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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이 남달랐던 디디무스는 모레가 작게 쌓여진 개미산을 몇 시간이고 꼬박 관찰하곤 했다.
''누가 저 개미산을 만들었을까?''
''이 멍청아, 당연히 개미들이지.''
디디무스는 한참을 더 보다가 집으로 급히 달려갔다.
길게 켠 널빤지를 다듬고 있는 아버지의 바닥에 깔린 어두운 그림자는 삶에 찌든 채취가 백향목 톳밥냄새와 어우러져서 깊은 삶의 무게를 쏟아내고 있었다.
''아빠, 저쪽 큰 바위 옆에 모레가 자꾸 위로 옆으로 움직여요.''
''개미들이 들락달락 하는데 아무리 봐도 뭔가가 그 안에서 개미들을 밖으로 밀어내고 있어요.''
오늘 해질녘까지 널빤지 작업을 마무리 해야하는데 큰일이었다.
먼저 돈받아 놓고 마무리 하기로 약속한 널빤지를 고작 열댓개 밖에 못했으니 말이다.
''아빠,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저기 바위 뒷 쪽에 아무래도 뭔가가...''
하지만 디디무스를 향해 아무말 없다. 아이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고였다. 침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용기를 한 번 더 내기로 결심한 아이는 더 큰 목소리로 널빤지가 올려진 작업대를 향해 소리쳤다.
''작은 산을 누군가 들어 올리고 있다니까요!''
순간 뒤에서 누군가 허리춤을 휘몰차게 감아 올려 밝은 밖으로 옮겨버렸다.
''아악!''
강한 땡볕이 그 아이의 눈을 내리 갈겼다. 몇 초 뒤였을까 눈 앞엔 두 개의 태양이 덩그러니 서 있는데 미지의 세계라도 간듯 공중에서 허우적 대는 아이의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2.
''디디무스, 한번만 더 아빠 일하는데 방해하면 저쪽 양떼 우리 사이에다 번쩍들어 던져버릴테다!''
엄마의 목소리가 너무도 무서웠다.
같은 또래 아이들과 뛰놀다 해가 기운을 잃을 때면, 양털처럼 부드러운 엄마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 철없는 것들을 부른다는 사실을 디디무스는 항상 신기해 했었다.
땡볕 아래에서 늘 기쁘고 자유라는 그 단어를 문자적으로 깨닫기도 훨씬 전에 그림자가 서려있는 아이의 어색한 미소는 그것이 자유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엄마라는 단어는 그저 이름이라고 인식하는 수준에서 아이의 해맑은 웃음은 땡볕 밑에서 움직이는 모레산에 더 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개미의 표정을 정신없이 바라보다 문득 디디무스는 새로운 사실, 그야말로 세상에 나밖에 모르는 그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거대한 욕구에 동네 아이며 어른들에게로 뛰어가곤 했다.
3.
''디디무스''
''넌 나중에 커서 뭘 제일로 하고 싶어?''
단짝친구 시몬이 물었다.
''난 땅 끝까지 여행을 갈 거야.''
''여행? 여행이란게 뭔데?''
시몬의 질문에 마치 랍비라도 된 듯 디디무스는 최선을 다해 설명해줬다.
''시몬, 저기 하늘에 태양이 내려가는 거기에서 달이 올라오는데, 보름달이 뜰 때 바로 아래 언덕이 밝아지거든, 그 밝아진 언덕 너머를 넘어가는 거야.''
시몬은 아직도 이해를 못했는지, 디디무스의 자신에 찬 눈빛에 한 번 더 묻는다.
''디디무스, 그 밝은 언덕 뒤에는 뭐가 있는데?''
''시몬, 난 그게 알고 싶어. 이상한 건 말이야. 항상 보름달이 뜰 때면 같은 시간에 같은 모레언덕 위에 있단 말이지. 이건 분명, 그 언덕 뒤에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야.''
사실 시몬과 디디무스는 단 한 번도 멀리 있는 어딘가의 그 언덕 위에서 달빛이 쏟아지는 것을 본적은 없었다.
''난 양들이 아주 많은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될 거야.'' 시몬은 묻지도 않은 질문에 행여 놓칠 새라 진지한 눈빛으로 소릴 냈다.
''그 양들한테 매일 매일 물과 풀을 먹이는 부자가 될 거야.''
어느덧, 해는 또 기울어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졌다.
''시몬, 어서 집으로 들어오너라.''
시몬은 아무도 부르지 않는 디디무스에게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고 노란 빛이 새는 문틈을 향해 달려갔다.
''그래! 낙타를 사야겠다.''
번뜩이는 어린 생각은 어른들도 짜낼 수 없는 주도면밀함으로 벌써 상상의 보름달 아래 언덕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개미산 위로 들락날락 하던 검은 반점들도 그들을 불러들이는 강한 힘에 이끌려 그들의 평온함으로 몸을 감췄다.
4.
며칠 밤을 샜던 이유였을까?
디디무스의 부친 이샥은 침상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저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또 잠이 들었을까? 혼잣말로 무언가를 반복할 때면 엄마 에글라가 물수건을 이마에 몇 번씩 옮겨 놓았다.
에글라는 처녀시절 천사가 인간으로 나타났다고 동네 사람들의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정말 모질게 사람들을 대한다는 혹평이 끊이질 않았다.
한번은 옆집에서 기름 한 그릇을 얻었으면 하는 요청에 ''안 그래도 힘든 살림에 별의별 거를 다보겠네.''란 식으로 쏘아붙였으니 말이다.
그도 그럴만한 이유라고 사람들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얘기는 이샥에게 시집 온 후, 그녀에게 불어 닥친 힘들었던 경험이었으리라.
그녀는 굳게 입술을 다문 채, 모두를 향해 침묵을 강요하기라도 하는 듯 두 눈 부릅뜨고 앞을 향해 달려오기만 했던 인생이었다. 목공소라고 하기에는 턱도 없이 작은 규모에 거의 일용직이나 다름없던 이샥은 하루하루 먹고살기 조차 바쁜 인생에 아내와 그들의 디디무스를 먹여 살려야만 했다.
