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의 이해
컵은 컵이기 위해 컵을 견디지
둘레가 얇아지는 것은 네 입술 자국 때문이지
컵의 수면에 동그라미를 그리면
담아 둔 풍경과 소리들을 꺼내 보여 주지
눈 오는 밤 네 창문을 노크하던 모습
입술이 와 닿던 체온
길 잃은 사막에서 별자리를 찾으며 같이 부르던 노래까지도
컵이 왜 섬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지 컵이
왜 모래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넌 알까
제 입술을 오염된 혓바닥이 핥고 있다고 느낄 때
제 손잡이에 체온이 닿지 않아 밤의 숲에 홀로 던져졌다고 느낄 때
지진에 흔들리듯 스스로를 무너뜨리려 하지
가슴에 새긴 풀꽃과 나비 문양을 지우고
제 안에 담긴 것들을 쏟아버리려 하지
꿈을 깨듯 자신을 깨뜨리고 싶어 하지
쨍그랑
파란 모서리들이 쓸어 담는 손끝을 찌르기도 하면서
<작품론>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구석본 (시인 · 본지 고문)
윤송정 시인의 시, 「컵의 이해」의 중심은 ‘자아自我’에 대한 탐구다. 시적 주체인 ‘컵’은 ‘자아自我’의 대유代喩인 것이다. 그래서 제목 ‘컵의 이해’는 달리 말한다면 ‘자아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컵은 컵이기 위해 컵을 견디지
둘레가 얇아지는 것은 네 입술 자국 때문이지
인용한 부분은 시의 첫째 연이다. ‘컵’의 존재 이유는 “컵은 컵이기 위해 컵을 견디”는 것이다. 여기서 ‘컵’은 각각 다르게 이해된다. 다시 말하면 ‘컵은’의 ‘컵’과 ‘컵을 견디지’의 ‘컵’은 같은 상징적 의미, 즉 현재의 실상인 ‘컵’이라면, ‘컵이기 위해’의 ‘컵’은 본래 존재인 혹은 본래 존재를 추구하는 ‘컵’이다.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①컵은 ②컵이기 위해 ③컵을 견디지
①과 ③은 같은 상징적 의미의 ‘컵’이라면 ②의 ‘컵’은 ①, ③과는 다른 본래의 존재를 상징하거나 현실의 ‘컵’을 극복하려는 존재다. 즉 ①,③의 ‘컵’은 변형되고 훼손된 존재인 반면 ②의 ‘컵’은 본래의 존재이거나 고유의 존재 가치를 추구하는 ‘자아’다. ‘컵’은 그 자체로서 존재의 의미가 있다. 즉 인간의 도구 이전의 ‘컵’으로서의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컵’은 인간과 만나는 순간부터 고유의 존재 가치는 상실되고 인간의 도구가 된다. 인간은 ‘컵’ 고유의 존재에 대한 관심은 없고 각종 음료와 음식을 담는 도구로 사용한다. 인간에 의해 본래 존재자로서의 ‘컵’은 사라진다. 그러나 “컵의 수면에 동그라미를 그리면” ‘컵’의 안이 보이는 것이다. ‘동그라미를 그린’다는 것은 ‘컵’의 본래 존재자로서의 회복을 암시한다. ‘컵은 이럴 때면 본래 자신의 안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그 안에 “담아 둔 풍경과 소리들을 꺼내 보여 주”는 것이다. 그 안에는 인간을 위한 각종 음료가 아닌 “눈 오는 밤 네 창문을 노크하던 소리”가 있고 “입술이 와 닿던 체취”가 있고 “길 잃은 사막에서 별자리를 찾으며 같이 부르던 노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컵’의 본래 존재 모습인 것이다. 즉 ‘컵’의 세계(네 창문을 노크하는 소리, 별자리 찾으며 부르던 노래)가 본연의 ‘자아’인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세계는 이미 잃어버렸다. 현실의 ‘컵(나)’은 넷째 연과 다섯째 연에 나타난다.
