 파괴된 기초”인 안식일을 다시 “수축”하는(사 58:12, 13) 역꾼이 되었다.
청교도들은 진지한 성경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임을 이해하게 되었다(출 19:5,6). 그리고 그 언약의 내용인 십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언약 유지의 수단으로서, 선택이 아니라 의무임을 깨달았다. 또한 인간의 죗된 본성은 율법(계명)을 기뻐하지 않지만(롬 7:19, 20) 성령으로 거듭난 마음은 율법(계명)에 순종함으로 속박이 아니라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음도 깨달았다(약 2:12). 왜냐하면 십계명은,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출 20:2) 후에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십계명을 언약의 내용으로 이해하게 되자, 언약을 보증하는 인 곧, “표징”이 되는 안식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비로소 올바르게 깨닫게 되었다(출 31:13,16,17). 청교도들은 진지한 성경연구를 통하여 마침내 칼빈의 가르침처럼, 주일 중 하루가 특별히 거룩해서가 아니라 “교회 중에서 질서를 보존함에 필요한 방도로서 그 날을 지킨다”는 해석이 성경에 어긋남을 깨달았다. 그들의 조상보다 더 밝은 빛을 가진 자손이 태어난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청교도 지도자 바운드의 저술과 가르침에 나타나 있다. 그는 사람이 범죄하기 전인 창조시에,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창 2:3)다는 말씀과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출 20:10)이라고 선언된 십계명의 내용을 상기시켰다. 그는 또한, “주님과 그의 사도들이 스스로 실천함으로 그 날을 일으켜 세웠”음을 상기시키고,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도 안식일이 필요했을진대,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바된 세상은 더욱 더 안식일이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그리하여 청교도들은 일요일을 칼빈의 가르침처럼 단순히 예배하는데 편리한 하루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거룩한 날로 믿고, 주일에는 각종 오락을 금하고 속된 일을 삼가는 등 성수 규정까지 마련했다. 그들의 안식일 준수는 오늘날 한국의 보수적이고 경건한 고신 계통의 장로교 신자들의 주일 성수와 흡사하다.
자신들이 깨달은 만큼의 진리를 옹호하고 실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청교도들은, 개신교라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계 3:1)였던 종교개혁 시대를 나타내는 “사데[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명”(계 3:4)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역사와 진리의 맥은 언제나 이 몇 명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계승된다는 사실을 다시 보게 된다. 지금 받은 빛과 진리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만 더 크고 온전한 빛과 진리가 주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16세기의 청교도들은 칼빈의 한계를 벗어나, 회중교회를 통하여 그들의 가문을 잇는 또 다른 자손인 침례교에서 17세기에 참된 제칠일 안식일을 쉽사리 싹티울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하였다.
침례교회의 상속자, 제칠일 침례교회
마침내 아침이 밝아왔다. 일요일을 제칠일 안식일로 믿고 성수하는 등 받은 바 빛에 충실하며 최선껏 살아온 청교도들에게 보다 밝은 참 빛이 이르러 온 것이다. 영국 국교회를 떠나 회중파 청교도 목사로 활약하던 트래스크는 1616년 런던의 밀 야드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중 그를 따르던 회중 가운데 한 사람인 잭슨에게서 제칠일 안식일을 소개받고 상당수의 회중과 함께 안식일을 준수하게 되었다. 결과로 1617년 밀 야드 교회는 회중제도를 유지하며 유아세례를 부인하고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하는 최초의 제칠일 침례교가 된 것이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극히 존중하고, 각 사람이 성령의 인도로 계발된 양심을 따라 자유롭게 성경을 연구하고 스스로의 믿음을 지켜 나가며, 신자에게 물에 잠기는 침례를 베푸는 등 정통 침례교의 모든 신조에 충실하면서, 성경상의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제칠일 침례교야말로 침례교가 낳은 훌륭한 맏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단으로 고발된 트래스크 목사는 혹독한 고문과 해상 감옥에서의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신념을 굽혔으나 그의 회중은 흩어지지 않았다. 그의 아내 도로시는 16년간의 옥고를 치르면서 참으로 고결한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하고 말았다.
역사의 기록에 남은 밀 야드 제칠일 침례교의 두번째 목사는, 영국의 세 국왕,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와 2세의 궁중 의사였던 챔블린이었다. 제3대 목사는 제임스였는데, 그는 1661년 10월 19일 안식일 설교 중에 체포되어 다음 달 26일 교수형에 처해진 뒤, 목을 잘라 장대에 꽂은 뒤, 시무하던 밀 야드 교회 뜰에 전시하여 안식일 준수의 댓가로 위협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선(계 12:17) 사단의 분노가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표현된 것이다.
다음 해인 1662년 개혁 신앙 때문에 투옥되었던 영국 국교회 목사 뱀필드는 개인적인 성경연구 끝에 제칠일이 성서적인 안식일임을 깨닫고, 9년 간의 복형기간 동안 계속 전도하여, “제칠일 침례교 도르체스터 감옥교회”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출감 후 또 다시 안식일을 가르친 죄목으로 1684년 70세의 고령으로 춥고 습한 뉴게이트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미국으로 이민 간 넷째 계명의 빛
순교자의 죽음은 언제나 진리의 씨앗이 되어 더욱 불어나게 마련이다. 영국의 뱀필드 목사가 목회하던 교회로부터 나온 열성있는 신자인 멈포드가 일어나 안식일 기별을 가지고 1664년 미국의 로드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그는 그 곳에 있는 침례교에 나가며, 십계명의 불변성과 제칠일 안식일 준수를 열심히 가르친 결과 몇 명의 청교도 신자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 곳의 침례교회마저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핍박하자 1671년 12월 23일 멈포드 내외를 비롯한 7명의 신자들이 거기서 나와 신앙 공동체의 언약을 맺고 신대륙에서 첫번째가 되는 제칠일 침례교를 로드 아일랜드의 뉴포트에 세웠다. 마침내 신대륙에 안식일의 진리가 뿌리를 내린 것이다.
제칠일 침례교는 1840년대 중반에 일어난 초교파적인 재림운동의 결과로 형성된 일단의 재림신자들에게 그들이 목숨을 바쳐 수호한 안식일 진리를 전달함으로써, 안식일 계명의 빛은 계속해서 전수될 수 있었다. 이러한 등대지기들의 충성과 희생을 통하여 16세기에 일어난 미완성의 종교개혁을 마무리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마지막 시대에 이루어 질수 있게 되었다.
