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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세극 직접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김두봉(金枓奉)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두 분야에 걸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하나는 주시경을 잇는 한글학자로서 명성을 날렸다. 우리 글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고 한글 연구와 이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주인공으로서 한글 연구 분야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다른 하나는 독립운동의 한축을 형성했던 연안파를 대표한 정치인으로서 북한 정권 수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연안파는 팔로군에 가담해 싸웠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 또는 조선의용군 출신을 일컫는 말로 조선의용군은 8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군사조직으로 성장했다.
독립운동 영역에서 무장투쟁 못지 않게 중요한 분야가 우리 말글과 역사를 지키는 것이다. 일제는 조선을 지배하면서 내선일체니 동조동근이나 하면서 동화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말이야 그럴듯하지만 우리 민족은 2등 국민으로서 노예적 위치를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동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타자와 구분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관건이라고 봤을 때, 자기 언어와 역사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정체성을 지키는 핵심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말과 글에 대한 그의 연구는 민족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식민지 상황만 아니었다면 그는 한글을 연구하는 언어학자로서 자리매김하며 인생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글연구만 하고 있기에는 상황은 너무 엄중했다. 우리 말글을 지키기 위해서도 나라를 되찾는 일이 더 절박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떻든 그는 무장투쟁 대열에 뛰어들며 새로운 인생행로를 개척했다. 이러한 정치적 행보는 그에게 북한에서 2인자의 위상을 차지하며 권력의 정점에 서는 영광도 안겨 줬지만 말년은 불우했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 김두봉은 한글학자이자, 항일혁명가와 정치인으로서 드라마틱한 삶을 산 인물이며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과 업적에 비해 저평가되고 있다. 그의 삶은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고향에서의 보낸 시절, 청년기 서울 생활, 그리고 중국 상해와 연안에서의 활동, 해방 후 북한에서의 활동 등으로 나줘 살펴볼 수 있다.
주시경 수제자로서 한글 연구에 몰입
김두봉은 1889년 3월17일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읍 동부리 87번지(현재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에서 민족의식이 투철한 농민 김돈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7세가 될 때까지 일본식 보통학교에 다니기를 거부하고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그가 국수주의자로 보일 정도로 철저한 민족주의자가 된 것은 어렸을 때 한문으로 된 많은 고전, 특히 조선의 고전을 섭렵한 것이 바탕이 됐다. 1908년 신학문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고향을 떠나 상경해 기호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의 전신)와 보성고보·배재학당에서 수학했다. 재학 중 그는 항일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에도 가입해 활동했고 대종교에도 참여해 나철 시봉자로서 나철의 순교를 목도하기도 했다.
1913년 주시경 문하에 들어가 한글 연구에 뛰어들었으며 국어사전 <말모이>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1914년 주시경이 사망하자 스승의 이론을 좀 더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1916년 <조선말본>을 출판했다. 이 책은 한글에 대한 문법학설로 당대에 “가장 넓고 깊게 연구된 책”으로 평가받았다. 1917년 당시로는 늦은 나이인 29세에 이화학당 출신의 아내와 결혼했다. 보성·휘문·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우리말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는 등의 일을 했다. 그는 말과 글이 살아 있으면 민족의식도 죽지 않고 독립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으로 한글강습소를 차려 한글을 통해 반일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했다.
상해에서 한글연구와 독립운동을 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학생들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에 참가하는 활동을 하다가 상해로 망명했다. 1919년 7월 개회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경상남도 대표로 의원에 선출됐다. 그러나 그는 상해에서 임정활동보다 한글 연구와 교육사업에 진력했다. 1922년에는 <조선말본>을 보완한 <깁더조선말본>을 출판했다. 여기서 ‘깁더’라는 말은 깁고 더한다는 뜻이니 수정 증보판이나 개정판이라는 의미의 순 한글말이다. 그는 이 책을 출판하면서 고충이 적지 않았음을 머리말에서 토로했다. 초판 2천부를 인쇄하고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여러차례 광고도 했으나 판매는 지지부진했다. 상해에 있는 교민들의 처지가 이런 책을 사서 읽을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반응이 좋아 1930년 동아일보사로부터 공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국내에서부터 우리말 사전 편찬 작업을 하다가 중단됐지만 상해에서도 쉼 없이 연구해 30여만개의 우리말 어휘를 정리하기도 했다. 그는 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조선말”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상해한인교민단의 학무위원장이 돼 교포자제들의 교육사업을 맡게 됐다. 교민단이 설립한 인성학교에서 1923년부터 강사와 교사를 하며 국어와 국사를 가르치다가 1928년부터 1932년까지 교장을 맡았다. 당시 그를 만났던 사람들의 증언이나 회상 기록들을 보면 “어린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주야로 침식을 저버리고 육영의 길에 몰두했던 한글학자요 역사학자였다”고 할 만큼 그는 전형적인 선비요 학자 스타일의 인물이었다.
