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문화 기행 / 겨울 축제의 백미(百媚) 삿뽀로 유키마츠리
잠에서 깨어 창문 커튼을 여니 온통 눈 세상인 설국(雪國)이었습니다.
인천에서 오후 4시 20분 비행기를 타고 2시간 반 후 홋가이도(北海道)의 치도세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버스에 올라 가로등도 드문 어두운 길을 달려 해안 가까이 있는 노보리베츠(登別) 온천호텔에 여장을 풀고, 호텔 안에서 저녁 먹고 온천욕을 하고 난 뒤 참을 청하니 그야말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꿀맛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커튼을 여니 온통 천지가 내 키보다 높은 눈에 뒤덮인 설국이었던 것입니다.
호텔방 커튼을 열면서 맞이한 북해도의 첫 인상은 그렇게 희고 차고 조용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맑은 하늘에다 바람이 없으니 더욱 투명했습니다. 그러나 방에서 나와 호텔 주변을 산책하니 추위가 살을 에이는 듯 했습니다. 보기에 아름다웠던 보행 길도 온통 빙판이었습니다. 도로도 마찬가지였는데 빙판 길을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빙판에 적응하는 특수한 스노우타이어 덕분인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일본의 또 하나 설국인 니가타에 갔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雪國》의 무대로 정말 겨울이면 눈이 엄청나게 와서 쌓이는 곳이었습니다. 야스나리 소설의 첫 구절도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니가타는 ‘일본의 부르고뉴(포도주로 유명한 프랑스 동부 지방)’로 불릴 만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양조장이 많은 곳입니다. 그들은 전통 맛의 비결이 눈 녹은 물에서 시작한다며 눈을 고마워했습니다. 눈에 포옥 덮였다가 녹으면서 젖은 대지에서 일본 제일의 쌀이 생산된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쌀과 맑고 깨끗한 물은 명주(名酒)의 절대조건이며 여기에 긴 겨울과 풍부한 적설량이 습도와 기온 등 최적의 양조환경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니가타의 눈은 축복이지 결코 재앙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곳 니가타의 특이한 점은 눈이 아무리 한길, 혹은 한갈 반이 쌓여도 자동차도로의 아스팔트는 멀쩡한 것이었습니다. 온천수를 이용한 분수가 자동차 전용도로 전 구간에 24시간 뿌려지고 있으니 적설량이 아무리 많아도 자동차 도로에는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홋가이도의 눈은 니가타의 눈보다 더 많고 심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눈길에 더 익숙해서인지 삿뽀로 자동차도로는 그냥 빙판인 곳이 많았습니다. 홋가이도 역시 천지에 온천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말입니다.
온천호텔 주변에 있는 것은 온통 병(의)원이었습니다. 온천 주변에 무슨 병원이 이렇게 많은가 하여 알아보니 바로 온천 때문이었습니다. 아타미(熱海), 벳부(別府)와 더불어 일본 3대 온천의 하나인 노보리베츠(登別) 온천의 수질이 각종 질병은 물론 난치병 치료에 유효하게 작용함으로 이를 연구하는 의사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차를 타고 5분쯤 산을 올라가니 유황냄새 가득한 폭발화구들이 있어 쉴 새 없이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지옥의 골짜기(地獄谷)라 이름 붙여진 일대를 산책하는 중에 천연 그대로의 온천수를 맛볼 수 있는 곳이 있어 대나무 컵에 담아 마시니 그 맛이 뜨거운 물에 사카린을 듬뿍 탄 것 같았습니다. 온통 눈에 뒤덮인 땅에서 솟아나는 뜨거운 온천과 하얀 김은, 처음에는 아름다웠지만 점차 기괴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홋가이도는 아이누족의 땅
반취는 일본을 참 많이 갔습니다. 일본은 현(縣) 단위로 지방자치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지역 문화나 축제 따위도 지역의 특색을 살려 잘 보존하고 있어, 기행문 뿐 아니라 이를 취재 소개하는 일도 많이 했습니다. 도쿄 오사카 교토 그리고 큐슈 등은 대여섯 번 이상, 전체적으로는 50차례 이상 다녀온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홋가이도는 처음이었습니다.