그런 빠듯한 생계에서도 성실하게 일했어야만 했건만 이샥의 품행엔 그에게 맡겨진 가정을 책임 질만큼 그런 평범한 책임감 따윈 없었다.
그의 부친에게 물려받았던 가축들과 디디무스가 동생처럼 여긴 마지막 염소새끼까지 노름빚으로 전부 탕진하는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5.
날이 밝는대로 에글라는 황급히 야콥의 집으로 달려갔다. 얼마나 급했던지 머리털이 제멋대로 뒤엉켜 마치 오랫동안 털손질을 하지 않은 늙은 양처럼 군데군데 덩어리져 여인네다운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쾅쾅쾅쾅, 쾅쾅쾅
나무로된 집문 안쪽에선 무언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듯 했다.
''누구시오?''
이른 아침, 목이 매인 사내의 거렁진 소리가 문틈에서 새어나갔다.
''미안해요. 아샥의 아내요.''
''잠시만 기다리시오.''
잠시 후 문을 연 사람은 시몬의 엄마 셸로밋이었다.
에글라는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한 체 셸로밋 발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셸로밋은 무언가 집히는 것이라도 있었던지 집안으로 다시 들어가서는 등에 외투를 하나 더 걸치고 야콥과 에글라를 부축해 일으켰다.
''저...저...''
잇지 못하는 말을 그녀의 눈물로 얘기하고 있었다.
''침착해요. 에글라. 어서 함께 집으로 갑시다.''
부축하듯 에글라를 데리고 야코프와 셸로밋은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도무지 무슨 일인지 알 길 없는 디디무스는 이른 아침 현관문 앞으로 점점 다가오는 목소리들로 문 사이에 고개를 내밀었다.
''이샥, 이샥''
침상에 누워있는 아빠를 향해 시몬의 부모들은 소리치며 두어 번 흔들어댔다.
셸로밋은 그녀의 벌어진 입을 두 손으로 막았고 디디무스의 엄마 에글라는 침상에 머리를 쳐박은 체 통곡하고 있었다.
6.
아빠와의 이별은 그랬었다.
어린 디디무스에게 아빠에 대한 잔상이란 매일같이 목공일 같은 인생의 찌든 땀 냄새가 나무냄새와 어우러져 톱밥처럼 쌓여있는 것과 같았다.
일이 들어오지 않는 날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엄마와 끝없이 다투는 소리에 디디무스에게는 어쩔 수 없이 많은 자연의 친구들이 늘어만 갔다.
어린 디디무스가 보기에도 참으로 이상했던 일은 시몬 내 아저씨 아줌마들이 왔다간 이후부터 집안이 조용해진 것과 집에 있는 거울 위에 천을 씌우고는 절대 천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주의를 준 일이었다.
그것뿐이었을까? 손발은 물론이고 평소엔 잘 씻어야 한다고 여러 차례 혼이 났던 일에 비교한다면 일주일 내내 절대 씻어서는 안 될 것을 당부 들었으니 말이다.
모든 것이 고요해진 어느 날 엄마는 오랜 동안의 고요를 깨고 디디무스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요 악마 같은 녀석, 너 때문에 도무지 되는 일이 없다.''
영문도 모르는 디디무스는 엄마라는 이름 앞에 작지만 조심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 어미를 닮은 꼬락서니가 나를 미치게 만드는군.''
디디무스는 무슨 말 뜻인지도 모를 말을 듣고는 개미산 바위 옆으로 가서 숨어 기대었다.
한참이 지났을까...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각에도 디디무스는 전혀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알 수 없는 포근함에 긴긴 잠에서 깨어난 듯 나른함과 따뜻함만이 그 아이의 작은 체구를 휘감았다.
''디디무스''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아이를 부르고 있었다.
''디디무스''
아이는 그 소리가 기대어 잠든 따스한 바위 아래 작은 개미굴에서 들리는 목소리인줄만 알았다.
''저 안에 무엇인가 있어.''
그것을 정말 오랜 시간 확신해 왔었는데, 드디어 때가 된 것일까?
디디무스는 그의 작은 오른쪽 귀를 개미산 위에 작게 난 구멍으로 옮겨 갔다.
''디디무스 내가 너를 멋진 곳으로 보내겠다.''
7.
디디무스는 살며시 그의 작은 발을 개미산 위로 지나쳐 평평한 바닥 위에 놓았다.
혹시라도 개미들이 놀라거나 개미산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끝내준다. 내가 멀리 멋진 곳으로 여행갈 수 있도록 해 준다니!''
하지만 어린 인생은 그가 들은 이 최고의 희소식을 누구에게 먼저 전할까?라는 인생 최대의 고민에 휩싸였다.
동물적인 본능이었을까?
개미산 구멍에서 나온 목소리가 향하게 인도한 그곳은 디디무스의 귀소본능에 따라 친구 시몬의 집으로 내달리게 만들었다.
''절대 뒤를 돌아봐선 안 돼!''
''너는 곧장 시몬에게 달려가 그 목소리가 알려준 소식을 전해야한다.''
디디무스가 시몬 집에 거의 다 왔을 무렵 해는 멀리 언덕 아래로 떨어졌고 일그러진 달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시몬, 시몬''
그의 둘도 없는 단짝을 향해 소리치는 작은 짐승에게 집 뒤편에서 등불이 비추어졌다.
''디디무스?''
셸로밋 아줌마였다.
''어서 들어오렴. 이제 많이 추워지는구나!''
셸로밋은 마치 그녀가 디디무스의 친엄마라도 된 듯 에글라가 단한번이라도 전해주지 못한 온정으로 작은 키의 디디무스를 안아주었다.
어린 디디무스는 이해할 수 없는 포근함으로 마술에 걸린든 시몬 엄마를 끌어 앉았다.
''가엾은 디디무스''
셸로밋은 연이어 디디무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방금 화덕에서 구워 나온 넙적한 빵과 염소젖을 내왔다.
