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습-제37차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 그러므로 수행자가 본래 자리 돌아갈 때
화엄경과 법성게의 본제 개념은 다르다.
시고행자환본제 “그러므로 수행자가 본래 자리 돌아갈 때” 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말하는 본래 자리는 본제(本際)의 번역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여래장, 불성, 참나, 주인공 등으로 표현하는 우리마음의 근본 자리를 의미한다.
법기에서는 내적으로 '증득한 해인(海印)'이라 주석한다.
조선시대의 유문은 '불과의 증득'이라고 주석하기도 하였다.
화엄경에서 본제(本際)의 출현회수도 적지만 의미 또한 전혀 다르다.
본제도 없다고 하면서 불교 수행자의 귀향처나 지향점이 아니라, 버려야 할
망상이다고 했다.
<여래광명각품> 에 실린 문수보살의 게송에서도 “지혜로운이는 본제를 멸한다”라고 노래한다.
용수의 중론에서의 본제는 산스끄리뜨어 ‘purva koti’의 한역으로
purva 는 ‘이전의, 앞선, 이른 ’ 등을 의미하고,
koti 는 ‘끝, 궁극, 첨단’ 등을 의미한다.
중론의 관본제품의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우리말로 풀면 ‘이전의 한계’ 또는 ‘ 행하는 궁극‘이라는 뜻이다.
<화엄경>에서도 본제에 대한 관점이 <중론>과 다르지 않다.
즉,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개념이었다.
- 법성게 본제 개념의 전거
법성게의 '시고행자환본제'에서 말하는 '수행자자 돌아가는 본래자리' 인 본제는 그 의미 전혀 다르다.
화엄수행자가 종국에 귀환하게 되는 지향점이고 목표점이다.
자성(自性, svabhava) 이라는 개념이 원래 '사물의 실체'를 의미하였기에 용수의 <중론>에서 그
실재성이 비판되었지만, 후대의 동아시아불교에서는 '불성'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듯이 <화엄경>이나
<중론>에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본제'라는 개념이 의상이 법성게에서는 수행의 지향점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귀환처나 지향점으로서의 본제 개념은 어떤 불전에 근거한 것일까?
의상이나 후대의 주석에서는 전혀 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구경일승보성론>이나 <보살영락경> 또는
<불설여래홍현경>등의 본제 개념의 법성게의 그것과 같다.
여기서,
본제는 중생들이 갖추고 있는 법신이며, 본성이 원래 맑고 번뇌도 없으며, 고요한 참된 실제다.'
<보성론>이 여래장 사상을 가르치는 대표적인 논서이기에 '본제'는 여래장이나 불성,
자성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의상이 노래하듯이 수행의 궁극에서 돌아갈 '본래자리'다.
이 외에도 본제를 '깨달음의 근본자리'로 이해하는불전이 여럿 있다.
법성게의 본제 개념은 <화엄경>이 아니라 이런 불전들에서 유래한 듯 하다.
- 불교는 해체법이다.
불교의 깨달음을, 높은 산의 정상에 비유하여, 길을 걷고 비탈을 딛고 힘들게 올라야 할 지점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깨달음은 앞으로 나아가고 높이 쌓아서 이룩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지우고, 또 지워서 체득되는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하나하나 해체하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내 안에 가득 들어 있는 탐욕, 분노, 교만과 같은 번뇌를 하나하나 제거ㅏ면서 얻게 된다.
불교는 해체법이기 때문이다.
일찌기 노자가 말했다.
" 학문을 함에 나날이 늘어나고, 도를 닦음에 나날이 덜어낸다.
덜너내고 또 덜어내어서 무위에 이르면 함이 없지만 하지 못할 것이 없다."
그러게 도인(道人)이 되려면 많이 버려야 한다 . 고정관념을 버릴 때 사물과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가 생긴다. 이것이 불교 수행의 길이다.
모든 번뇌를 제거한 아라한이 되려면 버려야 한다. 탐욕을 버리고, 분노를 버리고, 교만을 버리고,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
여기서 16나한 가운데 한 분인 '주리반특가'의 깨달음과 관련한 일화를 소개한다
(이미 스님으로부터 몇번에 걸쳐 소개받은 일화로 카페에 올려져 있긴 하다. 하여 요점만 언급한다.)
" 주리반특가는 너무나 우둔하여 산스끄리뜨어의 실담(悉曇)문자를 가르쳤는데, '담'자를 말하면 '실'자를
잊어버리고, '실'자를 말하면 '담'자를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의 형은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고 머지않아 아라한과에 올랐다. 주리반특가는 자신이 너무나 우둔한 것을
알기에 출다할 엄두를 내지 못해는데, 형의 격려를 받아 출가하였다.
형은 아우에게 구족계를 준 후 하나의 게송을 외게 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도 이 게송을 욀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자신의 우둔함에 낙담하여 슬피 울고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이를 보시고 주리반특가에서 "나는 먼지를 텁니다. 나는 때를 닦습니다" 라는 두 구절의
가르침을 주셨다. 그러나 이조차 외지 못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업자이 무거움을 보시고 "그대는 다른
스님들을 위해서 신발을 털고 닦아드려라"라고 분부하셨다.
부처님의 분부대로 열심히 신발을 털고 닦아드리다가 드디어 '나는 먼지를 텁니다. 나는 때를 닦습니다' 라는
가르침의 뜻을 알게 되어 우치의 삼독(탐진치)을 제거하여 모든 번뇌를 끊고 드디어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신발을 털고 닦는 일만 하던 주리반특가는 부처님께서 자신에게 그 일을 시키신 취지를 자각하고 삼독심을
제거하여 깨달음을 얻는다.
즉, 탐욕을 제거하고, 분노를 제거하고 우치를 제거하면 아라한다. 즉, 번뇌를 해체하면 아라한다.
다
요컨에 불교의 깨달음은 쌓고 더하여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버리고 몰라서 체득하는 것이다.
고정관념의 인지를 폐기할 때 깨달음을 얻는다.
깨달음이란 '시고행자환본제'에서 수행자가 돌아갈 '본래 자리'다.
본래자리는 수행을 통해서 '도달하는 신세계'가 아니라 '돌아가는 고향마을'과 같은 귀환처(歸還處)다.
온갖 번뇌로 가득한 우리 마음에서 번뇌만 제거하면 만나게 되는 '근본자리'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