入此門內莫存知解 (입차문내막존지해)
이 문 안에 들어서면 모든 알음알음을 던져버려라
無解空器大道成滿 (무해공기대도성만)
알음알음 없는 빈 그릇이 큰 도道를 채운다
범어사는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면서 사원의 규모를 넓혔으며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란 이름 아래 부산.경남의 3대사찰 중 하나이다.
이 사찰과 인연이 깊은 고승으로는 창건주인 의상義湘과
신라십성新羅十聖 중의 한 사람인 표훈表訓,
일생을 남에게 보시하는 것으로 일관한 낙안樂安,
구렁이가 된 스승을 제도한 영원靈源,
근대의 고승 경허鏡虛, 한용운韓龍雲, 동산東山 등이 있다.
특히 ‘선찰대본산범어사안내’에 의하면 1613년에 묘전妙全이 중건한 이후
역대 주지住持와 그 임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① 주지시대住持時代 132년간 87대, ② 승통시대僧統時代 166년간 177대,
③ 총섭시대摠攝時代 14년간 11대, ④ 섭리시대攝理時代 4년간 3대,
⑤ 주지시대 39년간 8대로 구분하여 1947년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주지住持라는 사찰의 책임자에 대한 호칭이 조선시대에 승통·총섭·섭리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것을 알게 하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범어사는 산지가람山地伽藍으로 특이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금정산 동쪽의 넓은 산지를 이용하여 그 아래에서부터
일주문一柱門-천왕문天王門-불이문不二門등을 차례로 배치하고
다시 7m 높이의 축대 위에 보제루普濟樓를 배치하였다.
보제루 좌우에는 심검당尋劍堂·비로전·미륵전이 나란히 놓여 있다.
보물 제 1461호인 조계문은 범어사의 일주문으로 삼해탈문三解脫門이라고도 한다.
광해군 6년(1614년) 묘전화상妙全和尙이 사찰 안에 여러 건물을
중수할 때 함께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숙종 44년(1718년)에 명흡대사明洽大師가 석주石柱로 바꾸고,
정조 5년(1781년) 백암선사白岩禪師가 지금의 건물로 중수했다고전해진다.
일주문一柱門으로 기둥이 한 줄로 나란히 늘어서 있다.
참조로, 사찰 중심 영역까지 들어가려면
보통 세 개의 문을 지나므로 삼문三門이라고 한다.
삼문을 어떻게 배열하는가는 사찰마다 다르다.
금산사, 법주사, 화엄사에서는 일주문-금강문-천왕문이 늘어선 경우이고,
해인사같이 일주문-봉황문-해탈문을 둔 경우도 있고,
범어사는 통도사처럼 일주문-천왕문-불이문(해탈문)순으로 배열돼 있다.
한편 부산 금정구金井區 청룡동靑龍洞 소재의
범어사梵魚寺에 얽힌 두 가지 설화說話가 있다.
‘금샘설화’는 부산의 진산 금정산이 예부터 신령스러운
영산임을 알려주는 것과 함께 ‘금정산金井山’이란 산 이름과
"범어사"의 절 이름, 그리고 이 사찰의 창건 내력을
알려주는 것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설화는 "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있다.
"금정산 산정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여척이며 깊이가 7촌쯤 된다.
황금색 물이 항상 가득 차 있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범천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빛나는 우물 곧 ‘금정金井’이란 산 이름과 범천의 고기
곧 ‘범어梵魚’라는 절 이름을 지었다.
이와 같은 내용이 "범어사 창건 자적"과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는데,
신라 의상대사義湘大師와 관련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범어사 연기설화緣起說話’에 의하면,
"신라시대 때 왜인矮人들이 10만의 병선兵船을 거느리고 와서
부산의 바다 동쪽을 침략하고자 했다.
문무왕이 이를 근심하고 있었는데 꿈속에 신인神人이 말하기를,
태백산 산중에 의상이라고 하는 큰스님이 계시는데
그를 맞이하여 함께 금정산의 금정암 아래로 가서
칠일 칠야 동안 화엄 신중을 독송하면
미륵여래가 동해에 가서 왜병들을 제압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후대에 계속해서 화엄 정진을 이어 간다면
전쟁이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왕은 사신을 보내어 의상 스님을 맞아 오게 하고,
그와 함께 친히 금정산으로 가서 칠일 칠야 동안 독경했다.
그러자 여러 부처님과 천왕과 신중, 문수 동자 등이
현신現身하여 병기를 가지고 동해에 가서 왜적들을 토벌하였다.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왕은 의상 스님을 예공 대사銳公大師로 봉하고
금정산 아래에 큰절을 세웠는데, 이것이 범어사이다.“
근대기에 범어사는 부산 근대정신과 교육 요람으로
명정학교明正學校와 지방학림을 설립했다.
여기서 배출된 인재들이 동래 3.1운동의 큰 축을 이뤘다.
이 바탕에는 1900년 전후 범어사에 머물며 결사를 주도한
경허선사鏡虛禪師의 높은 선풍禪風이 자리 잡고 있다.
해방 이후 범어사는 한국 현대 불교사의 대표적 선승인
동산東山스님읊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거짓불교’를 배척하는
불교정화운동에 앞장섰다.
동족상쟁의 6.25전쟁 때의 기록도 생생히 남아 있다.
“가노라 通度寺(통도사)야 잘 있거라 戰友(전우)들아,
情(정)든 通度(통도)를 두고 떠나려고 하려마는,
세상이 하도 수상하니 갈 수 밖에 더 있느냐.”
한국전쟁 당시 전투에 참여해 부상을 입은 병사가
통도사 대광명전에 남긴 낙서이다.
통도사에 설치된 31육군병원분원(정양원)에서
치료 받고 퇴원하는 시기에 쓴 것이다.
나라를 위해 총을 들었던 부상병들이
전각마다 ‘상이용사’로 머물었을 때
통도사 스님들이 이들의 병수발 뒷바라지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