''디디무스, 어서 먹어라.''
친구 시몬은 마냥 디디무스가 반가웠다.
''엄마, 오늘 디디무스 우리 집에서 자고 가도 되요?''
여느 때라면 셸로밋이나 야콥이 반대했을 법도 한데 이상하리만큼 쉽게 응답해 준다.
''그래 시몬, 그렇게 하는 편이 디디무스에게도 좋겠구나!''
디디무스의 엄마 에글라가 밤늦게 어린 아들의 행방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기라도 하면 어쩌나?란 걱정을 하기는커녕, 상상속의 당연한 모성본능을 비웃기라도 하듯 내외는 디디무스의 존재를 약속이라도 한 듯 그의 엄마로부터 멀리 떼어놓는 분위기다.
8.
밤늦게까지 시몬과 디디무스는 어스름한 방안 침대 위에서 신기한 이야기가 끝이 없다.
''시몬, 내 말 좀 들어봐. 굉장한 거야!''
''우리 집 앞 큰 바위 알지?''
''응''
''그 아래 유령이 살고 있어.''
''디디무스, 너 유령을 봤어?''
''아니. 실은....유령이 하는 얘길 들었어.''
''유령이 있는 게 분명해?''
''응''
''시몬, 넌 나와 약속을 하는데 꼭 지켜야해!''
''그래, 디디무스. 말해봐.''
''내가 이제부터 들은 얘기는 니네 부모님한테도 다른 애들한테도 절대 말하면 안 되는 거야.''
시몬은 디디무스에게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시몬, 내가 언젠가 말했던 보름달 아래 언덕 기억나?''
''응''
''난 그곳에 가게 될 거야. 더 정확하게는 그곳을 넘어가는 거야.''
''디디무스, 그곳을 어떻게 갈 건지 말해봐.''
''나도 정확한 방법은 몰라. 목소리가 알려줬어.''
''그 유령 얘기군.''
''응. 맞아.''
'' '디디무스 내가 너를 멋진 곳으로 보내겠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어.''
''우와 정말 굉장한 얘기야.''
흔들리는 불꽃의 너울거리는 그림자가 유령처럼 벽을 타고 춤을 췄다.
어느덧 시몬은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불꽃 유령의 춤사래는 디디무스의 꿈과 현실의 지평선 위로 너울대며 가늘게 뜬 눈꺼풀 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왔다.
현실과 꿈의 느슨한 지평선을 넘나들고 있을 때, 어디선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여보, 조용히 말해요. 디디무스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셸로밋, 애들이 모두 깊은 잠에 든 걸 보고 오는 길이오. 오늘은 특히나 디디무스가 가엾어 보이는구려!''
''그러게요. 저도 이샥이 조상들 품으로 떠나고 난 이후, 에글라가 더더욱 디디무스에게 모질게 대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파요. 그 애 엄마가 죽고 새로 들어온 에글라가 재대로 엄마 역할을 했을 리가 만무하잖아요?''
''그래요. 하지만 빌라에게도 문제는 있었지. 첩이었던 에글라를 그리도 못살게 다뤘잖소.''
삐그덕 거리는 문틈으로 불빛에 반사된 어린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 어... 디디무스, 깨었구나!''
난처해하는 셸로밋은 급히 허리를 굽혀 디디무스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려놓았다.
9.
셸로밋이 더욱 당황했던 것은 그녀와 남편 사이에 나눈 대화가 어린 아이의 작은 영혼에 큰 가시가 된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아이의 천진난만한 명랑함이었다.
''아이가 못 들었거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짧은 순간 셸로밋의 뇌리엔 두 가지 탈출구의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디디무스는 어린 나이에도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몇 일 후, 보름달이 뜨면 저는 언덕으로 올라가야 해요.''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시몬이 있는 방으로 디디무스는 들어갔다.
두 내외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을까? 멋쩍은 상황에서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이제 늦었으니 우리도 그만 잠자리에 듭시다. ''야콥은 현실에 충실한 일상적인 말을 뱉으며 스스로의 알 수 없는 죄책감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시몬 아침 먹으러 이리 오렴. 디디무스도 빨리 오너라!''
아침 일찍 서둘러 식사를 준비한 엄마는 아이들을 식탁 주변으로 불러 앉히려 했다.
''저... 디디무스는 떠났어요.''
''시몬, 무슨 말이니? 정확하게 좀 말해다오.''
엄마 셸로밋은 아마도 눈치 챘을 수도 있지만, 시몬에게 좀 더 급하게 정황을 물었다.
''디디무스가... 음... 저... 새벽에 저를 깨우고... 가야한다고 했어요.''
야콥은 급히 옷가지를 챙겨 밖으로 황급히 나갔을 땐, 이미 디디무스의 흔적은 아무데도 없던 상황이었다.
''에글라, 혹시 디디무스가 새벽녘에 집에 돌아왔는지요?''
에글라는 술에 반쯤 취해서 몸조차 가누지를 못하는 상태였다.
더 이상 야콥은 묻지도 어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10.
반나절 훨씬 족히 더 걸었을까? 어린 디디무스는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린 영혼은 되도록 기쁜 생각으로 허기를 달래며 걷고 또 걸었다.
저 멀리 나귀 한 마리와 행상으로 보이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대략 오십보 가까이쯤 되었을 때, 행상으로 보인 그 사람은 백발의 노인임에 틀림없었다.
디디무스는 그 노인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저... 어르신, 길을 물어봐도 될까요?''
일찍 철들었는지 디디무스의 목소리는 어른스런 격식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아니 이런 길목에 어린 아이로구나.''
놀란듯 혼잣말을 노인이 끝내기 무섭게 디디무스는 ''언덕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세요.'' 큰 목소리로 힘주어 말을 꺼냈다.
''언덕이라니?''
단 한 번도 언덕을 본 적이 없었다는듯, 행상 노인은 기억을 더듬는 표정을 짓다가 말을 다시 꺼냈다.
''혼자서 어디를 가는 길이냐?''
