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오백삼십리를 걷다. 네 번 째
4월 8일
새벽에 일어나서 서둘러 길을 나섰다. 남도대교의 광양 쪽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하동의 화개장터로 넘어가다. 엊그제 대지를 흡족하게 적셔주었던 비에 강물이 풍성하고, 초목이 왕연하다. 다리의 가운데 전망대에서 맞는 아침 강바람이 차갑고, 청량하다.
화계장터의 가게들은 이제 문을 열기 시작하였고 가게 주인들은 손님맞이 준비에 손길이 바쁘다. 쌍계사 가는 길에 올라서다.
지리산 골짜기의 아름다운 벚꽃 길, 꽃잎은 이미 떨어졌고, 가지에 잎이 돋아나고 있는데 마지막 한 그루가 이제 꽃잎을 떨구면서 늦은 상춘객을 맞이하고 있다. 길섶 차밭에 야생차를 따는 아낙의 손길에 정성이 가득 담겨있다.
버스로 오는 일행과 합류하여 국사암 오르는 다리에서 내려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복사꽃 강물에 떠내려가고 여울물 소리 정겹다.
가파른 산길을 이십여 분여 걸어올라 국사암에 도착했다. 우물물에 목을 축이고 숲길을 따라 쌍계사로 내려간다. 쌍계사에 가면 꼭 찾아보는 마애석불이 있다. 마애석불이라면 의례 거대한 벼랑에 억조창생을 구제하는 위엄이 넘치는 부처의 모습이 새겨지는데, 쌍계사의 마애석불은 법당의 후원에 넉넉한 밥집 아줌마 같은 푸근한 모습으로 중생을 맞는다.
쌍계사를 나와 섬진강변 길을 따라 내려간다. 전북 내륙산악지대인 진안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임실, 순창을 거쳐서 전남 곡성과 구례를 지나면서 지리산 권역의 경상남도 하동과 백운산권역의 전남광양을 가르면서 남해에 이른다. 지난번은 구례문척면의 강변길을 걸었고, 오늘은 경상도 하동의 강변길을 따라 내려간다. 하동을 배경으로 그려졌던 대하소설 ‘토지’와 그 지역의 전설과 역사문화의 자취를 따라 내려가는 테마길이 조성되어 있다. 늘 이 강변길을 내려갈 때는 광양쪽에서 하동을 강변의 대숲을 보며 내려갔는데 오늘은 하동에서 광양 쪽 강변길을 보며내려간다.
대나무 숲, 시누대 숲, 소나무 숲 강변 언덕엔 배꽃이 피어있고, 푹신한 모래길을 지나, 촉촉이 젖은 흙을 밟으며 시원한 강바람 맞으며 가는 길 ‘가도 가도 눈 멀미가 나지 않는 길’ 하동 섬진강 길을 걷고 있다. 하동에 이르면서 강역이 많이 넓어졌다. 넓은 모래사장과 깊어진 강심에 낚시질하는 조사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두꺼비 바위 쉼터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찰밥에 생김치와 회무침에 막걸리 한잔씩을 걸치고 불콰한 기분으로 오후 길을 나섰다. 박경리의 ‘토지’길을 걸었다. 악양들과 최참판 댁과 조부자집을 둘러보고 오후 일정을 마쳤다.
4월9일
어제 이어서 하동 섬진강길을 따라 내려간다. 배과수원과 갯버들 숲을 지난다.
강물이 완만해졌고, 강폭이 아주 넓어졌다. 바닷물이 밀려와 강물과 만나는 지점이다. 하구에 가까워져 감을 느낀다. 맑게 흐르던 강물이 흐름을 멈추고 버캐가 띠를 이루어 떠다닌다. 소금기를 느낄 수 있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에 서식하는 재첩과 벚꿀이 이곳 섬진강의 특산물인데 재첩의 껍질이 수북이 깔려진 재첩 길을 지나간다. 점심때가 다 되어 하동송림에 도착했다. 300여년 전, 바람과 모래를 막기 위해 심은 소나무가 명소가 되었다. 힐링과 휴식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넓은 모래사장과 수심이 깊은 강물
하동 모래사장에서 간식과 음료를 취식하고 섬진교를 넘어 광양 강변길을 걸었다.
오후 두시반 섬진강 대장정의 마지막 종착지 망덕포구에 도착했다.
한달에 한번씩 2박3일의 일정으로 네 번에 걸쳐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에서 부터 이곳 망덕포구까지 걸어 내려왔다. 남도에 살아오면서 수시로 지나다녔고, 몇 곳은 일년에 몇 차례씩 기행도 했지만, 이렇게 섬진강의 속살을 느껴보기는 처음이다.
이번 기행으로 섬진강 가볼만한 곳이 두 군데 추가되었다. 순창 적성강 항가 유원지와 하동 강변길이다.
망덕포구에서 기행을 마치며 이곳에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윤동주 유고보존 가옥“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름하여 윤동주 유고보존 정병욱 가옥입니다.
정병욱은 나중에 서울대 국문과 교수를 지냈고, 우리나라 고전문학을 선양하는데 큰일을 해내셨던 분입니다.
정병욱 교수는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에 재학할 당시 아주 친 혈육처럼 지냈던 지기로서 학년은 2년 아래였고 나이는 다섯 살 차이가 나 형과 아우처럼 돈독하게 정리를 나누웠다 합니다.
시인이 3학년 때, 신입생 룸메이트로 들어와서 인연을 맺게된 정병욱과 2년동안을 같이 지냈는데 나중에 기숙사를 나와 하숙을 할 때에도 같이 다닐 정도로 서로의 믿음이 두터웠던 사이였습니다.