컵이 왜 섬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지 컵이
왜 모래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넌 알까
제 입술을 오염된 혓바닥이 핥고 있다고 느낄 때
제 손잡이에 체온이 닿지 않아
밤의 숲에 홀로 던져졌다고 느낄 때
“제 입술을 오염된 혓바닥이 핥고 있”고 “밤의 숲에 홀로 던져졌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럴 때 ‘컵’은 “섬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고 “모래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여기서 ‘컵’이 가고 싶어하는 ‘섬’은 인간 사회와 격리되어 있다. 그래서 모든 존재가 고유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이다. 되돌아가고 싶은 ‘모래’는 ‘컵’으로 탄생하기 전의 세계, 모태母胎의 세계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현실의 ‘컵’은 “컵이 왜 섬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지 컵이/왜 모래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넌 알까”에서 나타나듯이 ‘너’에게 묻는다. 이 물음은 하소연으로 들려온다. 컵이 이런 고백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너’는 ‘컵’과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다. ‘컵’의 현재를 있게 하는, 즉 자아를 상실하게 하는 인간인 것이다. 호소를 담고 있는 추측의 의미의 어미 語尾 “∼ 지”로 끝맺는 여섯째 연에서 여덟째 연까지 하소연 대상이 바로 ‘너’이다. 물론 “눈 오는 밤 네 창문을 노크하던 소리”의 ‘너’와는 상대적인 ‘너’이다. “눈 오는 밤 네 창문”의 ‘너’는 순수의 세계, 즉 시인이 추구하는 세계이고 “왜 모래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넌 알까”의 ‘너’는 ‘컵’을 도구화하는 ‘너’인 것이다.
넷째 연,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과 “모래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에서 보여주는 현실 도피적인 모습은 여섯째 연부터 더 심화되어 나타난다. “지진에 흔들리듯 스스로를 무너뜨리려 하”고 “가슴에 새겨진 풀꽃과 나비 문양을 지우고/제 안에 담긴 것들을 쏟아버리려 하”고 “꿈을 깨듯 자신을 깨뜨리고 싶어 하”는데 이르러서는 자아 파괴의 모습까지 보여준다.
이런 현실 도피적이고 자아 파괴적 모습은 마지막 연에서 절정을 이룬다.
쨍그랑
파란 모서리들이 쓸어 담는 손끝을 찌르기도 하면서
“쨍그랑” 자아 파괴를 함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즉 “꿈을 깨듯 자신을 깨뜨리고 싶어 하”는 것을 구체적이고도 단호하게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나는 자기 파괴는 자포자기가 아니다. 오히려 “파란 모서리들이 쓸어 담는 손끝을 찌르기도 하”는 것이다. ‘파란 모서리’는 본연의 ‘컵’, 다시 말해 본래의 자아를 회복하려는 존재의 상징이다. 이 ‘파란 모서리’가 자신을 쓸어 담으려는, 즉 ‘컵’을 도구화하는 ‘너’의 “손끝을 찌르는” 것으로 끝까지 저항하는 것이다. 자기 파괴로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기 파괴적 모습은 오히려 현실 극복 의지의 강렬함의 반어적 표현으로 들려온다. 윤송정의 시, 「컵의 이해」에 나타나는 ‘컵’은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현대인 혹은 순수의 세계를 지향하는 모든 이들이 겪는 현실과의 갈등을 노래한 시로 읽힌다.
시, 「컵의 이해」는 끊임없이 순수의 세계를 지향하기에 겪어야 하는 좌절과 받아야 하는 상처에 고통스러워하는 ‘자아에 대한 이해’를 ‘컵’으로 대유하여 시적 감동의 깊이를 더 해 주고 있다.
윤송정 시인은 이번의 수상이 계기가 되어 더 넓고 깊은 시의 지평을 열어갈 것이라 믿는다. 윤 시인의 시적 역량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상의 영광을 차지한 그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