''네. 저는 보름달이 뜨는 때, 밝게 비추는 언덕 너머를 향해 가는 길이예요. 그 언덕이 제가 가야할 곳인데 이 길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디디무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작은 뱃골에서 사자가 포효한다.
''일단은 무얼 좀 먹어야겠구나. 나도 때마침 자리를 펴고 뭘 좀 먹으려 하던 참이었는데 잘 되었구나!''
나귀 등에 실은 가방에서 노인은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그늘진 절벽아래 바닥에 깔았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디디무스요.''
''오. 그렇구나. 나는 쵸프라란다.''
''쵸쁘라?''
''아니, 쵸프라.''
디디무스의 어눌한 발음에 노인은 불쾌함이 아닌 경쾌함으로 그의 이름을 또박또박 꼬마 녀석에게 각인시켜줬다.
''쵸-프-라''
''알겠어요. 쵸프라 할아버지. 그런데 쵸프라 할아버지는 어디를 향해 가시는 길이세요?''
노인이 건네준 빵을 한입 물고는 우물거리며 질문을 건넸다.
''나는 차 잎을 고향에서 가져다가 이곳까지 먼 길을 오게 되었지. 비단도 있단다.''
디디무스는 차와 비단이란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매우 비싼 것임을 이해한다는 눈치였다.
11.
쵸프라 할아버지는 이윽고 짐을 다시 챙겨 떠날 채비를 갖춘다.
''얘야, 갈 길이 먼듯한데, 내가 가는 곳으로 함께 가지 않으련? 그곳에 가면 내 동지들을 만날 수도 있고, 분명 네가 맘에 들어 하는 신기한 것들도 많을 게다.''
디디무스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 가야할 길이 바빠서요.''
쵸프라는 무슨 뾰족한 방법이라도 있는 냥 디디무스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보름달 아래 언덕이라고 했느냐? 어디 보자.''
다시 나귀에게 다가선 노인은 두루마리를 펴서 한참을 보며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살펴보았다.
''디디무스, 내가 너를 보름달 아래 비추는 그 언덕까지 안내하마.''
너무도 놀라왔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런 종류의 언덕이라곤 보지도 못했다는 나이 지긋이 드신 어르신이 치매에서 깨어나 맑아진 정신으로 무엇을 막 발견한 듯, 어린 아이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언덕의 존재에 대한 강한 믿음을 심어주었으니 말이다.
''네, 좋아요. 저를 도와주시는 거라면...''
디디무스는 그의 순박한 태생의 운명처럼, 쵸프라가 안내하는 대로 나귀 위에 올라탔다.
쵸프라는 어눌한 말씨의 영감이었다. 생김새도 짧지만 당찬 인생을 살아온 디디무스가 그동안 봐왔던 사람들과 어딘가 다르다는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깡마른 체구에 회색빛 린넨 수건을 말아서 머리 위로 올린 모양은 갈색 피부 톤과 대조를 이루다가도 나무거죽처럼 거칠고 질긴 그의 피부를 은색의 수염이 하나둘씩 헤집고 나온 얼굴은 그가 평생 동행한 늙은 나귀와 매우 닮았다.
12.
보름달이 떴다. 디디무스는 벅차오르는 꿈의 아지랑이를 꾸우꾸욱 누르며 다 녹여 먹어서는 안 된다고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마법의 주문을 거는 입안의 사탕처럼 아끼며 붙잡아 두고 있었다.
가만히 입안에 물고 있어도 마침내는 부스러지고 녹아 없어질 꿈같은 마법이 짙은 남색의 벨벳 위에서 출렁거린다.
사탕의 마법이란 어떤 인생도 이겨내지 못하는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몸부림이다. 바둥거리면 바둥거릴수록 행복한 꿈에서 깨어나 거친 돌들이 박힌 끝없는 길을 중력을 받으며 계속해서 걸어가야만 하는 모순이다.
차라리 가위눌림의 어떤 상태로 남아 천국도 지옥도 아닌 내 마음의 고요와 풍랑의 파도 사이를 너울거리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깨지 말아라. 그렇다고 잠들지도 말아라.'
어린 피조물의 작은 깨달음은 나귀가 가끔씩 내는 피식거리는 소리도 늙은 영감에게서 흘러나오는 지혜자의 잠언도 아니었다.
지구의 중력을 받은 지 십년도 못된 어린 영혼은 모든 것에 자유를 느껴야 했음에도 사탕같이 녹아내리는 보름달을 장엄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쵸프라는 디디무스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디디무스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어느 편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가를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디디무스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게 사실이다.
멀리서 희귀한 물건들을 나귀에 짊어지고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가 행상임에는 자명했기 때문이다.
열살도 채 안된 아이가 행상이란 의미를 받아들이기엔 만무했어도 이제부터는 행상의 뜻은 바로 쵸프라 같은 인생을 두고 하는 말인 것은 분명했다.
열 살도 안된 아이가 전해주는 짤막한 이야기 보다는 육십도 족히 넘겼을 이마 위 주름들은 쵸프라가 그 개수만큼이나 굴곡진 인생을 살아왔음을 이야기 해주고 있었다.
떨겅떨겅 소리를 내는 나귀의 목덜미는 잠시 멈추더니 쵸프라를 향해 두어 번 흔들었다.
''이 녀석도 힘든가보다. 잠시 쉬었다 가는 편이 낫겠다.''
서너 시간 쯤 더 걸었을까? 잠시 멈춰선 쵸프라는 아이에 대해 궁금함을 못 이겨 여러 가지 물어봤을 법도 한데, 의외였다.
그렇다고 디디무스가 스스로에 대한 작은 이야기나 어떻게 끝없는 길목에서 그를 만났는지, 통 말이 없었다.
''할아버지, 우리가 가는 길이 보름달 아래 언덕으로 향하는 방향이 맞나요?''
쵸프라는 말이 없다가 무언가 가방에서 꺼내더니 달을 향해 둥근 물건을 치켜세웠다.
''음... 그래 계속 이쪽 방향이군!''