4부-계속되는 종교 개혁 운동 (17, 18, 19세기)
17~18세기의 종교개혁
로마 교황권의 반 종교 개혁
16세기 각국에서 일제히 일어난 종교개혁은 초반에 힘있게 전진하는 듯 했지만, 개혁자들 사이에 예배의식, 성만찬, 예정론 등과 같은 교리 문제에 이견이 나타나고, 재침례파에 대한 개신교 안에서의 자체 핍박이 가해지면서 분파주의에 기울어져 중심을 잃게 되었다.
반면 개혁의 초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던 로마 교황권은 잠시 자성과 자책의 빛을 보였으나, 재빨리 태도를 바꾸어 반종교개혁운동의 전열을 가다듬었다. 1545년에서 1563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열린 역사적인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었던 면죄제도, 연옥, 화체설, 성자 및 유물 숭배 등 모든 교리들은 재확인되었고, 전통은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다는 결의와 함께 상당수의 외경이 인가되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루터, 쯔윙글리, 칼빈 등과 같은 개혁자들은 박멸되어야 할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러한 종교회의의 결의를 실천하도록 선택된 단체가 바로 스페인의 로욜라가 1534년 8월 15일 6명의 다른 회원과 함께 창립한 예수회(제수잇)였다. 교황과 로마 카톨릭교회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불사하겠다는 서약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들에 의하여 각처에 고등교육기관이 설립되었고 각급 지도자가 양성되었으며, 외국 선교가 펼쳐졌다. 이들에 의해서 악명 높은 종교 재판소가 다시 운영되었으며, 종교개혁으로 잃었던 지역들이 회복되었고, 개신교보다 한발 앞서 아시아, 남미, 카나다 등지에 가톨릭 신앙이 성공적으로 전파되었다. 이들은 또한 적그리스도에 대한 가짜 가르침을 조작하여 개신교회 속에 은밀히 밀어 넣는데 성공하였다. 마틴 루터를 위시한 대부분의 종교 개혁자들은 다니엘서 7장과 요한계시록 13장을 근거로 교황을 역사 속에 존재해 온 적그리스도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예수회의 두 젊은 신학자들은 적그리스도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며 미래의 어느 시점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미래주의”를 만들어서 교황권을 적그리스도로 주목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눈을 말세에 나타나는 어떤 초인간적인 존재에게 돌리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회가 교황권의 반개혁운동의 일환이었던 “미래주의”에 기초한 비밀 휴거론를 받아들이고 따르고 있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비밀 휴거 문제는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제24호를 참조하기 바람). 로마 가톨릭교회의 반종교개혁이 유럽과 신대륙, 아시아를 휩쓰는 동안 개신교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루터교의 쇠퇴와 경건운동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지 백 년이 채 못되어, 루터교는 “오직 성경”이라는 본래의 대의명분을 망각하고 새로운 빛을 거절한 채 교단이라는 담을 놓이 쌓놓고 냉담한 형식주의에 빠져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이에 경각심을 가지고 일어난 것이 루터교 목사였던 스페너와 프랑케 교수가 독일의 할레 대학교를 중심으로 일으킨 경건주의 부흥운동이었다. 평신자 중심의 소그룹 성경연구와 기도회를 통하여 실생활의 경건을 강조하여, 각종 쾌락을 금하고 절제를 강조하며 당시의 편만한 악을 견책했다. 단순한 예배의식과 속죄의 필요를 강조하는 복음이 중심이 된 설교로 이하여 죽은 듯 했던 교회에 새 생명이 넘쳐 들어왔다. 경건주의의 중심지였던 할레대학에서 교육받고 부흥을 체험한 독일 색슨 출신의 루터교 신자 진젠돌프 백작이 이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모라비아 교회를 탄생시켰다(1727년).
루터교의 양자 - 모라비아 교회
진젠돌프 백작은 자신의 넓은 땅을 로마 가톨릭의 핍박으로 내어 쫓긴 보헤미아인들과 모라비아인들, 그리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나선 개신교도들에게 피난처로 제공했다. 1727년, 서로 주장이 다른 각 파의 신자들을 성령으로 하나가 되게 하여 형제의 연합이라 부르는 모라비아 교회를 조직했다. 처음에는 6백명으로 시작한 이 작은 교회는 평신도 선교사를 양성하며, 그 후 150년간 2,170명의 선교사를 신대륙을 비롯하여 서인도 제도, 그린랜드 등으로 파견하여 개신교로서는 최초의 세계 선교를 시작했다. 루터교의 진수인 경건주의와 허스파 신앙의 진수인 보헤미아, 그리고 모라비아 형제회의 신앙이 진젠돌프 감독에게서 결집되어, 루터교의 양자격인 모라비아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모라비아 교회의 아우 - 감리교
진젠돌프 백작이 이끌어간 경건하고 능력이 넘치는 모라비아 교회가 개신교에 끼친 영적 감화는 헤아릴 수가 없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회심이다. 당시 옥스포드 출신의 영국 국교회 신부였던 웨슬리가 미국의 인디안을 위한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아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대서양을 항해하던 중 심한 풍랑을 만나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배에 함께 탔던 모라비아 평신도 선교사들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인디안 전도에 실패하고 돌아온 웨슬리는 자신의 진정한 회심을 위해 고민하던 중, 1738년 5월 24일 저녁,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모라비아 교회의 집회에 참석하여 마침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마음으로 뜨겁게 체험하고 회심을 경험했다.
이리하여 성령으로 충만해진 웨슬리 형제와 친구 휫필드의 지칠 줄 모르는 헌신으로 영국은 일대 부흥을 경험했고 웨슬리 형제에 의해서 교회 역사를 바꾼 감리회(Methodist)가 조직되었다. 처음에는 모라비아 교회에 부속되었다가 1740년 최초의 자립 감리회가 런던에 형성되었다.
웨슬리가 감리회 운동을 일으켰던 18세기 초의 영국은 영적인 일대 위기를 겪고 있었다. 종교개혁의 진수였던 청교도 정신은 신대륙으로 자리를 옮기고, 영국 국교회는 생명이 없는 형식주의로 퇴화한 데다가 성직자들의 퇴폐는 극에 달했다. 남아있던 장로교와 침례교는 개혁의 의지를 상실한 채 있었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유니테리안 신학에 잠식당하고 있었으며, 때마침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자연신론, 곧 하나님을 인간과 역사에서 분리시켜 불필요한 존재로 만든 파멸적인 철학 사조에 휩싸여 있었다. 이것이 유럽 대륙에서는 무신론적인 계몽주의로 나타났고, 인간위주의 합리주의로 발전하여, 마침내 프랑스에서 현대 무신론이 탄생한 혁명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후에 공산주의 혁명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18세기의 영국을 프랑스와 같은 무신론적 혁명의 파도로 부터 구한 것은 웨슬리의 감리회 운동에 힘입은 바 크다.
