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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사귀가 샛노랗게 물들어 가고 있을 때, 오랜만에 경복궁의 서쪽을 다시 찾았다. 경교장과 우리네의 어릴 적 모습들을 간접 경험해 볼 수 있는 돈의문 박물관 마을을 앞에 둔 채 적막감이 주변을 감쌌다. 흥화문 앞에서 시선을 위로 둘 때 가을빛을 머금은 단청과 샛노란 은행잎이 바람의 결 따라 일렁이며 수려한 경관을 보여줬다. 점심시간을 맞춰 경희궁을 찾은 직장인들이 산책하는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그 모습을 차치하더라도 여태껏 겪어본 적 없는 그 느낌이 참으로 어색했다.
서울 시내 한가운데 자리한 고궁들은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경희궁은 입장료도 무료이거니와 과거에 비해 규모가 많이 축소된 탓인지 궁내 사람들을 많이 찾아보기 힘들었다. 흥화문을 지나 숭정문 앞에 도착하니, 오히려 진짜 정문이 바로 이곳인가 싶을 정도였으며 안내와 관리를 위한 몇 분만 보일 뿐 경희궁 주변으로 산책 길 따라 마련된 벤치에 앉아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낯선 기분과 더불어 이러한 의아한 감정을 더해 경희궁에서의 순간을 시작할 수 있었다.
1. 광해군
임진왜란이 마무리된 후, 우여곡절 끝에 보위에 오른 광해군은 항간에 돌던 소문을 듣게 된다. 오늘날 경희궁 자리에 왕기가 서려 있으니 이곳에 궁궐을 지어야 한다 라는 이야기였다. 가뜩이나 취약한 정통성 때문에 이 말을 듣고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광해군은 이후 그 구역을 몰수, 공사에 들어가게 된다. 본래 이곳은 광해군의 이복동생 정원군의 옛집으로, 운명의 장난일까 훗날 이 부분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를 단초로 작용하게 된다.
하지만 공사는 순탄치 못했다. 경희궁을 필두로 지금은 그 흔적을 기록에서나 찾아볼 수 있던 인경궁과 자수궁의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기에 속도가 상당히 더딜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당시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 그렇기에 광해군은 인경궁의 공사를 잠시 멈추고 경희궁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듬해 10월 모든 공사가 마무리된 뒤, 광해군은 이곳으로 옮겨 갈 준비에 바로 착수했다.
무굴제국의 샤 자한이 떠오르던 대목이었다. 그도 새로운 궁궐을 지은 뒤 결국 토목공사에 반기를 든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내쳐지며 그가 완공한 성에 발을 들이지 못한 채 감금당했던 것처럼, 광해군도 비슷한 길을 걷게 된다. 무리한 토목공사 그리고 영창대군을 유폐하고, 인목대비를 폐위시켰다는 것들을 이유로 반정을 감행. 결국 1623년 경희궁에 들어가지 못하고 비운의 길을 걷게 된다. 그 뒤를 이어 능양군이 즉위를 하니 그가 바로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다.
절묘하게도 대상은 달랐으나 그 예언은 맞아떨어지게 된다. 경희궁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궁' 공사를 감행, 그 대상은 광해군이 아니라 바로 능양군 인조였다. 능양군이 바로 정원군의 장남으로 그 기를 이어받아 결과론 적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다. 후대에 의해 인조반정은 성공 가능성이 낮았던 사건으로 분류되나 결국 성공했고, 그를 옹립했던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조정을 꾸린 뒤 조선을 운영해 나간다.
2. 조선 후기 정치 중심지
인조는 즉위 다음 해인 1624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한양에서 공주로 피난을 가게 된다. 이후 한양으로 다시 보름 만에 돌아온 인조는 난으로 크게 훼손된 창덕궁과 창경궁에 들어가지 못하고 경희궁에 들어가 9년을 살게 된다. 이후, 경희궁은 이궁으로서의 지위를 갖춘 채 동궐로 불리던 창덕궁, 창경궁과 상반된 '서궐'로 불리며 시간이 갈수록 그 입지를 공고히 했다. 철종 승하 후 고종 즉위 때까지 그 지위는 꾸준히 유지된다.
양궐 체제가 확립된 뒤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으며, 숙종부터 헌종 까지 대부분의 왕이 이곳에서 즉위와 승하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그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불어 서궐도안을 통해 당시 경희궁의 그 크기를 짐작해 볼 수 있었는데 정전인 숭정전을 중심으로 앞으로는 구세군회관 영역과 서울역사박물관 뒤로는 기상청 주변을 포함했으니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였다는 것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3.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다.