한글학자이자 교육자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그에게 여러 가지 제안이 왔다. 1927년 민족유일당 운동이 본격화하자 독립운동의 통합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됐다. 1930년 1월 상해에서 창당된 한국독립당의 당의 당강 기초작업에 참여하며 비서장·이사 등의 직책을 맡았다. 안창호와 함께 각파혁명비교연구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운동을 꾀하다가 1932년 안창호가 일제에 체포되자 이를 계승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임정 지지세력이든 반대세력이든 모든 독립운동세력을 포함한 새로운 독립운동의 구심체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가 일부 임정 지지세력이 불참했지만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나타났다. 1930년대 중반 재중 한인 독립운동 진영이 김구와 김원봉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시점에서 그는 김원봉 진영에 가담했다. 김두봉은 김원봉의 처 박차정의 외당숙이어서 김원봉은 김두봉의 조카사위가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외삼촌과 조카’ 사이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가 민족혁명당에 가입해 활동하게 된 것은 김원봉과의 동지적 관계도 있었지만 당시 임정 옹호세력은 장·노년층으로 양반과 상놈을 가릴 정도로 고루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있어서 반발심이 있었다. 민족혁명당은 청년층을 주요 구성원으로 하고 있었는데 청년층이 김두봉을 떠받드는 분위기였다. 그는 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조직부장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의열단이 운영한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으로서 한글과 우리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연안에서 독립동맹 주석으로서 활동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지자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인 중경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다시 연안행을 결심했다. 그는 어린 딸을 데리고 국민당이 통치하는 구역을 지날 때는 언어장애인 행세를 해가며 육로로 중국 공산당의 항일 근거지로 들어갔다. 그가 산서성 진동남을 거쳐 연안에 도착한 때는 1942년 4월이었다. 그가 연안행을 택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중공 당국의 초빙, 즉 모시기 공작이 작용한 측면도 있었다. 연안에서 그는 조선독립동맹의 주석으로 추대됐다. 또한 조선의용대 화북 지대를 개편해 조선의용군을 조직했는데 연안파의 거두 무정이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그러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별개의 단체가 아니라 하나의 단체가 두 가지 면으로 나타난 것이다. 독립동맹은 조선이 해방과 독립을 위한 모든 애국자와 혁명가를 포함한 광범한 대중적 정치단체이고, 조선의용군은 이를 위한 무장세력이다. 조선의용군과 독립동맹은 중국 공산당과 팔로군과 함께 연대해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독립동맹은 군사간부 양성기관으로 연안·태행산·산동·화중 등지에 조선군정학교를 설립했다. 조선군정학교는 일본군에 있다가 탈출한 조선인 사병과 한인 청년들을 규합해 조선의용군으로 재편성하는 교육기관이었다. 연안의 군정학교는 1944년 조선청년학교를 개조한 것으로 1945년 2월에 개교했고 김두봉이 교장을 맡았다.
북한에서의 정치활동
해방 후 연안파의 지도자로 국내에 들어온 그는 평양에서 연안파를 기반으로 1946년 2월 조선 신민당을 결성해 당수로 선출됐고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돼 정치 일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46년 8월에는 조선노동당 위원장이 됐고 10월에는 김일성 종합대학의 초대 총장이 됐다.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1948년 4월 김일성과 더불어 남쪽의 김구·김규식과 4김 회담을 하는 등 남북 정치협상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8월15일 이남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9월9일에는 이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남북 분단이 기정사실화 됐다. 이후 북조선인민위원회 의장,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돼 국가수반이 됐다.
▲ 노세극 직접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한국 전쟁 이후 북녘에서 김두봉의 정치 행로는 순탄치 않았다. 1956년 소위 8월 종파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하자 반혁명 종파분자로 낙인찍히게 돼 조선노동당에서 제명됨과 동시에 평안남도의 한 협동농장으로 하방됐다. 그곳에서 농사에 종사하며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가 사망했다. 1961년께로 추정된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뛰어난 한글학자이자 항일투사인 김두봉은 남에서는 이북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이북에서는 종파주의자라는 이유로 남과 북에서 금기시된 인물이 됐다. 남과 북에서 그가 복권되는 날을 고대해 본다.
노세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