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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폭탄 맞은 호남이여
열흘 넘게 눈폭탄을 맞은 호남은 죽을 맛이다. 텔레비젼 화면이 비쳐주는 공간은 두텁게 쌓인 폭설의 파도로 일렁인다. 농촌 사람들은 지금 그 폭설 속에 빠져 죽고 싶은 심정일게다. 비닐하우스는 완전 망가졌다. 눈무게를 견디지 못해 비닐 하우스 받침대도 휘어지고 폭삭 내려앉았다. 삶이 송두리째 날아간 사람들의 뼈저린 눈물까지 빼앗아간 걸 보면 눈폭탄은 원자탄보다 더 무섭다. 싸락눈은 서정이 넘치는 눈꽃을 피워 올리지만 폭설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서정이 나올 리 없다. 또한 시도 나올 리 없다. 오직 눈물과 한숨뿐이다. 대전은 얼마나 살기 좋은가. 소나기도 피하고 태풍도 피하고 폭설마저 피하는 걸 보면 대전은 하늘이 내려준 복토임엔 틀림없다. 바깥엔 부슬부슬 눈이 날린다. 잘 다져진 떡쌀 같다.
후끈거리는 뜨거움의 열병
머리가 찌끈거리고 눈동자에 충혈이 인다. 급체에다 감기, 몸살이 터진 모양이다. 한파에 감기, 몸살은 그렇다 치더라도 체할 만한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 두통이 나고 속이 뒤집어 지니 그 원인을 모르겠다. 전에는 자주 체했다. 가정 의원은 나에겐 맞춤형이다. 그 병원에서 진단받고 약을 복용하면 거짓말처럼 낫는다. 그러나 어쩌랴. 오늘이 토요일 늦은 저녁이니, 가정의원은 문을 닫았고 다른 당직병원은 효과도 없을 것 같아 그냥 집에 있어야 했다. 토요일 오후 내내 방에만 쳐박혀 있었다. 바깥엔 10도를 오르내리는 한파인데 지글지글 끊는 전기장판 위에 엎드려 있다가 꿈꾸듯이 잠이 들곤 했다. 온 몸에 땀이 나고 머리 속은 불안한 사건들이 필름처럼 끊어졌다 이어졌다. 얕은 잠을 잤다.
과학은 거짓말이 아니다
황우석 교수의 말이 거짓말로 탄로가 난다. 그렇게 당당하던 과학자의 말도 양파껍질 벗기듯 벗겨보니 게욱질 나는 거짓말이다. 그는 왜 자꾸만 거짓말을 터뜨릴까. 노성일 미즈메디 병원 이사장에게 왜 모든 것을 덮어씌우고 김선종 연구관을 줄기세포를 훔친 도둑으로 몰았을까. 위기에 처하면 입은 거짓말을 생산하는 기계로 변한다. 위기 탈출, 황우석 교수는 이것이 가장 큰 과제였을 것이다. 남들이 우러러보는 과학자의 명성에 뭐가 부족해서 사기꾼이 되려고 할까. 욕망이 자신을 망친다. 그 놈의 욕망만 없다면 세상에는 진실만 있을 텐데, 아쉽다. 노벨상 후보에서 희대의 사기꾼으로 전락할 운명에 처한 황우석 교수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 12/17(토)
눈청소 하는 날
폭설이라고 하지만 호남에 비한다면 약과다. 호남은 열흘이 넘게 눈 속에 파묻혀 있다. 그치다 퍼붓다하는 폭설 때문에 사람들의 생활도 만신창이가 된지 오래다. 비닐하우스는 물론 축사, 양어장, 양곡창고까지 무너져 전쟁이 훑고 간 폐허처럼 삭막하다. 눈도 폭탄처럼 무섭다는 걸 알았다. 눈이 많이 흩날리지 않는 지역에 살다보니 호남의 폭설이 눈폭탄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고생깨나 하겠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 겨우 한 뼘이다. 기껏해야 20센티 안팎이다. 차가 막혀 우왕좌왕하는 도로를 벗어나 회사에 들어서니 앞마당은 휑하니 비어있다. 손끝조차 얼어터지게 할 것 같은 차가운 공기만 머물고 있다. 직원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눈청소를 한다고 야단이다. 동원된 삽과 빗자루들이 두터운 눈발위에 길을 내느라 한창이다. 12/21(목)
천주교의 사후관은 맞을까
죽음, 머릿속에 늘 차오르는 상념이다. 왜 자꾸만 죽음에 관심을 가지는가. 늙거나 뜻하지 않는 사고를 당하면 어차피 가야 하는 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고차원의 궤도를 수정할 수는 없다. 천주교의 사후관은 맞을까. 천국과 지옥은 실재할까. 아니면 상상이 만들어낸 산물일까. 인터넷의 지식 검색을 뒤졌다. 나라마다 종교마다 사후관은 달랐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적인 사실은 선행을 하거나 바르게 살면 반드시 천국이 도래한다는 것, 이런 사후관 조차 없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흉흉하고 어지러울 것이다. 12/22(목)
