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는 지속 중인가?
지진과 화산이 재앙이면 온천은 하나님의 선물인가?
2024년 이 시대에도 지구의 고동을 느끼며 지진과, 화산으로
천지창조는 지속 되는가?
2024년 2월 10일 한국의 설 명절 전날은 드물게 보는 쾌청하고 따뜻한 햇볕이 최근 연속이다.
친구분들에게 설 명절 인사와 오늘 읽은 글을 올려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설 명절 평안히 안전한 명절되세요.
임명락 드림
그동안 조선의 지진이 비교적 경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아시아 및 유럽의 자료를 인용하면 무섭고 큰 재앙으로 판단된다.
또 화산은 더 위협적이며 무서운 재앙이다.
대규모 분화의 원인과 그 위력 워싱턴대학 지진감시센터의 드럼기록계는 주로 지구과학 전공의 대학생들에 의해 24시간 쉬지 않고 감시되고 있다!
지질학 전공의 학생 스터브 브라이언트는 세인트 헬렌즈산 감시 그래프의 바늘이 갑자기 미친 듯이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을 목격하였다. 그는 곧 전화로 스테펀 맬론을 불렀다. 맬론은 바이크 에 얼른 올라타고 연구실로 향하였다. 약 20분 후에 도착한 바로 그때 세인트 헬렌즈산 으로부터의 분화 소리가 시애틀을 울렸다. 감시센터의 지진계 바늘이 최초로 극심한 동요를 나타내고부터 시애틀에 폭발소리가 들린 사이에 세인트 헬렌즈산의 북쪽 측면은 일단 가라앉았다가 분화하여 완전히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거기로부터 훨씬 더 먼 지점에서 관측해야 했던 5, 6명의 사람들이 정상 을 바라보고 있을 때 팽창부의 꼭대기 부근의 북쪽 면에서 한묶음의 작은 분연이 솟아올 랐다. 그러자 몇장의 극히 두드러진 연속사진이 확인하고 있듯이, 세인 트 헬렌즈산의 북쪽 측면 상부 전체가 곧 폭발하여 주로 스피리트호의 방향으로 거대한 카페트처럼 쏟아져 내렸다. 몇초 후에 검은 연기와 화산재의 일대 분연이 북쪽 측면에서 측방으로 분출하고 다음 에 정상에서 동일한 검은 분연이 위로 끓어 올랐다. 설명할 나위도 없이 세인트 헬렌즈 산은 화산의 본성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제 세인트 헬렌즈산 폭발의 세부에 대해 화산학자들 사이에 일치된 견해가 성립되어 있다. 촬영된 사진은 시간이 경과한 순서로 정리되고 시간이 기록되어 촬영되었으며 시 간의 경과를 역행시켜 재활영되었다. 분출물 표본은 분화의 시간 경과에 따라 모든 관점 에서 분석되었다. 더우기 이 모든 정보는 이제까지 알려져 있는 세인트 헬렌즈산의 지질 사를 배경으로 하여 연구되었다. 우선 처음 5월 18일에 일어난 분화의 맹위와 방향을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단서는 세인트 헬렌즈산이 최근의 온화한 외관과는 정반대로 내부는 분명히 "썩고 있었다"는 사 실이었다. 화산구의 대부분은 그 내부가 일반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처럼 암충이 아니라 대단했다.
이런 상황속 반대편 일부 극성스런 아이들은 현장에 가면 더운 점심을 얻기가 쉽 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노변 온천 의 온도가 계란을 요리하기에 충분할이 만큼 높기 때문 이다. 많은 이 도시의 호텔에 투숙한 관광객들은 도처 에 있는 온천에서 음식을 요리하며 비용을 절약한다.
이들에게는 온천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가?