기회를 엿보던 중 2월 유끼마츠리(눈 축제)에 맞추어 다녀왔습니다. 뮨헨의 옥토버페스티발, 브라질의 리어카니발과 더불어 세계 3대 축제의 하나라고 자랑하는 (일본 사람들은 그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 둘에 자기네 것 하나를 붙여 3대 어쩌구 하는 소리를 참 잘합니다. 가끔은 어처구니가 없어 보일 때도 있습니다.) 삿보로 눈 축제를 다녀온 것입니다.
홋가이도는 아이누족이 살던 땅으로 에조(蝦夷地)라 부르던 독립된 나라였습니다. 일본은 이 에조를 오랑캐로 여겼습니다. 나라나 헤이안 시대에 이 에조 정벌대 대장을 쇼군(將軍)이라 불렀습니다. 정식 명칭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세이이타이 쇼군) 즉 오랑캐 나라 정벌대 대장이었던 것입니다. 막부는 최고의 장군을 정이대장군에 임명했고 이것이 소위 일본 쇼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언어나 에스키모 언어와 같은 류의 포합어(抱合語)를 사용하는 아이누 족은 에스키모 계열인데 몽골로이드의 피가 섞였다고 전합니다. 피부는 암갈색이 많으며 눈은 쌍꺼풀에 우묵하고 광대뼈가 나왔으며 귀는 비교적 큰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남녀 공히 귀고리를 다는 풍습이 있으며 여자는 문신을 하고 의복은 난티나무 껍질에서 얻어지는 섬유로 옷감을 지어 입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설명이 되어버렸지요. 홋가이도는 메이지유신 이후 본격적으로 개발되었고 동시에 본토인들이 대거 이주해 살면서 혼혈 화되어 현재는 순종을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노보리베츠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2시간 쯤 달려가면 시라오이(白老)에 닿는데 여기 포로토코탄에 아이누민족박물관이 있었습니다. 1976년 재단법인 시라오이민족문화 전승보존재단이 설립되어 준비한 덕분에 1984년부터 아이누족의 유(무)형 문화를 전시하게 되면서 민족박물관을 병치 개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6년 후인 1990년 현재의 아이누민족박물관으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일본 안에서 아이누 족 역사는 5천여 점의 자료로써만 남아있을 뿐 말살되었습니다.
전승 보존 사업으로는 북해도를 상징해 온 곰 영혼전송의식인 이요만테와 이왁테 (사물 영혼 전송), 침산케(석박진수의례). 시누랍파(선조 공양) 등 몇 편의 아이누족 고유의 전통의례를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아이누 전통무용은 물론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전승 무용입니다.
아이누의 노래도 있죠. 한 곡 소개 할까요?
비리카 비리카 착한 비리카 / 오늘은 좋은 날 착한 비리카가 오는 날 / 그 아이는 누굴까, 그 아이는 누굴까.
비리카 비리카 착한 비리카 / 내일은 좋은 날 착한 비리카가 올 거야 / 그 아이는 누굴까, 그 아이는 누굴까.…
겨울 축제를 대표하는 삿뽀로 유끼마츠리
겨울 중 가장 추운 때인 2월 상순, 삿뽀로 중심지에서 벌어지는 유키마츠리(눈 축제)는 홋가이도의 자랑입니다. 어느 민족이나 축제라는 이름의 행사가 있게 마련인데 일본의 축제가 차별화되는 것은 생활 깊숙이 뿌리를 내려 내 고장에 대한 긍지를 갖게 하고, 나아가 전통과 형식을 존중하는 품성을 길러주는 교육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축제는 대개 신사(神社) 중심의 종교행사에서 마을 축제로 번진 것이어서 종교와 깊은 관계가 있는데, 여기에 관광객을 의식한 이벤트를 가미해 일거양득의 기회로 발전시켰습니다. 70회를 넘긴 삿뽀로 유키마츠리는 후지산과 모양이 같아 작은 후지산으로 불리는 에조산을 배경으로 드넓게 펼쳐진 도야꼬(洞爺湖)에서 밤 불꽃놀이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호수 한 가운데서 15분간 계속되는 불꽃놀이는 드문 장관이었습니다. 배에서 쏘아 올려 하늘에서 연달아 터지는 것 중 줄줄이 활짝 핀 서양란 같은 것도 일품이었지만, 춘란(春蘭)처럼 물 위에서 사면팔방으로 벋어나가는 불꽃은 환상이었습니다.
