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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같은 충의지사는 고금에 드물거니, 살아서나 죽어서나 한결같은 정충보국(精忠報國)의 화신. 충장공 정운 제독(忠壯公 鄭運) (부산 사하구 다대포 몰운대)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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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가족
2024. 3. 14.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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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좌수사 이순신 제독은 녹도만호 정운과 본영군관 송희립 제독의 간언을 받아 들여 출전을 결심하고,
1592년 5월 4일, 판옥선 24척을 주력으로 함대를 편성하여 출항했습니다.
제1차 출정의 진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전라좌수영 본영의 방어와 출정군에 대한 지원을 담당하는 유진장(留陣將) 우후(虞侯) 이몽구(李夢龜)
중위장(中衛將) 방답첨사 무의공 이순신(武毅公 李純信)
좌부장(左部將) 낙안군수 무장공 신호(武壯公 申浩)
전부장(前部將) 흥양현감 효숙공 배흥립(孝肅公 裵興立)
유군장(遊軍將) 발포가장 나대용(羅大用)
우부장(右部將) 보성군수 김득광(金得光)
중부장(中部將)이자 향도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후부장(後部將) 녹도만호 충장공 정운(忠壯公 鄭運)
좌척후장(左斥候將) 여도권관 김인영(金仁英)
우척후장(右斥候將) 사도첨사 김완(金浣)
한후장(捍後將) 군관 최대성(崔大晟)
참퇴장(斬退將) 군관 배응록(裵應錄)
돌격장(突擊將) 군관 이언량(李彦良)
전라좌수사 충무공 이순신 제독을 옆에서 보좌하는 소임은 순천부사 권준(安昌君 權俊)과
본영의 군관 송희립(宋希立).
5월 6일, 통영의 당포에서 경상우수영 잔존 함대 판옥선 4척, 협선 2척과 합류하고, 거제 송미포에서
하룻밤 쉰 다음, 5월 7일 낙동강 하구방향으로 항진하다가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제독이 거제 동북방
옥포(玉浦)에서 일본 수군함대를 발견하여 전투에 돌입하였습니다.
이 해전에서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 연합함대는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가 이끄는 50척 중 23척을
격침시키고, 4천 여를 참하는 대승을 거두니..이 해전이 조선수군의 첫승리인 옥포해전입니다.
이후 합포(合浦, 창원 마산)와 고성 적진포(固城 赤珍浦)에서 일본 수군을 연파하였고..
조선 수군은 단 한척의 판옥선도 잃지 않고, 적선 최소 39척에 적군 7천 이상을 살상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지요.
이 출정에서 충장공 정운 제독은 후방의 후부장에 배치되었으나, 장병을 격려하여 앞으로 나아가 적선 2척을
깨뜨리는 군공을 세웠습니다.
경상우수영의 구원요청을 받아 2차 출정한 전라좌수영은 경상우수영과 다시 연합함대를 편성하여
사천과 당포에서 적 함대를 깨뜨리고, 전라우수영 함대까지 가세하여 당항포와 율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3차 출정은 전라좌,우수영과 경상우수영 함대가 모두 참여한 조선수군함대가 편성되어 한산도와 안골포에서
적의 주력함대를 깨뜨리며 조선 수군이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였습니다.
녹도만호 정운 제독이 이 모든 해전에 참전하며 조선 수군의 승리에 일익을 담당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죠.
일본은 한산도와 안골포에서의 대패 이후 본거지인 부산을 중심으로 조선 수군에 대한 무모한 도전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부산을 중심으로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거제에서 부산에 이르는 뱃길의 주요 거점에 왜성을 축조하여
방어망과 조선 수군에 대한 감시망을 굳혀 나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수군은 또한번 일본 수군에 큰 타격을 가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조선 연합 수군함대의 이번 목표는 바로 부산(釜山)이었습니다.
사실..부산을 목표로 삼은 제4차 출정은 이전의 출정과는 비교도 안되게 위험한 결정이었습니다.