디디무스는 신기한 듯 알 수 없는 둥근 물건의 위를 들여다봤다.
''흔들리는 바늘이 보이지?''
''네, 바늘이 움직이고 있어요.''
''그래, 이 바늘의 끝이 뭉툭한 쪽이 북쪽을 가리키고 있지. 그래서 내가 서있는 위치에서 왼팔이 서쪽인거다.''
디디무스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무엇인지 모르게 점점 더 꿈의 정원에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13.
''오늘은 여기에서 밤을 보내야겠다.''
주섬주섬 그러모은 나무들 위에 마른 풀들을 듬성듬성 올려놓는 노인의 모습은 참으로 특이했다.
바닥에 흙을 긁어서 밖으로 내놓고 작은 구덩이 주변으로 돌들을 빙 둘러 놓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계속해서 늘어놓았다.
한번 씩 뱉어내는 소리와 소리마다의 간격이 무척이나 달라서 그것이 디디무스가 자라왔던 작은 마을에서 쓰던 일상적인 언어는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나뭇가지를 서로 맞대어 힘차게 오래 부비다 숨이 찾는지 헉헉 소리를 내더니만 입 밖에 말을 꺼냈다.
''다른 방법을 써야겠군. 디디무스 놀라지 말거라.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것은 네가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 될 테니까. 정령들을 불러내는 방법이거든. 나는 이 정령들을 내 몸 안에 넣었다 몸 밖으로 밀어냈다 할 거다. 겁먹을 필요는 없으니 안심하고 그냥 쳐다만 보면 되는 법.''
어두운 밤 달빛 아래에 쵸프라는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끝이 좁은 주둥이에서 가루를 조금 쏟아내더니 나무 위에 줄을 긋듯 길게 떨어뜨려 놓았다.
얼마 후, 쵸프라는 돌멩이 두개를 꺼내어 딱딱 소리를 내며 맞부딪쳐 불꽃을 냈다. 치-치-직 소리와 함께 연기와 난생처음 맡아보는 지독한 냄새는 강렬한 불꽃을 나무 위 건초 더미에 옮겨 붙었다.
디디무스는 잠시 움찔해 뒷걸음치면서도 한참을 들여다봤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작은 눈동자는 연기와 함께 위로 솟는 불꽃향연에 두 볼이 벌겋게 뜨거워졌다.
''자, 이제 내가 무언가를 잠시 동안 할 테니 너는 저쪽으로 물러나서 소변이라도 보고 오너라.''
디디무스는 노인의 부탁대로 소변을 본다는 핑계로 자리에서 물러섰다.
소변을 보는 내내 쵸프라를 바라보는 눈길을 끊을 수는 없었다. 참으로 기괴한 동작들이다.
바닥에 노인은 자기 체구정도 되는 천 하나를 반으로 접어 깔았고 얼마 있다가 가부좌를 틀더니, 머리를 뒤로 힘껏 젖혔다.
다시 머리를 제자리 앞으로 두더니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는 나귀처럼 네 발로 웅크려 바닥에 있더니 다리 하나를 머리 뒤 목에 걸쳤다.
명상을 하는지 한참을 같은 자세로 있던 쵸프라는 디디무스에게 말을 건넸다.
''아까 꺼냈던 검은 가루는 화약이라고 하는 거란다. 주로 악령을 내쫓을 때 사용하곤 하지.''
''악령이라니요?'' 악령이라는 단어를 처음 듣는 디디무스는 궁금한 게 많았다.
''연기가 피어오를 때 그 연기를 옷으로 입고 너울거리는 놈들이지.''
''그 악령들은 왜 나타나는 거죠?''
''아직도 알 수 없는 부분이지. 나도 악령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알지만 여하튼 고약한 놈들이니 조심해야 할게다.''
쵸프라의 당부에 디디무스는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여간해서 겁을 먹지 않는 당돌한 꼬마 아이였던 당참은 사라지고 악령이란 것들의 존재와 역겨운 냄새는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쵸프라도 화약의 쓰임이 불을 일으키는데 매우 요긴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았지만, 악령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다는 두려움도 어쩔 수는 없었다.
적어도 최근 수년 동안 어쩔 수없이 악령들과 함께 깊은 밤을 지새워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생관계에 대한 인정을 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14.
''어쩌면 쵸프라의 기괴한 몸동작은 악령들을 몰아내려고 했던 일련의 작업이었던 게 분명하다.'' 어린 디디무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별자리가 유난히 밝은 것이 악령들의 세계는 그리 어둡거나 꺼려하는 공간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열 살 어린 나이에 그런 형이상학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걸맞지 않은 게 분명했지만 디디무스가 받은 계시는 그 이상의 촉각으로 보이는 세계보다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열망과 기대감이 훨씬 컸다.
''디디무스야 이리 와서 앉아 보거라.''
쵸프라는 디디무스를 향해 손짓으로 불렀다.
''네!''
''디디무스야 이것이 무엇인줄 아느냐?''
잠시 후, 쵸프라는 나뭇가지로 바닥에 동그라미를 하나 그렸다.
''보름달 이네요. 둥근 보름달''
쵸프라는 디디무스의 마음 상태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의 설명에 최선을 다했다.
''이것은 '없음'이라는 뜻을 가진 숫자란다.''
''없음이요?''
''응. 그렇지. 아무것도 없다''
''할아버지, 그렇지만 방금 그린 그림은 있는 거잖아요.''
''이것은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거란다.''
어린 디디무스에게 없음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당연한 이치겠다만, 없는 것을 보는 것은 정령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없음에 대한 설명은 이윽고 정령이라는 낱말로 연결되었고 디디무스는 새로운 이야기에 대해 호기심이 커지고 있었다.
''쵸프라 할아버지, 그러면 할아버지는 없는 것을 본적이 있으신가요?''
순간 쵸프라는 아이의 질문에 지난 65년간의 인생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정령을 보게 되었다.
''보지 못 한 것을 본 적이 있느냐고?''
