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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고려 태조 왕건상(일부). 왕건은 글씨에 일가견이 있었다. 북한 소재.
고려 태조 왕건(877~943·재위 918~943)은 글씨에 일가견이 있었다. 고려후기 문신 이규보(1168~1241)의 시문집 <동국이상국집>은 "(고려) 임금으로서는 태조, 인종, 명종이 모두 글씨를 잘 썼다. 왕을 품평할 바는 아니기에 자세한 것은 언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고려 후기에 최자(1188~1260)가 엮은 <보한집>도 "태조는 문장과 필법을 타고나서 능한 일이 많았다"고 적었다.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외손이자 최초의 혼혈왕인 고려 제26대 충선왕(1275~1325·재위 1308~1313)은 학자의 삶을 살았다. 오세창(1864~1953)이 편찬한 <근역서화징>에 따르면, 원나라 베이징에 독서당 '만권당'을 지어 머물면서 글과 글씨로 일생을 보냈다.
우리나라 학자로 이제현(1287~1367)을 비롯해 원나라 학사인 요수, 염복, 원명선, 조맹부 등이 충선왕의 문하에 머물렀다. 조맹부는 고려 말·조선 초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서체인 송설체를 만든 주인공이다.
원의 간섭을 뿌리치고 자주국 고려의 위상을 회복한 개혁군주 공민왕(1330~1374·재위 1351~1374)은 우리 임금 중 가장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는 글씨와 그림 모두에서 천재적 소질을 지녔다.
이제현은 <익재집>에서 "상감이 회암 삼선사에 다섯 글자를 내렸다. 하늘이 내린 솜씨"라고 평했다. 김종직(1431~1492)은 <점필재집>에서 "안동의 유명한 누각 영호루는 공민왕이 손수 누각 액자의 영, 호, 루 석자를 큰 글씨로 써서 걸게 하여 지금까지도 기와와 대들보 사이에서 광채가 환히 비치고 있다"고 썼다.
공민왕은 수많은 그림을 남겼는데 그 중 초상화가 으뜸이다. 그는 윤해, 염제신 등 신하들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 선물했다. 조선 성종 때 발간된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은 "공민왕이 염제신의 얼굴을 친히 그려주면서 '중국에서 공부했고 성품 또한 고결하니 다른 신하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공민왕은 자신과 부인 노국대장공주의 얼굴도 자주 화폭에 담았다. 허목(1595~1682)은 <미수기언>에서 "황해도에 있었던 화장사에 공민왕이 거울을 보며 그린 자화상이 있다"고 말한다.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우리나라에는 명화가 별로 없다. 근래로부터 본다면 공민왕의 화격이 대단히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면서"지금 도화서에 소장되어 있는 '노국대장공주진'과 흥덕사에 있던 '석가출산상'은 모두 공민왕이 손수 그린 그림이며 간혹 큰 부잣집에 산수를 그린 것이 있는데 비할 데 없이 뛰어나다"고 논평한다.
<용재총화>가 집필될 당시는 공민왕이 죽은 지 100년이 경과한 시점이어서 여전히 그의 작품이 상당수 남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으로 넘어와서는 제5대 문종(1414~1452·재위 1450∼1452)이 묘호에 걸맞게 문장과 글씨 솜씨가 걸출했다. 중종 때 권신 김안로(1481~1537)의 설화집 <용천담적기>에는 "상감(문종)이 해서법에 정통하여 굳세고 힘차고 생동하는 기운이 진인(왕희지)의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나 다만 석각 몇 본만이 세상에 전할 뿐"이라고 했다.
문종은 시에도 조예가 깊었다.
"상감이 동궁으로 있을 때, 희우정(마포구 합정동에 있던 정자)에 거둥하여 금귤을 한 쟁반 내왔다. 그 귤이 다 하자 쟁반 가운데 시가 있었으니 곧 상감이 친히 쓰신 것이었다.