웨슬리 형제가 이룩한 감리회는 대부분의 신조를 일반 기독교와 함께 하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와 함께, (1) 성령의 역사에 의한 중생, 곧 성화와 성결(거룩한 삶)을 특히 강조한다. (2) 웨슬리의 경험과 가르침에 따라 칼빈의 절대적인 예정론을 거부하고 아르미니우스의 예지예정을 따르며 (3) 신자의 세례와 함께 유아세례도 인정하고, (4) 감독제도의 교회행정을 가진다. (5) 칼빈주의 교회들처럼 다른 신조를 가진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일이 거의 없다.
19세기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열등아 - 프랑스
종교개혁으로 치명상을 입었던 중세 가톨릭 교회가 예수회가 주도한 반종교개혁으로 세계 각처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개혁자들이 일으켰던 개혁신앙은 그 후손들의 나태하고 형식적 신앙 때문에 거의 죽어갔지만, 18세기 독일에서는 경건주의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결과로 1727년 세계 선교의 문을 연 모라비아 교회가 탄생되었다. 그리고 심각한 영적 침체에 빠졌던 18세기의 영국에서 웨슬리 형제들이 일으킨 부흥운동은 1740년 감리회를 탄생시켰으며, 동 시대에 신대륙 미국에서는 대각성운동이 일어나 개신교의 일대 확장과 부흥을 초래했다.
그러나 같은 18세기에 무신론적인 합리주의에 노출된 프랑스는 영적 부흥 대신 1789년 공포와 유혈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오히려 19세기를 휩쓴 무신론과 회의론의 요람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와 연관하여 프랑스의 가톨릭 세력이 남 프랑스 지방의 왈덴스인들 4천여명을 집단 학살하였으며(1545년), 1572년 8월 24일 성 바돌로메 제사의 밤에는, 화해를 모색하던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인 위그노들을 속임수로 모은 뒤 빠리에서 2천명, 지방에서 2만명을 무참히 학살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혁명 직전까지 계속된 핍박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위그노들은 국외로 도피 내지 추방됨으로써, 프랑스는 깊은 영적 밤을 지나가게 되었다.
인간의 이성을 위주로 한 무신론적인 프랑스 혁명 정신을 바탕으로 한 근세의 시작인 19세기가 펼쳐지면서 1848년 칼 마르크스는 이념적 무신론인 공산주의 선언을 했고, 1859년에는 다윈이 과학적 무신론인 진화론을 발표했다. 그리고 각각 1844년 태어난 벨하우센은 성경의 영감을 부정하는 신학적 무신론인 고등비평을 내놓았으며, 니체는 철학적인 무신론인 초인주의를 소개하였다. 이들 모두는 성서 신앙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조들이었다. 바야흐로 면면이 이어온 성서 신앙은 세상과 교회 안팎으로부터 그 근본을 위협받는 일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대응
빌라델비아 교회, 18~19세기의 세계 선교 시대
이 비상한 시기인 18~19세기에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대책을 강구하셨는가?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 시 119:126. 성경의 영감과 역사성을 불신하는 파멸적인 현대 신학인 고등 비평에 맞서 이를 반증하는 성서 고고학의 열쇠인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1822년에,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설형[쐐기]문자가 1847년에 각각 판독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역사적 진실을 증거하도록 “돌들이 소리지르게”(눅 19:40)하셨다.
1864년, 세균학의 아버지인 프랑스 학자 파스퇴르는 실험을 통하여 희랍의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4세기) 이후로 믿어왔던 생명의 자연발생설이 거짓임을 입증함으로써, 생명은 생명에 의해서만 발생된다는 창조 신앙을 뒷받침했다. 1865년에는 진화론이 비과학적임을 드러내는 멘델의 유전법칙이 발표되어, 다윈이 무질서한 것으로 관찰한 종의 변이가 결코 전혀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낼 수 없도록 법칙에 의하여 통제되고 있음을 입증했다. 1804년에는 대영 및 해외 성서공회가 발족되었고, 1816년에는 미국 성서공회가 발족되어 세계적인 성경 보급이 촉진됨으로써 개인적인 성경연구, 특별히 예언에 관한 연구가 고조되었다. 1800년부터 1830년 사이에 다른 나라 말로 번역된 성경의 수(86개 언어)는, 그 이전의 1800년 동안 번역된 수(71개 말)보다 더 많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8세기 전후반에 걸쳐 일어난 부흥과 대각성은 19세기에는 세계 선교의 열정으로 이어져 온 세상에 복음이 급속히 전파되었다. 이 일을 위해 미국의 해외 선교위원회가 조직되었고(1810년), 잇달아 회중교 총회(1810년), 침례교 선교 연합회(1814년), 감리교 선교회(1819년)가 조직되었고, 개신교 감독교회(1820년), 화란 개혁교회(1832년), 장로회(1837년) 등도 세계 선교를 위한 조직을 갖추었다. 1800년대 초반에 신속히 보급된 성경과 미국을 중심으로 확산된 선교의 열정, 그리고 1800년 겨우 530만에 불과했던 미국의 인구가 유럽으로부터의 급증한 이민으로 1840년에 1700만에 이르게 된 일대 변화는 미국 개신교 세력의 신속한 확장을 가져왔다. 1800년부터 1830년까지 30년 동안 미국의 회중교,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는 110만의 신자가 증가하였고, 특히 1826년부터 1830년 동안 20만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9세기 초 미국을 비롯한 유럽, 남미, 아시아 등 복음이 전도된 세계 각 곳에서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연구와 함께 세상의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왔음을 알리는 재림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영국에서는 웨이와 드루먼드 등이 일어났고, 독일 태생 유대인 울프는 8개국 언어를 구사하며 근동지방과 중앙 아시아, 인도에 이르러 재림기별을 전했고, 1837년에는 미국 상원에 초빙되어 기별을 전했다. 스코트랜드의 어빙과 커닝험, 스위스의 가우센, 독일의 리히터, 호주의 플레이포드, 특히 저술을 통해 스페인과 남미에 재림기별을 전한 전직 예수회 신부 라쿤자, 미국 전역에서 10만 이상이 참여한 재림운동을 주도한 침례교 신자[후에 목사가 됨] 윌리암 밀러 등은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온 세상에 전한 기수들이었다.