바닥에 그린 영(0)이라는 숫자가 모순이었듯, 어린 디디무스가 물어온 질문에 갇힌 쵸프라는 안간힘을 쓴다.
''없는 것을 본다... 없는 것을 보았다.''
피곤한지 바닥에 깔개를 펴고는 두 사람은 나란히 머리 뒤로 두 손을 베개 삼아 누웠다.
유성이 꼬리를 늘어뜨리며 지나가는 것을 보다가 쵸프라는 벌떡 일어났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다!''
어린애가 신이라도 난 듯 펄쩍펄쩍 뛰며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반복해서 철썩철썩 치던 쵸프라는 ''그래, 난 봤다.''
라고 외쳐댔다.
15.
디디무스는 질문했다.
''저에게도 알려줄 수 있나요?''
''디디무스, 네가 이해할지 모르지만 그건 시간이란 놈이야.''
''시간이요?''
''그래, 시간 말이지. 그 시간이란 놈은 원래 없는 건데 거울 속에 정령으로 나타난단 말이지.''
''할아버진 그 시간이란 놈을 싫어하시나요?''
''난 그놈과 무관한 인생을 살줄 알았지. 적어도 50년 전엔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놈은 날 붙잡아 묶은 뒤 작은 상자에 가두어 두려 한 적이 있지 뭐겠니. 그래서 난 멀리 도망쳤어. '이제는 그놈과 작별이구나!'라고 하는 사이에, 소스라치는 건 그놈이 언제부터인지 이제는 나를 붙잡으려 쫓아오고 있지. 허허허.''
허탈한 웃음은 디디무스에게 너무도 어려운 숫자놀이 같았다.
그래도 디디무스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쵸프라에게 대꾸했다.
''저도 잘 알아요. 그 시간이란 놈을 가두는 방법에 관해서요.''
또랑또랑한 디디무스의 목소리엔 시간을 가두는 법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웃음소리를 내던 쵸프라는 표정이 굳어졌다. '요놈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란 생각에 스스로를 다독거려준 웃음은 툭 소리 내며 부러진 마른 나뭇가지처럼 간결하고 고요하게 멈췄다.
''그건요. 수건으로 덮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이번에는 디디무스의 이야기가 종 잡히지 않았다.
''수건 같은 걸로 거울 위에 덮어 두면 시간이란 놈은 못 빠져 나오는 거니까요.''
디디무스의 이야기는 아빠 이샥이 저 세상으로 떠나던 그날 집안에서 벌어졌던 일을 회상하는 이야기였다.
''엄마가 거울을 천으로 덮으며 손대면 안 된다고 말한 일이 있었어요.''
쵸프라는 대강 무슨 상황이 어린 디디무스의 과거에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는 있었다.
16.
보이지 않는 정령들에 대한 디디무스의 설명은 노인 쵸프라의 눈가에 연민이 맴돌게 만들었다.
''디디무스 이리 와보렴.''
디디무스는 방끗 웃으며 노인에게 다가섰다.
''보름달 비추는 언덕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지?''
''네, 할아버지.''
''그러면 내가 너를 그리로 인도하마. 나도 함께 그리로 가도 되겠니?''
어린 쵸프라는 너무도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당연하죠.''
인생에 단 한 번도 자기의 목적지에 대해 이토록 고민해주고 열의를 다해 관심을 가져준 사람이 없었건만 그것도 나이가 있는 할아버지가 동행 하겠다고 뜻을 밝혔던 일은 디디무스의 최대 업적 중 하나로 남을 사건이었다.
그것도 그냥 어른이 함께 길을 걷겠다는 것이 아닌, 그의 충실한 하인인 나귀를 포함해서...
물론 둘도 없는 친구 시몬도 자기편이었음을 기억해 볼 때, 지금까지의 인생길은 분명 성공가도였던 게 맞다.
''디디무스, 우리가 오랜 길을 같이 가는 동안 나는 네 지난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구나. 들려줄 수 있겠느냐?''
''어떤 이야기를 먼저 하면 좋을까요?''
쇠똥구리가 굴려다 놓은 둥근 공을 양귀비 꽃 옆에 몰래 가져간 얘기며, 염소젖을 짜놓은 물통을 새끼염소들 한테 다 먹여주고 엄마한테 혼이 난 이야기, 정말 끝날 것 같지 않은 많은 소재들로 쵸프라는 어느 땐 그늘 밑에 앉아 듣다가 코를 골기까지 했다.
''여기 산등성이만 넘으면 암벽 둘이 나오는데, 두 암벽이 매우 좁게 붙어 있단다. 나귀 한 마리에 사람은 한 줄로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디좁은 외길이지.''
쵸프라는 지도와 나침반을 꺼내서 신중을 기해 방향을 잡은 후 지도의 한 지점을 손으로 가리키더니 이내 둘둘 말아서 나귀에게로 가져간다.
17.
''그동안 참으로 오랜 시간 여행하였구나!''
''할아버지, 저기 암벽 사이를 지나가면 목적지가 나오나요?''
어린 나이에도 목적지에 대한 집요함이 여느 어른들의 것보다 강했다.
''그래, 내 생각에는 저쪽 암벽 사이를 우선 지나가는 것이 맞겠구나.''
두 사람과 나귀는 붉은 흙이 간간히 흩으러 지는 돌산을 내려와 길이 한 방향으로 밖에 통하지 않는 암벽사이로 몸을 꾸겨 넣기 시작했다.
벌써 서늘해지는 것을 보니 곧 어둠이 엄습할 것 같아 좀 더 서둘러 틈새 길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나귀가 걸리는 일은 없었지만 양 옆이 절벽 같다보니 나귀가 겁을 먹고 서서 꼼짝을 않는 것일까? 쵸프라는 하는 수 없이 나귀의 두 눈을 가리개로 덮은 뒤 주둥이 앞에 먹을 것이 놓이도록 바구니를 매달아 줬다.
참으로 비정한 생각도 들었지만 이 방법이야 말로 나귀가 멈추지 않고 앞으로 계속해서 전진하도록 유도하기에는 안성맞춤의 방법임에 분명했다.