무너지는 황우석 신화
서울대 조사위의 기자 회견은 역시 예상대로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다. 황우석 신화가 나락으로 내려앉는 순간이다. 영웅의 존재로 추앙받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희대의 사기꾼이 될 운명에 처했으니 사람들의 충격은 당연하다. 모두들 한숨이다. 희망이 사라졌다고 야단들이다. 특히 난치병 환자들의 상실감은 더하다. 그 동안 황우석 교수를 절대적으로 떠받들던 두터운 신의 만큼 상실감도 그 배가 된다. 그래도 끈을 놓지 못한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을까 후속발표에 두 귀를 곤두세운다. 복제소 영롱이와 스너피도 검증을 한단다. 조작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다. 이것마저 조작으로 판명된다면 그는 그동안 업적을 남긴 것이 전무하다. 그 많은 지원금을 받고 도대체 무엇을 했을까. 지원금을 황우석 교수에게만 몰아주지 말고 생명공학자들에게 분산 지원했다면 아마 이같은 일은 터지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다. 청와대나 정부도 후폭풍을 맞을 것은 뻔하다. 아마 족쇄를 차고 있는 느낌이 들것이다. 12/23(금)
허를 찔린 음주측정
성당 마당은 축제분위기다. 성탄미사를 마친 신자들이 마당에 피워놓은 불을 쬐며 술과 음식을 들고 있다. 빈 드럼통에 장작을 쑤셔놓고 불을 지폈는데 타닥거리는 불티들이 성당 마당을 환하게 비춘다. 별들이 마당으로 쏟아져 내릴 때 불티들은 노란 꽃불을 달고 허공을 솟구쳐 오른다. 마당 전체가 따스하다. 영하로 몸서리치는 밤 추위도 꼼짝 못한다. 맛난 국물을 안주삼아 소주 반잔을 털어 넣었다. 앞뒤 생각 않고 막무가내 마셨으면 두잔 정도는 해 치웠을 텐데, 그렇게 했으면 난 꼼짝없이 음주단속에 걸릴 뻔 했다. 연말연시, 미리 알고 술을 자제한 탓이다. 도로를 달리다가 집 앞 사차선 도로 텍사스 골목으로 빠지는 도로상에 전경이 길을 막고 음주측정기를 들이미는 통에 가슴이 철렁했다. 반잔 정도 마신 술기운 때문이다. 그 쪽이 유흥가니 음주단속을 하는 것은 당연한데도 난 그만 허를 찔리고 말았다. 다행히 통과하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했지만 하마터면 방심하다 큰 일 날뻔 했다. 음주단속에 걸리는 사람이 이래서 걸리는 모양이다. 설마 이 시간에 음주측정을 하랴, 여기서 측정을 하랴 하는 방심이 차를 몰게끔 마음이 유도를 하는 모양이다. 어찌 보면 이 위기를 모면한 것도 하느님 은총이라고 할 것 같다. 만약 걸렸어도 하나님 은총이라고 할 것이다. 신앙이 깊은 사람은 더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라고 하느님이 벌을 내려주신 걸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직 믿음이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신앙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12/24(토)
제대에 무릎을 꿇다
2006-01-07 18:06:39
성긴 눈발이 흩날리다 만다. 성탄절 거리, 골목은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차있다. 건물은 건물대로 맨살을 드러낸 채 떨고 있고 나무는 가지마다 달아나는 바람을 붙잡으려 안달을 하고 있다. 성당 입구에 서있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얼굴도 부석하다. 살을 깍듯이 아린 날, 신자들을 향해 축복을 내리신다. 예수님은 양팔을 벌리고 성모님은 두 손을 얌전히 오무린 채 하늘을 응시한다. 물기 빠진 구름만 떠도는 하늘이 영 눈발을 뿌릴 것 같지는 않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었으면 그 풍경이 더 살아날 텐데, 무릎을 시리게 하는 찬 바람이 더욱 을씨년 스럽다. 