10월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 이듬해 5월까지 계속되는 삿뽀로에서, 유키마츠리를 준비하는 기간은 약 한 달 정도. 남산타워처럼 전망대를 겸하고 있는 삿뽀로 중심가 텔레비전탑에서 서쪽으로 약 1.2km(폭은 100미터)에 달하는 도오리(大通) 공원이 여름이면 꽃과 분수로 아름다운 공원이 겨울이면 눈 축제장으로 변합니다.
긴 공원이 바둑판 같은 도로를 경계로 10여 구역으로 나누어지면 북해도에 진출해있는 기업이나 자치단체들이 한 구역씩 맡아 저나름의 특색 있는 대형 눈 조각품을 만들어 전시 운영하고, 한편에 무대를 만들어 각종 공연과 놀이, 게임을 진행하는 방식입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빙판 위에서의 집단 줄다리기 경연도 벌어집니다.
축제장을 메운 구경꾼은 대개 관광객입니다. 축제 기간이 되면 삿뽀로 시민들은 거리를 아예 관광객에게 비워줍니다. 개미굴 같은 지하도가 거미줄처럼 잘 만들어져 있어 그들은 지상을 어른거리지 않아도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하철 역시 훌륭하고 편리하게 운행되고 있습니다.
눈 조각품을 하나 만드는데 소요되는 눈은 8통 트럭으로 약 500대 분량이나 된다는데, 전시되는 작품이 200개가 넘습니다. 높이가 10m 이상 되는 대형작품도 많습니다. 이런 작품을 하나 만드는 데는 100여명의 인력이 동원되어 2~3주 가량 작업하기도 합니다.
제작 방법은 먼저 나무로 구조물을 세운 뒤 운반해 온 눈을 차곡차곡 채워 넣습니다. 24시간 정도 지나 눈이 단단하게 굳으면 겉의 구조물을 제거하고 삽, 톱, 망치 등의 연장으로 작품을 만들어 갑니다.
대형 눈조각의 테마는 시민에게 공모해서 채택하는 것이 관례인데, 보통 동화나 만화의 주인공.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 혹은 그 해에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나 사건 등이 재현됩니다.
삿뽀로 눈 축제에는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들어 눈 조각이 연출하는 장관을 만끽합니다. 겨울이면 예외 없는 대설(大雪)로 삶에 불편은 말할 것도 없고 큰 피해를 입던 것을 관광자원화 함으로서 이제는 거꾸로 막대한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기간 중 기발한 이벤트도 많습니다. 축제장 곳곳에서 스키쇼, 패션쇼, 레이저광선쇼, 외국인가라오케 콘테스트 등이 다채롭게 벌어집니다.
축제는 일주일간 열립니다. 일주일간의 축제가 끝나면 포크레인 수십 대가 동원되어 그렇게 공들여 만든 작품들을 무자비하게 쿡쿡 찍어 해체해 얼른 내다 버립니다. 삿뽀로 시민들이 다시 도시를 찾이해서 봄을 기다리는 노래를 부릅니다.
사랑합니다 삿뽀로, 사랑합니다. 당신을 / 사랑합니다 삿뽀로. 사랑합니다 모두를. / 겨울 눈의 무게를 견디어 낸 / 라일락 작은 가지에 꽃이 필 무렵이면 / 부드러운 바람 타고 찾아오는 사랑의 기운 / 돌아보면 녹색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빨간 지붕 / 나비는 태어나기 전부터 스즈란(은방울꽃/鈴蘭)과의 만남이 정해져 있었네요 / 당신과의 만남이 시작된 그 나무 그늘에 앉아 / 살며시 다가오는 구두발자국 소리 기다리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