적의 최후방 기지를 타격하고, 조선과 일본 본토의 연결고리를 위협하여 그들의 전쟁의지와 전쟁 수행능력에
큰 타격을 가하는 목표와 목적은 좋지만, 문제는 사실상 적의 본진이 된 부산을 직접 공략한다는 계획 자체가
상당히 무모하다는 거죠.
견내량을 넘어 거제에서 부산에 이르는 우리 수군의 활동과 이동 경로가 적에게 노출될 위험이 크고,
그 구간의 항로도 험난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적의 본진을 직공한다는 것은 최악의 위험 그 자체죠.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성향으로 봤을 때, 이런 작전은 하지 않으려 들 것을 감행한 것은..
역시 조정의 압박이 그만큼 거세었기 때문이고, 부산을 거점으로 한 일본 수군의 방어망이 완전히 굳어지기 전
부산을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드디어 1592년 8월 24일, 조선수군 연합함대의 제4차 출정이 개시되었습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 휘하 연합함대는 판옥선 74척, 협선92척으로
편성되어 부산포(釜山浦)로 출정했습니다.
견내량(見乃梁)을 넘은 조선수군 함대는 부산포로 가는 길목에서 여러 차례 소규모 해전을 치르게 됩니다.
8월 29일, 장림포(부산 사하구 장림동)에서 부산포 해전의 당일인 9월 1일에는 화준구미(부산 사하구
몰운대 인근), 다대포와 서평포(부산 사하구 다대동, 구평동), 절영도(부산 영도구), 초량목(부산 동구)에서
일본 수군 함대를 연파하고, 부산진 앞바다로 돌입하여 부산포 해전이 개시되었습니다.
순조로웠던 전초전들과는 달리 부산포에서의 전투는 악전고투였습니다.
부산포에 정박한 일본 수군 함대는 거의 5백척...조선 수군 함대의 몇 배에 달하는 전력이었습니다.
이들 일본군 함대는 그간의 연패에 전의를 잃어서인지..예상외로 함대를 몰고 나와 결전에 응하지 않았지요.
일본군은 그저 포구 뒤편 고지 위에 올라 조선 수군 함대를 향해 조총 등을 요란하게 쏘아댈 뿐이었답니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일본 수군의 전함이 비었으니 그것만 깨뜨리면 될 것 아닌가 싶죠.
그건 맞는데, 그렇게 전함을 깨뜨리려면 우리 수군 함대가 탑재한 총통의 사정거리까지 접근해야 되잖아요.
가뜩이나 좁은 물길과 해역이라 함대의 운신이 자유롭지도 않은데.
부산포 해전지 (부산항 일대, 부산 동구 초량동)
그러다 보니 포구 뒤편 고지에서 3면에 진을 치고, 일본군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내려보고 조총을 쏘아대니..
그 정확도와 사거리가 상당히 늘게 되고, 조선 수군은 바다 위 엄폐물 없이 노출된 상황에서 일본군의 사격을
받아 내며 싸워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거죠.
아무리 뛰쳐 나오지 않고, 틀어 박힌 적을 상대한다지만, 앞서 일본 수군을 연파했던 다른 전투들보다
더 어려운 전투를 수행하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단병접전에 능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일본군을 상대로 조선 수군이 상륙해서 싸우는 것은
더더욱 안될 말이었습니다. 조선 수군 3개 함대가 연합했었어도, 기본적으로 병력과 전력에서는 열세거든요.
그래서 조선 수군은 장사진(長蛇陣)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포구에 정박한 적의 전함에 함포사격을 하여
적함을 파괴하고, 순차적으로 나아가고 빠지며 전투를 수행했답니다.
조선 수군은 이 모든 악조건을 뚫고 용맹하게 싸워 1백척이 넘는 적함을 깨뜨리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조선은 판옥선 1척도 잃지 않았으나, 6명 전사, 25명 부상의 피해를 봤지요.
이전 전투에서도 이정도 피해를 본 일은 거의 없었거든요. 이례적인 큰 피해였던 겁니다.
그 피해 중에서도 가장 아픈 것은..선봉으로 전투 내내 분전했던 녹도만호, 충장공 정운 제독의 전사였습니다.