특별히 조직적이고 빈틈 없는 다니엘서의 예언들에 기초한 밀러의 가르침은 각 교회들로부터 대대적인 호응을 얻어, 이름이 확인된 숫자만도 174명이나 되는 목사들이 재림운동의 지도자로 참가했는데, 감리교와 침례교 출신이 다수였고, 회중교, 크리스찬교, 장로교, 성공회, 루터교, 화란 개혁교회, 퀘이커교 출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밀러는 이들과 함께 13년간(1831-1844) 지칠줄 모르고 재림의 임박함을 전파한 결과 최고 13만 5천명으로 추산되는 재림신자들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재림운동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마지막 심판을 알리는 일곱째 나팔이 불기 직전에(계11:15)있을 것으로 예언된(계10장) 숙명적인 운동이었다. 예언을 통하여 이들에게 주어진 기별은 근세를 시작한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발판을 굳힌 무신론적인 합리주의 풍조로 넘쳐있던 세상과 교계에 얼마나 시기적절한 하나님의 대응이었는가?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계14:7).
진리의 마지막 연결고리
하늘 성소에서 시작되는 대속죄일의 심판을 알리는 마지막 일곱째 나팔이 울리면서(계 11:15) 열려진 하늘 성전의 지성소에서, 요한은 십계명의 두 돌비가 보관된 언약궤를 분명히 목도했다(계 11:19). 그리고 잇달아 12장에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그 여자의 남은 자손”(17절)의 출현을 확인했다. 이러한 예언이 재림운동을 통하여 이루어져 나가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준수했고, 성경과 역사가 확인한 안식일이 4세기 이래 어떻게 유린되었고, 종교 개혁 이래 어떻게 회복되었는지를 이미 공부하였다. 종교개혁의 진전에 따라 중세 교회에 의하여 짓밟혔던 구원의 진리들은 잇달아 회복되었어도, 배도의 세력에 의하여 단단한 전통의 굴레가 씌워진 네째 계명인 안식일의 회복은 가장 힘겹게 이르러왔다. 왈덴스인-위클립-허스-루터교와 재침례파-개혁[장로]교-청교도-회중교-침례교-제칠일 침례교로 이어지는 종교 개혁의 정통적인 진로를 따라 힘겹게 회복된 제칠일 안식일이, 마침내 1800년대에 일어난 재림운동에 합류하게 된다.
1844년 3월, 제칠일 침례교인인 라헬 오우크스 부인이 제칠일 안식일에 관한 진리를 재림운동에 참가한 감리교 목사 휠러에게 전함으로써 안식일을 지키는 최초의 재림교회가 뉴 햄프셔 주에 출현했다. 이리하여 일곱째 나팔이 불 때에, 하늘 성전의 지성소가 열리고 십계명이 보관된 언약궤가 공개된 장면처럼(계 11:17), 재림운동을 통하여 밝혀진 하늘 성소의 진리와 하나님의 계명의 중요성에 대한 깨달음이 합쳐져서 기독교회가 드디어 더 밝고 완전한 빛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진행되어온 종교개혁은 완전한 빛으로 나아가기까지 오늘도 계속되어야 한다. 성경 말씀과 맞지 않는 모든 가르침들은 과감하게 버리는 용기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가지는 것이 모든 기독교인들이 소유해야 할 종교개혁의 정신이다.
Q & A
십계명에 대한 종교 개혁자 칼빈의 믿음을 아십니까?
요한 칼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이 우리를 율법의 권위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은 그리스도인의 생애가 거룩한 삶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영원불변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포함하고 있는 십계명은 마땅히 존재해야만 하며 변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언제나 동일한 존경과 순종을 표해야만 한다.” Commentary on harmony of the evangelists, trans. By William Pringle
종교 개혁자들의 후예인 현대 기독교인들은 16세기 이래 진행되어 오고 있는 종교개혁의 유산들을 신실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이 왜 루교의 신앙을 받게 되었으며, 자신이 무엇 때문에 장로교나 감리교의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분명한 성서적 고찰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지신이 갖고 있는신앙의 뿌리와 근본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면서 방황하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깊은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성서적 그리스도인은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이 회복시킨 진리처럼,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신, 구약 성경을 절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교회의 전통이 아닌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양심의 유일한 규범임을 믿어야 한다.
성서적 그리스도인은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처럼, 사람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공덕에 의하여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선물임을 믿어야 한다. 이러한 구원의 경험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심으로써, 예수님을 죄인을 위한 대속주와 온전히 본받아야 할 모본으로 믿는 믿음에 의하여 가능하게 된다.
성서적 그리스도인은 왈덴스인들과 위클립이 밝혔고, 루터가 재천명한 것처럼, 인간의 행위나 교회가 제공하는 공덕 대신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중세기의 천주교회가 주창한 전통 대신 성경을, 교권 대신 그리스도를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 인정해야 한다.
성서적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곧바로 나갈 수 있는 만인 사제직을 제창하며, 루터나 틴데일의 가르침처럼, 연옥 교리와 고대 이집트와 헬라의 사상인 영혼 불멸을 믿지 않으며, 신구약 성경, 특별히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부활로 입증된 조건적 불멸과 부활 신앙을 확신해야 한다.
그러나 성서적 그리스도인은 중세 교회의 미사 제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루터의 어중간한 예배의식과 성만찬에서의 성체 공존설, 의와 심판의 표준인 율법의 복음적 기능에 대한 경시 등은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지금까지 이어온 교회와 종교 개혁 역사를 되돌아 보면, 중세 가톨릭 뿐만 아니라, 루터, 칼빈 등 개혁자들에게까지 가혹한 핍박을 받은 재침례파의 개혁 신앙이야말로 성서 신앙의 회복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신앙의 유일한 근거로서의 성경 연구와 실천적인 경건을 강조한 것, 정치와 종교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한 것, 유아 세례를 비성서적인 것으로 부정하고 성인 신자의 침례를 가르친 것, 죽음의 무의식적인 상태와 부활 신앙,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한 것과 핍박자들에 대한 관용, 평화 애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고 고대한 그들의 신앙은 개신교회가 받아들여야 할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이다.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의 양대 주류를 이룬 칼빈의 역할은 개혁의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루터의 개혁을 이어받고 보완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성서 위주의 철저한 신앙과 그 권위에 복종할 것을 가르친 성서적 신앙,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본질과 의의 표준이 되는 율법의 기능을 균형있게 가르친 것, 성서적인 개신교 예배의 확립, 상징으로서의 성만찬의 영적 의미를 강조한 것, 장로제도를 확립한 교회조직과 개신교 교육제도의 기반을 놓은 일 등은 개신교의 신앙과 구성에 참으로 요긴한 요소들로 받아들여 져야만 한다.
그러나 칼빈의 가르침들 중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로 인하여 신학과 신앙의 조화를 상실한 칼빈의 이중 예정설, 제한된 속죄, 무조건적인 선택, 불가항력적인 은혜 등은 성경과 인간의 경험에 어긋난다는 것이 칼빈보다 후에 일어난 웨슬리와 같은 종교 개혁자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이다.