성당에 들어가 제대에 무릎을 꿇는다. 지나간 삶들이 파노라마처럼 떠 오른다. 그동안 삶들이 너무나 뒤죽박죽이었구나. 가족에겐 허물이 없었는가.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던가. 무심코 내던진 말이 화살이 되어 상대방 가슴에 꽂히지난 않았을까. 고백성사를 하듯 죄지은 것 다 털어내니 마음이 후련하다. 평일 미사도 꼭 참석하고 부모님의 안식을 위해 열심히 기도드려야지, 이승 떤 부모님에 자꾸만 집착한다. 어찌 생각하면 병적이다. 광기다. 부모님의 영혼은 지금 편히 안식을 맞고 계실까. 현재의 삶도 곤궁해서 발버둥치는 마당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에 집착하는 것이 부질없다 생각도 해 보지만 아니다. 더 곰곰히 생각하면 이것만큼 더 급한 것도 없다. 전 생애가 가시밭길인 부모님이 하늘나라에서라도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해드리는 것, 이것이 진짜 효가 아니겟는가. 부모와 자식은 죽어서도 혈육의 끈을 놓지 못한다. 개신교는 달리 천주교의 사후관에 한가지 덧붙여잇는 건 연옥이라는 개념이다. 사람이 목숨을 놓으면 영혼은 모두 연옥에 머물러 단련을 받아야 한다. 후손들의 기도가 영혼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다. 선행과 진실한 삶, 열심인 미사가 부모님의 영혼을 안식의 자리로 머물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미사를 게을리 할 수도 없다. 12/25(일)
처음 시작한 새벽미사
2006-01-07 18:09:39
5시 40분, 문득 눈을 떴다. 낮 동안의 시끄러운 일상들이 어둠에 파묻혀 있을 무렵, 새벽 손길이 나를 두드려 깨웠다. 내 몸은 따스한 이불속으로 자꾸 파고 들었지만 마음은 성당으로 향하고 있다. 새벽미사. 처음 시작한 일에 바깥의 찬바람은 자꾸만 나를 갈등과 번민으로 몰아넣는다. 일요미사만 보고 적당히 찬송하며 적당하게 세월을 헤쳐나가도 될 일을 왜 사서 고생하느냐. 나는 마음을 다 잡았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지. 사탄은 사탕보다 더 달콤한 말로 유혹을 한다지, 그러나 적당히란 없다. 그건 중립도 아니다. 그냥 얼버무리자는 뜻이다. 신앙에서는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 적당히는 아무나 다 할 수 있다. 하늘나라에 먼저 발을 들여놓기 위해서는 벗어버릴 껍질 같은 존재다. 앞으로 새벽미사를 보기로 했다. 제대에 꿇어앉아 부모님의 안식을 위해 기도를 바치기로 했다.
저절로 떨어진 딱지는 상처가 나지 않는다
딱지는 저절로 떨어져야 상처가 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딱지는 다 똑같다. 탯줄 같은 밤꽃이 말라붙어 잘 여물어진 밤, 자주빛 윤기가 도는 밤톨만 봐도 독하게 달라붙었던 꽃딱지가 보인다. 밤뿐이 아니다. 짐승과 꽃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내 입술은 터지기 전 일보직전이다. 입술의 딱지는 지금 상처를 여물게 하는 중이다. 그러나 억지로 뗐더니 피가 터졌다. 입술이 엉망이다. 감기 몸살이 만들어 낸 자국은 참으로 처참하다. 살은 일단 손을 댔다 하면 폐허가 된다. 12/26(월)
미련없이 지는 한해와 싸움을 걸다
저무는 한 해가 아쉬워 직원들끼리 오붓이 모여 회식을 즐겼다. 망년의 슬픔이 교차되는 순간에 맞는 회식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 되기도 한다. 떠들썩한 술의 성찬 때문이다. 술은 인간관계를 더 끈끈하게 이어주는 최상의 기호품이 된지 오래지만 술 때문에 벌어지는 비극은 부지기수로 많다. 그만큼 술 속에는 인생사의 양면이 다 존재한다. 화해와 갈등이 있고, 온유와 비탄이 있고 웃음과 슬픔도 잇다. 솜과 칼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양면성은 늘 대립각을 세우며 술자리를 지배한다. 양면성 중에도 후자가 무서워 술을 절제하지만 당최 오늘의 망년 모임에서는 절제할 수가 없다. 술을 권하는 손길이 그만큼 많다는 말이다. 그것만큼 달콤한 유혹도 없다. 그 유혹을 참고 견디면 들고 있는 잔을 부딪혀 쨍하고 소리를 내는 축들이 있다. 