선조실록에서는 정운 제독의 전사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순신(李舜臣) 진중의 정운(鄭雲)이라는 사람이 그 대포를 맞고 죽었는데
참나무 방패 3개를 관통하고도 쌀 2석을 또 뚫고 지나
정운의 몸을 관통한 다음 선장(船藏)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27년 4월 17일 을축-
사인은 총탄 관통에 의한 즉사, 일반 조총으로는 이 기록상의 위력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만..
이정도의 위력과 사거리를 가진 일본측의 무기라면 딱 하나가 떠오르네요.
일반 조총보다 구경도 크고 많은 화약이 들어가기에 더 강력한 위력과 사거리를 가진 대조총(大鳥銃)입니다.
녹도만호 정운 제독의 전사는..그의 성정 그대로, 누구보다 앞서 나아가 맹렬히 싸우고, 물러날 때는 최후의 순간,
마지막을 지키는 그의 전투 지휘 때문이었고, 불운이 겹친 것이라 봅니다.
사실, 전투에 앞서..예감이 안좋긴 했답니다.
부산포 전투에 앞서 다대포의 몰운대(沒雲臺)를 지나며..몰운대를 보고 저기가 어딘가 묻고는 지명을 듣게 되자,
자신의 이름인 운(運)과 뜻은 다르나 같은 음을 가진 저곳을 보니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인가하고 예감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고 지난 부산 다대포와 몰운대를 갔을 때, 들었습니다.
게다가 싸움에 앞서 한창일 때, 자꾸만 앞서 나아가는 녹도만호 정운 제독을 전라좌수군의 고문이자,
조방장인 송정 정걸 제독께서 장수로서 자신을 소중히 하라, 신중히 하라 말렸는데..
정운 제독께서 그 간언을 듣지 않고, 앞서 나아가 싸우시다 전투 막판에 그만 변을 당하셨다 하더군요.
충장공 정운 제독의 전사는 조선과, 상승무적 조선수군에 너무나도 큰 손실이었습니다.
조선 수군은 최고의 돌격장을 잃었으니까요.
팽팽한 전투에서 일순간에 분위기를 우리 쪽으로 돌리고, 흐름을 우리 쪽으로 돌릴 수 있는 사람.
그가 녹도만호, 충장공 정운 제독이었습니다.
아끼는 수하 장수, 그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든든하고 유능한 참모, 녹도만호 정운 제독을 잃은 전라좌수사
이순신 제독은 비통해 했습니다.
전쟁 개전 이래..전라좌수영 장수 중 처음으로 전사자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애통해 했던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그를 위하여 손수 제문을 짓고, 그를 위한 제단에 술잔을 들어 바쳤으며..
먼저 간 그를 위해 제단 앞에 향을 살랐습니다.
부산포 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정운 제독을 녹도진성에 충렬공 이대원 제독을 모신 사당에 함께 배향하여
모실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조정에 간청하였습니다.
그게 바로 지금의 고흥 녹도진성 내에 있는 쌍충사(雙忠祠)입니다.
如君忠義(여 군 충 의), 古今罕聞(고 금 한 문),
爲國忘身(위 국 망 신), 有死猶生(유 사 유 생)
그대 같은 충의지사는 고금에 드물거니,
나라 위해 던진 그 몸은 죽었어도 살아 있는 것과 같다.
人生必有死(인 생 필 유 사), 死生必有命(사 생 필 유 명),
爲人一死(위 인 일 사), 固不足惜(고 부 족 석),
君獨可傷者(군 독 가 상 자)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사람이 한번 죽는다고 아쉬워 할 것은 없으나,
오직 그대에 관련해서는 마음이 아프기 그지없다.
- 제증참판정운문(祭贈參判鄭運文) -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충장공 정운 제독을 위하여 지어 바친 제문에서 그의 마음 한자락을 읽어 보게 됩니다.
충장공 정운 제독은 그 혁혁한 전공과 국난극복의 공적에도 불구하고, 전후에 선무공신이 되지 못하였으나..