시인이 졸업을 하면서 만든 시집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였습니다. 시집을 꾸며서 당시의 스승이었던 이양하 교수께 보여주니 시집을 출판하는 것을 강력히 만류를 합니다. 창씨 개명을 하고 우리민족의 문화를 말살하였던 일제의 군국주의가 단말마적인 발악을 할 시점에 탄압을 받게 되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데 제자를 아끼는 스승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시인이 육필로 3부를 만들어 한부는 스승에게 한부는 본인이 나머지 한부는 아우였던 정병욱에게 증정을 하였는데. 본인의 보관분은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할 때 버려졌을 것이고, 이양하 교수는 분실을 하였고, 오직 정병욱이 숨겨 보관한 시집이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게 된 것 입니다. 아슬아슬하기도 하고 기막힌 사연도 있습니다.
학도병에 끌려가게 되자 정병욱은 본인의 운명도 장담할 처지가 아닌지라 어머님께 간곡히 부탁 말씀을 드립니다. 한쪽 깊은 곳에 감쳐두었다가 나중에 해방이 되거던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그래서 그 집의 마루짱을 뜯고 항아리에 담아서 보관했던 시집이 오늘날 햇빛을 보게 된 것 입니다.
그 시집에 수록된 열세편의 시 중에서 윤동주 시인의 주옥같은 시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서시. 자화상, 별을 헤는 밤 등
그 뒤로도 윤동주 정병욱의 아름다운 인연은 계속이어집니다.
윤동주의 동생들 중에 열 살 아래되는 일주라는 남동생이 있습니다. 이분도 시인이시고 나중에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를 지내셨는데.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뛰어나고 영특하여 시인이 아주 아끼셨다 합니다.
정병욱의 아래 여동생이 당시 명문 부산여고를 나온 재원이었는데 윤일주와 동생 덕희의 인연을 주선하여 오늘 까지도 두 집안의 인연은 맺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렇듯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하지도 못했고, 시집 한권 제대로 내지 못했던 한갓 무명시인에 지나지 않던 윤동주 시인이 오늘날 우리나라 근 현대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은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했던 주위 지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 입니다.
강치중이란 분은 시인의 연희전문 동기로서 시인의 일본 유학시에 서신으로 받아논 네편의 시를 세상에 알리게 했고, 동생 일주님은 북간도 집에 남아 있던 유고를 고스란히 옮겨왔습니다. 이 모든 윤동주 알리기의 중심에는 일제 시대부터 육이오 동란 전까지 우리나라 문단의 별이었던 정지용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바람에 이는 잎 새에도 나는 서러워했다’는
맑고, 순수하며,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젊은 청년의 시가. 나라를 빼앗긴 조선청년의 비장함이 담겨진 노래가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 것 입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확전되어 가면서 전세가 점점 더 불리해져가는 것을 느끼면서 내부에서의 혼란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특히 조선의 배움이 있고, 의식이 있는 젊은이들의 봉기를 가장 두려워했지요. 그리하여 대대적으로 일본에 유학한 조선의 학생들을 검거하게 되는데요. 그때 윤동주의 고종사촌이던 일본에 같이 유학을 왔던 송몽규와 같이 검거되어 2년형을 받고 복역중 옥사를 하게됩니다.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당하게 된 횡액이었지요.
이때 북간도에서 연락을 받고 시신을 수습하려 당숙인 윤영춘, 영선 두분형제가 후쿠오카 형무소에 오는데요. 그 때 까지 아직 살아있던 송몽규를 면회하여 당시의 상황을 듣게 됩니다. 놈들이 조선인 죄수들에게 이상한 주사를 놓는데 그 주사를 맞고 견딜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피골이 상접한 윤동주를 마지막으로 보았다는 것 이지요. 결국 송몽규도 한달을 더 못버티고 옥사를 합니다. 윤영춘씨는 영문학박사로 후에 경희대 교수를 지냈고, 우리가 잘 아는 가수 윤형주의 부친 입니다.
나중에 일본인 학자들이 그 때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어떻게 천인공노할 만행이 있었는가를 조사해서 알아 냅니다.
전쟁 중이라 혈액이 많이 소요되는데. 그 혈액을 대체하는 것으로 식염수를 연구하였는데 식염수를 주사하여 그 반응을 본 것 입니다.
그렇게 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세상을 등지게 됩니다.
참으로 치 떨리는 일이었고, 통분할 일 이었습니다. 더구나 윤동주는 조국독립을 위해서 조직을 결사했다거나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대중을 선동하는 운동가도 아니었고, 골방에서 순수하게 나라 잃은 설움을 시로써 써낸 조용한 시인이었을 뿐 입니다.
패색이 짙어가는 군국주의자들의 말기적인 발악이었습니다.
강물이 흘러가듯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사람은 태어나서 짧던 길던 이승의 삶을 살다가 갑니다. 어느 날 한줌의 흙이 되어 세상을 하직할 때 영영 떠나가는 아픔을 주위에 남겨두고 갈 겁니다. 더구나 뜻을 펴보지 못한 젊은이들의 죽음은 더 많은 가슴 아림과 애통함을 남기고 갑니다.
그러나 시인 윤동주는 죽음과 삶을 넘어서는 영원한 노래를 우리에게 남겨 놓고 떠나갔습니다.
별을 헤는 밤
가을이 지나가는 길목에는 별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는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들을 아직 못 다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아직 내 젊음이 다하지 않은 까닭 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별 하나에 쓸쓸함과 사랑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을 불러 봅니다.
소학교 시절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이미 아기 어머니 되어 버림 계집아이들의 이름과 가난한 사람들의 이름과 강아지 토끼 노루 사슴 비들기 프랜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우에
내 이름자를 써보곤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세워 우는 벌레들은 부끄러운 제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 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