칼빈은 십계명의 복음적 기능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를 하나님의 의의 표준으로 적절히 제시했다. 그러나 유독 네째 계명인 안식일에 대해서는 “교회 중에서 질서를 보존하는” 방편으로, “이레에 한번씩 모”이는 편리한 날 정도로 가르친 것은 성서 신앙에 전적으로 어긋나는 임의적인 해석이다. 결과적으로, 안식일은 일주일 중 아무 날이나 될 수 있다는 왜곡된 신앙을 일반 신자들로 하여금 갖게 한 것은 그가 남긴 커다란 모순 중의 하나이다.
칼빈이 어거스틴의 영향을 크게 받은 운명론적인 예정설을 제창하고, 플라톤을 통하여 소개된 중세 교회의 영혼불멸 사상을 개혁교회의 신앙으로 전수시킨 것과 개신교의 연옥에 해당하는 중간상태의 개념을 소개한 것은 개혁신앙의 진전에 크나큰 부담으로 남았다. 또한 신학이나 신앙에서 이설이나 이견을 가진 사람들을 화형과 추방 등 혹독한 방법으로 대응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잘못된 행위이며 , 제네바의 신정 정치에서 보여진 바와 같이 정치와 교회가 하나로 연합하는 관계는 신약 성경의 교회관에 비추어 크게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한다.
루터의 뒤를 이어 종교개혁을 진전시킨 칼빈의 역할은 필수적이었지만, 루터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1260년간의 중세 천주 교회의 영적 오염으로부터 단번에 모든 것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 “그 시대의 아들”로서의 한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완전히 뿌리채 뽑지 못한 비성서적인 가르침은 밝혀진 빛에 의하여 철두철미하게 교정되고 보안되어야 한다.
회중파 청교도들이 보여준 바 성경에 일치한 철저한 신앙과 경건한 생활, 성령의 지배를 받는 개인의 양심과 판단에 따른 자유로운 신앙과 성경해석, 정치와 교회의 철저한 분리 원칙들을 성서적 신앙이다. 회중파 청교도로부터 성립된 침례교회의 개혁자들이 가르친 대로, 유아세례는 비성경적인 예식이며, 오직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성인이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음으로써 성경이 인정하는 참된 거듭남의 의식이다. 또한 침례교의 영적 뿌리가 되고 있는 재침례파의 메노나이트 신자들이 실천하였던, 요한복음 13장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본에 따라 성찬식 전에 서로의 발을 씻기는 세족예식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행하여야 할 합당한 의식이다.
웨슬리 형제가 성결운동을 통하여 깨우친 중생과 성화에 과한 강조와 예지예정에 관한 아르미니우스 가르침을 받아들여 이를 진전시키고 체험하게 한 사실은 성서신앙의 소중한 유산으로서 더욱 강조되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다. 감리회 운동의 지엽인 구세군의 자선과 사회 봉사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열매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덕성이다.
감리회 운동에 불을 붙인 모라비아 형제회의 세계 선교의 이상과 열정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위대한 사명(마 28:19)을 실천한 본보기로,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계 14:6)진 남은 백성의 귀감으로 받아들여 져야 한다.
마침내, 왈덴스인과 재침례파, 모라비아 형제회와 회중파 청교도의 맥락을 타고 집대성된 침례교의 개혁 신앙에서 돋아난 제칠일 안식일의 회복은, 종교개혁을 마무리 짓는 성서신앙의 가장 순수한 결정이며 가장 성숙된 결과로 확신한다.
이와 같이 종교개혁이 완성되어가는과정은 완전히 순수하지는 못하지만 귀중한 광물질이 섞인 광석을 용해시켜, 불순물은 제거하고, 순수해진 값진 금속을 융합시켜서 한 덩이로 만드는 용광로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시대의 신앙 분위기를 호흡해야 했기 때문에 단번에 완전할 수 없었던 개혁자들의 단편적인 개혁의 진리들이 한데 녹혀지고, 중세기 천주 교회의 배도에 의해서 생성되었던 불순물이 제거됨으로써 마침내 종교개혁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쳐 출현하는 것이,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계 12:17)이며, 그들의 특성이,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계 14:13)로 요한계시록에 표현된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계명이 완전하게 회복되는 것을 종교 개혁의 완성점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종교개혁의 결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으로 요약된 마지막 시대의 성서적 개혁 신앙은 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독자적인 창안이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이며 결산인 것이다. 그것은 중세의 교권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고 손상된 성서신앙의 회복을 위해 온갖 고난과 희생을 치르고, 끝내는 불에 사루지고 물에 던져지며, 칼에 목베임을 당한 수십만, 수백만 성도들의 희생의 댓가인 것이다.
이 위대한 구원의 신앙을 회복시켜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개혁자들이 당한 고난과 희생을 돌이켜 보노라면, 회복된 진리 하나 하나가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하게 느껴지게 된다. 그리고 치뤄진 그 엄청난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말아야 할 부담과 책임을 아울러 절감하게 된다. 그러한 대가를 치름으로써 회복된 성경의 진리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거기에 일치하게 살아가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요 특권인 것이다.
그리하여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마지막 시대의 여자의 남은 자손들은 개혁자들과 그들의 신앙을 보존해온 신앙공동체들이 물려준 귀중한 유산을 빚진 마음으로 받아들여, 다음와 같이 종교개혁을 결집시켜야 한다.
1. 루터의 개혁의 핵심인 “오직 성경”, “오직 믿 음”, “오직 은혜”의 개혁신앙을 실천하며, 교 회의 머리로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인정하고 조건적 불멸과 부활 신앙을 받아들인다.
2. 재침례파 개혁의 유산인 성인신자의 침례, 정 교분리, 신앙과 양심의 자유수호, 죽은 자의 무의식, 재림을 고대하는 그리스도인의 경건 한 생활, 평화애호의 신앙을 받아들여 실천한다.
3. 메노나이트 재침례파의 세족예식을 성서적 의 식으로 받아들이며, 그들의 양심적인 평화 애 호 신앙에 입각한 의료봉사를 본받으며, 나아 가 심령의 성결과 함께 육신의 성결을 위한 건강생활을 위해 성경적인 위생법칙과 금주, 금연 등 모든 분야의 절제를 강조한다.
4. 칼빈의 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성서적인 예배, 성경의 권위에 대한 절대 복종, 율법의 복음 적 기능, 장로제도 등을 확인하며 수용한다.
5. 회중파 청교도[회중교]들의 값진 유산인 성경 에 일치한 신앙과 경건한 생활, 정치와 교회 의 분리, 성령의 지배를 받는 신앙 양심을 존 중하며 실천한다.