몇년 후, 추가로 동아시아 7년전쟁 때 전몰한 장졸들을 포상할 때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충장(忠壯)이란 시호와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습니다.
고흥 녹도진성 터의 쌍충사에서 시작한 충장공 정운 제독의 역사 인물 기행은..
그의 삶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부산 사하구 다대포의 몰운대에 서 있는 충장공 정운 제독의
'정운공 순의비(鄭運公 殉義碑)에서 마무리 합니다.
부산 다대포 몰운대의 끝자락, 깊은 숲 속에 세워진 이 순의비는, 1798년 정조22년에 다대진 첨사로 부임해온
충장공 정운 제독의 8대손 정혁(鄭爀)제독이 부산포 해전에서 순절한 선조 정운 제독을 기리고자 몰운대에
세웠다고 합니다.
沒雲臺下沒雲悲 (몰운대하몰운비)
몰운대 아래 구름에 묻히다니 슬픈지고
水底魚龍恨亦知 (수저어룡한역지)
물 밑의 어룡도 그 한을 알고 있으리라.
雲可沒兮名不沒 (운가몰혜명불몰)
구름이 (몸)을 묻을 수 있어도 이름은 묻을 수 없으니
沒雲臺上鄭公碑 (몰운대상정공비)
몰운대 위에 정공의 비석이 서 있구나.
- 조선 순조 때 몰운대를 찾은 선비 박재형의 시 -
오랫동안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공개되지 않던 정운공 순의비가 몇년 전에 개방되어 지금은 일몰 전 시간에는
찾아볼 수 있게 되었으니, 혹 부산 사하구 다대포를 찾으시거든 해수욕장과 해변만 걷지 마시고..
조금 더 숲길을 걸어서
정운공 순의비까지 보시기를 권합니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검명(劍銘)은 유명합니다.
충장공 정운 제독도 일찍이 보검을 얻어 검명을 새겨두고 일평생 놓지 않고 함께 했다고 합니다.
정운 제독의 검명은..'정충보국(精忠報國)'입니다.
송나라의 충신이자 명장, 악비(岳飛, 1103~1142) 장군에게서 유래된 이 검명은..
'올곧은 충심으로 나라에 보답한다'는 뜻이죠.
평소 충장공 정운 제독의 사람됨이 어떠하였나, 어떤 장수였나 이 검명만 봐도 알 수 있을듯 합니다.
몰운대에서 정운공 순의비를 보고 비탈길을 내려와 만난 다대포의 바다에서 보니 거제도 부터 괭이바다 부산의
해역과 낙동강 하구까지 충장공 정운 제독이 지키고자 했던 그 '우리의 바다'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맑은 날이면..저 해안선 끝으로 일본의 쓰시마까지 보인다 하더군요.
충장공 정운 제독은 죽어서도 우리의 바다를 지키고, 일본 땅을 노려보며 이 나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순천 충무사라는 사당에서도 그를 만났는데, 이곳 가까이 10리 도 안되는 거리에 있는 순천왜성에서 죽은
일본군의 망령들이 우리 백성을 해코지 하며 괴롭히자,
그 땅의 백성들이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충장공 정운 제독, 송희립 제독을 모셔 그 일본군 망령들을 제압하고자
세운 사당이랍니다.
이곳에서도..충장공 정운 제독은 일본의 망령들에게서 이 나라와 백성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충장공 정운 제독은 살아서나, 죽어서나..늘 변함없는, 말 그대로 '정충보국'의 화신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요즘도 끊이지 않고 준동하는 극우 친일 무리들의 망동을 보면서..충장공 정운 제독이 생각나더군요.
어쩌다 그분은 수백년 지난 지금도 편히 쉬시지 못하시게 된 사나운 팔자가 된 걸까요.
후손들이 모두 반성 좀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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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사람을 보고, 그 자연을 보고, 그 역사를 생각합니다. 여행은 가족간의 사랑을 다지고 사랑하는 아들을 위한 살아있는 교육입니다.
(퍼온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