좁은 틈을 몇 시간 가다 어둠이 찾아올 무렵 길은 점점 더 넓어지더니 넓은 집마당 같이 넓은 공토가 나왔다.
쵸프라는 다소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할아버지''
''쉿!''
쵸프라의 작은 목소리는 디디무스가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막아 버린다.
쵸프라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입을 막는 시늉을 디디무스에게 보여주며 소리 내어서는 안 되는 방침을 무언으로 지시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사람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 저곳이 공명으로 근원지를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건 쵸프라는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마 갸라드 쟈라타? (여기 왜 왔는가? : 아랍어)''
''아슈크룩 알라 하디히 알 다으와! (초대에 감사하다! : 아랍어)''
서로의 암구호는 약속된 말이었다.
여기저기 구석진 구멍들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쵸프라는 디디무스에게 '이젠 안심 해도 된다'는 듯이 손짓과 함께 웃으며 소리냈다.
''디디무스야!''
디디무스는 영문도 모른 체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 넓은 중앙으로 달려갔다.
여러 지역의 언어들이 난무한 것을 알아차린 디디무스는 쵸프라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이곳은 여러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이 있는 거 같아요.''
''디디무스, 그 것을 네가 어찌 알았느냐?''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듯이 삼삼오오 모여 말을 하는데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앞을 보고 말하고 나서 왼쪽에 있는 사람이 같은 사람을 향해 말을 하면, 두 번 듣던 사람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던지 끄덕 거리는 걸 보거든요.''
쵸프라는 어린 디디무스의 빠른 이해력에 무척이나 감탄했다.
''디디무스야, 우리는 당분간 여기서 머물며 지낼 거란다. 내가 당분간이라고 말한 이유는 두 가지인데, 명심해서 마음에 새겨듣지 않으련?''
디디무스는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입장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을 쳐다봤다.
''디디무스야, 여기가 바로 보름달이 떠오르면 비추는 그 언덕이란다. 가운데 넓은 땅을 비출 때, 멀리서 보면 희미한 은빛의 반사된 타원의 모양을 너는 네 고향에서 언덕으로 보았던 게 맞을게다.''
디디무스는 쵸프라의 사뭇 진지한 설명에 대해서 어떤 긍정도 어떤 부정도 내비추지 않고는 단지 자기가 원래 추구한 목적지가 달빛 비추는 언덕이 아니라 그로부터 다시 출발하는 언덕너머 미지의 세계였음을 알리지는 않았었다.
''디디무스, 그래서 난 네게 했던 약속을 지켰고 이곳 달빛 언덕에 널 정착시켰으면 하는구나! 두 번째 중요한 사항은 나는 이곳을 떠나서 또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만 하는 운명이 있구나.“
”넌 어려서 아직 그 말뜻을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운명이란 건, 천으로 덮어둔 거울을 꺼내들고 내 얼굴과 마주하게 될 때 발견하는 그 정령들을 향해 더 이상 외면하거나 멀리 도망쳐서는 안 돼는 걸 의미하지. 그래서 나는 너와 이곳에서 머물다가 한 달 뒤면 떠나려고 한다.''
18.
광장같이 넓게 펼쳐진 공동생활 구역은 아침마다 사람들이 모여 체조를 하거나 아이들이 뛰어노는 일종의 휴식공간이었고, 또 때로는 공지사항을 마을전체에 알리려는 목적으로 전원 참석을 요구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참으로 독특했던 광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아랍어를 제외하고는 세 명 정도가 통역사로 지정되어 맨 앞쪽에서 촌장이 무언가를 아랍어로 전하면 말 끝나기가 바쁘게 각자 자기들의 말로 순서대로 떠들어 대는 모습이었다.
일종의 암묵적인 강요가 디디무스에게도 적용 됐던 사실은 이곳에 온지 2주째였을까?
저쪽에서 한 여자 아이가 내게 와서 말을 걸었다.
''내가 듣기에 너는 유태인이라던데, 그러면 아람어를 알아들을 수 있겠구나?''
디디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는데 자신이 알아듣고 말하는 것이 아람어란 사실이었다.
''나는 미카야라고 해. 만나서 반가운데 너한테 꼭 해줄 말이 있어서 왔단다.''
디디무스는 어여쁜 미카야의 낭랑한 말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귀를 기울였다.
''여기엔 규율이 있어. 정해진 약속을 지켜야만 하지. 그리고 그것들을 받아 적고 기억해야 하거든. 나도 받아 적는 데는 아직까지 어렵지만 열심히만 하면 나중에는 이곳에서 제일 잘하게 될 거라 믿어.''
디디무스는 그 어여쁜 아이의 두 눈을 신비롭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이전에 생기발랄했던 쾌활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멍하니 미카야의 목소리에 빠져들었다.
''저... 나도 아랍어를 잘 할 수 있을까?''
''그렇고말고. 내가 잘 가르쳐 줄 테니 나를 너의 선생으로 모셔라.''
어찌나 쾌활한 소녀였던지 그 아이의 밝은 웃음소리는 그늘진 광장 한 켠에 해맑음을 주었다.
우당탕탕. 멀리서 닭들의 푸드덕 거리는 날갯짓이 섞인 둔탁한 소리는 몇 명의 젊은 남자들의 외치는 소리와 함께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저 늙은이를 어서 잡아야 한다. 절대 놓쳐선 안 돼.''
19.
미카야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콰-광' 하는 굉음에 섞인 흙먼지가 디디무스의 작은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허-억' 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강제로 멈춰진 짧은 몇 초간의 고통은 결코 낯설지 않은 어두운 냄새를 몰고 와서는 작은 콧구멍 새로 쿡쿡 찌른다.