6. 침례교의 유산인 성인 신자의 물에 잠기는 침 례를 실천한다. 성경에 입각한 속죄와 인간 의 의지 문제를 정립시킨 일반 침례교와 자유 의지 침례교의 유산을 존종한다.
7. 제칠일 침례교의 값비싼 유산인 제칠일 안식 일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십계명 전체를
지키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8. 웨슬리의 감리회 운동의 유산인 중생과 성결 을 필수적인 구원의 진리로 받아들이며, 성령 의 사역 강조와 칼빈의 모순된 예정론을 성서 적 신앙으로 대응한 것에 동감한다.
9. 구세군의 구호봉사와 자선사업을 통한 사회 참여를 본받는다.
10. 모라비아 형제회의 선교 신앙을 받아들여 지 역의 제한이 없는 세계 선교 사업을 추진한다.
11. 사도시대 이래, 중세 교회를 거쳐, 정통 개혁 신앙으로 이어진 바, 하나의 통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께서 영원히 함께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12. 종교개혁을 마무리짓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인류의 마지막이고 유일한 소망으로 확신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종교개혁의 결산인가?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성서 진리의 모자이크 작품인가? 4세기 이래 깊어만지던 배교의 골짜기, 16세기 이래의 종교개혁으로 조금씩 조금씩 메워져 온 그 깊게 패인 배도의 골짜기가 감격스럽게도 다시 메워져, 마침내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는 왕의 대로, 곧 “The King’s Highway로 마련되어야 한다. 이러한 왕의 대로를 수축하는 일이 종교 개혁의 완성이며, 그 일에 가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 시대의 진정한 여자의 남은 자손들인 것이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사 58:12-14).
본문에 기록된 이사야 58장은 참다운 신앙의 개혁과 부흥을 촉구하는 강력한 기별, 곧 사람에게 드러내기 위한 외형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을 행사하지 말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내면적이고 진실한 신앙의 부흥을 촉구하고 있다. 바벨론의 포로에서 벗어나게 될 백성들은 오랜 세월 동안 무너진 채로 남아 있던 예루살렘 성의 기초를 다시 쌓아 복구해야 했다(사 58:12).
마찬가지로, 영적인 바벨론의 통치로 비교되는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 동안 유린되고 훼손된 하나님의 계명과 성경의 진리들을 다시 회복해야 할 마지막 날의 성도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인데(계 14:12), 바로 이것이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 앞에 놓여진 특권과 사명이며, 지금까지 살펴본 그리스도 교회 역사의 증언이요, 이제 곧 종결에 이르게 될 구속사의 절정인 것이다.
역사의 증언
지금까지 거의 2천년에 걸쳐 진행된 교회사, 특히 종교개혁의 역사를 요약하면서 구속사의 진행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역사의 조명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이의없이 도달하게 될 이해와 결론은 무엇인가?
첫째, 4세기에 정치적, 종교적 기초가 놓이고 6세기부터 정식 출범한 중세 교회는 다니엘서와(7:25, 8:10-12, 11:31-40) 요한계시록에(12:6, 13-15, 13:5-9) 정확히 예언되었고, 사도 바울도 생생하고 분명하게 예고한(살후2:3-7) 배도의 세력(적 그리스도의 세력)이었음을 성경과 역사에서 확인하게 되었다(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제46호 참조).
둘째, 12세기부터 태동했고 16세기에 폭발된 종교개혁은 중세 교회의 극에 달한 배도와 타락에 대하여 신앙 양심과 성서 신앙이 일으킨 당연한 반응이며,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친히 이끄신 개혁운동이었음을 동시에 확인하였다.
세째, 중세 교회의 배도가 1천년 이상이나 계속된 뒤에 일어난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겨우 개혁의 시작이었지 개혁의 완성이 결코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16세기 종교개혁의 기수들이었던 루터, 쯔윙글리, 재침례파, 칼빈 등의 개혁 역시, 위기를 당한 구원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한 위대한 시작이었지 찬란한 완성이 아니었음도 명백해졌다. 따라서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불가불 완성을 향하여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발전되어야 할 성질의 운동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개혁의 진전과 함께 새롭게 밝혀진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채, 16세기에 그대로 머무르며 고착돼 버리는 것은 종교개혁의 정신과 목적에 전적으로 어긋나는 또 하나의 반 종교개혁이다. 이러한 사실은 최초의 분리주의 청교도로 회중교 목사였던 로빈슨이 1620년 자신이 목슴을 바쳐 목양하던 일단의 신자들을 메이플라워호에 태워 신대륙 미국으로 떠나보내던 때의 고별설교에 잘 드러나 있다.
“저로서는 개혁교회들의 상태에 대해 참으로 비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들은 한 때는 신앙적이었지만, 현재는 그들의 개혁자들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루터교 신자들도 루터가 깨달은 것 이상을 넘어설 수가 없고... 칼빈주의 신자들도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깨닫지는 못한 사람[칼빈]에 의하여 이르게 된 자리에 단단히 고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슬퍼해야 할 불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개혁자들]이 그 당시에는 타면서 빛을 발한 빛이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속속들이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 살아있다면, 그들이 처음에 빛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그 이상의 빛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네째, 살펴본 종교개혁의 역사에서 분명히 드러났듯이, 16세기에 일어난 루터나 쯔윙글리, 재침례파, 칼빈 등의 개혁이 결코 완전하지 않을 뿐더러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를 고수한다는 명분으로 그것을 현상태로 고착시키는 것은 건전한 성서 신앙이 아니라, 한낱 종교적 아집이 되고 만다.