철종이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고종이 잇게 되자, 어린 왕이 성년이 되기 전까지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행한다. 와중에 각종 개혁 정치를 단행하던 중 생각지도 못한 불똥이 경희궁으로 튀게 되는데, 그 사건의 발단이 바로 '경복궁 중건'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뒤 선조 때 복원하려 했으나 천문학적인 액수로 감당 불가라는 결론에 이른 뒤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공터로 남아 호랑이와 각종 야생동물들의 서식처로 전락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았던 이 문제를 흥선대원군이 수면 위로 올리면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데 물자가 부족했던 와중에 이궁이었던 경희궁의 전각을 뜯어 경복궁 공사에 활용하도록 명을 내리게 된다. 이후 경희궁의 전각들 중 90%가 뜯겨 나가게 되는 대참사가 벌어지고 경희궁 터는 과거의 영광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끔 국가 행사만 거행되는 장소로 전락해 버린다. '권불십년' 그리고 '화무십일홍'이라는 한자성어가 절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그나마 이곳에 남아 있던 나머지 전각들도 민간에 팔려 기록을 제외하곤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린다. 이중 흥화문은 광복 이후에 신라 호텔의 정문으로 활용되다가 오늘날 현재의 위치로 다시 돌아오게 됐고, 경희궁의 정전은 현재 동국대학교의 사찰로 활용되고 있다. 사찰 안쪽으로 들어간 뒤 천장을 바라볼 때 조선의 궁궐에서 볼 법한 용의 문양을 통해 이 건물이 그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주요 전각들이 복원에 성공해 이곳의 정체성을 잊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은 무척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주요 궁궐로 활용된 적은 없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자수궁과 인경궁의 경우 그 흔적을 기록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으니 서울의 5대 고궁이 아닌 7대 고궁이 될 수 있었다는 그 사실이 한편으론 아쉽게 다가왔다. 그 모든 궁궐이 동시대에 머물렀던 적은 없지만 만약 그랬다면 어땠을까? 당시의 백성들은 참으로 괴로웠겠지만 그 결과물을 당당히 누렸을 오늘날을 생각하며 위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4. 시간 여행
숭정문 밖으로 나와 뒤로 돌아가니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찾을 수 있었다. 경희궁 주변은 가을이 참으로 아름답다. 매우 낮게 깔린 하늘을 시작으로 궁궐의 고풍스러움과 기와지붕 너머로 보이는 남산타워가 오직 서울에서만 느껴볼 수 있는 매력을 한껏 선사한다. 떨어진 잎사귀를 밟아가며 경희궁의 안과 밖을 모두 탐닉했을 때 하늘은 갈수록 보들워 졌고, 그 빛을 머금은 은행잎은 갈수록 탐스러워 졌다. 덩달아 묵묵히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잡상의 모습은 마치 이곳을 지키는 수호신 처럼 와닿았다.
그들은 이곳에서 일어났던 어떤 것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라는 호기심이 강하게 솟구쳤다. 작지만 약하지 않았고 밀도 있으면서 근엄했다. 수백 년의 시간 너머로 자리를 지켰을 그들을 통해 오랜만에 경외감이라는 감정을 느껴볼 수 있었다. 수려한 풍경이 시대의 흐름이 스며든 공간과 맞닿아 엄숙하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수 차례의 복원 공사와 앞으로 진행될 계획들이 기대가 되면서도 염려가 된다. 부지 확보와 더불어 2035년 을 바라보는 계획이 현실화될지 미지수이기에 당분간은 이 모습을 바라보며 찰나의 산책을 즐길 수밖에 없을 듯싶다. 빨갛게 노랗게 물들어 가던 나뭇잎들도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하며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 줬다. 이곳을 포함해 서울에 포진된 고궁들을 거닐 때마다 항상 쫓기듯 살아왔던 일상의 그 순간들에 찰나의 여유를 건네주는 것들이 참으로 감사했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장소에서 그 고유의 품격을 유지한 채 오늘도 묵묵히 세월의 흐름을 받아냈고, 덕분에 그 품격과 가치를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돌고 내리막 길에 들어섰을 때 담장 너머로 가지런히 나열된 잡상들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 가치는 값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우리네의 자부심으로 남을 것이며 굴곡의 세월을 뒤로한 채 앞으로는 탄탄대로만을 거닐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