''이건...'' 작은 본능이 화약 냄새를 알아차렸을 땐 이미 쵸프라의 흔적은 세상에 없었고 뒤따라 달려오던 두 명의 건장한 남성들도 바닥에 쓰러진 채 모든 것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멍하니 앞만 주시하던 디디무스는 떨리는 입술로 ''할아버지''라고 작게 외마디를 내뱉고 쑥대밭이 되어버린 광장 끝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둘러싼 인파 사이로 디디무스가 헤집고 들어갔을 땐, 여기저기 천 조각들이 널려 있었는데 어른들은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모두 물러나도록 하시오. 하나도 장소에 있지 않도록 당장 아이들 눈을 가리도록 하시오!''
어린 영혼들을 위한 배려였을까? 두려움에 떨리는 호기심은 그들의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가려지고 말았다.
디디무스는 무엇하나 제대로 관찰하지 못했다. 호기심 많은 아이의 기질에도 이번만큼은 심상치 않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도무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미카야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내가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올께. 디디무스, 여기 가만히 있어. 내가 올 때까지.''
작은 상자에 걸터앉은 디디무스는 미카야가 올 때까지 멍하니 기다렸다.
화약 냄새가 디디무스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던 이유는 춤추는 정령들이 연기 속에서 피어올라 여기저기 흩어져 사람들 등 뒤에 서있을 것만 같은 상상에서였다.
강한 냄새가 코끝에서 쵸프라 할아버지의 그을린 얼굴과 흰 수염을 영상으로 떠오르게 한 일에 대해서 디디무스는 어쩌면 정령들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됐다.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쵸프라 할아버지!''
얼음을 혼잣말로 불러보며 디디무스의 작은 두 눈길은 잠시 후 자신을 향해 달려온 미카야 앞에 멈췄다.
''미카야.''
''디디무스, 잘 들어. 지금 당장 여기에서 도망쳐야해.''
다짜고짜 어리벙벙한 이야기를 마구 쏟아내는 미카야의 작은 입술에서 공포의 기운이 감돌았다.
''저 놈 잡아라.''
디디무스는 본능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뒤도 돌아볼 새 없이 머리를 땅 쪽으로 숙이고 땅을 힘껏 걷어찼다.
옆으로 지나치던 중년의 여인은 왼편에서 들려온 한 무리의 뒤섞인 목소리들에 방금 구운 빵들이 담긴 바구니를 흙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세워둔 쟁기 옆 누런 개 한마리가 포복자세로 다가서더니 빵 한 조각을 덥썩 물고 줄행랑을 친다.
''요놈 봐라!'' 한 명의 근육질 남자가 가랑이 아래로 쏜살같이 지나가는 디디무스를 낚아채며 소리 질렀다.
''네가 잡았소! 요괴 같은 이놈을 잡았단 말이오''
목덜미가 잡힌 디디무스는 한 마리 토끼가 긴 귀를 붙잡혀 옴짝달싹 못한 것 마냥, 공중 위로 들어 올려졌다.
''놔줘요. 아파요. 이거 놔요. 너무 아프단 말이에요.''
저 멀리 미카야는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공중에서 가위질하다가 축 늘어진 디디무스를 보고만 있다.''
''잘했네. 요놈을 마구간으로 데려가게.''
온 몸에 기운이 빠져나간 디디무스는 손끝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쯤은 쵸프라가 나타나서 모든 것을 해명해 줄 것도 분명한데 세상은 그저 조용할 뿐, 아무도 디디무스를 위해 다독거려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서 내놔라!''
다짜고짜 격앙된 목소리가 디디무스를 구석진 곳으로 몰아갔다.
''어서 내놓으란 말이다.''
알 수 없는 분노에 디디무스는 입을 열었다.
''무엇을 내놓으란 말인가요?''
''영악한 요괴 같은 놈, 네가 하루 종일 굶으며 서까래에 대롱대롱 매달려봐야 이실직고를 하겠느냐?''
''정말 무슨 얘길 하는 건지 모른단 말이에요.''
포악한 불꽃을 뿜어내는 그 사람 뒤에서 누군가 엄중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만 하게.''
한 마리 누렁이가 이빨을 드러내다가 주인의 기에 눌려 온순해지기라도 한 듯, 마구간 벽면의 나무판자 틈새로 쏟아지는 먼지 섞인 가느다란 빛줄기는 멋쩍어 하는 남자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20.
''내가 직접 물어 볼 테니 네 놈들은 전부 나가 있어라.''
얼굴이 희멀건 중년의 남자는 디디무스에게로 다가와 어깨에 살며시 널따란 손을 올려놓았다.
''이름이 뭐지?''
''디디무스''
''그래, 아무튼 무척이나 놀랐겠구나.''
놀란 심장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는 듯이 그 남자는 디디무스가 규칙적으로 숨을 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줬다.
''음... 디디무스, 그 노인네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너에게 전해준 물건이 있지?''
디디무스는 질문의 뜻을 전혀 모른 체 이야기를 계속 들으려는 눈치였다.
''그건 정말 중요한 비밀문서인데 말이지. 둘둘 말려진 양가죽으로 되어있고 그걸 펼치면 많은 글자들이 써있는 것이지.''
디디무스는 무슨 소린지 도무지 알지 못했다.
''나으리, 기억 못 하는 표정인데 회초리라도 준비할까요?''
''넌 가만있어!''
소리 지르는 권력 앞에 주눅 든 모양이 역력하다.
''디디무스, 한번만 잘 기억해 보렴. 그 영감이 네게 말이지. 화약 어쩌구...하는 말을 한 적이 있을 텐데. 우리는 그걸 만드는 비법은 적힌 양가죽을 찾고 있거든. 그러니 생각나면 언제라도 즉시 내게 알려주러 오거라.''
홀로 남은 디디무스는 기억을 더듬어 본다. ''양가죽 두루마리''
수많은 기행을 보여줬던 쵸프라가 그리워져 눈가엔 어느덧 작은 눈물이 맺혔다.
''그래 맞아. 검은 가루의 정령들이 쵸프라 할아버지를 데려간 게 분명해.''
쵸프라가 알려준 정령들에 대해서 디디무스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흩날리는 먼지가 가라앉을 즈음이 되자 나무벽면 틈새로 들어오는 황금빛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