그것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게 하시고 이제는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엡 4:13, 14)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도 전적으로 어긋나는 신앙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6세기 이후의 개신교회가 바로 이러한 현상에 고착되었음을 불가불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장로교가 로마 가톨릭교로부터 분리되어 나온데 대해 장로교 신학자 거트리박사는 강한 부정을 표시하고 있다. “3백년 전에 우리 교회는 펼쳐진 성경을 근거로 삼고, ‘성경을 탐구하라’는 표어를 내걸고 로마 천주 교의 문들로부터 행군하여 나왔다. 그러나 그들이 바벨론으로부터 말끔이 나왔었는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드리는 호소
이제 장장 2천년 가까이 진행되어온 신약시대 교회의 우여곡절이 많았던 역사를 함께 답사해온 독자 여러분과 지면에서 헤어지려 하면서, 1620년 미국의 국부인 필그림 파아더즈들을 길러내어 떠내보낸 존경받는 회중교 청교도 목사 로빈슨의 고별설교를 다시 상기하게 된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제 곧 헤어지게 됩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지는 주님만이 아십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기회를 주시든 아니 주시든, 저는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여러분에게 책임을 부과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이 쓰시는 다른 방편을 통하여 무엇이든 여러분에게 드러내고자 하시는 때는, 일찌기 나의 봉사를 통하여 드러난 진리를 여러분이 받아들였던 것처럼,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십시오. 왜냐하면, 제가 확신하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말씀으로부터 터져나올 더 많은 진리와 빛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미 알려졌거나 장차 알려지게 될 주님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동의한 바 여러분의 교회의 서약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부터 여러분에게 알려지게 될 빛과 진리가 무엇이든지 그것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나님께 서약하고 또 서로 간에 약속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더욱 조심하도록 간청하기는 여러분이 진리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은 사전에 그것을 성경의 다른 진리들과 비교하고 달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계는 극히 최근에야 그처럼 두터웠던 적 그리스도적인 암흑에서 나왔으므로, 단번에 완전한 지식이 모두 터져나오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려깊은 개혁자의 신앙인가? 교파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오직 성경”에 얽매인 성서 신앙, 새롭게 밝혀진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 편견을 팽개치고 마음을 활짤 연 의로운 신앙, 인간 개혁자들에게 고착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에게 고착된 구원의 신앙, 이러한 개혁신앙을 우리는 가졌는가?
지금 우리에게는 초교파적인 대각성이 필요하다. 어느 교회의 역사가 더 길고 짧으냐를 떠나서, 어느 교회가 더 많은 신도를 갖고 있는지를 떠나서, 지금 갖고 있는 빛에 충성하면서 계속 더해주시는 새 빛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고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루터와 칼빈의 개혁 이후, 얼마나 더 새로운 진리, 얼마나 더 밝은 빛, 얼마나 더 놀라운 깨우침이 성경으로부터 쏟아져 나왔는가? 우리는 그러한 새 빛에 정직하게 반응해 왔는가? 고난이나 죽음도 불사하게 만든 루터의 “하나님의 말씀에 얽매인 양심”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짓밟힌 성서 신앙을 한 치 한 치 회복하기 위하여 옥에 갇히고 목베임을 당했으며, 물에 던져지고 불에 사루어진 무수한 개혁자들의 희생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을 참으로 바르게 평가한다면 지금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14).
그렇다. 여기에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할 일이 있다.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피와 땀과 눈물과 목숨을 바쳐 싸워 온 진리의 선한 싸움을 어서 속히 끝내야 할 역사적인 사명과 특권이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래야 그 지긋지긋한 죄의 통치가 끝나고 몸서리쳐지는 고난과 죽음도 끝날 것이다.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모든 약속의 일대 성취인 것이다. 이처럼 오래 계속된 진리의 선한 싸움을 마침내 승리로 끝낼 마지막 날의 하나님의 백성인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계 12:17)이 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며 형용할 수 없는 영광인가? 그것은 단 한번 살다가 결국은 죽게 될 모든 인간이 누려 볼 수 있는 가장 보람되고 값진 삶이 아닌가?
지금까지, 믿음과 불신, 충성과 배신, 진실과 위선, 순종과 불순종, 용감과 비겁, 자만과 겸손, 구차한 삶과 떳떳한 죽음이 어지럽게 교차된 선과 악의 싸움터인 그리스도교 역사의 현장을 함께 답사하며 그 결말을 확인한 독자들이 끝없는 어두움 대신 영원한 새벽을 알리는 진리의 밝은 새 빛을 선택하기를 마지막으로 탄원한다. 어두움은 별도로 택할 필요가 없다. 빛을 거절한 결과가 어두움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요 3:21)게 마련이며,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요 7:17)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깨달은 바 빛과 진리를 위하여 “죽도록 충성”함으로써 가치를 깨닫게 된 “생명의 면류관”(계 2:10)을 마침내 누리게 되기를 재삼 탄원한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1).
Q & A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십계명에 구속 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되는데, 정말 그런가요?
종교 개혁자들은 수 세기 동안 십계명의 준수를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서, 기독교회가 세속에 물들어 가면서부터 계명과 진리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퇴락해 버렸습니다. 개혁자들은 교회를 세속과 악의 조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계명과 순종의 문제를 강조했습니다.
마틴 루터: “하나님의 계명이 폐지되었다는 이론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나의 논리로는 그와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없다. 법이 폐지되었다는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가 어떻게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들어보고 싶다. 죄에 묶여서 죄를 범하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법을 없애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법이 없는 곳에 어떻게 죄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누구든지 법을 없애려고 하는 사람은 죄를 없애려고 하는 것과 같다.” “Wider die Antinomer” in Sammtliche Schriften, ed. By Johann Walch, vol. 20, col.1613,1614
드와이트 무디: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십계명은 구약시대 이후로 지금까지 인간을 구속하고 있다… 사람들은 십계명이 여전히 우리들을 묶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범하는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른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바울이 말하기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랑이 율법을 폐한다는 말이 아니다.” Weighed and Wanting, p. 10~17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내용은 노아 홍수시대 이전부터 거슬러 올라가 믿음을 지켜온 노독들의 생애와 그 신념에 대하여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 믿음장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모세는...”.
그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었고 믿음으로 타락과 부패를 헤치고 나아간 자들이었다. 그들은 믿음으로 승리하였고 믿음을 가지고 핍박과 죽음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이번 호의 내용에 비추어 히 11:33-40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BR> 위의 성경절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싸워온 선조들의 생애를 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기에 충분하다. 믿음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하는 것이다. 믿음은 어떤 논리를 인정하는 동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살아 있는 삶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믿음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 믿음은 능동적인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진리가 타협되거나 바뀌어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지 아니한다. 종교 개혁을 가능케 한 것은 개혁자들이 가진 바로 이 살아 있는 믿음이었다. 알면서도 가만히 중립을 지키고 있는 자들은 사실상 믿음을 가졌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고 있는 한가지 중요한 사상이 있다. 그것은 이 지구 역사의 믿음의 싸움에 있어서 마지막 주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주자가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 믿음의 싸움이, 아니 계속되어 가고 있는 종교개혁의 사업이 온전히 이루어 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목숨을 다하여 진리를 발견하고 내세우며 보존하여 왔다. 그들은 진리를 위하여서라면 모든 것을 버리고 희생하는 일을 즐거이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그 결과를 바라보기만 하였지 아직 그 약속이 이루어 지는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모든 믿음의 싸움의 결과와 끝은 세상의 종말에 살고 있는 마지막 주자인 우리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11:40절 하단).