'물씬 물씬 향내는 코가 싱그럽고, 살살 녹는 단맛은 입에 착착 붙는다'는 시와 글씨가 모두 세상에 뛰어난 기이한 보배인 지라 여러 학사들이 그대로 모사하려 하는데 대궐에서 빨리 들여오라고 재촉하므로 다투어 쟁반을 붙잡고는 차마 놓지 못하였다." <용천담적기>
9대 성종(1457~1494·재위 1469∼1494)도 다재다능했다. <용천담적기>는 "성종의 글씨는 아름답고 고우면서도 단정하고 정중하여 조용히 조송설(원의 서화가 조맹부)의 정신을 그대로 옮겨왔다.
또 가끔 붓장난으로 소품을 그리기도 했다. 이는 모두 하늘이 내린 재능이요, 번거롭게 배우고 익혀서 그 묘한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니었다. (중략) 그것을 얻는 자는 비단으로 꼭꼭 싸서는 좋은 보배보다 더 귀중히 여겼다"고 적었다.
이긍익(1736~1806)도 <연려실기술>에서 "상감(성종)이 경사에 능통하고 특히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천문과 역법, 음률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활쏘기와 글씨, 그림도 모두 대단히 뛰어났다"고 했다.
성종의 글씨는 최고의 명필이었던 안평대군과 비슷해 사람들이 헷갈릴 정도였다.
"중종께서 일찍이 성세창이 글씨에 능하고 서법을 잘 알고 있으니 대궐에 보관하던 글씨 몇 장을 보내면서 이르기를 '대궐 안에서 성종과 이용(안평대군)의 글씨를 분별하지 못하니 자세히 분별하여 올리라'고 명했다. 이에 성세창이 깨끗이 분별해 올렸다."<연려실기술>
14대 선조(1552~1608·재위 1567∼1608)도 글씨를 잘 써 명필로 이름을 떨쳤다. 병자호란 때 국가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주화론을 폈던 최명길(1586~1647)은 문장에는 뛰어난 반면 글씨가 악필이었다. 선조는 그런 최명길을 형편 없다고 낮춰봤다.
심노숭(1762~1837)의 <자저실기>에 따르면 최명길은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주서(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담당하던 정7품 관직)를 맡았다. 그의 글씨를 본 선조는 불같이 화를 내며 "글은 꼭 쥐똥 같고 글씨는 꼭 새 발자국 같구나. 어디에서 이 따위 주서를 데려왔느냐" 하고 는 내쫓아버렸다.
최명길은 이후 글씨 연습에 매진했지만 글씨는 나아지지 않았다. 노년에 접어들어 "글씨 잘 쓰는 일이 문장을 잘 짓는 일보다 어렵다"고 한탄했다.
선조는 난초와 대나무 그림도 탁월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완당집>에서
"우리나라에는 난초를 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엎드려 살펴보니 선조의 어화는 하늘이 내린 솜씨로서 잎사귀 그리는 법과 꽃을 그리는 격조가 정소남(중국 송나라 화가)과 꼭 같다"고 했다.
16대 인조(1595~1649·재위 1623~1649) 역시 그림에 능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정원군의 장자(인조)가 상감(선조) 앞에서 그림을 그리니 상감이 그 그림을 (신하들에게) 내려주고 이어 품계를 더해 주었다"고 했다.
21대 영조(1694~1776·재위 1724~1776)는 긴 통치 기간 만큼이나 숱한 글씨를 남겼지만 솜씨는 빼어나다고 할 수 없다. 영조는 글씨보다는 그림을 잘 그렸다.
<근역서화징>에 의하면 숙종은 연잉군(영조의 왕자 시절) 그린 '선인도(仙人圖)'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미목(눈썹과 눈) 어찌 그리도 명랑한가, 칼 빛이 칼집 밖에까지 환히 보이는구나. 처음 그린 것이 이렇게도 잘 되었지만, 평소에 한 번도 가르친 적은 없었거늘…"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6.글씨, 그림에 뛰어났던 다재다재능한 왕들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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