은혜를 베푸는 일본의 온천 화산의 섬 일본의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는 온천 은 일본인들과 그들의 방문객들에게 오래도록 즐거움을 주는 자원이 되어 왔다. 이 나라에는 고대 종교의 정화의식에서 유래한 공중목욕이라 는 전통이 있으며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더 운 물을 개인의 가정에까지 끝어들이게 하고 있 다. 거의 모든 마을에 공중목욕탕이 있으며 온 천이 솟아오르는 곳이면 어더나 여관 혹은 풀이 있어 방문객들은 거기에 그들의 근심거리를 담 가 버린다. 일본 어느 곳도 법뿌에 있는 온천만큼 중요한 곳은 없다. 이곳은 14만 6,000명의 시민이 살고 있는 도시로 동경의 남서쪽 약 800km 떨어진 곳 에 있는 내륙해에 위치하고 있다. 일본 국내외 로부터 매년 1,200만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는 이곳 4,000개의 온천은 이 도시 생계의 근거가 되고 있다. 서기 867년 이래 온천이 흐르고 있 으며 그 때 이 도시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높이 1,300m의 휴화산 쭈루미의 폭발에 의해 볩뿌의 240m 밑에 열수장이 형성되었다. 벱뿌의 수많은 온천은 방대한 용도에 응용되 고 있다. 관광객을 수용하는 850여 숙박업소는 소형 목조탕을 갖춘 전통적인 여관으로부터 타 일로 된 거대한 욕탕이 있는 1류 호텔에 이르기 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동물원은 축사의 난 방을 위해 온천을 이용하며 열대 수목과 화초는 수만㎡의 열수로 난방된 온실에서 번성하고 있 다. 그러나 모든 온천이 다 관광객들을 위해 사 용되지는 않는다. 현대 병원은 일본 전국에서 볼려오는 관절염과 류우머티즘 환자들에게 인기 있는 갱생의학제도에 광물질이 함유된 온천을 사용한다.(한국일보 타임ㅡ라이프 1986년2월2일자 인용)
한국은 대부분 500년 이전 지진, 화산 피해 인명의 손실이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로마에서는 - 헤르쿨라네움에 있던 주민들은 흙탕물이 비교적 서서히 흘렀기 때문에 대부 분 2,000명의 폼페이 시민이 갑자기 덮친 재에 묻혀 죽었다. 여하튼 두 도시는 공식적으로 포기되었다. "여전히 이 산은 불을 뿜다" 두 도시의 이름은 중세를 동해 유럽지도에 계속 남아 있었는데, 당시의 지도가 모두 역사 에서 자취를 감춘 로마 군단용으로 그려진 것의 복사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고트인, 비잔틴의 동(東)로마제국, 노르만인, 롬바르트족, 안쥬의 샤르 르와 변전하는 치배자들인 행정관 그리고 아라곤이나 합스부르크가의 역대 총독들이 차 례로 베수비우스산 주변국가를 지배함으로써 이들 마을 자체는 완전히 잊혀졌다. 헤르쿨 라녜움 위에는 새로운 마을 레지나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폼페이가 묻혀있는 땅 위에는 포도밭이 무성하였고 베수비우스산은 초연하게 우뚝 솟아 있었다. 이 화산은 거의 세기마다 1회 정도 맹렬하게 포효하면서 방대한 양의 재를 하늘로 뿜 어내고 진흙탕과 용암을 산허리로 흘려보내 계속 건재함을 보였다. 기원 79년 이후 중세 를 통해 그 활동의 상세한 내용은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현존하 는 기록이나 재와 용암의 충을 조사한 화산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베수비우스산은 서기 203년과 서기 472년에 격렬하게 폭발하였고, 서기 512년의 분화는 대단하였기 때문 에 고트족의 데오도릭' 대왕은 잔존 마을에 면세조치를 취할 정도였다. 베수비우스산은 서기 685년과 서기 787년에 다시 분화하고 , 이어 서기 968년과 서기 1037년 사이에는 완 전히 활기를 되찾아 5회에 걸쳐 불과 타는 용암을 토해 냈다. 그 이후 600년간 잠시 화산 은 진정하였으나 서기 1630년경에 다시 머리를 치켜들어, 이후부터 인근에 있는 사람들 을 위협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베수비우스산 근처에 있는 농민이나 마을 사람들은 그들 지역에 대한 무수한 지배자들 의 학정을 감내하여 온 것처럼 베수비우스산의 때 맞추어 일으키는 주기적인 분노를 숙 명적인 것으로 감수하여 왔다. 서기 1631년의 분화는 이 사람들 중에 적지않은 회생자를 냈으나, 천재에 대하여 이처럼 고집스럽게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고 베수비우스산의 무서 운 불만의 표시에 언제나 회생자만 내고 있었다. 화산은 긴 잠(그 사이 울창한 삼림이 다 시 정상까지 뻗었다)에서 깨어났으나. 어떤 의미에서 그 난폭함은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사람들을 찾아왔을 때보다 더 악질적이었다. 분화가 일어나기 수개월 전에 화구에 들어갔던 대주교는 분화구의 직경이 8km이 고 깊 었으며 곳곳에 멧돼지의 은신처가 되어 있는 엉킨 덤불숲이 있었다. 고원의 중앙에는 바... 며 아되어다. 인데는 하라히의 이가 1. 8km라고 보고하였다, 화구의 밑바닥은 평지로, 거기에서 소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 위로 된 요지(凹地)가 있어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의 좁고 굽은 길을 따라가지 않는다.
편저 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