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종목에서 국가대표가 되면 너무 기쁜 일입니다. 대단한 일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종착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겨우 출발선에 선 것에 불과합니다. 국가대표가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태릉선수촌에 입촌하면서부터 그때부터 진짜 고된 훈련이 시작됩니다.
예수를 믿어 신자(信者)가 되면 감사한 일입니다. 국가대표가 된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니 경사 중의 경사지요. 그러나 그것은 시작점입니다. 그때부터 신앙의 올림픽을 위해 달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聖徒), 곧 성스러운 성 (聖), 무리, 걷을 도(徒)가 아닙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를 마라토너에 비교했습니다. 도상 위의 주자(走者) 말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9:24)고 격려합니다.
이왕 국가대표가 되었으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라는 말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여 이왕이면 메달을 목에 걸라는 뜻입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대단합니다. 목에 거는 메달은 사실 명예요 훈장 같은 것이고, 진짜는 따로 있습니다. 각 기업에서 포상금이 어마어마하게 나오고, 국가에서는 평생 메달 색깔에 따른 연금 혜택을 줍니다.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지요.
하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보세요. 엄청납니다. 그것을 기대하며 사도 바울은 죽기 살기로 훈련에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보세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요즘은 메달을 목에 걸어주지만, 고대 올림픽에서는 월계수 잎으로 만든 월계관을 머리에 씌워줬었습니다. 우리가 신앙 올림픽에서 우승하면 주님이 직접 우리 머리에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엄청난 포상과 함께 말입니다. 기대되지 않습니까?
그걸 생각하면 저는 흥분되어 잠이 안 옵니다. 그래서 이 나이에 지구 반대편에 있는 페루까지 복음을 전하러 다녀온 것입니다. 저는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30)는 말씀을 믿고, 그 상을 받고 싶거든요.
여러분,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4)며 확실한 목표를 둔 사도 바울 같아야 합니다. ‘뭐 꼭 메달을 따야 하나?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지.’라고 생각하면 절대 메달을 딸 수 없습니다. 그런 자가 최선을 다할 리 없으니까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고전9:26). 그래서 저는 그날에 받을 상에 대해서, 면류관에 대해서 가르칠 뿐, 주의 일을 하는데 절대 사정하지 않습니다. 충성된 자에게 부탁은 하지만, ‘봉사해달라’ 사정하지 않습니다. 메달에 목표를 두면 각자 알아서 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빨리 달린다고, 힘이 세다고, 기술이 좋다고 메달을 따는 게 아닙니다. 성경은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2:5)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아무리 홈런을 날려도 규정을 위반하면 실격입니다.
신앙생활도 법대로 해야 합니다. 내 신념에 가득 차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법 아래서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무조건 ‘아멘’ 하는 것이 법대로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백 세에 난 아들을 제물로 내놓으라는 하나님 명령에 ‘아멘’한 아브라함처럼 말입니다. ‘줄 때는 언제고, 왜 빼앗아 가냐?’고 따지는 것은 ‘왜 마라톤 코스대로 달려야 하냐? 빠른 길이 있어 그리로 가는데 뭐가 잘못됐냐?’고 따지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리고 선수는 자신을 절제해야 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고전9:25). 히브리서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히12:1)라고 했습니다.
국가 대표에게 물어보세요.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자고 싶은 거 다하는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체조선수들의 식단을 보면 ‘저걸 먹고 어찌 버티나?’싶을 정도로 소식을 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자는 것, 입는 것, 외출까지 철저하게 절제합니다.
성도들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세상에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것들을 절제해야 합니다. 그것이 결국 얽매이기 쉬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좁은 길입니다. 다 짊어지고, 다 가지고는 걸려서 좁은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선수들은 인내해야 합니다. 기록이 조금이라도 좋아지기 위해서 힘든 훈련을 인내하며 참아내야 합니다. 역도 선수들은 그 무거운 역기를 인내하며 올려야 하고, 수영선수는 새벽에 차가운 물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마라토너는 2, 3시간이 넘도록 인내하며 뛰어야 합니다. 인내하지 못하면 어찌 됩니까? 국가대표 옷을 벗어야지요. 코치는 사정하지 않고, 냉정하게 ‘너 아니라도 얼마든지 다른 선수가 있다.’고 합니다.
신앙도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 하면 만사형통하리라 생각하겠지만,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인내할 때 난사형통(難事亨通)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생활이 편하기만 했나요? 야곱이나 요셉, 바울이 편안한 신앙생활을 했나요? 다 난코스를 만났으나 그것을 믿음으로 이겨 완주했습니다. 예수님도 치욕을 참아내시고 우리를 구원하지 않았습니까(히12:2)? 저 역시 물 없는 사막, 눈 덮인 산야를 걸었음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누구나 힘이 다하고 거의 포기하고 싶은 지점에 도달했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기도하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30~31)라는 말씀이 이루어져 넉넉히 고되고 힘든 것을 이겨낼 것이고, 마침내 메달을 따게 됩니다.
여러분, 메달을 따서 받는 연금은 살아있을 동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 영원한 보상을 위해 달리고 있습니다.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5). 그런데 그것을 위해 잠시 동안 훈련하고 노력하는 것을 못합니까?
국가대표선수들은 국가를 대표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위해 노력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교회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날에 내가 받을 상과 면류관을 위해서 오늘도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메달을 땁시다. 이왕이면 그날에 주님이 들고 계신 상과 면류관의 주인공이 됩시다. 할렐루야!
후회 말고 기회 있을 때
주님의 일 하자
신앙생활은
나를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