빛이란 점진적인 것이다. 아침의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8). 하나님을 알기 시작한 자가 단번에 진리를 다 꿰어 차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요구된다. 진리를 이해해 나가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예수께서 세워 놓고 가신 초대 교회는 그 진리를 알고 실천하는 면에서 완전하였었다. 그들은 온전히 회개하였으며 성령을 충만히 받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후예들에게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돈에 대한 사랑과 권력에 대한 다툼과 정치와 타협하고 진리를 쉽게 변조시켜버리는 일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서서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사람들은 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그냥 지나쳐 버린 경우들이 많게 되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 있는 주의 종들이 그때마다 종교 개혁을 부르짖으며 전쟁을 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것이었고 또한 그 진리들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깨닫게 되며 구원을 얻게 되는 기초석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중세기에 진리는 그 빛을 잃게 되었다. 이 세상은 암흑 속으로 깊숙하게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위기 때에 하나님께서 개혁자들을 일으키신 것이다. 그들의 출현도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서서히 밝음을 비추이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역사의 흐름과 그 성정은 진리를 단번에 소화하거나 개혁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아울러서 진리의 원수인 사단의 방해와 공격이 또한 큰 변수로 늘 작용해 오고 있지 않은가! 이 종교개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진리의 빛이 온전한 분량에 도달 할 때까지 계속 전진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시작한 진리의 개혁은 그 후예들에게 와서 중단되어 버렸다. 중단은 후퇴를 뜻하는 것이다.
구속의 역사는 모든 진리가 회복되었을 때, 그리고 교회가 그 모든 진리를 회복한 후에 그 회복된 진리로 인하여 성결케 될 때에 그 끝이 이르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곧 하나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통하여서만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삐뚤어지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진리의 빛은 온전한 분량까지 전진되어 나가야 한다. 아직도 채 개혁되지 못한 채 감추어져 있는 진리들이 여전히 그 빛을 발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한 교회가 준비될 때에, 그리하여 어린 양의 신부가 드디어 준비되는 때에 예수께서 신랑으로 재림하시게 되는 것이다. 그 때에야 하나님께서 사단과의 전쟁에서 진리로 승리하시게 되는 것이다. 진리가 어두움을 이기고 승리한다는 사실이 온 우주에 증명된 이후에 끝이 오는 것이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전기를 발견하기 전까지 인류는 어두움의 노예로 살고 있었다. 전기의 발명 이후에 인류는 밝음의 자유를 누리며 얼마나 많은 발전을 도모해 왔는가! 교회의 사명은 진리를 완전하게 다시 회복하는데 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마지막 주자들이다. 개혁자들의 후예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명은 과연 무엇일까? 교회를 성장시키어 큰 건물을 짓는 것일까? 현세의 정치 제재를 바꾸기 위하여 노동자들과 함께 농성을 벌이는 일일까? 아니면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자선하는 일에 온 정력을 기울이는 일이란 말인가? 물론 그러한 일도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업은 교회의 사명에 있어서 지엽적인 일이다.
교회의 사명은 진리를 고수하고 가르치는 일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우선 순위를 바꾸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믿음은 단순한 동의나 인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하여 뛰어나가는 능동적인 삶 그 자체이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는 이 시대적인 사명과 도전을 어떻게 받아 드리겠는가? 예수께서 곧 오실 것이다. 우리는 종교 개혁의 마지막 주자들이다. 우리는 새로운 진리들을 발견하거나 듣게 될 때에 빛으로 빛으로 전진해 나가는 용기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이익이나 평판보다 하나님의 명예가 더 중요시 되어야 하겠다! 끝으로 1620년도에 청교도들을 미국으로 떠나 보내는 마당에서 설교한 회중교회의 청교도 지도자 로빈슨 목사의 고별 설교 내용을 다시 음미해 보도록 하자!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제 곧 헤어지게 됩니다. 제가 여러분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지는 주님만이 아십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기회를 주시든 아니 주시든, 저는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여러분들에게 책임을 부과합니다?毬ご途께서 그분이 쓰시는 다른 방편을 통하여 무엇이든지 여러분에게 드러내고자 하시는 때는, 일찍이 나의 봉사를 통하여 드러난 진리를 여러분이 받아들였던 것처럼,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십시오. 왜냐하면, 제가 확신하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말씀으로부터 쏟아져 나올 더 많은 진리와 빛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미 알려졌거나 장차 알려지게 될 주님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동의한 바 여러분의 교회의 서약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부터 여러분에게 알려지게 될 빛과 진리가 무엇이든지 그것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나님께 서약하고 또 서로 간에 약속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더욱 조심하도록 간청하는 것은 여러분이 진리로 받아드리고자 하는 것은 먼저 그것을 성경의 다른 진리들과 비교하여 달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계는 극히 최근에야 그처럼 두터웠던 적그리스도적인 암흑으로부터 나왔으므로, 단번에 완전한 지식이 모두 터져 나오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두 교회
노아시대에 두 교회가 있었습니다.
진리보다는 외관을 중시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려하고 웅장한, 그리고 안전하게 보이는 교회에 그들의 운명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노아의 단순한 설교와 초라한 방주를 손가락질하며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홍수가 시작되자, 노아의 교회가 참 교회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소돔 시대에 두 교회가 있었습니다.
진리보다는 외관을 중시하던 대부분의 소돔 시민들은 화려하고 웅장한, 그리고 안전하게 보이는 교회에 그들의 운명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룻의 경고를 노망난 할아버지의 허탄한 이야기로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리자, 룻의 교회가 하나님의 참 교회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두 교회가 있었습니다.
진리보다는 외관을 중시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합왕과 이세벨이 이끄는 화려하고 웅장한, 그리고 안전하게 보이는 교회에 그들의 영혼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경고와 호소를 코웃음으로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갈멜산 위의 제단에 불이 내려오자, 엘리야의 교회가 하나님의 참 교회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두 교회가 있었습니다.
진리보다는 외관을 중시하던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장들이 주관하는 화려하고 웅장한, 그리고 안전하게 보이는 유대 교회에 그들의 영혼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웃음과 조롱으로 침례 요한의 목을 자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이 내리자, 제자들과 다락방에 모여 있던 소수의 사람들의 교회가 하나님의 참 교회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에 두 교회가 있었습니다.
진리보다는 외관을 중시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려하고 웅장한, 그리고 안전하게 보이는 교황권의 교회에 자신의 운명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화형대의 불붙는 장작 위에 세워진 왈덴스인들과 개혁자들을 보면서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 개혁이 일어나자, 왈덴스인들과 순교자들의 교회가 하나님의 참 교회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오늘날 두 교회가 있습니다.
진리보다는 외관을 중시하는 현대 기독교인들은 화려하고, 웅장한, 그리고 안전하게 보이는 거대 교단에 그들의 운명을 의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여자의 남은 무리들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짐승의 표가 강요되고, 십사만 사천인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이 쳐질 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던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참 교회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