다름 아닌 동료 술꾼들이다. 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두주불사형, 이런 사람들과 동석을 하고 있자니 걸레처럼 몸이 망가지는 건 나다. 쨍, 쨍, 경쾌한 술잔 소리에 할 수 없이 술은 식도를 타고 미끄러지듯 넘어간다. 인생사의 괴로움처럼 끓어오르는 삼겹살을 안주삼아 소곡주를 몇 잔 들이켰더니 얼마안가 얼굴이 불콰해진다. 거울에 내 얼굴 비춰보지 않아도 저녁노을을 들이키고 있는 잘 익은 홍시 빛을 띨 것이 틀림없다.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는 것이 미련 없이 지는 한해와 싸움을 걸자는 수작이다. 잘 가라, 한해여. 나, 오늘부터 술잔에 너의 이름을 넣고 마시겠다. 그리고는 말썽많은 네 이름 잊겠다. 12/27(화)
혹한을 헤치며 걷는 유등천 조깅로
겨울 한철 뱃살을 찌웠다가 날이 풀어지면 운동을 해서 뱃살을 빼는 게 보통이다. 추위 때문에 도통 움직일 수 없어 방에서만 먹고 뒹굴다보니 살이 붙는 건 배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이 풀리기를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툭하면 갖는 직장의 회식자리에서 마셔대는 폭음과 삼겹살이 고스란히 뱃살로 쌓인다는 생각을 하니 두렵기 짝이 없다. 찌는 건 쉬워도 빼기는 정말 어려운 게 뱃살이다. 유등천 천변의 조깅로는 돈없는 서민들을 위해 깔아놓는 웰빙 코스다. 붉은 아스콘으로 포장하여 밟으면 폭신폭신한 발걸음이 나비처럼 날아갈 듯한 기분이다. 헬스장의 회비가 아까운 사람들은 이 조깅로 만큼 좋은 게 없다. 유등천의 맑은 바람을 들여 마시며 팔을 좌우로 최대한 뻗어 빨리 걷기만 하면 된다. 주택지보다 유등천은 더 겨울이 깊어진 기분을 느낀다. 말라붙은 물위로 드러난 자갈과 돌 주변에는 얇은 얼음막이 형성되어 희끗거렸고 둔치의 마른 나무와 풀들은 추위에 몸살이 난 듯 잔뜩 주눅 들어 있다. 그래서 운동하는 사람도 가뭄에 콩 나듯 한다. 지난 여름에는 조깅로가 터져나갈 듯이 발걸음이 붐볐는데 냉혹한 추위가 몰아치니 모두들 아랫목에 들어앉아 겨울잠을 자는 모양이다. 따스한 방은 폭식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모진 추위도 단단히 무장한 운동복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바람들 새 없이 목까지 꽉 졸라맨 모자와 운동복은 고추같이 매운 추위조차 막아줘 운동하기 딱 좋았다. 태평교에서 유등교 아래까지 왕복 1시간을 걸었더니 땀이 났다. 이겨울에 땀이라니,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다. 집에서 샤워를 하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운동을 하고 잠자리에 드니 한결 개운했다. 1/2(월)
찐빵처럼 따끈한 데이트
미사 중에 문자가 찍히면 난감하다. 문자를 띄울 줄 모를 뿐 더러 정신을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내가 성당 앞에 차를 받쳐 놓고 미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일전에 미사 끝나는 즉시 성당 앞에 차를 대라는 나의 요구를 거절한 아내와 한바탕 싸움을 벌인 후에 오늘 아내가 알아서 차를 몰고 나왔다. 또 싸움을 할 것이 두려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추위를 뚫고 성당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것이 처량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성당 앞에 차를 갖다대니 기분이 흡족했다. 게다가 차안에서 찐빵 두개를 내미는 손이 솜털처럼 따스했다. 배고픈 나를 위한 아내의 특별 배려다. 포실 포실한 찐빵 속의 팥 맛이 꿀맛 같다. 세심한 배려를 하는 아내가 고맙다. 평소에는 찌지고 볶고 싸워도 단 둘만이 잇는 차 속의공간에서 즐기는 데이트가 찐방 만큼 맛있다.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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